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97회]
  • 관리자
  • 2010-06-04 11:03:52
  • 조회수 : 1,653
나는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1980년 8월부터 나는 주체과학원에 박사원생을 모집했다. 박사원에는 철학이나 경제학 등 사회과학 계통의 전문가들과 외국어 전문가들을 50대 50의 비율로 받기로 했다. 사회과학 전문가들은 주체철학을 배우면서 외국어를 습득하도록 하고, 외국어 전문가들은 전적으로 주체철학을 배워 외국어로 주체철학을 해설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아무리 바빠도 매주 한 번은 박사원생들과 토론회를 열었다. 박사원생들 가운데는 재능 있는 인재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은 급속히 향상되어 갔다. 특히 어학 전문가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회과학 전문가들을 따라가게 되었으며 토론에도 적극적이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덜 받은 외국어대학 졸업생들의 경우가 더 빨리 발전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이들을 양성하는 데 큰 의미를 두었다. 그래서 그들과 만나고 함께 공부한다는 것이 큰 기쁨이었다. 그들 역시 나를 너무 따라서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나는 지금 그처럼 재능 있는 사람들, 사랑스러운 사람들을 주체사상에 끌어들인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운명을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내가 북에서 남으로 넘어옴으로써 북한당국은 나의 사상적 영향하에 있던 핵심들만 해도 수천 명을 정치범수용소에 감금하거나 혹은 철직시켜 지방으로 추방했다고 한다. 1982년 2월 제7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진행되었다. 나는 이 대의원선거 기간에 의장직을 양형섭에게 물려줘야 했다.

당시 사회과학원의 반대파들은 선전부와 결탁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양형섭이 등용되자 그를 구심점으로 모여 나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때 나는 과학교육담당비서로서 사회과학원에 대한 지도권을 쥐고 있었다. 양형섭은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사회과학원 원장을 겸하게 되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나에 대한 평판이 높아짐에 따라 선전부와 문서정리실에서도 나와 주체사상연구소를 시기하는 분위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김정일도 질투심을 가지고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으며, 나의 주체사상 선전활동을 제한하기 시작했다.

거듭 주장하지만 나는 마르크스의 유물변증법은 가장 단순한 물질적 존재를 지준으로 하여 전개한 이론이기 때문에 운동의 주체인 인간이 적극적인 역할을 하는 성숙된 인간사회에는 맞지 않으며, 따라서 인간을 중심으로 하여 이론을 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인간중심으로 개작한 유물론과 변증법을 ‘주체의 유물론’, ‘주체의 변증법’이라고 불렀다. 마르크스주의를 교조주의적으로 신봉하는 자들은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은 절대적 진리이기 때문에 고칠 수 없으며, 『자본론』에서의 가치법에 대해 다른 해석을 가하려는 것은 터무니없는 수정주의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내가 아는 김정일은 철학 상식이 부족하고 또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감성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이런 문제에는 흥미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주체철학에 대해 높은 권위를 갖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