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110회]
  • 관리자
  • 2010-06-04 11:08:22
  • 조회수 : 1,525
또 김일성의 환상적인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군대를 동원해 쓸데없는 서해갑문(남포갑문이라고도 하며 8km에 이른다.)을 건설하는 데 막대한 자원을 낭비했다. 뿐만 아니라 금강산댐 건설에 엄청난 자재와 노력을 투입했다.

공사가 한창일 때는 인민군이 물속에서도 작업을 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다고 한다. 김정일은 금강산댐에서 80만kw의 전기를 생산할 수 있다고 했는데, 실제로는 겨우 40만kw에 그친다고 했다. 1차 공사가 끝났을 때 현장을 가보았더니, 그때까지 투입된 자금과 자재만 해도 서해갑문 건설에 비해 2배나 넘게 들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당시에는 겨우 5만kw의 전력을 생산하는데 머물고 있었다.

1989년 제 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북한으로서는 아마도 마지막의 호화로운 행사로 기억될 것이다. 이 무렵 김일성은 그나마 왕년의 원기와 의지는 사라지고 줄곧 아들인 김정일의 비위를 맞추는데 급급한 형편이었다. 나를 잘 아는 부총리들은 내가 국제비서이고 또 이론전문가로서 융통성이 있어 자신들을 일러바칠 만한 위인이 아니라고 보았던지, 함께 출장을 갈 때면 자주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그들은 은밀한 얘기를 털어놓으면서 북한경제가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멎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단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줄곧 경제가 발전하고 있다는 허위선전만 일삼았으며, 또 그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조직부의 교조주의자들은 경제실무자들의 걱정하는 태도를 패배주의라고 비난하면서 들볶기만 했다. 중국의 전문가들도 북한에 와보고는 정치적인 선전만 우선시하고 있다고 나에게 조용히 말해줄 정도였다.

인민들을 위해서는 뭔가를 해야 했지만 참으로 난감했다. 주관적 환상에 들떠 있는 김일성에게 내가 들은 얘기들은 전해줄 방법이 없었다. 또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도 아니었다. 정치적 권력만능주의자인 김정일에게 얘기해본다는 것은 더더욱 소용없는 일이었고, 무엇보다도 이미 그런 말을 건네기가 곤란한 분위기였다. 중앙당내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서로 눈치만 살피는 싸늘한 형국이었다.

김환은 당 중앙위원회 경제담당비서로서 정치국 위원이었는데, 당시 중국에서 실시중이던 가족도급제가 장점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과학원 연구사의 행동을 제때에 제지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철직되어 정무원 부장으로 강직되었다. 또 ‘216호실’을 담당했던 선전부 부부장은 그동안 김정일의 신임을 받아왔으나, 김환과 비슷한 견해를 주장했다는 이유로 본부 당 회의에서 호되게 비판받은 뒤 선전부에는 소속만 걸어둔 채 김일성 부자의 우상화를 위한 영화문헌 편집실로 쫓겨났다.

이 같은 살벌한 분위기에서 개혁·개방에 동조하는 말을 조금이라도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행위였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고 있었다. 동유럽의 사회주의 나라 가운데 헝가리가 맨 먼저 남한과 국교를 맺었다. 그러자 외교부장은 당장 외교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는 당시 의암초대소에서 집필사업을 지도하고 있었는데, 김정일이 전화로 내 의견을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시간문제지 이제 모든 사회주의 나라들이 헝가리의 뒤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그냥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일 외교를 단절한다면 회복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