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59회]
  • 관리자
  • 2010-06-04 10:49:41
  • 조회수 : 1,517
며칠 후 우리는 베트남으로 갔다. 베트남에서 받은 첫 인상은 호치민이 매우 소탈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팜반동 수상도 겸손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나는 1996년에 베트남을 세 번째 방문하여 아흔이 넘어 앞을 못 는 그를 만났었다). 김일성은 조선의 사회주의 건설 경험을 소개하면서 무료의무교육제(7년제)와 무상치료를 자랑했다. 그러자 호치민이 농담조로 말했다.
“다른 데 가서는 제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인민들이 호치민이는 뭘 하고 있는가 하면서 나를 쫓아낼 수도 있소.” 며칠 후 우리는 귀국했다. 김일성은 당 중앙위원회에서 방문결과를 보고했다. 국가계획위원장인 이종옥을 비롯한 많은 간부들이 우리도 중국식 경작을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자 김일성은 이렇게 말했다. “남의 경험을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오. 정 해보고 싶으면 중앙당에서부터 시험적으로 해보고 좋은 결과가 나오면 전국에 적용하도록 하는 게 좋을 것 같으오.”

다음해 봄, 중앙당에서는 평양에서 약 20킬로쯤 떨어진 중화라는 곳에 시험재배장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비료를 듬뿍 주고 깊이 갈아 밀식했는데 400톤이 아니라 4톤도 나지 않았다. 그 해 북한은 천리마운동으로 인해 공업은 크게 발전했으나 농업은 형편없었다. 그 이듬해 가을, 중국에서 우리를 안내했던 교포가 평양의 친척집을 방문했다가 나를 찾아왔다. 그는 중국의 1958년의 영곡 총 생산고는 5억 톤이 아니라 1억 8천만 톤이라면서 식량이 모자라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다고 했다.

중 ·1 소 이데올로기 논쟁. 1959년 1월, 나는 김일성을 수행하여 소련공산당 제21차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모스크바로 갔다. 당시 김정일은 고급중학교 졸업반이었는데 우리와 동행했다. 나는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을 따라 중앙당 청사에 나오는 것을 몇 차례 본 적이 있어도 직접 만나보기는 처음이었다. 김정일은 내가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교수를 하다가 온 것을 알고 는 특별한 호감을 갖고 대했고, 나 역시 그를 지도자의 아들로서 따뜻하게 대하면서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했다.

김정일은 영리하고 호기심이 많아 나에게 대학의 학과내용에 대해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왔다. 내가 철학전문가로서 사회과학이나 문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에 대해서도 약간의 상식이 있다 보니 그의 질문을 대체로 만족시켜준 것 같았다. 그는 공식행상에 참석하지 않고 숙소에 남아 있을 때가 많았는데 그럴 때는 내게도 남아달라고 부탁하고는 했다.

그래서 나도 가능하면 그와 함께 남아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와 얘기를 하면서 받은 인상은 그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정권에 대한 욕망이 상당히 컸다는 것이었다. 그는 아버지를 잘 모시는 일에 특별한 관심을 쏟았다. 아침마다 자기 아버지가 나갈 때 부축을 하고 나서는가 하면, 신발을 신겨주기도 했다. 김일성은 당시 47세로 원기왕성하여 부축을 받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김일성은 아들의 부축을 받을 때면 마냥 흡족해했다. 저녁에 김일성이 돌아오면, 김정일은 부관들과 의사, 간호원 등 수행원들을 집합시켜 놓고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고 이런저런 지시를 하곤 했다. 김일성을 수행한 대표단 중에는 정치국원들도 많았는데, 김정일이 김일성의 사업을 직접 관장하고 부관들과 수행원들에게 구체적으로 일을 지시한다는 것은 상식을 초월한 행동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