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북한 문제에 대한 우리의 근본 입장 (4)
- 관리자
- 2010-06-03 20:43:24
- 조회수 : 1,533
「수령절대주의적 개인독재체제 확립」
金正日은 수령의 독재적 지위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이 아니라 직접 수령 자체의 존재를 독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수령이 출현하여 지도사상을 창시해야 그것을 지침으로 하는 당이 창건될 수 있고, 당의 영도를 받아야 혁명적 노동계급이 형성될 수 있으며, 노동계급의 영도 밑에서만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꾸로 된 논리에 따르면 수령은 곧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존재의 근원으로 되며 생명의 뿌리로 된다.
이로부터 金正日은 수령에 대한 충성은 공산당과 노동계급과 인민에 대한 충성의 최고 표현이며 수령에 대하여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데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근로인민들의 삶의 목적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金正日은 이러한 수령 절대주의에 기초하여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본원칙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수령의 개인독재를 절대화한 것으로서, 스탈린식 계급독재에 봉건 가부장 독재를 결합시킨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장 반동적이며 反인민적인 독재형태이다.
그것은 종래의 공산주의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세습적인 권력승계를 감행함으로써 수령절대주의 정권의 봉건적 정체를 더욱 뚜렷이 드러내 놓았다.
金正日에 의하여 수령절대주의적 개인독재체제가 확립됨으로써 북한체제는 급속히 봉건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인민들의 노예화와 생활고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1974년경 북한 정권이 金日成-金正日 공동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록 金正日이 실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으나 북한 정치의 큰 선은 金日成이 세워 주고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金日成은 최고 고문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金正日이 모든 정치적 권력과 함께 정책 결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김일성이 외국 손님들을 자주 만나고 그것이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다 보니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그가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金日成이 진행하는 의례적인 대외(對外)활동까짇 예외 없이 다 金正日의 통제 밑에 진행되었다.
그러면 金正日이 수립한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가 金日成의 스탈린식 독재체제와 구별되는 주된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수령의 개인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당과 군대, 국가재산을 다 수령의 개인소유로 전환시켰다.
둘째, 당의 독재 위에 군사독재를 놓고 폭력적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셋째,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고 외부세계의 영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민들에 대한 우매화 정책을 철저히 실시했다.
원래 공산독재체계에서 공산당은 최고 조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공산독재란 본질상 공산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金正日은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당 자체를 수령의 개인조직으로 전환시켰다.
공산당의 조직원칙인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에 따르면 당내 모든 단위의 지도기관은 민주주의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선거된 지도기관은 해당 단위에서 지도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최고지도지관인 만큼 당중앙위원회가 선거하는 최고지도자인 수령은 당중앙위원회를 통하여 전당(全黨)을 지도할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수령을 선거한다는 것은 무엄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수령선거제도'를 '수령추대제'로 바꾸었다. 수령을 선거하는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다 수령의 지시가 곧 절대적인 법으로 인정되었으며 각급 지도기관들도 다 수령의 의도에 맞게 위로부터 결정하는 것이 제도화 되었다.
이리하여 당내 민주주의는 완전히 거세되고 대외관계를 고려하여 진행되는 경우에도 거수가결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金正日은 수령의 독재적 지위를 절대화하기 위하여 노동계급이 아니라 직접 수령 자체의 존재를 독재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수령이 출현하여 지도사상을 창시해야 그것을 지침으로 하는 당이 창건될 수 있고, 당의 영도를 받아야 혁명적 노동계급이 형성될 수 있으며, 노동계급의 영도 밑에서만 인민대중이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거꾸로 된 논리에 따르면 수령은 곧 공산당과 혁명적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존재의 근원으로 되며 생명의 뿌리로 된다.
이로부터 金正日은 수령에 대한 충성은 공산당과 노동계급과 인민에 대한 충성의 최고 표현이며 수령에 대하여 충성과 효성을 다하는 데 모든 공산주의자들과 근로인민들의 삶의 목적이 있다는 주장을 내놓게 되었다.
金正日은 이러한 수령 절대주의에 기초하여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본원칙으로 내세웠다.
이것은 수령의 개인독재를 절대화한 것으로서, 스탈린식 계급독재에 봉건 가부장 독재를 결합시킨 전대미문(前代未聞)의 가장 반동적이며 反인민적인 독재형태이다.
그것은 종래의 공산주의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세습적인 권력승계를 감행함으로써 수령절대주의 정권의 봉건적 정체를 더욱 뚜렷이 드러내 놓았다.
金正日에 의하여 수령절대주의적 개인독재체제가 확립됨으로써 북한체제는 급속히 봉건적인 것으로 변질되었으며 인민들의 노예화와 생활고가 더욱 심각한 상황이 되었다.
1974년경 북한 정권이 金日成-金正日 공동정권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비록 金正日이 실권을 다 장악하고 있었으나 북한 정치의 큰 선은 金日成이 세워 주고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金日成은 최고 고문의 역할을 담당하였을 뿐, 金正日이 모든 정치적 권력과 함께 정책 결정권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도 김일성이 외국 손님들을 자주 만나고 그것이 신문지상에 크게 보도되다 보니 세상 사람들에게 마치 그가 여전히 실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金日成이 진행하는 의례적인 대외(對外)활동까짇 예외 없이 다 金正日의 통제 밑에 진행되었다.
그러면 金正日이 수립한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가 金日成의 스탈린식 독재체제와 구별되는 주된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수령의 개인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함으로써 당과 군대, 국가재산을 다 수령의 개인소유로 전환시켰다.
둘째, 당의 독재 위에 군사독재를 놓고 폭력적 탄압을 더욱 강화했다.
셋째, 민족주의 구호를 내걸고 외부세계의 영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주민들에 대한 우매화 정책을 철저히 실시했다.
원래 공산독재체계에서 공산당은 최고 조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만큼 공산독재란 본질상 공산당의 독재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金正日은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다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당 자체를 수령의 개인조직으로 전환시켰다.
공산당의 조직원칙인 민주주의 중앙집권제에 따르면 당내 모든 단위의 지도기관은 민주주의적 선거에 의해 선출되어야 하며 선거된 지도기관은 해당 단위에서 지도권을 행사하게 되어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최고지도지관인 만큼 당중앙위원회가 선거하는 최고지도자인 수령은 당중앙위원회를 통하여 전당(全黨)을 지도할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수령을 선거한다는 것은 무엄한 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수령선거제도'를 '수령추대제'로 바꾸었다. 수령을 선거하는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다 수령의 지시가 곧 절대적인 법으로 인정되었으며 각급 지도기관들도 다 수령의 의도에 맞게 위로부터 결정하는 것이 제도화 되었다.
이리하여 당내 민주주의는 완전히 거세되고 대외관계를 고려하여 진행되는 경우에도 거수가결은 형식에 불과한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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