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제64회]
- 관리자
- 2010-06-04 10:5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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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는 경제신문 서기들과 자주 논쟁을 벌였지만 3대 1의 대립으로 결판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에 대해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천리마운동은 생산경쟁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까지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천리마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었거나 진행중이던 생산경쟁과 구별되었다. 특히 생산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를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양하고 개조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즉, 생산과정에서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집단을 만듦으로써 생산에서 집단적 혁신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천리마운동의 밑바탕이 된 사상은 군중노선이었다. 군중노선이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에서 먼저 쓴 말인데, 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군중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군중을 사상적으로 교양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군중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과업을 이룩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에 이론적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이 운동을 통해 인간교양사업과 경제발전을 다 같이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내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군중노선에 관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나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사람들이 서로 협조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것인 만큼, 천리마운동을 통하여 동지적 협조정신, 즉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더 귀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무장시키기만 하면 생산실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때 소련 사회주의의 중요한 결함이 사람들의 협조정신을 앙양시키는 데 소홀히하고, 또 일한 만큼 분배해주라고만 강조한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일한 만큼 분배해주라는 원칙이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인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던 것이다. 어쨌든 천리마운동은 나름대로 실속 있게 진행되었으며, 경제발전과 새로운 도덕적 기풍을 세우는 데도 성공을 거두었다.
천리마 운동에서 뽑힌 기수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을 교양하고 그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면서 끈질긴 설득전을 폈다. 1961~62년에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크게 놀랐다. 집에는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환자가 생기면 집단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을 생산직장에서만 벌이지 말고 당 기관들에서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혼자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협조하면서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실천에 옳겼다. 나는 글을 쓰라는 과업이 주어지면 조수들을 모아놓고 서로 의논하면서 써나갔다. 그렇게 하면 피로도 덜하고 주관주의로 흐르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도 이 방법으로 글을 집필해왔다.
당시 김일성은 천리마운동에 대해 큰 의의를 부여하고 있었다. 천리마운동은 생산경쟁운동으로서 전개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까지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천리마운동은 다른 나라에서 진행되었거나 진행중이던 생산경쟁과 구별되었다. 특히 생산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자를 공산주의 사상으로 교양하고 개조하여 생산성을 향상시킨다는 데 그 의의가 있었다.
즉, 생산과정에서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집단을 만듦으로써 생산에서 집단적 혁신을 이룩한다는 것이었다. 천리마운동의 밑바탕이 된 사상은 군중노선이었다. 군중노선이라는 용어는 중국공산당에서 먼저 쓴 말인데, 당이 군중 속으로 들어가 군중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군중을 사상적으로 교양하여 하나로 뭉치게 하고, 군중의 힘에 의거하여 혁명과업을 이룩한다는 의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에 이론적 의의를 부여하는 한편, 이 운동을 통해 인간교양사업과 경제발전을 다 같이 힘있게 밀고 나갈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을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으로 내세우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으며, 나아가 군중노선에 관한 사상을 더욱 발전시켜야 할 것으로 보았다. 나는 사회주의 경제제도가 수립되면 사람들이 서로 협조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마련된 것인 만큼, 천리마운동을 통하여 동지적 협조정신, 즉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의 이익을 더 귀중히 여기는 사상으로 무장시키기만 하면 생산실적을 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나는 그때 소련 사회주의의 중요한 결함이 사람들의 협조정신을 앙양시키는 데 소홀히하고, 또 일한 만큼 분배해주라고만 강조한데 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도 실제로는 일한 만큼 분배해주라는 원칙이 지켜진 적이 없기 때문에 인민들의 불만은 더욱 커졌던 것이다. 어쨌든 천리마운동은 나름대로 실속 있게 진행되었으며, 경제발전과 새로운 도덕적 기풍을 세우는 데도 성공을 거두었다.
천리마 운동에서 뽑힌 기수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을 교양하고 그 정신을 개조하기 위해 그들을 가르치면서 끈질긴 설득전을 폈다. 1961~62년에 북한을 방문한 외국인들은 크게 놀랐다. 집에는 자물쇠를 잠그지 않았고, 도둑이 없었으며, 환자가 생기면 집단이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천리마운동을 생산직장에서만 벌이지 말고 당 기관들에서도 벌여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때부터 나는 혼자 글을 쓸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협조하면서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주장하면서 실천에 옳겼다. 나는 글을 쓰라는 과업이 주어지면 조수들을 모아놓고 서로 의논하면서 써나갔다. 그렇게 하면 피로도 덜하고 주관주의로 흐르는 것도 막을 수 있었다. 나는 그 후로도 이 방법으로 글을 집필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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