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7회]
  • 관리자
  • 2010-06-04 10:2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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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관에서는 북한측에 의한 독약 투입에 대비해 외부에서 음식을 반입하지 못하도록 하고, 영사관 구내에서 만든 요리도 검사를 한 뒤에야 식사를 하도록 했다. 2월 21일부터는 한국정부에서 요리사가 파견되었다. 며칠간은 죽느냐 사느냐의 가로에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지만, 중국정부가 한국정부에 협상할 용의를 표명했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는 가족들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을 조였다.

잠약(수면제)을 먹어도 아내와 자식들의 걱정하는 모습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시 일어나 잠약을 한 알 더 털어 넣고서야 겨우 눈을 붙일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가족을 걱정하는 것처럼 가족들도 나와 똑같은 심정으로 내 걱정을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내가 마음속의 안타까운 심정을 덕홍에게 어찌나 호소했던지, 우직하기만 한 그마저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가족얘기는 꺼내지도 않으면서 나를 위로하는 것이었다. “형님, 가족들에 대해서는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서울에 가면 길이 있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는 너무도 부끄러웠지만, 혼자 있으면 다시 가족들 걱정으로 마음을 졸였다. 나와 덕홍은 가족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더라도 민족을 구원해야 한다고 맹세했었다.

그런데 막상 일이 터지고 나자 내 가족만 걱정하면서 덕홍을 귀찮게 하고 그의 가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으니, 이러고도 형 될 자격이 있으며 애국자로서의 의지를 간직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수치심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가족사진을 더 이상 보지 않으려고 아예 트렁크 깊숙한 곳에 갈무리했다. 하지만 그래본들 문득 문득 떠오르는 가족들의 얼굴은 트렁크에 넣을 수 없었다.

특히 먹을 것이 있을 때면 그리움이 더했다. 대사관에서는 내가 사탕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는 그걸 이따금 가져왔다. 쟁반 가득한 사탕을 덕홍이와 같이 먹을 때는 별로 못 느끼지만, 혼자서 먹노라면 두 돌이 되어가는 손자 지성이가 작은 입을 벌리고 ‘아, 아’하던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려 차마 목에 넘어가지가 않았다. 지성이는 식사 때면 내게 늘 그렇게 다가와 밥을 먹여달라고 했었다.

부끄러운 고백인지는 모르지만 내가 만일 평양으로 돌아갈 수 있는 처지였다면 그 남은 사탕을 대사관에 그냥 두고 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사관 직원들의 의견도 한가지는 아니었다. 중국정부가 우리의 망명을 국제관련에 따라 처리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의견이 있는가 하면, 어쩌면 그쪽에서 망명 처리를 오래 끌지도 모른다는 어두운 의견도 있었다. 끌면 얼마나 오래 끌 것 같으냐고 물었더니 6개월 내지 1년을 끌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비만 대한민국 대사관은 대한민국 영토나 다름없으며 중국정부로서도 우리를 강제로 끌어낼 수는 없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렇다면 좋다, 6개월이고 1년이고 영사관에 있다가 한국으로 망명이 실현되면 좋고 여의치 않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평양에서 독약을 구한 뒤로는 이상하게도 늘 마음이 평온하고 한편으로 든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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