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8회]
- 관리자
- 2010-06-04 11:04:12
- 조회수 : 1,659
1972년 여름이라고 기억된다. 새 헌법에 대해 토론하던 중에 당시 과학교육부장이 일어나 말했다. “지금 사회과학원에서 주체사상을 황장엽이 창시했다는 말이 자꾸 나돌고 있는데, 그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러자 김일성은 “주체사상이야 내가 내놓은 것이고 황장엽은 내서기라는 사실이 다 알려져 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그냥 내버려두라”면서 일언지하에 과학교육부장의 말을 눌러버렸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김일성이 비록 말이나마 대범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나에 대한 평가를 삼가면서 뒤에서는 나의 이론적 권위가 높아지는 데 대해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김정일은 김일성보다 포용력이 약했다.
나는 나의 이론적 권위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 이론문제와 관련하여 그 누구와 경쟁심을 품은 적도 없었다. 나는 내가 발견한 철학적 진리의 역사적 지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내 개인의 공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더구나 나 자신을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나는 여러 선배나 동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를 공부시켜주고 또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늘 명심하던 터였다.
그런 만큼 내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이름으로 써준 글들은 나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당연히 그들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내가 주장하는 철학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몰라도 그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받아들인 상태에서, 나의 이론과 그들의 입장을 혼동시킬 필요는 없었다. 내가 주체 철학적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역시 발전하는 것인 만큼, 후세에 그 누구든 이런 진리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론과 그것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1980년인지 81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김정일의 지시라고 하면서 선전부 부부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간된 조책자를 건네주면서 김정일의 노작 발표모임에서 간부들에게 읽어주라고 했다. 이 모임은 김정일의 저서 간행을 축하하고, 김정일의 저서를 한 권씩 받기 위한 간부들의 모임이었다. 김정일의 책자를 읽어주면서 보니 책을 쓴 날짜가 1974년 4월로 되어 있었다. 내용은 ‘주체의 유물론’, ‘주체의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로 논쟁할 생각은 없었으나 기분이 묘했다. 마치 주체철학을 예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날짜까지 김정일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은 1974년으로 소급하여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이른바 노작원고를 만들어놓고는 발표날짜를 어제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의논하여 적당한 날짜를 붙여왔던 것이다. 하지만 주체철학처럼 너무도 뻔한 주제의 날짜까지 조작된 것을 보면서, 내 기분은 솔직히 씁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쓰다 달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나에게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 글이 발표된 뒤로 반대파들이 새로운 철학원리를 더욱 집요하게 반대할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 후부터 ‘주체 유물론’, ‘주체 변증법’ 대신 ‘인간중심의 유물론’, ‘인간중심의 변증법’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은 그 용어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묵살해버렸다.
그러자 김일성은 “주체사상이야 내가 내놓은 것이고 황장엽은 내서기라는 사실이 다 알려져 있는데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가? 그냥 내버려두라”면서 일언지하에 과학교육부장의 말을 눌러버렸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는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는 김일성이 비록 말이나마 대범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김정일은 나에 대한 평가를 삼가면서 뒤에서는 나의 이론적 권위가 높아지는 데 대해 몹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처럼 김정일은 김일성보다 포용력이 약했다.
나는 나의 이론적 권위에 대해서는 털끝만큼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또 이론문제와 관련하여 그 누구와 경쟁심을 품은 적도 없었다. 나는 내가 발견한 철학적 진리의 역사적 지위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을 내 개인의 공적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더구나 나 자신을 비범한 재능의 소유자로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당시 나는 여러 선배나 동료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나를 공부시켜주고 또 연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내가 그런 진리를 발견할 수 있었겠는가 하고 늘 명심하던 터였다.
그런 만큼 내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이름으로 써준 글들은 나의 것으로 생각지 않고 당연히 그들의 것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만일 그들이 내가 주장하는 철학 전부를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몰라도 그것의 극히 일부분만을 저들의 이익에 맞게 받아들인 상태에서, 나의 이론과 그들의 입장을 혼동시킬 필요는 없었다. 내가 주체 철학적 진리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사회는 역시 발전하는 것인 만큼, 후세에 그 누구든 이런 진리를 발견하게 되리라는 것이 내 생각이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이론과 그것을 처음으로 제창한 사람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보고 있다.
1980년인지 81년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어느 날 김정일의 지시라고 하면서 선전부 부부장이 찾아왔다. 그는 나에게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간된 조책자를 건네주면서 김정일의 노작 발표모임에서 간부들에게 읽어주라고 했다. 이 모임은 김정일의 저서 간행을 축하하고, 김정일의 저서를 한 권씩 받기 위한 간부들의 모임이었다. 김정일의 책자를 읽어주면서 보니 책을 쓴 날짜가 1974년 4월로 되어 있었다. 내용은 ‘주체의 유물론’, ‘주체의 변증법’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문제로 논쟁할 생각은 없었으나 기분이 묘했다. 마치 주체철학을 예전부터 알고 있기라도 했다는 듯이 날짜까지 김정일이 실질적으로 권력을 잡은 1974년으로 소급하여 조작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우리가 김일성이나 김정일의 이른바 노작원고를 만들어놓고는 발표날짜를 어제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의논하여 적당한 날짜를 붙여왔던 것이다. 하지만 주체철학처럼 너무도 뻔한 주제의 날짜까지 조작된 것을 보면서, 내 기분은 솔직히 씁씁했다.
그러나 나는 그 문제에 대해 쓰다 달다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또 나에게 의견을 물어오는 사람도 없었다. 다만 그 글이 발표된 뒤로 반대파들이 새로운 철학원리를 더욱 집요하게 반대할 뿐이었다. 나는 그저 그 후부터 ‘주체 유물론’, ‘주체 변증법’ 대신 ‘인간중심의 유물론’, ‘인간중심의 변증법’이라는 말을 썼다. 그들은 그 용어에 대해서도 시비를 걸었지만, 나는 의도적으로 묵살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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