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 정치정세와 민주주의적 당면과업1
  • 관리자
  • 2010-06-07 15: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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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정치철학연구소 임원들과의 담화 2007. 3)

1. 문제제기

지금부터 62년 전, 우리는 1945년에 8.15해방을 맞이했습니다. 그 때 우리나라가 어느 길로 갈 것인가, 즉 미국과 동맹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소련식 사회주의 독재의 길을 따라 갈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습니다. 북한은 소련식 사회주의를 따라갔고 남한은 미국과 함께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따라갔습니다. 그 결과 남과 북은 천양지차이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 와서 역시 나라의 발전방향과 관련하여 이와 유사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대로 미국과의 동맹을 더욱 강화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계속 고수하고 개선해 나갈 것인가 아니면 김정일의 독재체제와 공조하고 용공반미 방향으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2. 한국의 정체성과 성공비결

먼저 우리는 대한민국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대한민국이 어떻게 해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는가 하는 데 대해서 살펴보려고 합니다.

원래 한국은 오랫동안 일제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반봉건적 사회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매우 가난하고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가난하고 뒤떨어진 나라들이 잘 살기 위해서는 착취계급이 없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지식인들 속에 적지 않게 유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미군이 주둔한 남한에서도 정세가 복잡했습니다. 이런 환경 속에서 미국과 동맹하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따라가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고수하고 그 길로 나라를 이끌어 나간 첫 지도자가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이승만 대통령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을 말하여 줍니다.

해방 직후의 어려운 상황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로 나가겠다는 확고부동한 결심을 가지고 나라를 이끌어 나갔기 때문에 6.25남침 전쟁 때 공산침략을 막아내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대한민국 정체성의 초석을 마련하는 데 이바지 한 역사적 업적이라고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경제를 현대화하는 방향에서 급속히 발전시켰습니다. 다른 나라에서 백 년, 이백 년 걸려야 할 수 있는 경제적 비약을 단 몇 십 년 내에 비약적으로 해 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참으로 세계적인 기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누가 이러한 경제건설을 지도했습니까? 박정희 대통령입니다.

현대적인 경제를 건설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현대적인 민주주의 사회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서 주권재민을 표방하는 한국 민주주의의 기초가 마련되었다면, 그것을 현대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전진시키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 시기의 비약적인 경제발전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짐으로써, 즉 건국 초기에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로 가는 기본 틀을 결정한 것과 모든 난관을 무릅쓰고 현대적 인 자유민주주의적 경제를 발전시킨 것, 이 두 가지 역사적 업적이 결합되어 대한민국의 확고부동한 정체가 마련되었습니다.

3.북한의 정체성과 실패의 요인

그러면 북한의 정체성은 무엇이며, 또 북한의 실패의 기본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소련으로부터 들여온 스탈린식 사회주의 독재를 계속 개악해 나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소련군대의 점령 하에서 북한에 소련식 사회주의 제도를 마련한 것은 북한 자체의 정치적 역량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제도는 스탈린식 독재를 모방하는 방식으로 소련정부가 파견한 고문들과 4-5백 명이나 되는 소련 태생의 조선 사람들의 협력을 통하여 만들어졌습니다. 아무런 정치적인 준비도 없는 상태에서 스탈린식 사회주의 독재체제가 수립되다 보니 그것이 북한에 많이 남아있던 낡은 봉건잔재와 결부되어 스탈린식 계급독재체제는 점차 왕이 통치하는 통치방식을 닮아 가게 되었습니다.

6.25전쟁을 계기로 해서 스탈린이 사망한 후 김일성이 주체를 세운다는 구호를 내걸고 자체의 독재체제를 수립할 때, 기본은 스탈린식 독재체제를 그대로 모방했지만, 이것이 봉건적인 사상과 결부되며 더욱 악화되고 뒤떨어진 독재로 변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김정일 시기에 와서 그것이 더욱 결정적으로 악화되어 수령절대주의적 군사독재로 전환되었습니다.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가 스탈린식 사회주의 계급독재와 다른 점이 어디에 있는가?

노동계급은 가장 선진적인 계급이기 때문에 전 사회를 대표해서 독재를 실시할 수 있으며, 공산당은 노동계급을 대표하는 선진부대로서 독재를 실시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마르크스주의 창시자들이 인정하는 독재이론입니다.

스탈린주의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서 공산당원 가운데서 가장 탁월한 공산당원인 수령이 공산당을 대표해서 독재를 실시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갔습니다. 이것이 스탈린 시기의 공산진영 각국에서 다 채택한 스탈린식 독재, 말하자면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를 허용하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독재체제였습니다.

그러나 1960년 중반기에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일어나고 김일성이 문화대혁명을 따라가지 않게 되자 그를 수정주의자로 공격하게 되었으며, 이것을 계기로 김일성은 소련에서뿐 아니라 중국의 영향에서도 벗어나 독자적으로 남조선을 해방하고 수령 독재체제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하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김정일은 자기 삼촌과 함께 김일성에 대한 개인숭배를 더욱 강화하기위한 경쟁(본질상 후계자로 되기 위한 경쟁)을 하는 과정에서 “수령이 있고서야 공산당이 있을 수 있고 공산당이 있고서야 노동계급이 있을 수 있다, 노동계급의 영도를 받고서야만 자주적인 인민대중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령은 당과 노동계급과 인민대중의 생명의 원천이고 은인이고 어버이다. 수령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과 효성은 모든 당원들과 인민의 생의 목적이다”는 식으로 독재의 출발점을 거꾸로 만들어 스탈린식 독재를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입니다.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는 부모가 있고서야 자식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라고 주장하는 봉건가부장적 전제주의를 스탈린식 수령 독재(지도자 독재)와 결부시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일성이 후에 스탈린식 독재를 좀더 봉건화하기는 했지만, 초기 북한 사회주의 제도의 기본 틀은 소련 고문과 소련 태생 조선 사람들이 소련을 그대로 모방하여 만든 스탈린식 독재체제였습니다.

이와는 달리 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 독재를 자기가 주장하였을 뿐 아니라 자기의 조직력으로써 이것을 철저히 제도화하고, 무자비한 강제적 방법으로 생활화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인민의 모든 자유와 권리를 희생시키고 수령을 신격화하고 수령의 권한만을 확대하는 데 모든 힘을 집중했습니다.

독재의 가장 큰 기본무기는 군대입니다. 김정일은 군사제일주의를 주장하면서 당의 독재를 군사독재로 전환시켰으며 수령에 대한 존칭도 당의 지도자로서의 지위를 강조하는 “총비서 동지” 대신에 군사 지도자를 표시하는 “장군님”이라고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는 국가주석이라는 호칭 대신에 국방위원회 위원장이라는 표현을 쓰게 하고 마지막에는 선군사상이요 뭐요 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완전히 말살하고 철저한 폭력적 군사독재를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경제와 문화를 다 희생시키고 온 나라를 군사화해서 수령의 군사적 명령에 따라 전국이 하나와 같이 움직이는 군사명령식 통치체계를 수립하였습니다.

95년 이후에 수백만 북한 주민들이 굶어 죽게 되고, 온 나라가 감옥으로 변하게 되고, 사람들이 모든 민주주의적 권리를 빼앗기고, 마지막에는 정신마저 다 빼앗긴 산송장으로 된 것은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적 군사독재가 초래한 결과입니다.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 독재는 마르크스나 엥겔스나 레닌이 생각했던 공산주의 독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계급이라는 집단의 특성은 사라지고 수령의 개인 독재의 면만이 강조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의 수령 독재는 계급적 집단주의인 공산주의 독재와 인연이 없는 것 같이 보이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김정일의 수령 독재가 아무리 개인 독재로 변질되었다 하더라도 역시 바탕은 무산계급의 공산 독재에 있습니다.

마르크스는 처음부터 계급주의자인 것이 아니라 계급적 이기주의와 완전히 인연이 없는 완전히 평등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급진적 민주주의자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공산주의 사상을 참다운 인도주의 또는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말하기도 하였습니다. 계급 이기주의와 인연이 없는 완전한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계급 이기주의가 전혀 없는 무산계급이 자기 마음대로 독재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게 되면서 마르크스는 계급주의자로 전환되었습니다. 무산계급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가장 사심 없는 계급으로서 완전히 평등한 민주주의를 실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르크스는 무산계급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파산된 계급이라고 볼 수 있으며 자주적인 생명을 가지지 못한 노예의 운명에 처한 가장 무력하고 가장 가치 없는 계급이다, 그러나 단결하면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될 수 있다, 무산계급의 생명은 단결이다, 무조건 단결만이 무산계급에게 자주적인 생명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무조건 단결이 무산계급의 생명이라는 사상을 단결을 강화하는 방향에서 계속 압축해 나가면 결국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무조건적인 단결의 사상으로 되며 더 나아가서 수령을 출발점으로 하고, 수령을 생명의 원천으로 하는 수령절대주의 독재사상으로까지 집약되게 됩니다.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는 무산계급과 떨어진 것이 아니라 수령을 생명으로 하는 수령, 당, 계급의 절대적인 통일체를 주장합니다. 다만 당이나 계급이 주인이 아니라 주인은 수령이고 당이나 계급은 수령의 위대성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 점에서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는 초기의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한 무산계급중심의 무조건적 단결을 수령개인을 주체로 하는 계급의 무조건적 단결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계급의 이익을 완전히 배반하였지만 수령과 계급의 무조건적 통일과 단결을 주장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성을 가집니다. 계급 이기주의는 결국 수령의 개인 이기주의로 집약되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의 수령절대주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사상적 뿌리는 결국 공산주의 독재사상과 결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다운 민주주의는 어디까지나 각이한 개인들의 자유와 평등을 인정하는 조건에서 집단의 단결과 협조를 요구하는 것이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무시하고 무조건 단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조건 단결을 요구하는 것은 독재에 기초한 지배와 예속의 강제적 단결입니다. 무조건 단결을 요구하는 공산주의적 계급주의는 처음부터 독재사상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자기들이야말로 가장 못 사는 무산계급의 이익을 옹호하는 가장 진보적인 민주주의자라는 궤변을 일삼고 있습니다.

4. 한국의 독재와 북한의 독재는 천양지차

우리는 독재와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만 합니다. 한국의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긴 독재시대가 있었다고 하면서, 그것을 북한의 독재와 비슷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습니다.

8.15 직후부터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사회의 기초를 잡아놓은 것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였습니다. 그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어떤 수준의 민주주의였는가는 별 문제이고 그것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이지 계급주의적 사회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처음부터 한국의 민주주의가 미국 수준의 발전된 민주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쨌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였던 것은 틀림없습니다.

계급주의적 독재의 전형은 신분제도에 기초한 봉건왕권제도입니다. 사회주의 독재는 계급을 없애야 한다고 하면서 사실상 철저한 계급주의적 독재를 실시했습니다. 계급을 없애기 위해서는 계급적인 독재를 더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이론입니다. 북한과 남한은 8.15 직후부터 정반대되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체제와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갈라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북은 처음부터 사회주의적 독재고 남은 처음부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입니다. 그러나 북의 독재와 남의 민주주의는 제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은 것이 아닙니다. 북은 독재를 계속 강화하고 악화시켰으며, 남은 민주주의를 계속 발전시켰습니다. 남한의 민주주의 발전에서 약간의 우여곡절은 있었다 하여도 민주주의가 계속 발전하였지 사회주의 독재로 퇴보하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해방 후 한국의 역사발전 과정은 민주주의가 낮은 단계로부터 높은 단계로 발전하여온 것이 기본특징이라고 보아야지 일정한 시기에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테두리를 벗어나 사회주의 독재체제로 후퇴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국은 건국 이래 계속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길을 걸었지 사회주의 독재로 후퇴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한국의 소위 독재를 북한의 독재와 비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북에서는 계급 이기주의에 기초한 독재가 본질이고 남에서는 계급주의를 반대하고 전체 인민의 민주주의적 평등이 본질입니다. 북과 남의 통치형식의 면에서 유사성이 있다하여도 근본뿌리가 다르다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현상만 보고 본질이 같은 것 같이 이해하여서는 안 됩니다.

민주주의는 문자 그대로 인민이 사회의 주인, 자기운명의 주인으로서 살 것을 요구하는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맞는 생존, 생활원리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정치생활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제생활과 정신문화생활도 중요하며 따라서 민주주의적 생존의 원리도 정치생활 분야에서 뿐 아니라 경제생활과 정신문화생활 분야에서도 다 같이 필요합니다.

인간은 정권의 주인으로 될 뿐 아니라 물질적 재부와 정신적, 문화적 재부의 주인으로 되어야 합니다. 먹고 살 수 없을 정도로 빈곤한 사람이나 무지몽매하여 미신을 믿는 사람들은 경제생활이나 정신문화생활의 주인으로 될 수 없으며, 이런 사람들이 정치생활의 주인으로 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합니다. 정치생활, 경제생활, 정신문화생활은 서로 밀접히 연관되어 상호의존하고 있지만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먹고사는 것이 가장 절박한 문제로 되고 있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정치생활이나 정신문화생활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발전에서도 정치, 경제, 문화의 3대 생활 분야가 반드시 균형적으로만 발전할 수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일시적인 불균형은 해당 사회의 실정에 따라 불가피한 것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의 일시적 불균형을 민주주의의 독재로의 후퇴로 보아서는 안 되며 더구나 그것을 전혀 성격이 다른 공산독재와 유사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여기서 박정희 대통령 통치시기를 대표적으로 들어 봅시다. 독재라고 하는 것은 그 본질에 있어서, 공권력 즉 인민의 국가 정권을 개인이나 소수 집단의 이기주의에 복종시켜서 이용하는, 그리고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으로써 폭력적인 강제적 방법과 기만의 방법에 의거하는 통치상태를 말합니다. 이기주의는 반사회적이며 부당하기 때문에 역시 부당한 방법에 의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폭력적 강제적 방법과 기만의 방법이 바로 부당한 방법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기 와서 알아본 바에 의하면, 개인 이기주의는 없었습니다. 그는 자본주의적 발전을 지향하였는데, 그것을 실현하는 방법에서 부분적으로 강제적인 방법이 적용되었습니다. 그 뿐 입니다. 정치의 목적에서 북의 독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김정일은 인민생활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수령의 이기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공산독재만 강화하는 데로 지향하였으나 박대통령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발전을 지향하였습니다.

강제적인 방법 자체에서도 본질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김정일 독재체제에서는 한 군(郡) 내에서도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게 되어있음은 물론, 모든 가정에서 자기 친척들이 방문해도 자고 가지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주이전의 자유기 있습니까, 선거의 자유가 있습니까,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토지를 이용할 권리가 있습니까, 언론의 자유가 있습니까, 신앙의 자유가 있습니까. 수령을 찬양하고 수령의 지시에 복종할 자유밖에 없습니다.

북의 공산독재에 비한다면 남한에서 강제라고 하는 것은 자유를 좀 제한한 데 불과합니다. 강제의 목적이 이기주의와 결부되지 않은 경우에는 많은 경우에 그 본질을 독재가 아니라 자유의 제한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소련의 독재도 겪어 봤고 일본제국주의 식민통치도 겪어 봤습니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실제로 생활체험을 하지 못한 것은 히틀러식의 나치통치뿐입니다. 나치 독재 시기의 문건들을 보면 그 때도 상점은 있었으며, 자유로운 상인들의 활동도 있었습니다. 재산권도 있었습니다. 나치는 민족 이기주의, 민족 배타주의였기 때문에 유태인들을 반대하는 데 있어서는 야만적인 독재가 있었지만 독일 민족 자체에 대해서는 김정일과 같은 독재를 실시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더구나 동구라파에서 가장 독재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루마니아와는 대비도 안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의 개인 이기주의적인 독재는 그 유례가 없는 것입니다. 김정일이 철저한 개인 이기주의자라는 것은 많은 예를 들 필요도 없습니다. 두 가지 큰 역사적 사실만 들어도 됩니다.

하나는 해방 직후부터 소련식 독재를 봉건화하고 개인 이기주의화하여 보다 더 이기주의적인 것으로 악화시켜온 결과 남북이 천양지차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옆의 나라인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면서 근 30년 동안 계속 북한도 개혁개방으로 나가자고 권유하였지만 김정일은 그것을 거절하여 왔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과 북한 사이에도 천양지차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도 개혁개방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 역사적 사실을 통해 볼 때 김정일이 얼마나 철저한 개인 이기주의자인가를, 그가 자기의 수령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철저한 이기주의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야말로 철저한 개인 이기주의자이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폭력적인 방법과 기만의 방법으로써 이기주의를 관철시키고 인민의 모든 자유를 말살하고 경제를 파탄시켜 북한을 빌어먹는 나라로 전락시킨 최악의 범죄자입니다.

5.민주주의적 자유는 무조건적인 자유가 아니다.

인민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반인민적인 독재이지만 인민의 생존과 발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이에 배치되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은 인민의 이익에 맞는 것으로서 독재가 아닙니다. 박정희 시대에 강제적인 방법으로 일정한 정도 자유를 제한하였지만 그 결과에 있어서는 기적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민주주의 발전의 길을 열어주었습니다.

후진국가가 선진국가를 따라 갈 때 자유를 일부 제한하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그것은 발전하려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발전을 방해하는 지나친 삶의 욕망을 제한하는 것입니다.

후진국가 인민들이 선진국가 인민들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선진국가 인민들보다 더 절약하고 더 많이 일해야 하며 더 많이 배우고 공부해야 합니다. 역사적으로 따져보면 선진국가 인민들은 후진국가 인민들보다 난관을 이겨내며 발전하기 위한 노력을 더 많이 한 결과 앞서게 되었습니다. 후진국가 인민들이 선진국가 인민들과 같은 생활수준을 요구해서는 안 됩니다. 선진국가에서 5시간 노동제를 실시한다고 하여 후진국가에서 그런 것을 모방하려고 하여서는 안 됩니다. 선진국가보다도 더 절약하고 더 많이 노력함으로써만 앞선 나라들을 따라갈 수가 있습니다.

개인의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가 뒤떨어져 있는 학생이 앞서 나가는 학생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놀러 가자고 해도 놀지 말아야 되고, 맛있는 것을 먹으러 가자고 해도 그것을 거절하고 밤새워 공부를 해야 합니다. 이 역시 발전을 위하여서는 삶의 욕망을 일정한 정도로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일반적으로 정신문화 수준이 낮은 조건에서는 자유를 제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린 아이들이 예방주사를 맞지 않으려고 할 때 부모들이 좀 욕을 하고 때리는 한이 있더라도 예방주사를 맞게 하는 것이 아이를 사랑하는 것으로 됩니다. 물놀이 하다가 빠져 죽을 수도 있는 것을 모르고 자꾸 강에도 들어가고 바다에도 나가려는 것을 못나가게 하는 제한 방법이 조금 거칠고 과하다고 해서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인생의 목적은 생존하고 발전하려는 욕망을 자유롭게 더 잘 실현하는 데 있는 것이지 자유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자유 자체를 인생의 목적으로 여기는 자유지상주의와 자유방임주의는 인간의 자유로운 발전을 저해하고 타락시키는 그릇된 생활태도입니다. 도덕적인, 법적인 제한을 무시하고 본능적 욕망의 자유만 주장하는 자들은 사람을 동물적인 상태로 타락시키는 자들입니다.

자유는 인간의 창조적 노력의 산물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조적 능력, 창조적 역할에 상응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창조적 능력을 발전시키지 않고, 창조적 역할의 수준을 높이지 않고 자유만 요구하는 것은 공짜로 남의 창조물을 뺏으려는 범죄행위와 다름없습니다.

북한 독재자들은 인민이 잘 살 수 있는 길로 나가는 자유를 억제하고 반대로 인민의 자유로운 생활을 방해하는 독재통치의 자유를 옹호합니다. 그들은 북한 주민들이 굶어죽지 않기 위해 놀고 있는 땅을 이용하며 강에서 물고기를 잡는 것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그들은 남한에서 민주주의적 법질서를 어기고 불법시위와 폭력시위를 하는 자유를 인정해야 한다고 떠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인민의 생존과 발전을 위한 자유는 억제하고 수령의 독재를 찬양하는 자유, 즉 인민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찬양하는 자유만 인정합니다.

경제발전에 장애로 되는 파업을 허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농민들이 다 식량생산을 그만두는 파업을 인정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다 굶어죽게 되는데 이런 파업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에서는 김정일 집단의 영향 하에 있는 소위 진보적 단체들이 경찰을 때리고 심지어는 국군장병들을 때리는 폭력행동까지 하고 있는데 이것이 무슨 민주주의적 자유입니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범죄행위입니다. 이런 행동은 민주주의 법에 의거하여 국가반란죄로 처벌받아 마땅합니다. 인민들의 창조적 역할과 협조를 높이는 것을 방해하는 자유, 인민들의 건전한 사상의식을 마비시키는 언론의 자유는 제한해야 합니다.

인민의 창조적 역할을 높이고 인민의 생존과 발전의 수준을 높이기 위한 활동의 자유를 강화하는 문제와 인민의 생존과 발전을 저해하는 자유를 제한하는 문제를 합리적으로 배합해야 합니다. 발전된 인민, 발전된 인간일수록 발전에 지장을 주는 자유를 보다 더 자각적으로 제한합니다. 수양된 국민, 수양된 사람일수록 자유방임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근엄하게 의식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는 법입니다.

6. 한국의 대북민주화 정책

다음은 한국의 대북 민주화 전략이 무엇인가, 북한의 대남 전략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한민국은 민주국가인 만큼 대북정책도 어디까지나 북한을 민주화하는 전략으로 되어야 합니다. 민주화하는 전략에서는 기본이 독재정권을 반대하고 독재에 희생되고 있는 북한 인민들을 도와주고, 각성시키고, 그들과의 통일을 강화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한국의 대북 민주화 전략의 기본으로 되어야 합니다.

민주주의적인 원칙에서 볼 때, 국가와 사회의 주인은 인민입니다. 정권은, 좋은 정권의 경우에도 인민의 위임에 의하여 인민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지 정권 자체가 인민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인민이 인정하는 한에서,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한에서 대통령이 인민을 대표할 자격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주민을 굶어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고, 탈북자를 대량적으로 만들어내고 주민들의 모든 권리를 다 빼앗고, 자기의 노예로 만드는 북한의 독재 통치자는 북한인민을 대표하는 국가 지도자인 것이 아니라 인민을 배반한 반역자입니다. 노예와 노예주를 갈라 보는 것처럼 북한의 김정일 독재집단과 독재의 희생자인 북한 동포들을 엄격히 갈라 보아야 합니다.

인민의 이익을 무시하는 독재자와 인민을 구별하지 않거나 독재집단을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보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자가 아닙니다.

참다운 민주주의자라면 언제나 국가와 사회의 주인을 인민으로 보고 그들을 옹호하고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들을 견결히 반대하여 투쟁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현실적으로 통치권을 장악하고 있는 독재정권을 상대로 하여 대화와 협상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상태에 있는 국가들 사이에서도 대화와 흥정은 있는 법입니다. 적들과도 외교는 해야 합니다. 외교적 접촉이 없이는 적에게 정치적 타격을 줄 수 없습니다. 권투를 아무리 잘해도 접근하지 않고서는 상대방에게 타격을 가할 수 없습니다. 대화와 외교도 적과의 투쟁의 한 형식으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인민을 주인으로 보고 인민의 이익을 옹호하는 원칙적 입장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한국의 일부 정치가들이 주창하고 있는 소위 햇볕정책은 민주주의적 대북전략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7.햇볕정책

햇볕정책은 민주주의의 근본입장에서 탈선한 비민주주의적 대북정책의 전형입니다.

물론 햇볕이 옷을 벗게 한다는 우화는 생활적 진리의 중요한 일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적어도 민주와 반민주와의 관계에서는 정상적인 대응방식이 아닙니다.

만일 어떤 부자가 흉기를 들고 들어온 강도에게 그가 요구하는 것 외에 적지 않은 돈을 주면서 “너는 왜 비정상적인 생활을 하는가, 이 돈을 줄 터이니 이것을 밑천으로 하여 정상적인 노동생활로 돌아가라”고 설교한다면, 백 명의 한 명, 천 명의 한 명 정도는 감동되어 강도의 습성을 버리고 옳은 길로 나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강도는 부자가 선한 마음으로 준 생활보조금을 강도적 범죄행위에 악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 강도 범죄자는 부자의 이러한 선심을 선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정신적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강도행위를 더 쉽게,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그 돈으로 더 무서운 강도수단인 권총 같은 것을 마련하는 데 쓰게 될 것입니다.

김정일 독재집단은 수백만의 북한주민들을 굶겨 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어 죽이고 수십만 탈북자를 만들고 다시 붙잡아 죽이는 극악한 독재집단이고 외화를 위조하고 마약거래와 테러행위를 서슴없이 자행하는 파렴치한 범죄 집단인 만큼 한국의 원조(햇볕)를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데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자기의 독재체제를 더욱 강화하고 남침야망을 실현하는 데 이용하게 되리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중국과 같은 위대한 동맹자가 수십 년 동안 같이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자고 권유하여도 단호하게 거절하는 김정일이 개혁개방보다 훨씬 민주주의 도수가 높은 자유민주주의를 받아들일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김정일이 개혁개방의 의사를 표현한 일도 없고 자기들의 지금까지의 잘못을 시인하고 반성한 일이 전혀 없으며 김정일의 독재체제가 달라진 아무런 증거도 없는데 어째서 김정일과의 공조를 주장하는가? 의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김정일 정권이 어떤 정권입니까?

8.15 해방 이래 소련사회주의 독재 진영 가운데서 가장 중세기적인 색체가 농후한 것으로 평가되었던 북한 정권, 6.25 남침전쟁을 일으키고 남한 동포들을 계급적 원수로서 무자비하게 살해한 김일성 정권을 세습적으로 계승한 정권이 바로 김정일 정권 아닙니까. 김정일 정권이 김일성 정권보다 몇 배나 더 개악된 군사독재 정권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단 말입니까? 지도이념에서나 대내정책, 대외정책, 대남전략에서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고 더욱 개악되었다는 역사적 사실만이 뚜렷한데 최고의 지성인으로 자처하는 햇볕정책 주창자가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알면서 어째서 최악의 민족반역집단과의 민족공조를 주장하며 전통적인 동맹관계에 있는 미국을 멀리하는 기만적인 정책에 매달린단 말입니까? 만일 햇볕정책 주창자가 양심에 거리끼는 점이 없다면 왜 국민들 모르게 막대한 외화를 김정일에게 갖다 줍니까?

그럴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비할 바 없이 우월할 뿐 아니라 미국과의 동맹 하에 군사적으로도 우월합니다. 김정일은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며 일으키면 멸망을 앞당길 뿐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걱정이 되어 민족반역집단이고 국제범죄집단을 찾아가 공조를 약속하고 동맹국인 미국을 멀리 합니까?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 정상적인 한국 사람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햇볕정책의 결과는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과연 햇볕정책 주창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김정일이 독재의 옷을 벗었는가, 김정일 독재체제가 햇볕에 녹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역사적 현실은 이들의 주장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김정일의 독재사상은 선군사상으로 더욱 개악되었고 독재의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핵무장한 더 위험한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지금 북한독재집단은 핵무기를 휘두르며 노골적으로 한국의 좌파반미용공정권을 더욱 강화할 야망을 드러내면서 만일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핵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위협하며 한국의 대선에까지 노골적인 간섭의 손을 뻗치고 있습니다.

햇볕정책의 결과 북한의 독재 옷이 더욱 튼튼해진 반면에 한국에서 민주주의 옷을 벗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대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친남, 친미 인사가 한 명도 늘어난 것 같지 않지만 남한에서는 친북반미 세력이 대대적으로 늘어났습니다. 민주주의 법질서를 파괴하는 불법 파업과 폭력 시위는 더욱 기승을 부리게 되었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무리들의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6.15 공동선언 채택 5주년을 계기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청년학생들의 68% 이상이 만일 북한과 미국이 전쟁을 하게 된다면 북한 편에 서서 미국을 반대하여 싸우겠다고 하였다고 합니다. 미국과의 동맹이 생명선이라고 볼 수 있는 한국 땅에서 일어난 이런 현상이야말로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 변화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햇볕정책의 기만성이 백일하에 들어나고 있는데도 진보와 평화의 탈을 쓴 햇볕정책 주창자들은 득의양양하여 제 세상인양 활보하고 있으며 북한의 인권유린을 규탄하는 세계여론까지 무시하며 탈북자의 비참한 상태에 눈을 감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의 교활 무쌍한 기만행위와 비민주주의적인 행위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는 일제시기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싸운 애국지사들과 인민들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를 반대하여 싸운 애국지사들과 애국적 인민들은 한국의 독립을 팔아넘긴 민족반역자의 전형으로서 을사 5적을 들고 있습니다. 우리도 어린 시절에 부모들로부터 을사 5적에 대한 욕을 수없이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오늘날은 민족해방이 완전히 실현되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까? 민족해방의 과업, 민족통일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했습니까? 물론 민족해방, 민족통일의 과업은 남아 있습니다.

지난날 2천만의 우리 민족이 일제식민지 통치 밑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강토의 절반인 북한에서 공산독재 하에 신음하고 있는 우리 민족은 2천3백만 이상입니다. 이것은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민족적 억압이 계급적 억압으로 변하였을 뿐이지 지금 북한 주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은 일제통치 시기의 그것을 훨씬 능가하고 있습니다.

일제 식민지 통치가 가혹하였지만 오늘날 북한에서와 같이 수백만 주민들이 굶어죽은 일이 없으며, 수십만 주민들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어가는 일, 수십만 탈북자들이 외국에서 헤매다가 다시 붙잡혀와 악형을 당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군대에 끌려가 10년, 13년 동안 수령을 위하여 죽는 훈련을 받는 일도 없었고, 6.25 전쟁과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도 없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의 무자비한 계급적 독재와 억압이 일제의 민족적 독재보다 더 혹독하다는 것은 구태여 많은 예를 들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받은 우리 인민이 일제에 굴복하여 나라를 넘겨준 을사 5적을 증오하는 것은 응당합니다. 그러나 그 때 일제는 우리나라에 비하여 대항하기 어려운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약한 자로서 강한 자에게 굴복하는 것이 필연적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역량관계는 북한 공산독재집단에 비하여 한국이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경제적 면에서는 백배나 위력하다고 볼 수 있고 군사적 면에서도 최대강국인 미국과의 동맹을 감안한다면 비할 바 없이 강합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막대한 외화까지 가져다 주면서 북한의 민족반역집단과 민족공조를 약속하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적 정체성을 팔아 넘겨주려고 하는가, 이 죄가 을사 5적보다 가볍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8. 탈북자 문제

탈북자 문제는 대북정책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집니다. 탈북자라고 하면 북한 공산독재를 반대하여 월남한 모든 사람들을 다 포괄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우선 주로 북한공산체제가 전면적 붕괴 위기에 직면하여 인민들에 대한 탄압이 극심하게 된 시기에 북한독재를 반대하여 탈북하게 된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북한의 전반적 위기는 대체로 1990년경부터 시작되어 1995년-98년경에 절정에 도달하였으며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 탈북은 목숨을 걸고 사선을 넘는 결사적인 행동이었으며 그만큼 김정일 독재체제에 아픈 타격을 주었습니다. 또 그런 만큼 탈북자들은 김정일의 가장 큰 증오의 대상으로 되었습니다. 김정일이 가장 적대시하고 증오하는 탈북자들을 김정일과 공조하는 햇볕정책 주창자들이 달가워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습니다. 심지어 일부 친김정일 집단은 대북민주화를 위하여 활동하는 탈북자들을 살해하겠다고 노골적으로 협박하고 있습니다. 좌경용공분자들의 책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탈북자들이 자유의 조국 대한민국의 품에 안기지 못하고 이국땅에서 헤매다가 희생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출판보도 부문에서는 탈북자가 1만 명을 넘어섰다는 것을 큰 사변인 것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북한 땅에는 수백만이 탈북을 염원하고 시도하고 있으며 압록강과 두만강의 사선을 넘고 탈북한 사람만 하여도 수십만을 헤아릴 터인데 아직 자유조국에 안긴 사람이 1만 명밖에 안 된다는 것은 애족, 애국의 정신의 부족의 표현으로서 민족적 수치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같은 선조들로부터 피를 같이 나눈 동포들이 잘 살게 되었다 하여 사선을 넘고 또 넘어 겨우 찾아온 탈북 동포들을 이렇게 냉담하게 대할 수 있는가’하고 섭섭하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다 김정일 집단의 간악한 이간정책과 기만술책의 결과라는 것을 생각하며 북한에서도 김정일 독재집단을 반대하여 싸울 능력이 없었고 자유의 조국에 와서도 김정일 독재집단의 흉계를 타승할 힘이 없는 자기 자신을 두고 개탄치 않을 수 없습니다.

정치적으로 권위 있는 인사의 말에 의하면 김대중 정권과 노무현 정권이 김정일 독재집단에게 준 원조가 8조원을 넘는다고 합니다. 이 막대한 자금을 탈북자를 받아들이는 데 썼더라면 벌써 대한민국의 품에 안긴 탈북자는 수십만이 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었더라면 최악의 국제범죄 집단인 김정일 독재집단을 규탄하는 전 세계 인권옹호자들의 정의의 목소리와 힘찬 지원 밑에 북한의 수령 독재체제는 무너지고 북한 동포들도 인간 생지옥에서 해방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탈북자 문제는 단순한 인도주의적인 도덕적 문제인 것이 아니라 북한을 민주화하는 데서 거대한 전략적 의의를 가진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만 지난 10년 어간에 뚜렷한 변화는 다 죽어가던 김정일 독재집단은 햇볕을 받아 다시 소생하고 탈북자들이 하늘과 같이 믿고 천신만고 끝에 찾아온 자유의 조국 대한민국의 민주주의 진지는 천만 뜻밖에도 좌파 용공세력이 판을 치는 심각한 위험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탈북자들은 북한을 민주화하기 전에 먼저 우리의 희망이고 목적인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좌경용공반미 세력을 극복하기 위하여 한 목숨 바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탈북자들이 뒤떨어진 북한 사회에서 물든 악습을 버리지 못하여 성실하지 못하고 열심히 일하지 않는 등 여러 가지 결함을 발로시키고 있기 때문에 한국 사회에서 호감과 동정을 받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점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탈북자들의 기본특징이겠습니까? 우리는 가혹한 독재 통치 하에서 민주주의 사회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생을 체험하였고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슬기롭고 용감하게 싸웠다는 데, 즉 독재를 증오하고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열의가 비상히 높다는 데 탈북자들의 본질적 특징이 있다고 봅니다. 탈북자들은 보통 생활환경에서는 체득할 수 없는 귀중한 품성을 체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탈북자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결사적으로 건널 때의 결심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충고합니다. 그들이 한국에 와서 발로시키고 있는 결함을 처음부터 가지고 온 것이 아닙니다. 만일 그들이 탈북할 때의 그 비장한 결심을 가지고 한국의 좋은 생활환경을 이용하여 나갔더라면 모든 생활분야에서 성공하였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 특색을 살려 강한 투지를 가지고 간고분투 하는 대신 한국 동포들의 자선과 방조에 의존하여 잘 사는 사람들을 모방하고 따라가려고 하는 데서 출로를 찾고 있습니다. 잘못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탈북자들이야말로 북한 민주화 투쟁에 앞장설 수 있고 한국의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데서 헌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소질을 지닌 귀중하기 그지없는 애국적 혁명인재들입니다. 이런 소질을 이끌어주는 자체의 지도적 조직이 필요합니다. 탈북자들의 조직은 자선과 친목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애국적이며 민주주의적인 투사들의 집단으로 의식화하고 조직화하기 위한 전투조직으로 되어야 합니다. 현 시기 탈북자들에 대한 자선적인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보다도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은 애국애족의 이념에 기초한 혁명적, 동지적 원조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처음부터 애국적이며 전투적인 탈북자들의 조직을 만들려고 하였지만 자신의 무능과 혁명성 부족으로 10년 동안 아무런 성과도 이룩하지 못하였습니다. 죄송하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탈북자들 속에서 복잡하고 어려운 투쟁 속에서 단련된 유능한 젊은 지도일꾼들이 자라나 별처럼 빛을 뿌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이 힘을 합쳐 빨리 탈북자들의 애국적이며 혁명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하며 한국의 뜻있는 애국적 민주단체들이 이 사업에 동지적인 지지성원을 보내줄 것을 크게 기대하고 있습니다.

9. 북한의 대남전략

북한의 대남전략은 한 마디로 말하여 남한까지 수령독재체제를 확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북한의 수령의 유일한 희망이며 이것을 실현하기 위하여 전력하며 이에 배치되는 것은 모두 다 무자비하게 배격합니다. 이것이 북한의 국내정책과 대외정책, 대남정책을 다 일관하고 있습니다.

원래 대외정책은 대내정책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직접 통치하고 있는 인민들을 수백만씩 굶겨죽이고 온 나라를 감옥으로 만들어 죽이는 북한 독재자들이 남한 인민들에게는 민주주의적으로 대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그들은 남한의 자본주의 체제를 적대시하고 남한을 적지, 적후라고 부르며 남한 동포들을 착취계급의 집단이라고 하며 무자비하게 타도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까지 수령의 독재를 확대하여 수령의 유일적인 독재 하에 전국을 통일시키는 것을 변함없는 대남전략으로 견지하고 있지만 그것을 실현하는 방도는 정세의 변화에 따라 조금씩 변화되고 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산계급에게는 유산계급보다 우월한 두 가지 특징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첫째는 무조건 단결하는 것입니다. 유산계급은 자기의 재산을 믿고 그것을 옹호하려 하다 보니 단결이 잘 되지 않습니다. 무산계급은 단결만이 살 길이기 때문에 무조건 단결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육체적 힘에 의거한 폭력의 우월성입니다. 유산계급은 수적으로 적기 때문에 육체적 힘이 얼마 안 될 뿐 아니라 자기 몸을 아끼다 보니 자기 몸을 희생시켜 육체적 힘으로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와는 달리 무산계급은 다수이기 때문에 육체적 힘이 크고 또 그것을 밑천으로 삼아 몸을 아끼지 않고 싸울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산계급은 유산계급과의 투쟁에서 육체적 폭력에 의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데로부터 무산계급에게 고유한 기본특징은 무조건적인 단결과 자기희생적 폭력주의라는 것입니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한까지 자기들의 통치권을 확대하는 데서 폭력 제일주의에 의거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상․정치적 와해전술을 보조적 방법으로 간주하였습니다. 즉 전쟁에 의한 통일을 1차적 방법으로 인정하고 내부와해 전략을 보조적 대남전략으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냉전의 결과 소련 사회주의 체제가 붕괴되고 중국이 개혁개방으로 나가면서 전쟁을 반대하게 되자 북한 통치자들은 전쟁에 의거하는 대남전략에만 매달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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