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인권문제(3)
- 관리자
- 2010-06-07 15:2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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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지반
①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② 주체사상의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의 전환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선전사업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른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활동 역사라는 것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위조하여 선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봉건사상으로 왜곡하여 선전하는 것이다.
①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우리는 김일성과 그의 전우들이 항일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것을 응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항간에는 가짜 김일성이라는 설도 나돌고 있지만, 가짜건 진짜건 항일빨치산에 참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사실 그대로 밝혀지는 법이다. 앞으로 역사가들에 의하여 진짜 김일성인가 가짜 김일성인가 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명될 것이다.
우리가 의견을 가지는 것은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이 1930년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사상을 창시하려면, 우선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투쟁경험과 민족과 인류의 발전과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1930년 18살 난 김일성은 중학공부도 하지 못하였고 투쟁경험도 없었다. 누에도 뽕잎을 먹고서야 실을 뽑는 법인데 똑똑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지도사상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6.25조선전쟁 이전에는 <주체>라는 말조차 없었다.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련파와 중국파를 숙청할 때부터이며, 주체사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므로 1930년 김일성이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나는 1958년 초부터 7년 이상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하였지만, 그로부터 해방 전에 주체사상이나 주체를 세 울데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다. 오히려 그때 내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는 항일빨치산이 크게 투쟁한 것은 없지만 안한 것보다는 낫다든 가, 그때 조선의 지도자로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다든가 하는 따위의 비교적 겸손한 말이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항일빨치산 투쟁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은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이 앞장서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호나무>소동은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북한 통치자들은 김일성이 진행한 항일빨치산 투쟁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진행된 투쟁인 것이 아니라, 주로 백두산 근거지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방과 조선반도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조선국내에서 투쟁하였다는 증거로 나무껍질을 벗기도 거기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만세> 등 여러 가지 반일구호를 붓으로 써 놓은 것이 국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어느 빨치산 참가자가 회상기에서 자기들이 어느 밀림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무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조선독립만세!> 와 같은 구호를 써놓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암시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구호나무가 빨치산 투쟁이 주로 진행된 중국 동북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북조선 도처에서 수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가 1만수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때 국내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였다면 한 두 사람일 것이다. 또 국내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면서 설마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를 써넣을 것을 기본임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비밀공작을 하였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한가하게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을 갈아 붓으로 구호를 쓰고 앉아 있었겠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수십 년 전에 써놓은 것이 비바람에 다 지워진 것을 특수한 약을 바르면 다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누구도 그 특수한 약을 본 사람은 없다.
이러한 역사날조 사업은 아마도 당중앙의 한 개 부서로서 사업하고 있는 당역사연구소가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 밑에 극비리에 진행하였을 것이다. 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현행문건을 작성하는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던 관계로, 당역사연구소에서 항일빨치산 투쟁시기에 김일성이 하였다는 보고나 연설을 새로 발굴하였다고 하면서 가져오는 문건도 검토해주었다. 이런 관계로 나는 1987년부터 당역사연구소 사업을 지도하는 책임도 형식상 맡아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당역사연구소에서 하는 사업내용에 대하여서는 전혀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문건만 보아주거나 제기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참고삼아 주는 정도에 그쳤다.
어느 날 내가 당역사연구소 책임일군에게 조용히 평양 모란봉에서도 700여 개나 구호나무를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평양에서 학교 다닐 때 여름에는 점심을 모란봉에 올라가 먹는 일이 많았는데, 나무에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모란봉에 구호나무가 몇 백 개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하고 물어보았다. 그 책임일군은 모란봉에 있는 구호나무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빨치산들이 연락신호로 나무에 칼자국을 남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더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1940년과 41년경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빨치산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견딜 수 없어 다 소련국경으로 넘어가 소련이 조직한 88특수여단에서 군정훈련을 받았다. 그때 김일성과 같이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88특수여단 전체 인원이 약 200명 가량 되었는데, 그중 조선사람은 60명밖에 안되었으며 나머지는 다 중국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여단장도 중국사람이었고 김일성은 4개 대대 가운데서 한 개 대대를 책임진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것으로써도 항일빨치산 투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내부에 드나들며 평양 모란봉 공원의 많은 나무에 연락암호의 칼자국을 수백 개나 남겼겠는가. 나는 평양에서 1937년부터 41년까지 공부하였는데, 그때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하게 되면서 큰 소나무가 다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나무종류 자체가 교체되었는데 수백 개의 나무가 칼자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분수 없는 거짓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은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에 <광명성>으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일성이 1940년 이후부터는 소련 땅으로 넘어가 88특수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김정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을 낳았고, 그 이름을 소련식으로 <유라>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처음에 김일성도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빨치산투쟁 역사의 왜곡이 성과를 거두는데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욕망은 더 크게 자라났다. 그리하여 김정일은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낳았다는 전설을 만드는 데로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되었다.
삼지연 휴양소에 가서 휴양하고 있던 김일성은 어느 날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을 불러 김정일이 탄생한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내라고 과업을 주었다. 그들이 없는 것을 찾아 낼 수 없는 것은 뻔하다. 그렇게 되자 김일성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찾아내야 하겠다고 하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한 다음,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당중앙의 당역사연구소에서는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 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어려운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밑에 <백두산 밀영 고향집>이라는 것을 건설해 놓고, 이 집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이 같이 살면서 사령부를 표시하는 붉은 깃발을 띄우고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였으며, 김정일은 여기서 태어나 빨치산들의 총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고 선전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1940년말에 소련 땅에 넘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단 말인가.
북조선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88특수여단에 있던 몇 십명의 김일성빨치산이 해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을 듣고서는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불쾌감은 가져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인격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감은 덜 느껴진다.
그러나 김일성이 인민들에게 속일 필요가 없는 자기 경력까지 속이며 김정일의 출생지까지 속이기 위하여 일을 꾸미는 사실을 놓고는 김일성·김정일이 혁명가로서의 품성은 고사하고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이런 저열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며 온 나라를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위조한 <허위선전의 종합본>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다.
원래 김일성은 항일빨치산 투쟁을 선전하기 위하여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출판하도록 하고,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회상기 학습을 시켰다. 물론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는 예외 없이 기자나 작가들이 사실을 흥미 있게 그리고 특히 김일성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 각색하여 써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 노동당원들과 청소년 학생들 속에서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자아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기부터 김정일이 당중앙에 들어와 선전사업을 주관하면서 빨치산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모두 회수하여 버렸다.
그 첫째 이유는, 그 회상기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데 집중되지 못하고 빨치산 참가자들 자신의 공적을 선전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 빨치산 참가자들에 대한 환상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회상기 필자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한다 하여도 회상내용에는 당시의 진실을 반영한 자료들이 일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이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대대적으로 과장하는데 방해로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다 회수한 다음부터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빨치산 참가자들의 이름으로 회상기를 발표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는 당중앙의 당역사연구소가 검토하고 개작하여 대중보도기관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빨치산 참가자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나 신문사와 교섭하여 회상기를 발표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대대적으로 쓰고 영화를 많이 만들도록 조직 지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예작품과 영화는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든 것이라 하여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한 저작과 같은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전당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엄격한 규율을 세웠다. 예컨대 당중앙에서와 중앙급기관 일군들을 위한 학습반에서는 매주 한번씩 영화를 보게 되어 있는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등의 혁명활동 주제영화는 <문헌영화>(김정일의 문헌과 같다는 뜻)라고 하면서 당과 국가의 최고위급 간부들도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며, 때로는 영화를 본 소감을 당조직에 써내도록 규율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학습 대신에 김일성의 혁명활동역사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를 의무적으로 학습하고, 어떤 것은 학습총화때 시험까지 치기 때문에 회상기를 읽은 기억은 사라지고 소설과 영화의 내용만을 역사적 사실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이 마련된 조건에서 김일성의 회고록을 쓰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김일성의 혁명활동과 관련된 소설과 영화는 당중앙 선전부가 자기 산하의 작가, 예술인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선전부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자기 부서가 주관하여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역사연구소는 수령의 회고록은 혁명역사에 속하는 만큼 자기 부서가 주관하여 쓰겠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회고록 집필은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게 되었다. 집필자 문제는 선전부에서 그 산하에 있는 혁명소설 집필작가들을 동원하여 보장하기로 하고, 혁명역사의 자료와 관련된 문제는 당역사연구소 일군들이 1∼2명 동원되어 고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집필자들은 원래 혁명소설이나 혁명영화 시나리오를 써온 사람들인 만큼 회고록을 흥미 있게 잘 썼다. 회고록 제1권이 나왔을 때 대중 속에서 평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과 영화에서 본 내용과 일치될 뿐 아니라, 내용서술 또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회고록이 잘되었다고 매우 만족해하였으며 집필자들을 크게 고무하여 주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회고록은 김일성의 노작으로서 전당과 전 국민의 필독학습 문헌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급의 학습반에서 의무적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당역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성과와 위로부터의 높은 평가에 힘을 얻었으며, 항일빨치산 시기 뿐 아니라 해방 후 시기를 포괄하는 방대한 규모의 회고록 편찬계획을 세우고 이 사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또 선전부에서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대외선전에 대대적으로 이용하였다.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자 회고록 출판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단호하게 회고록 출판사업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회고록을 문학전문가들이 너무 재미나게 썼기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까지 회고록을 내놓으면 이미 출판한 것까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때 나는 또 다른 생각도 하였다. 해방 전 항일빨치산 시기의 사실이라면 아무리 과장하여 써도 그것을 문제시할 사람이 없지만, 해방후의 역사적 사실은 공개되었기 때문에 너무 과장하여 쓰면 대외관계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원래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진행되기는 하였으나, 동북지방(만주)에서의 투쟁은 중국 전체의 투쟁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김일성의 빨치산투쟁은 동북지방 투쟁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북한 통치자들이 아무리 김일성의 투쟁역사를 과장하여도 중국사람들은 모택동이 영도한 중국공산당의 투쟁에 비하여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방후의 역사적 사실을 너무 왜곡하게 되면 중국 사람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점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고록 속편을 써 올려 김정일의 결론을 받자고 하였다. 회고록 속편을 보고 김정일은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회고록 출판사업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왜곡이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북한 주민들을 기만하고 수령절대주의를 옹호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지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할 뿐 아니라, 마치도 항일애국투쟁의 주류를 김일성 일가가 담당한 것처럼 역사를 위조하는데 큰 관심을 돌렸다.
3.1운동 이후만 보더라도 수많은 애국자들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김일성 일가만이 반일투쟁을 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면서, 김일성 일가를 <위대한 혁명가계>라고 부르게 하고 조선민족의 혁명전통을 김일성 일가의 투쟁전통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60년대까지는 북한 교과서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과 같은 우리나라를 빛낸 명장들이 등장했으나, 60년대 후반 수령절대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들도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또 안창호, 신채호 같은 독립투사들도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김정일은 항일투쟁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자기 자신과 빨치산의 평대원이었던 자기 모친 김정숙까지 합하여 김일성으 필두로 하는 <백두산의 3대 장군>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또 김일성의 부친과 모친인 김형직과 강반석, 그리고 삼촌인 김형권과 외삼촌 등을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로 부르고 있으며, 김일성의 조부모까지도 묘를 크게 만들고 명절 때마다 당과 국가 간부들이 화환을 가지고 참배하게 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렇게 조선민족의 애국투쟁 전통을 김일성 일가의 애국투쟁전통으로 바꾸어 놓고, 이른바 혁명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김일성 일가의 종손인 자기가 민족의 혁명전통의 계승자로서 김일성의 뒤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로 되는 것이 응당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고 집요하게 노력하였던 것이다.
인물의 가치는 그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업적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는 그 자신과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독재정권을 세우고 추종분자들을 동원하여 찬양하도록 강요한 결과이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다.
김일성에 대하여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에 항일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것이다. 또 비록 스탈린이 그를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빨치산 참가자들 가운데서는 가장 젊고도 능력이 있다는 것이 평가된 것도 틀임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선출된 데 대하여서는 다른 의견이 없다.
그러면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 김일성의 빨치산이 북한을 해방하였는가?
아니다. 김일성을 위시하여 빨치산 참가자들은 단 한 명도 북한해방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북한 해방은 전적으로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김일성이 6.25조선전쟁을 일으킨 것이 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조선전쟁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중국과 미국 인민에게까지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이 옳았는가?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것이 옳았는가?
옳지 않다. 이것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국가와 인민의 정권을 완전히 저들의 사적 소유로 만드는 범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는 정권뿐 아니라 재산권도 독점하고 있다. 김부자는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인민에 대한 통치권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전대미문의 약탈자로 되었으며, 인민들을 저들에게 절대복종 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북한에서 오늘 수백만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하나의 대감 옥으로 전환시킨 책임이 전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으로 부르며 옛날 왕조와 같이 주체연호를 쓰고, 김일성의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더구나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시기에 건설하여 놓았던 자립적 민족경제도 다 망쳐먹고 북한 인민을 오늘의 비참한 처지에 몰아온 죄악을 범한 것 밖에 없는데, <위대한 장군님>이요, <세계정치의 원로>요, <21세기의 태양>이요 하며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인가. 이것만으로도 북한의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기초가 상상을 초월한 허위와 기만으로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② 주체사상의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의 전환
북한은 처음에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자기의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1948년 소련군대가 철수하기 전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6.25조선전쟁까지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 소련고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또 소련에서 태어난 소련공민 조선인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북한은 소련의 가맹공화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모든 행사 때마다 스탈린 만세를 불렀으며 그 다음에야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북한의 모든 간부들이 저마다 누가 더 소련에 충실한가 하는 경쟁을 하였을 뿐, 감히 주체를 세운다든가 자주독립의 길로 나간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6.25 조선전쟁에 중국지원군이 대대적으로 참가한 때부터, 그리고 스탈린이 사망하면서부터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때에 김일성은 인민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당권은 아직 소련계 조선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계기로 당권을 소련계 조선인들로부터 빼앗았다.
1951년 11월 북한 노동당 제4차 전원회의에서 그때까지 당사업을 주관하여 온 소련계 조선인 허가이를 철직시킨 것은 김일성이 당권을 장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신호로 되었다.
전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간의 세력균형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먼저 남로당 파를 숙청하고, 연이어 소련파와 중국 파를 숙청함으로써 자기 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대국(소련)에 대한 사대주의와 대국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주체를 세울 데 대한 사상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주체를 세우는 문제는 북한에서 뿐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1943년에 국제공산당이 해산된 다름에도 소련은 사회주의의 종주국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주되는 기지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소련공산당의 노선과 정책은 모든 나라 공산당들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할 국제노선으로 간주되었다. 소련당과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당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해방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당의 지령에 반기를 들었으며, 스탈린 사망 후에는 중국 공산당에서도 소련당이 다른 나라 당들에 대하여 <아버지 당>행세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주체를 세 울데 대한 김일성의 사상은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또 일정한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음에 김일성은 주체를 세우는 문제를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 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 자기를 유일한 수령으로 하는 독재를 수립하는데 이용하였다. 1958년부터는 이론서기들을 동원하여 그때까지 발표한 기념보고나 연설을 묶어 출판하였던 <김일성선집>이라는 것을 주체를 세우는 방향에서 대대적으로 개작하였다. 이 개작사업을 통하여 소련을 무조건 숭배하고 섬긴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은 다 빼버렸으며 스탈린 만세도 다 삭제하였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독자적인 노선과 정책을 내놓았다.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은 이 시기에 제기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의거하여야 할 근본입장으로 선포하였다.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구현하여 사업체계와 방법에서도 자기식의 특징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기초하여 대중적인 경쟁운동인 <천리마>운동을 제기하였다. 이 모든 것은 북한 사회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주체사상은 수령절대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주체사상은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당 학습 필독문헌을 제시하는데 서도 먼저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의 저서를 지적한 다음에 김일성의 저작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수령절대주의로 넘어가면서 당 학습의 필독문헌에는 오직 김일성의 문헌만이 지적되고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은 참고 문헌으로나 지적되게 되었다. 한때는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대대적으로 회수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이 당사업의 기본으로 선포되었다. 이를 위한 몇 차례의 사상투쟁이 전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모든 당 사업이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사상 하나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고, 수령의 사상이 아닌 사상은 철저히 배격하다는 것이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은 수령을 신격화하고 수령의 사상을 신조화하며, 수령의 사상의 정당성을 절대화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화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명령지시에 따라 전당과 전군, 전국, 전민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는 같은 사물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령의 사상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유일사상체계의 요구이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의 요구를 영도체계에 구현한 것이 유일적 영도체계이다.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한다고 할 때에는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문제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고 할 때에는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유일사상 체계를 조직적 면에서 보면 유일적 영도체계로 되며 유일적 영도체계를 사상적 면에서 보면 유일사상 체계로 된다.
이와 같이 수령의 사상과 수령의 영도를 절대화한 것은 수령절대주의의 기본내용으로 된다. 여기서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절대화하는 문제를 어떻게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정당화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동시에 주체사상이 어떻게 하여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 전환되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된 것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고 할 때 두 면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인민의 이익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의 사회발전 수준이라든가, 자연 지리적 조건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조선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용한다는 점만이 강조되었으나, 점차 조선 인민의 이익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리하여 주체를 세우는데서 기본요구로서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기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주적 입장을 지킬 것과,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자주적 입장을 지킬 것과,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조건에 맞게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창조적 입장을 지킬 것이 강조되었다.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적 입장을 견지할 데 대한 문제가 강조되면서 혁명과 건설의 주체가 자기 나라의 인민(민족)이라는 사상이 또한 강조되게 되었다. 남의 나라를 숭배하고 섬기는 사상을 반대하고 자기 나라 인민, 자기 민족의 독자적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주체를 세우는데서 첫째가는 요구로 제기되었다.
구체적으로 소련을 따라가고 소련을 모방하는 입장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탈린주의를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던 데로부터 스탈린주의+민족주의를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의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민족주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의 주체사상은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틀 안에 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는 자체의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이론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인간중심철학은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과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반영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적 현상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갈라놓고,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원칙에서 사회적 운동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운동도 물질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운동과 공통성을 가진다고 보면서 자연의 운동이 필연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것처럼 사회적 운동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하여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사회적 운동에서는 자연의 운동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정신(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의 운동에서와 같이 필연적인 법칙이 뚜렷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것은 독자적이고 필연적인 운동법칙을 가질 수 없으며, 다만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물질적인 사회적 운동에 일정한 반작용을 할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사회적 운동에서 물질적인 것, 즉 물질적인 사회적 운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여 먹고 입고 쓰고 사는 생활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생산활동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산활동이 없이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생활의 변화발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사회적 운동은 본질상 물질적 부를 창조하고 분배하고 소비해 나가는 경제활동이며,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다른 사회적 현상들은 다 경제활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사회의 물질적 운동인 경제활동을 규정하는 필연적 법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생산관계가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기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생산방식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 것이 사회적 의식이며, 사회적 의식을 구현한 사회적 시설들이 사회의 상부구조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논리에 따라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생산관계가 상응하고, 생산관계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반영한 여러 가지 사상의식 형태가 형성되며, 그것을 구현한 정치 법률적 또는 문화적 시설들이 해당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게 된다. 상부구조는 토대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동시에 토대에 반작용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른바 유물사관 공식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운동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갈라놓았지만, 물질적인 운동과 정신적인 운동을 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사회적 운동의 밑바닥에 놓여있는 경제적 운동이 곧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이루며, 이 경제적 운동의 발전 법칙이 곧 사회적 운동의 객관적 법칙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운동은 누가 일으키고 누구를 위하여 누가 이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사회적 운동의 주체에 관한 문제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해명하는데서 근본적인 의의를 가지는 문제라는데 대하여 응당한 주목을 돌리지 못하였다.
운동은 운동하는 물질의 성질의 표현이다. 무생명 물질의 운동과 생명물질의 운동의 근본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무생명 물질은 맹목적으로 작용하지만, 생명물질은 개체보존과 종보존의 본능에 따라 합목적적인 운동을 한다는데 있다. 여기로부터 물리, 화학, 천문학 같은 과학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생물과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동물의 운동과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운동의 근본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동물은 본능에 따라 주위환경에 순응하여 자기의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운동을 하지만, 인간은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객관세계를 자기요구에 맞게 개조해 나감으로써 자기의 삶의 요구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실현해 나가는데 있다. 여기로부터 자연과학(생물학을 포함한)과 구별되는 사회과학이 성립된다.
인간이 진행하는 사회적 운동의 본질적 특징은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질적 특징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간은 타고난 본능적 욕망과 육체적 힘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생활 과정에서 축적한 정신적 힘(사회적 의식의 제형태인 사상문화적 재부)과 물질적 힘(사회적으로 생산한 물질적 재부)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협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발전수준은 사회적으로 축적한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힘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규정되며, 따라서 인간이 진행하는 사회적 운동의 수준은 결국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힘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규정된다. 사회적 운동을 일으키고 그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주체인 인간은 타고난 본능만 가진 생물학적 존재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축적한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사회적 협력의 힘을 지닌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는 사회적 운동의 주체를(사회적 운동을 일으키고 떠밀고 나가는 물질적 존재) 해당사회의 사회적 존재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1972년 9월에 처음으로 주체사상에 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할 수 있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이 정의에서 혁명과 건설이라고 지적한 것은 당시 북한 사회에서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 일반을 혁명과 건설이라고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체사상에 관한 정의를 일반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면 주체사상이란 사회적 운동의 주체는 인민대중이며 사회적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추동력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운명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며 인간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의에서는 계급주의적 사상과 수령절대주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북한 통치자들은 이 정의를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고, 당이 있고서야 노동계급이 있을 수 있고, 노동계급이 있고서야 인민대중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의 주인은 수령이며, 수령은 인민대중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
북한 통치자들은 인간중심의 철학이 밝힌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이론도 왜곡하여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인간중심 철학은 자기 개인의 생명을 귀중히 여길 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집단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동물도 개체보존의 본능과 함께 종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경우에도 개체의 생명뿐 아니라 종의 생명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이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생명의 기본 특징은 살려는 요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능력이다. 개인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집단도 그 집단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요구가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집단도 역시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사회적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집단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맞게 결합되어야 강한 생활력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다 같이 보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다 같이 보존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적 관계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구현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원만히 보장하는 동시에, 동지적 협조의 원칙을 구현하여 사회성원들의 긴밀한 협력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관계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정치를 통하여서만 실현될 수 있다. 앞으로 온갖 특권이 없어지고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완전히 자주적인 동시에 동지적 협조관계로 전환되어 모든 사람들이 고락을 같이 나누면서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이러한 사회적 집단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협력이 가장 원만히 실현된 이상적인 사회관계를 특징짓기 위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의 유일 적인 사상의지에 따라 단결된 사회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수령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으로서 뇌수와 같고, 인민들은 뇌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기관과 같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수령은 복숭아의 씨와 같고 인민대중은 복숭아의 살과 같다고 하였다. 즉 복숭아의 살은 씨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결국 인민을 위하여 수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령을 위하여 인민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수령에 대한 신격화와 그것을 무조건 믿게 하기 위한 우민화정책이 심화됨에 따라 북한에서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허황된 미신이 떠돌고 있으며, 그것이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까지 발표되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 그것을 추모하여 백학의 떼가 김일성동상 위를 떠돌았다든가, 창공높이 김일성의 초상이 떠 있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미신이 널리 유포되었다. 또 김정일이 판문점을 방문하였을 때 하늘은 그를 남한측의 저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끼게 하였으나, 김정일이 판문점 초소를 지키는 군인들 앞에 나타나자마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찬란한 햇빛이 그의 <웅장한 모습>을 비쳐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인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그의 위대성을 칭송하여 썼다는 송시에서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고 썼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았으며, 김일성은 김정일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앞장서 힘쓰다보니, 북한이라는 밀폐된 작은 땅안에서는 사람들에게 김일성·김정일의 두개의 태양이 만물을 비치는 것 같은 환상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
①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② 주체사상의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의 전환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크게 두 가지 선전사업에 힘을 집중하고 있다. 그 하나는 이른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활동 역사라는 것을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위조하여 선전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지도사상인 주체사상을 봉건사상으로 왜곡하여 선전하는 것이다.
① 김일성. 김정일 <혁명역사>의 과장과 위조
우리는 김일성과 그의 전우들이 항일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것을 응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항간에는 가짜 김일성이라는 설도 나돌고 있지만, 가짜건 진짜건 항일빨치산에 참가한 것이 사실이라면 마땅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역사는 반드시 사실 그대로 밝혀지는 법이다. 앞으로 역사가들에 의하여 진짜 김일성인가 가짜 김일성인가 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명될 것이다.
우리가 의견을 가지는 것은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하고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이 1930년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주장은 정상적인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믿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운명 개척의 길을 밝혀주는 사상을 창시하려면, 우선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투쟁경험과 민족과 인류의 발전과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져야 할 것이다.
1930년 18살 난 김일성은 중학공부도 하지 못하였고 투쟁경험도 없었다. 누에도 뽕잎을 먹고서야 실을 뽑는 법인데 똑똑한 지식과 경험도 없이 어떻게 새로운 지도사상을 창조할 수 있단 말인가. 원래 6.25조선전쟁 이전에는 <주체>라는 말조차 없었다. 주체를 세워야 한다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것은 소련파와 중국파를 숙청할 때부터이며, 주체사상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에 들어와서이다. 그러므로 1930년 김일성이 18살 때 주체사상을 창시하였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다.
나는 1958년 초부터 7년 이상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하였지만, 그로부터 해방 전에 주체사상이나 주체를 세 울데 대하여 논의하였다는 말을 한번도 들은 일이 없다. 오히려 그때 내가 김일성으로부터 직접 들은 이야기는 항일빨치산이 크게 투쟁한 것은 없지만 안한 것보다는 낫다든 가, 그때 조선의 지도자로 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한 일이 없다든가 하는 따위의 비교적 겸손한 말이었다. 김일성을 신격화하고 항일빨치산 투쟁을 과장하고 왜곡한 것은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이 앞장서 조작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구호나무>소동은 그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잡기 시작한 때부터 북한 통치자들은 김일성이 진행한 항일빨치산 투쟁이 중국 동북지방에서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진행된 투쟁인 것이 아니라, 주로 백두산 근거지를 중심으로 중국 동북지방과 조선반도 내부에서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조선국내에서 투쟁하였다는 증거로 나무껍질을 벗기도 거기에 <일본제국주의 타도>, <조선독립만세> 등 여러 가지 반일구호를 붓으로 써 놓은 것이 국내 도처에서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아마 어느 빨치산 참가자가 회상기에서 자기들이 어느 밀림속에 주둔하고 있을 때 나무껍질을 벗기고 거기에 <조선독립만세!> 와 같은 구호를 써놓은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로부터 암시를 받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구호나무가 빨치산 투쟁이 주로 진행된 중국 동북지방에서 많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은 없고 북조선 도처에서 수많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수가 1만수천개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때 국내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였다면 한 두 사람일 것이다. 또 국내에 비밀공작원을 파견하면서 설마 나무껍질을 벗기고 구호를 써넣을 것을 기본임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일본경찰의 눈을 피하여 비밀공작을 하였을 터인데, 어느 겨를에 한가하게 나무껍질을 벗기고 먹을 갈아 붓으로 구호를 쓰고 앉아 있었겠는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또 수십 년 전에 써놓은 것이 비바람에 다 지워진 것을 특수한 약을 바르면 다시 나타난다고 하는데, 그 누구도 그 특수한 약을 본 사람은 없다.
이러한 역사날조 사업은 아마도 당중앙의 한 개 부서로서 사업하고 있는 당역사연구소가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 밑에 극비리에 진행하였을 것이다. 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현행문건을 작성하는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던 관계로, 당역사연구소에서 항일빨치산 투쟁시기에 김일성이 하였다는 보고나 연설을 새로 발굴하였다고 하면서 가져오는 문건도 검토해주었다. 이런 관계로 나는 1987년부터 당역사연구소 사업을 지도하는 책임도 형식상 맡아보게 되었다. 이때 나는 당역사연구소에서 하는 사업내용에 대하여서는 전혀 간섭하려고 하지 않았고, 다만 문건만 보아주거나 제기된 문제에 대한 의견을 참고삼아 주는 정도에 그쳤다.
어느 날 내가 당역사연구소 책임일군에게 조용히 평양 모란봉에서도 700여 개나 구호나무를 발견하였다고 하는데, 우리가 평양에서 학교 다닐 때 여름에는 점심을 모란봉에 올라가 먹는 일이 많았는데, 나무에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한 일은 한번도 없었다. 모란봉에 구호나무가 몇 백 개나 있다고 선전하는 것은 지나치지 않는가하고 물어보았다. 그 책임일군은 모란봉에 있는 구호나무는 나무껍질을 벗기고 붓으로 쓴 것이 아니라, 빨치산들이 연락신호로 나무에 칼자국을 남긴 것입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나는 더 물으려고 하지 않았다.
1940년과 41년경에 중국 동북지방에서 항일빨치산들은 일본군의 토벌을 견딜 수 없어 다 소련국경으로 넘어가 소련이 조직한 88특수여단에서 군정훈련을 받았다. 그때 김일성과 같이 있던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88특수여단 전체 인원이 약 200명 가량 되었는데, 그중 조선사람은 60명밖에 안되었으며 나머지는 다 중국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여단장도 중국사람이었고 김일성은 4개 대대 가운데서 한 개 대대를 책임진 대대장이었다고 한다. 이것으로써도 항일빨치산 투쟁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조선내부에 드나들며 평양 모란봉 공원의 많은 나무에 연락암호의 칼자국을 수백 개나 남겼겠는가. 나는 평양에서 1937년부터 41년까지 공부하였는데, 그때 아카시아 나무가 무성하게 되면서 큰 소나무가 다 죽어 가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나무종류 자체가 교체되었는데 수백 개의 나무가 칼자국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은 분수 없는 거짓말이라 아니할 수 없다.
다음은 김정일이 백두산 밀영에서 1942년 2월 16일에 <광명성>으로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일성이 1940년 이후부터는 소련 땅으로 넘어가 88특수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김정숙과 결혼하여 김정일을 낳았고, 그 이름을 소련식으로 <유라>라고 불렀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역사적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서는 처음에 김일성도 부인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빨치산투쟁 역사의 왜곡이 성과를 거두는데 따라 김일성과 김정일의 욕망은 더 크게 자라났다. 그리하여 김정일은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낳았다는 전설을 만드는 데로 한 걸음 더 전진하게 되었다.
삼지연 휴양소에 가서 휴양하고 있던 김일성은 어느 날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을 불러 김정일이 탄생한 백두산 밀영자리를 찾아내라고 과업을 주었다. 그들이 없는 것을 찾아 낼 수 없는 것은 뻔하다. 그렇게 되자 김일성은 아무래도 내가 직접 찾아내야 하겠다고 하면서 주변을 돌아다니다가 경치가 좋은 곳을 찾아내어 여기가 밀영지였다고 지적한 다음, 그 뒷산을 <정일봉>이라고 이름지어 주었다.
당중앙의 당역사연구소에서는 거대한 화강석 바위를 구해 다가 거기에 엄청나게 큰 글자로 <정일봉>이라고 새기고, 그것을 산봉우리에 올려다 붙이는 어려운 공사를 진행하였다. 그리고 그 밑에 <백두산 밀영 고향집>이라는 것을 건설해 놓고, 이 집에서 김일성과 김정숙이 같이 살면서 사령부를 표시하는 붉은 깃발을 띄우고 빨치산 투쟁을 지도하였으며, 김정일은 여기서 태어나 빨치산들의 총소리를 들으며 자라났다고 선전하게 되었다. 김일성이 1940년말에 소련 땅에 넘어갔다가, 1945년 9월에 처음으로 평양에 들어왔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데 어떻게 1942년에 백두산 밀영에서 김정일을 낳았단 말인가.
북조선을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니라 88특수여단에 있던 몇 십명의 김일성빨치산이 해방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그런 거짓말을 듣고서는 그것이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불쾌감은 가져도 김일성과 김정일의 인격에 대한 직접적인 혐오감은 덜 느껴진다.
그러나 김일성이 인민들에게 속일 필요가 없는 자기 경력까지 속이며 김정일의 출생지까지 속이기 위하여 일을 꾸미는 사실을 놓고는 김일성·김정일이 혁명가로서의 품성은 고사하고 파렴치하기 그지없는 속물이라는 것을 통절히 느끼게 된다.
이런 저열한 품성을 가진 사람들만이 수백만 인민을 굶겨 죽이며 온 나라를 하나의 큰 감옥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회주의 지상낙원을 건설해 놓았다는 거짓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역사를 위조한 <허위선전의 종합본>은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이다.
원래 김일성은 항일빨치산 투쟁을 선전하기 위하여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출판하도록 하고, 당원들과 근로자들 속에서 회상기 학습을 시켰다. 물론 항일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는 예외 없이 기자나 작가들이 사실을 흥미 있게 그리고 특히 김일성의 업적을 부각시키는 방향에서 각색하여 써준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북한 노동당원들과 청소년 학생들 속에서 김일성과 항일빨치산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정을 자아내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런데 1960년대 후반기부터 김정일이 당중앙에 들어와 선전사업을 주관하면서 빨치산 참가자들이 쓴 회상기를 모두 회수하여 버렸다.
그 첫째 이유는, 그 회상기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는데 집중되지 못하고 빨치산 참가자들 자신의 공적을 선전하는 점이 있기 때문에 대중 속에서 빨치산 참가자들에 대한 환상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이유는, 회상기 필자들이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최대한 노력한다 하여도 회상내용에는 당시의 진실을 반영한 자료들이 일부 담겨 있기 때문에, 그것이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대대적으로 과장하는데 방해로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를 다 회수한 다음부터는 어떤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빨치산 참가자들의 이름으로 회상기를 발표할 필요성이 제기될 때에는 당중앙의 당역사연구소가 검토하고 개작하여 대중보도기관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빨치산 참가자들이 개별적으로 출판사나 신문사와 교섭하여 회상기를 발표하는 것은 완전히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김정일은 김일성의 혁명활동을 주제로 하는 소설을 대대적으로 쓰고 영화를 많이 만들도록 조직 지도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문예작품과 영화는 김정일이 직접 지도하여 만든 것이라 하여 김정일의 이름으로 발표한 저작과 같은 중요한 비중을 가지고 전당과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학습하도록 하는 엄격한 규율을 세웠다. 예컨대 당중앙에서와 중앙급기관 일군들을 위한 학습반에서는 매주 한번씩 영화를 보게 되어 있는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등의 혁명활동 주제영화는 <문헌영화>(김정일의 문헌과 같다는 뜻)라고 하면서 당과 국가의 최고위급 간부들도 예외 없이 의무적으로 보아야 하며, 때로는 영화를 본 소감을 당조직에 써내도록 규율을 세우고 있다. 이렇게 빨치산 참가자들의 회상기 학습 대신에 김일성의 혁명활동역사를 주제로 한 소설과 영화를 의무적으로 학습하고, 어떤 것은 학습총화때 시험까지 치기 때문에 회상기를 읽은 기억은 사라지고 소설과 영화의 내용만을 역사적 사실과 같이 생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이 마련된 조건에서 김일성의 회고록을 쓰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김일성의 혁명활동과 관련된 소설과 영화는 당중앙 선전부가 자기 산하의 작가, 예술인들을 동원하여 만들었다. 그러므로 선전부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자기 부서가 주관하여 쓰겠다고 주장하였으며, 당역사연구소는 수령의 회고록은 혁명역사에 속하는 만큼 자기 부서가 주관하여 쓰겠다고 주장하였다.
결국 김정일의 결론에 따라 회고록 집필은 당역사연구소가 주관하게 되었다. 집필자 문제는 선전부에서 그 산하에 있는 혁명소설 집필작가들을 동원하여 보장하기로 하고, 혁명역사의 자료와 관련된 문제는 당역사연구소 일군들이 1∼2명 동원되어 고문의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김일성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집필자들은 원래 혁명소설이나 혁명영화 시나리오를 써온 사람들인 만큼 회고록을 흥미 있게 잘 썼다. 회고록 제1권이 나왔을 때 대중 속에서 평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소설과 영화에서 본 내용과 일치될 뿐 아니라, 내용서술 또한 소설이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 있었기 때문이다.
김일성과 김정일도 회고록이 잘되었다고 매우 만족해하였으며 집필자들을 크게 고무하여 주었다. 이때부터 김일성의 회고록은 김일성의 노작으로서 전당과 전 국민의 필독학습 문헌으로 지정되었으며, 모든 급의 학습반에서 의무적으로 학습하게 되었다. 당역사연구소에서는 이러한 성과와 위로부터의 높은 평가에 힘을 얻었으며, 항일빨치산 시기 뿐 아니라 해방 후 시기를 포괄하는 방대한 규모의 회고록 편찬계획을 세우고 이 사업에 큰 힘을 기울였다. 또 선전부에서는 김일성의 회고록을 대외선전에 대대적으로 이용하였다.
1994년 7월 8일에 김일성이 사망하게 되자 회고록 출판사업을 계속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나는 단호하게 회고록 출판사업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로서는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에도 회고록을 문학전문가들이 너무 재미나게 썼기 때문에 그 진실성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는데,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까지 회고록을 내놓으면 이미 출판한 것까지 사람들이 믿지 않는 역효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때 나는 또 다른 생각도 하였다. 해방 전 항일빨치산 시기의 사실이라면 아무리 과장하여 써도 그것을 문제시할 사람이 없지만, 해방후의 역사적 사실은 공개되었기 때문에 너무 과장하여 쓰면 대외관계에서도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원래 김일성의 항일빨치산 투쟁은 중국공산당의 영도 밑에 진행되기는 하였으나, 동북지방(만주)에서의 투쟁은 중국 전체의 투쟁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없었다. 더구나 김일성의 빨치산투쟁은 동북지방 투쟁의 작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북한 통치자들이 아무리 김일성의 투쟁역사를 과장하여도 중국사람들은 모택동이 영도한 중국공산당의 투쟁에 비하여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해방후의 역사적 사실을 너무 왜곡하게 되면 중국 사람들도 가만있지 않을 것이란 점을 우려하였던 것이다.
공명심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나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회고록 속편을 써 올려 김정일의 결론을 받자고 하였다. 회고록 속편을 보고 김정일은 잘 썼다고 칭찬하였다. 그리하여 회고록 출판사업은 김일성 사망 후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왜곡이 언젠가는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북한 주민들을 기만하고 수령절대주의를 옹호하는데 이용되고 있다.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지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터무니없이 과장할 뿐 아니라, 마치도 항일애국투쟁의 주류를 김일성 일가가 담당한 것처럼 역사를 위조하는데 큰 관심을 돌렸다.
3.1운동 이후만 보더라도 수많은 애국자들이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벌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정일은 김일성 일가만이 반일투쟁을 한 것처럼 역사를 왜곡하면서, 김일성 일가를 <위대한 혁명가계>라고 부르게 하고 조선민족의 혁명전통을 김일성 일가의 투쟁전통으로 바꾸어 놓으려고 하였다.
60년대까지는 북한 교과서에 을지문덕, 강감찬, 이순신과 같은 우리나라를 빛낸 명장들이 등장했으나, 60년대 후반 수령절대주의가 등장하면서 이들도 교과서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또 안창호, 신채호 같은 독립투사들도 <외세를 등에 업은 사대주의자>로 묘사하고 있다.
김정일은 항일투쟁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자기 자신과 빨치산의 평대원이었던 자기 모친 김정숙까지 합하여 김일성으 필두로 하는 <백두산의 3대 장군>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또 김일성의 부친과 모친인 김형직과 강반석, 그리고 삼촌인 김형권과 외삼촌 등을 <불요불굴의 혁명투사>로 부르고 있으며, 김일성의 조부모까지도 묘를 크게 만들고 명절 때마다 당과 국가 간부들이 화환을 가지고 참배하게 하고 있다.
김정일은 이렇게 조선민족의 애국투쟁 전통을 김일성 일가의 애국투쟁전통으로 바꾸어 놓고, 이른바 혁명전통을 계승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함으로써 김일성 일가의 종손인 자기가 민족의 혁명전통의 계승자로서 김일성의 뒤를 이어 민족의 지도자로 되는 것이 응당하다는 것을 대중들에게 납득시키려고 집요하게 노력하였던 것이다.
인물의 가치는 그 자신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따라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남긴 업적에 의하여 객관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김일성에 대한 신격화는 그 자신과 그의 아들인 김정일이 독재정권을 세우고 추종분자들을 동원하여 찬양하도록 강요한 결과이지, 객관적인 평가가 아니다.
김일성에 대하여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은 젊은 시절에 항일빨치산 투쟁에 참가한 것이다. 또 비록 스탈린이 그를 북한의 지도자로 내세운 것은 사실이지만, 빨치산 참가자들 가운데서는 가장 젊고도 능력이 있다는 것이 평가된 것도 틀임 없는 것이다. 이 점에서 김일성이 북한의 지도자로 선출된 데 대하여서는 다른 의견이 없다.
그러면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 김일성의 빨치산이 북한을 해방하였는가?
아니다. 김일성을 위시하여 빨치산 참가자들은 단 한 명도 북한해방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다. 북한 해방은 전적으로 소련의 붉은 군대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 김일성이 6.25조선전쟁을 일으킨 것이 잘한 것인가?
잘못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볼 때 조선전쟁을 통하여 우리 민족에 헤아릴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중국과 미국 인민에게까지 막대한 손실을 끼쳤다.
- 김일성이 자기 아들인 김정일에게 정권을 넘겨준 것이 옳았는가? 김정일이 자기 아버지로부터 정권을 넘겨받은 것이 옳았는가?
옳지 않다. 이것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가 국가와 인민의 정권을 완전히 저들의 사적 소유로 만드는 범죄를 범하였다는 것을 실증해주고 있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국가는 정권뿐 아니라 재산권도 독점하고 있다. 김부자는 정권을 독점함으로써 인민에 대한 통치권뿐 아니라, 경제와 문화의 모든 것을 독점하는 전대미문의 약탈자로 되었으며, 인민들을 저들에게 절대복종 하는 노예로 만들었다. 북한에서 오늘 수백만 인민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하나의 대감 옥으로 전환시킨 책임이 전적으로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조선민족을 <김일성 민족>으로 부르며 옛날 왕조와 같이 주체연호를 쓰고, 김일성의 생일을 <태양절>이라고 떠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한 일인가. 더구나 김정일은 자기 아버지시기에 건설하여 놓았던 자립적 민족경제도 다 망쳐먹고 북한 인민을 오늘의 비참한 처지에 몰아온 죄악을 범한 것 밖에 없는데, <위대한 장군님>이요, <세계정치의 원로>요, <21세기의 태양>이요 하며 떠드는 것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웃음거리인가. 이것만으로도 북한의 수령절대주의의 사상적 기초가 상상을 초월한 허위와 기만으로 꾸며진 것이라는 것이 명백하다.
② 주체사상의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의 전환
북한은 처음에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자기의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라 1948년 소련군대가 철수하기 전에는 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후에도 6.25조선전쟁까지는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분야에 소련고문이 배치되어 있었고, 또 소련에서 태어난 소련공민 조선인들이 실권을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때까지 북한은 소련의 가맹공화국과 큰 차이가 없었다. 모든 행사 때마다 스탈린 만세를 불렀으며 그 다음에야 김일성 만세를 불렀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북한의 모든 간부들이 저마다 누가 더 소련에 충실한가 하는 경쟁을 하였을 뿐, 감히 주체를 세운다든가 자주독립의 길로 나간다는 말을 꺼내는 사람이 없었다.
6.25 조선전쟁에 중국지원군이 대대적으로 참가한 때부터, 그리고 스탈린이 사망하면서부터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은 급격히 약화되었다. 그때에 김일성은 인민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나, 당권은 아직 소련계 조선인들의 수중에 있었다. 김일성은 소련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계기로 당권을 소련계 조선인들로부터 빼앗았다.
1951년 11월 북한 노동당 제4차 전원회의에서 그때까지 당사업을 주관하여 온 소련계 조선인 허가이를 철직시킨 것은 김일성이 당권을 장악하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사변이었을 뿐 아니라, 소련의 예속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투쟁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역사적 신호로 되었다.
전후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간의 세력균형을 교묘하게 이용하면서 먼저 남로당 파를 숙청하고, 연이어 소련파와 중국 파를 숙청함으로써 자기 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를 수립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부터 김일성은 대국(소련)에 대한 사대주의와 대국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면서 주체를 세울 데 대한 사상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물론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주체를 세우는 문제는 북한에서 뿐 아니라 다른 사회주의 나라들과 국제공산주의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제기되는 중요한 문제였다. 1943년에 국제공산당이 해산된 다름에도 소련은 사회주의의 종주국으로,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주되는 기지로 인정되고 있었으며, 소련공산당의 노선과 정책은 모든 나라 공산당들이 의무적으로 따라야 할 국제노선으로 간주되었다. 소련당과의 이러한 종속적인 관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당들이 적지 않았다.
특히 자체의 힘으로 나라를 해방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당의 지령에 반기를 들었으며, 스탈린 사망 후에는 중국 공산당에서도 소련당이 다른 나라 당들에 대하여 <아버지 당>행세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정면으로 비판하고 나섰다. 이러한 국제적 움직임을 배경으로 하여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주체를 세 울데 대한 김일성의 사상은 대중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으며, 또 일정한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음에 김일성은 주체를 세우는 문제를 소련의 예속에서 벗어나 자기 파를 중심으로 하는 독재, 자기를 유일한 수령으로 하는 독재를 수립하는데 이용하였다. 1958년부터는 이론서기들을 동원하여 그때까지 발표한 기념보고나 연설을 묶어 출판하였던 <김일성선집>이라는 것을 주체를 세우는 방향에서 대대적으로 개작하였다. 이 개작사업을 통하여 소련을 무조건 숭배하고 섬긴다는 인상을 주는 대목들은 다 빼버렸으며 스탈린 만세도 다 삭제하였다.
이와 함께 김일성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구호를 내걸고 독자적인 노선과 정책을 내놓았다. 사상에서 주체, 정치에서 자주, 경제에서 자립, 국방에서 자위의 원칙은 이 시기에 제기한 것이었으며, 아울러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의거하여야 할 근본입장으로 선포하였다.
자주적 입장과 창조적 입장을 구현하여 사업체계와 방법에서도 자기식의 특징을 살리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이러한 사업방법과 사업작풍에 기초하여 대중적인 경쟁운동인 <천리마>운동을 제기하였다. 이 모든 것은 북한 사회발전에 긍정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60년대 후반기에 들어서면서 주체사상은 수령절대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이때까지만 하여도 주체사상은 어디까지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조선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적용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당 학습 필독문헌을 제시하는데 서도 먼저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스탈린의 저서를 지적한 다음에 김일성의 저작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수령절대주의로 넘어가면서 당 학습의 필독문헌에는 오직 김일성의 문헌만이 지적되고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은 참고 문헌으로나 지적되게 되었다. 한때는 마르크스주의 고전들을 대대적으로 회수하기까지 하였다.
특히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기 시작한 때부터는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이 당사업의 기본으로 선포되었다. 이를 위한 몇 차례의 사상투쟁이 전당적으로 전개되었으며, 모든 당 사업이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으로 전환되었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사상 하나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고, 수령의 사상이 아닌 사상은 철저히 배격하다는 것이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은 수령을 신격화하고 수령의 사상을 신조화하며, 수령의 사상의 정당성을 절대화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화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명령지시에 따라 전당과 전군, 전국, 전민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는 같은 사물의 양면이라고 볼 수 있다. 수령의 사상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여야 한다는 것이 유일사상체계의 요구이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의 요구를 영도체계에 구현한 것이 유일적 영도체계이다.
유일사상 체계를 확립한다고 할 때에는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문제도 포괄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또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고 할 때에는 유일사상 체계를 세우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유일사상 체계를 조직적 면에서 보면 유일적 영도체계로 되며 유일적 영도체계를 사상적 면에서 보면 유일사상 체계로 된다.
이와 같이 수령의 사상과 수령의 영도를 절대화한 것은 수령절대주의의 기본내용으로 된다. 여기서 수령의 사상과 영도를 절대화하는 문제를 어떻게 주체사상에 기초하여 정당화하였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동시에 주체사상이 어떻게 하여 수령절대주의 사상으로 전환되었는가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주체사상의 출발점으로 된 것은 사대주의와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일반적 원리를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조선의 구체적 현실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창조적으로 적용한다고 할 때 두 면을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조선인민의 이익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조선의 사회발전 수준이라든가, 자연 지리적 조건에 맞게 적용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다른 나라와 구별되는 조선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적용한다는 점만이 강조되었으나, 점차 조선 인민의 이익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리하여 주체를 세우는데서 기본요구로서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기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자주적 입장을 지킬 것과,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자주적 입장을 지킬 것과,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교조주의를 반대하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조건에 맞게 모든 문제를 처리하는 창조적 입장을 지킬 것이 강조되었다.
사대주의를 반대하고 자주적 입장을 견지할 데 대한 문제가 강조되면서 혁명과 건설의 주체가 자기 나라의 인민(민족)이라는 사상이 또한 강조되게 되었다. 남의 나라를 숭배하고 섬기는 사상을 반대하고 자기 나라 인민, 자기 민족의 독자적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 주체를 세우는데서 첫째가는 요구로 제기되었다.
구체적으로 소련을 따라가고 소련을 모방하는 입장으로부터 자기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모든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는 방향으로 사상이 발전하게 되었다.
이런 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스탈린주의를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던 데로부터 스탈린주의+민족주의를 지도사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960년대 말까지의 주체사상은 스탈린주의+민족주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까지의 주체사상은 전적으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틀 안에 있었으며 마르크스주의와 구별되는 자체의 이론적 기초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간중심의 새로운 철학이론에 기초하여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사업이 시작되었다.
인간중심철학은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과 견해를 달리한다.
마르크스주의는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의 반영이라는 유물론적 반영론으로부터 출발한다. 마르크스주의는 모든 사회적 현상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갈라놓고, 물질적인 것이 정신적인 것을 규정한다는 원칙에서 사회적 운동의 합법칙성을 규명하려고 하였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운동도 물질의 운동이라는 점에서 자연의 운동과 공통성을 가진다고 보면서 자연의 운동이 필연적인 법칙에 의거하여 진행되는 것처럼 사회적 운동도 필연적인 법칙에 의하여 진행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다만 사회적 운동에서는 자연의 운동에서와는 달리 인간의 정신(의식)이 작용하기 때문에 자연의 운동에서와 같이 필연적인 법칙이 뚜렷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인 것은 물질적인 것의 반영이기 때문에 그것은 독자적이고 필연적인 운동법칙을 가질 수 없으며, 다만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운동하는 물질적인 사회적 운동에 일정한 반작용을 할 뿐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사회적 운동에서 물질적인 것, 즉 물질적인 사회적 운동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개조하여 먹고 입고 쓰고 사는 생활수단을 마련하기 위한 생산활동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생산활동이 없이는 인간의 사회생활이 성립될 수 없으며, 사회생활의 변화발전에 대하여 생각할 수 없다. 사회적 운동은 본질상 물질적 부를 창조하고 분배하고 소비해 나가는 경제활동이며, 정치와 문화 등 모든 다른 사회적 현상들은 다 경제활동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사회의 물질적 운동인 경제활동을 규정하는 필연적 법칙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생산관계가 상응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물질생활과 정신생활의 상호관계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그것은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인간의 의식을 규정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에서 기본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통일인 생산방식이다. 인간의 사회적 존재를 반영한 것이 사회적 의식이며, 사회적 의식을 구현한 사회적 시설들이 사회의 상부구조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이런 논리에 따라 생산력의 발전수준에 생산관계가 상응하고, 생산관계를 토대로 하여 그것을 반영한 여러 가지 사상의식 형태가 형성되며, 그것을 구현한 정치 법률적 또는 문화적 시설들이 해당사회의 상부구조를 이루게 된다. 상부구조는 토대에 의하여 규정되지만 동시에 토대에 반작용한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른바 유물사관 공식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사회적 운동을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으로 갈라놓았지만, 물질적인 운동과 정신적인 운동을 하는 주체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즉 사회적 운동의 밑바닥에 놓여있는 경제적 운동이 곧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이루며, 이 경제적 운동의 발전 법칙이 곧 사회적 운동의 객관적 법칙이라는 것을 주장하였지만, 그 운동은 누가 일으키고 누구를 위하여 누가 이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였다. 사회적 운동의 주체에 관한 문제가 자연의 운동과 구별되는 사회적 운동의 본질을 해명하는데서 근본적인 의의를 가지는 문제라는데 대하여 응당한 주목을 돌리지 못하였다.
운동은 운동하는 물질의 성질의 표현이다. 무생명 물질의 운동과 생명물질의 운동의 근본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무생명 물질은 맹목적으로 작용하지만, 생명물질은 개체보존과 종보존의 본능에 따라 합목적적인 운동을 한다는데 있다. 여기로부터 물리, 화학, 천문학 같은 과학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생물과학이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존재인 동물의 운동과 사회적 존재인 인간의 운동의 근본차이는 어디에 있는가?
동물은 본능에 따라 주위환경에 순응하여 자기의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운동을 하지만, 인간은 자주적인 사상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가지고 객관세계를 자기요구에 맞게 개조해 나감으로써 자기의 삶의 요구를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실현해 나가는데 있다. 여기로부터 자연과학(생물학을 포함한)과 구별되는 사회과학이 성립된다.
인간이 진행하는 사회적 운동의 본질적 특징은 바로 인간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본질적 특징에 의하여 규정된다. 인간은 타고난 본능적 욕망과 육체적 힘만을 가진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사회생활 과정에서 축적한 정신적 힘(사회적 의식의 제형태인 사상문화적 재부)과 물질적 힘(사회적으로 생산한 물질적 재부)을 지니고 있으며, 사회적으로 서로 결합되어 협력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발전수준은 사회적으로 축적한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힘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규정되며, 따라서 인간이 진행하는 사회적 운동의 수준은 결국 인간이 지니고 있는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그리고 사회적 협력의 힘의 발전수준에 의하여 규정된다. 사회적 운동을 일으키고 그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주체인 인간은 타고난 본능만 가진 생물학적 존재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축적한 정신적 힘과 물질적 힘, 사회적 협력의 힘을 지닌 사회적 존재이다.
우리는 사회적 운동의 주체를(사회적 운동을 일으키고 떠밀고 나가는 물질적 존재) 해당사회의 사회적 존재로 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하여 1972년 9월에 처음으로 주체사상에 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하였다.
주체사상이란 혁명과 건설의 주인은 인민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추동할 수 있는 힘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이 정의에서 혁명과 건설이라고 지적한 것은 당시 북한 사회에서 인간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사회적 운동 일반을 혁명과 건설이라고 표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주체사상에 관한 정의를 일반적인 용어를 써서 표현한다면 주체사상이란 사회적 운동의 주체는 인민대중이며 사회적 운동을 떠밀고 나가는 추동력도 인민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여 인간의 운명의 주인은 인간 자신이며 인간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는 힘도 인간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정의에서는 계급주의적 사상과 수령절대주의 사상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러나 북한 통치자들은 이 정의를 <수령이 있고서야 당이 있을 수 있고, 당이 있고서야 노동계급이 있을 수 있고, 노동계급이 있고서야 인민대중이 있을 수 있다>는 논리에 따라 사회주의 운동의 주인은 수령이며, 수령은 인민대중의 운명의 주인으로서 인민대중의 운명개척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명제로 바꾸어 놓았다.
북한 통치자들은 인간중심의 철학이 밝힌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관한 이론도 왜곡하여 수령절대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이용하였다. 인간중심 철학은 자기 개인의 생명을 귀중히 여길 뿐 아니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귀중히 여기는 것은 인간의 사회적 본성이라는 것을 밝혔다.
이것은 인간이 개인적 존재인 동시에 사회적 집단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라는 사상과 관련되어 있다. 동물도 개체보존의 본능과 함께 종보존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물의 경우에도 개체의 생명뿐 아니라 종의 생명이 귀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인이 생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생명의 기본 특징은 살려는 요구와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능력이다. 개인들이 결합되어 이루어지고 있는 사회적 집단도 그 집단의 생존을 보존하려는 요구가 있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생활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사회적 집단도 역시 생명을 지닌 존재라는 점에서 사회적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적 집단은 그것이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맞게 결합되어야 강한 생활력을 가질 수 있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은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다 같이 보존할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개인의 생명과 사회적 집단의 생명을 다 같이 보존하도록 하기 위하여서는 사회적 관계에서 민주주의 원칙을 구현하여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원만히 보장하는 동시에, 동지적 협조의 원칙을 구현하여 사회성원들의 긴밀한 협력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적 관계를 이렇게 만드는 것은 정치를 통하여서만 실현될 수 있다. 앞으로 온갖 특권이 없어지고 사람들의 사회적 관계가 완전히 자주적인 동시에 동지적 협조관계로 전환되어 모든 사람들이 고락을 같이 나누면서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 나갈 때 이러한 사회적 집단은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와 평등이 완전히 실현되고 사람들 사이의 사회적 협력이 가장 원만히 실현된 이상적인 사회관계를 특징짓기 위하여 사회정치적 생명체라는 개념을 썼던 것이다.
그러나 북한 통치자들은 수령의 유일 적인 사상의지에 따라 단결된 사회가 바로 사회정치적 생명체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서 수령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으로서 뇌수와 같고, 인민들은 뇌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육체기관과 같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심지어 수령은 복숭아의 씨와 같고 인민대중은 복숭아의 살과 같다고 하였다. 즉 복숭아의 살은 씨를 위하여 존재한다는 뜻이다. 결국 인민을 위하여 수령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령을 위하여 인민이 필요하다는 논리이다.
수령에 대한 신격화와 그것을 무조건 믿게 하기 위한 우민화정책이 심화됨에 따라 북한에서는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허황된 미신이 떠돌고 있으며, 그것이 노동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에까지 발표되고 있다.
김일성이 사망하였을 때 그것을 추모하여 백학의 떼가 김일성동상 위를 떠돌았다든가, 창공높이 김일성의 초상이 떠 있었다든가 하는 따위의 미신이 널리 유포되었다. 또 김정일이 판문점을 방문하였을 때 하늘은 그를 남한측의 저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끼게 하였으나, 김정일이 판문점 초소를 지키는 군인들 앞에 나타나자마자 안개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찬란한 햇빛이 그의 <웅장한 모습>을 비쳐주었다고 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인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그의 위대성을 칭송하여 썼다는 송시에서 <만민이 칭송하는 그 마음 한결같아 우렁찬 환호소리 하늘땅을 뒤흔든다>고 썼다.
김정일은 김일성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지리 않았으며, 김일성은 김정일을 신격화하기 위하여 앞장서 힘쓰다보니, 북한이라는 밀폐된 작은 땅안에서는 사람들에게 김일성·김정일의 두개의 태양이 만물을 비치는 것 같은 환상을 가지게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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