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 [제4회]
  • 관리자
  • 2010-06-04 10: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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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아무 말 없이 토마토가 든 광주리를 들고 돌아섰는데, 그 어깨가 기억에 남을 만큼 축 처져 있었다. 그 순간에는 내 말의 뜻을 정확히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이제는 그게 어떤 암시였다는 걸 깨닫고 있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는 내가 북을 떠나기 보름 전쯤에 있었던 일이다. 그날 나는 그동안 써두었던 두 트렁크 분의 원고를 모두 불살라버렸다. 그때 아내가 가만히 다가와 물었다. “아끼던 원고를 왜 태워요?” “이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그때도 나는 그렇게 짤막하게 대답했지만, 아내는 왠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아내도 내 스스로 자기 사상을 마음대로 발표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보아서는 안 되는 글을 많이 써둔다는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그걸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면서 여러 해에 걸친 내 정신적 생산물들이 한줌 재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다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이번에는 사무실에서 챙겨온 카메라며 고급 만년필 따위 귀중품들을 아이들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개중에는 우리 부부에게 아직 필요한 것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내는 역시 아무 말 없이 따라주었다. 더 물어볼 필요도 없이 내 속마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나는 나대로 가족을 구할 계획을 세우고 떠나야 한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런데도 이렇게 훌훌 떠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생각 못지않게 나를 몰아댄 내 마음속의 또 다른 목소리 때문이었다. ‘결국 구해낼 수도 없으면서 미련을 갖고 주저하면 너는 끝내 떠나지 못하고 만다. 그리되면 훗날 역사는, 그때 북에서는 그렇게도 엄청난 폭력과 불합리 속에 인민들이 고통받고 있는데도 당당하게 나서서 비판하거나 저항한 지식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말할 것이다’라는 그런 소리 말이다.

하지만 이처럼 무사히 서울에 당도하고 보니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가족이고 특히 아내이다. “잘 다녀오세요” 그날 아내는 늘 그랬듯이 그렇게 담담한 인사로 나를 보냈다. 나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차에 올랐지만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을 삼키고 있었다. 나의 이 결단이 한낱 속된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민족적 양심의 부름에 순응하는 것이며, 분단 상황을 고착시키는데 기여했던 한 지식인이 조국통일의 제전에 바치는 마지막 헌신이라는 것이 과연 아내에게 위로가 될는지.

살아서 다시 만나 한지아비로서 자기 아내를 죽음보다 더한 고통 속으로 몰아넣은 죄를 씻을 날이 올는지. 원래 내가 망명을 계획했던 곳은 일본이다. 그러나 일본에 도착한 지 하루도 안 지나서 나는 불길한 예감 속에 그 결행을 미루지 않을 수 없었다. 조총련 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호위라는 구실로 밤낮없이 내 주위를 겹겹이 둘러싸면서 도무지 몸을 뺄 틈을 주지 않았다. 낌새를 느낀 김정일의 특별지시가 있어서 밀착 집중감시에 들어간 게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될 정도였다. 그래서 결국 다음 경유지인 중국에서 망명을 결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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