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82회]
- 관리자
- 2010-06-04 10: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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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18년이 지난 1993년, 김일성은 자기 동생의 처리문제로 평판이 좋지 않고, 또 이제는 김정일의 경쟁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계산하여 김영주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형식상의 부주석을 시켰다. 그러나 김영주는 여전히 연금상태나 다름없는 처지였고, 업무에서도 철저하게 제외되었다.
김영주는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은 지지해도 정일이는 지지할 수 없다. 정일이를 망친 것은 황장엽이다.” 김영주는 내가 김정일을 망친 것으로 오해할 만큼 현실파악이 어두운 편이었다. 언젠가 김일성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영주는 독하지 못한 것이 결함이고, 정일이는 저희 삼촌보다 독한 것이 장점이다.” 1974년, 김정일은 실권을 장악하자마자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수준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그는 자기 삼촌이 예전에 작성한 바 있는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김일성을 더욱 우상화 하는 방향에서 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당의 조직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인민의 지도자가 될 소질을 타고났다는 사적들의 날조 작업을 조직적으로 진행시켰다. 김정일은 도처에 김일성의 동상을 세우거나 사적지 건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이른바 ‘구호나무’ 발견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구호나무란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국내에 들어와 게릴라 공작을 하다가 자취를 남기려고 나무껍질을 벗긴 다음 ‘김일성 장군만세’, ‘조선독립만세’ 등의 구호를 먹으로 써둔 것인데, 수십 년이 지나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먹으로 쓴 글씨가 수십 년 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보존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 빨치산 참가자들이 회상기를 쓰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활동할 때 칼로 나무껍질을 벗기고 글을 쓴 적이 있다고 기록한 데서 힌트를 얻어 조작해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구호나무가 도처에서 그렇게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거짓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빨치산이 체포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구호나무 쓰는 걸 전업으로 하며 돌아다녔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일제시대에 구호나무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철봉리에 들어와 1년 남짓 지나서 김정일로부터 전화가 왔다. “철봉리 휴양소에 대대적인 건설작업을 해야겠으니 원산에 있는 휴양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철봉리 골안 깊은 곳에서는 굴을 파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공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사로 미루어볼 때 유사시에 쓸 별장을 짓는 것 같았다. 그 후 그곳은 여러 채의 특각(김일성과 김정일의 별장)이 들어섰다.
나는 김정일에게 원산은 거리가 너무 멀어 차라리 평양의 최고인민회의 청사를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한 새로운 글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내가 마르크스나 레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소.” 나는 김일성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근본적으로 개작해야 한다는 내 말에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김영주는 유배지에서 평양으로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형은 지지해도 정일이는 지지할 수 없다. 정일이를 망친 것은 황장엽이다.” 김영주는 내가 김정일을 망친 것으로 오해할 만큼 현실파악이 어두운 편이었다. 언젠가 김일성이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영주는 독하지 못한 것이 결함이고, 정일이는 저희 삼촌보다 독한 것이 장점이다.” 1974년, 김정일은 실권을 장악하자마자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 수준을 높이는 작업에 들어갔다.
우선 그는 자기 삼촌이 예전에 작성한 바 있는 유일사상체계 확립 10대 원칙을 김일성을 더욱 우상화 하는 방향에서 개작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에 대한 우상화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수단을 총동원했다. 당의 조직은 그가 어릴 때부터 인민의 지도자가 될 소질을 타고났다는 사적들의 날조 작업을 조직적으로 진행시켰다. 김정일은 도처에 김일성의 동상을 세우거나 사적지 건설을 대대적으로 추진하는 한편, 이른바 ‘구호나무’ 발견운동을 전국적으로 전개했다.
구호나무란 김일성 빨치산 부대가 국내에 들어와 게릴라 공작을 하다가 자취를 남기려고 나무껍질을 벗긴 다음 ‘김일성 장군만세’, ‘조선독립만세’ 등의 구호를 먹으로 써둔 것인데, 수십 년이 지나서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먹으로 쓴 글씨가 수십 년 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보존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이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아마 빨치산 참가자들이 회상기를 쓰면서 자신들이 과거에 활동할 때 칼로 나무껍질을 벗기고 글을 쓴 적이 있다고 기록한 데서 힌트를 얻어 조작해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구호나무가 도처에서 그렇게도 많이 발견되었다고 하니 거짓말이 너무 지나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빨치산이 체포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쓴 것이 아니라 구호나무 쓰는 걸 전업으로 하며 돌아다녔다는 말이 아닌가. 더구나 일제시대에 구호나무를 발견했다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철봉리에 들어와 1년 남짓 지나서 김정일로부터 전화가 왔다. “철봉리 휴양소에 대대적인 건설작업을 해야겠으니 원산에 있는 휴양소를 이용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당시 철봉리 골안 깊은 곳에서는 굴을 파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 공사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공사로 미루어볼 때 유사시에 쓸 별장을 짓는 것 같았다. 그 후 그곳은 여러 채의 특각(김일성과 김정일의 별장)이 들어섰다.
나는 김정일에게 원산은 거리가 너무 멀어 차라리 평양의 최고인민회의 청사를 이용하고 싶다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평양으로 돌아온 나는 김일성을 만나 주체사상에 대한 새로운 글을 발표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김일성은 주저하면서 말했다. “내가 마르크스나 레닌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겠소.” 나는 김일성이 왜 그렇게 자신이 없어졌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으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마르크스의 유물론과 변증법을 근본적으로 개작해야 한다는 내 말에 지레 겁을 먹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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