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1회]
- 관리자
- 2010-06-04 11:08:53
- 조회수 : 1,595
나는 또 세계는 변하고 있으며, 그 변화를 어느 한 나라가 억지로 붙잡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역설했다. 그러자 다음날 김정일은 김일성에게 외교부장과 내 의견이 대립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리고는 협의 끝에 결국 중간을 택하여 대사를 소환하는 한편 대리대사를 두기로 결정했다고 나에게 알려주었다. 김정일은 외교부에 헝가리를 비난하는 글을 쓰라고 했는데, 그러면서 나에게는 외교부 사람들의 이론수준이 낮으니 그쪽에 대해 지도를 좀 해달라고 했다.
외교부에는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부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이지 글을 빨리 썼다. 그가 초고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하룻밤에 원고지 100매 정도를 매끈하게 써낼 정도로 문장력은 있었으나,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어 깊은 사상이 담긴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는 김정일의 술 파티의 고정 멤버였는데, 그 전날 술이라도 마셨는지 도무지 맥을 못 추었다. 그 바람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글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도 그랬지만, 가만히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일이 잘 안 될수록 상대편을 비방하면서 위안을 찾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중국에 대해 계속 수정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면서 비방했으며, 덩샤오핑에 대해서도 온갖 비난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식 마르크스주의의 잘못된 길에서 중국을 구원한 위인이라고 평가했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특히 중국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하루는 김일성 부자가 중국을 반대하는 글을 조총련에서 발간하는 출판물에 무기명으로 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극비리에 전해왔다. 나는 반대의견을 전했다. 중국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만나서 따지든 욕을 퍼붓든 해야 하며, 또 조총련의 발간물을 이용한다고 해도 중국 사람들이 모를 리 없을 뿐 아니라 글로 남기면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는 뜻을 강조했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이미 발표된 글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물이 되어, 장차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한 국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 이라는 점도 함께 말해주었다.
내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김정일은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사회의 붕괴로 북한이 받은 충격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그러나 김정일은 놀란 가슴을 애써 숨기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조선민족 제일주의’등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식 사회주의의 필승불패를 선전하는 글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 글들은 나의 지도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선전부‘216호실’과 조직부 교시편찬과 직원들이 쓴 것이었다.
원래는 그 두 곳에서 씌어진 글들도 나의 검토를 받아야 했으나, 너무 질이 낮아 잘 보아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김정일에게 직접 올려 비준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남부서에서도 난리가 났다.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이 소련의 붕괴로 혼란에 빠져 있고, 더구나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와 같은 글로써는 그들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나는 문서정리실 요원들을 지도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이라는 글을 써서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대남부서에서는 이 글이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나중에 알려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남한의 철없는 운동권 학생들을 기만하는 죄과를 하나 더 범하게 되었다.
외교부에는 글을 잘 쓰기로 소문난 부부장이 있었는데, 그는 정말이지 글을 빨리 썼다. 그가 초고를 들고 찾아왔다. 그는 하룻밤에 원고지 100매 정도를 매끈하게 써낼 정도로 문장력은 있었으나, 체계적으로 공부한 적이 없어 깊은 사상이 담긴 글을 쓰지는 못했다. 그는 김정일의 술 파티의 고정 멤버였는데, 그 전날 술이라도 마셨는지 도무지 맥을 못 추었다. 그 바람에 나는 마음에도 없는 글을 울며 겨자 먹기로 써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도 그랬지만, 가만히 보면 김일성과 김정일은 일이 잘 안 될수록 상대편을 비방하면서 위안을 찾는 것 같았다. 김일성은 중국에 대해 계속 수정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면서 비방했으며, 덩샤오핑에 대해서도 온갖 비난을 다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덩샤오핑이야말로 소련식 마르크스주의의 잘못된 길에서 중국을 구원한 위인이라고 평가했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특히 중국이 서울 올림픽에 참가한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다.
하루는 김일성 부자가 중국을 반대하는 글을 조총련에서 발간하는 출판물에 무기명으로 실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극비리에 전해왔다. 나는 반대의견을 전했다. 중국의 태도가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차라리 만나서 따지든 욕을 퍼붓든 해야 하며, 또 조총련의 발간물을 이용한다고 해도 중국 사람들이 모를 리 없을 뿐 아니라 글로 남기면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는 뜻을 강조했다. 만약 문제가 발생할 경우에는 이미 발표된 글이 빼도 박도 못할 증거물이 되어, 장차 중국과의 관계개선이 필요한 국면에서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것 이라는 점도 함께 말해주었다.
내 의견을 받아들였는지, 김정일은 그 일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언급하지 않았다. 소련사회의 붕괴로 북한이 받은 충격은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컸다. 그러나 김정일은 놀란 가슴을 애써 숨기며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면서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조선민족 제일주의’등의 구호를 내걸고 조선식 사회주의의 필승불패를 선전하는 글을 잇따라 발표했다. 그 글들은 나의 지도로 씌어진 것이 아니라, 당시 선전부‘216호실’과 조직부 교시편찬과 직원들이 쓴 것이었다.
원래는 그 두 곳에서 씌어진 글들도 나의 검토를 받아야 했으나, 너무 질이 낮아 잘 보아주지 않았더니 그들이 김정일에게 직접 올려 비준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남부서에서도 난리가 났다.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이 소련의 붕괴로 혼란에 빠져 있고, 더구나 「인민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필승불패이다」와 같은 글로써는 그들을 진정시킬 수 없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보다 못한 나는 문서정리실 요원들을 지도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역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노선」이라는 글을 써서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했다. 대남부서에서는 이 글이 남한의 운동권 학생들을 진정시키는 데 결정적인 작용을 했다고 나중에 알려왔다. 그리하여 나는 또 남한의 철없는 운동권 학생들을 기만하는 죄과를 하나 더 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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