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변화와 대응원칙 (1)
- 관리자
- 2010-06-07 15:3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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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변화와 대응원칙 - 황장엽.2001.3 -
1. 북한의 1995년-1998년 위기와 대(對)북한전략
1) 북한의 위기의 심각성
1995년에 이르러 북한은 최악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경제전반에서 부문간의 연계와 균형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경제적 파국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서는 보통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북한은 1년 계획도 세우지 못하여 국가계획위원회가 매달 기업소들에 생산지령을 내려보내는 형편이었다.
북한의 전력생산 능력은 약 600만㎾라고 하지만 1995년-1996년에는 연간 약 190만㎾밖에 생산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도중손실 38만㎾와 발전소 자체소비 7만㎾를 제하고 나면 145만㎾가 남는다. 북한에는 24시간 단 1분간도 전기공급이 중단되어서는 안되는 특수대상이 있는데 이러한 특수대상이 사용하는 전력이 80만㎾이다. 이것을 제하고 나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은 65만㎾밖에 되지 않는다.
북한에는 1급 공장으로부터 7급 공장에 이르기까지 대소규모의 공장이 모두 약 1만5천 개 가량 된다. 이러한 공장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도시와 농촌의 모든 대상들에 전력을 충분히 공급하려면 1.000만㎾가 필요하다. 200만㎾의 전력으로는 10%의 공장이나 겨우 돌리고 나머지는 농촌경리에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 통치자들은 생산설비에 대한 점검보수와 갱신에는 응당한 관심을 돌리지 않고 그저 만부하로 돌릴 것만 요구하다보니 생산설비들이 다 노후하게 되어 제 능력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기술수준이 낮다보니 단위당 전력소비량이 크다.
당면하여 전력생산을 늘이기 위해서는 석탄생산을 늘여야 하겠는데 탄광들의 생산조건이 말이 아니다. 1997년 1월에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우리는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요한 채탄기지인 덕천 탄광연합기업소를 찾아가 석탄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사업을 도와주었다.
이 탄광은 수도 평양에서 가깝고 이름난 탄광으로서 당적으로 중요시하고 있는 대상 이였으나 생산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안전등을 가지지 못한 탄부가 절반 이상이었으며 탄을 운반하는데 쓰는 벨트콘베아는 300M 가량 다 낡아빠져 쓸 수 없게 되었다. 전력이 약하기 때문에 탄광갱내에서 석탄을 실은 탄차를 갱 밖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동발을 대주지 못하여 낙반사고가 빈번했다. 화물자동차는 약 300대 가량 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타이어가 없어서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석탄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으며 석탄이 생산되지 않다 보니 화력발전소들을 돌릴 수 없으며 석탄을 쓰는 모든 산업시설들에서 생산을 할 수 없었다.
강철 생산능력은 월간 20만 톤 수준이라고 하지만 1개월에 평균 1만 톤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1955년도 수준이라고 한다.
1996년 여름에 강철생산 정형이 궁금하여 국가계획위원장을 만난 기회에 강철생산정형을 물어보았더니 그 달에는 생산이 잘되어 1만 8천 톤을 생산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 5천 톤은 외국에 팔아야 다음 달에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할 수 있는데 인민군대에서 큰 별을 단 사람들(장성)이 와서 무조건 다 내라고 하여 다 주고 나니 다음달 강철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막막하다고 걱정하였다.
그해 개천에 있는 원유정제공장에서 생산된 나프타가 저장탱크를 넘어나 유실되고 있다는 보고가 김정일에게 올라갔다. 귀중한 나프타가 유실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노한 김정일은 중앙당 경제담당비서를 비서국에서 비판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 비서들이 모여 경제담당비서를 무책임하다고 비판하자 그는 『사정은 내가 더 잘 알고 무진 애를 쓰고 있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프타를 운반하는 탱크 차가 다 낡아서 기름이 샌다. 탱크 차를 수리하자면 강판이 있어야 하겠는데 강판은 생산하는 대로 군대가 가져가다 보니 강판을 구할 재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996년 겨울에는 수도 평양시에 있는 화력발전소를 돌리지 못하여 중앙당 청사에서까지 스팀이 돌지 않아 국제부의 외국손님 면담실에 있는 어항의 금붕어가 다 얼어죽었다.
공업생산이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자 비료를 비롯한 영농물자와 농기계 부속품 같은 것을 농촌에 공급할 수 없게 되어 농업생산이 급격히 감퇴되었으며 1990년에 들어가서는 매년 식량을 50만 톤∼100만 톤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94년 12월에도 중앙당 농업담당비서와 도당책임비서들 사이에서 1995년도 식량이 100만 톤 이상 부족하기 때문에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문제가 심각히 논의되었다. 중앙당 농업비서의 주장은 각 도당 책임비서가 제출한 양곡생산보고에 기초하여 식량계획을 짰는데 각도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면 중앙당에 허위보고를 한 도당책임비서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도당 책임비서들은 군당에서 올라온 보고가 잘못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식량이 모자라는 만큼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 김정일은 온 나라를 눈물의 바다로 만들어 놓고 이러한 추모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데만 전력을 다하였으며 현실적인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김일성이 생존시에는 그가 최고 고문격으로 경제부문사업을 지도하여 왔지만 그가 사망하자 경제간부들이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경제문제가 제기되어도 하소연할 중심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994년 말에 1995년도 식량문제를 놓고 경제담당 간부들이 서로 책임을 회피하면서 똑똑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1995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995년 여름에 평안북도에서 큰 홍수로 인하여 많은 수재민들이 나왔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식량예비를 깡그리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 통치자들은 속수무책으로 1995년의 최악의 식량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군수공장 노동자는 약 50만 명이 있었는데 가족까지 합치면 약 200만 명 가량 되었다. 군수공장은 행정적으로는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제2경제위원회가 관리하지만 당적으로는 중앙당 군수공업부가 직접 장악지도하는 중요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일반 공장들에 비하여 생산조건도 월등하고 대우도 좋았다. 그러나 1995년에는 군수공장에도 9개월 이상 식량배급이 중단되어 공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출근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집에 누워있었으며 아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중앙당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중앙당 책임일군들 협의회에서 보고한데 의하면 전국 군수공장들에서 기술기능이 뛰어난 공장의 보배로 불리 워 오던 고급기술기능공만 하여도 2.000여명이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중앙당 군수공업부에서는 기아사태가 엄중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직접 간부들을 각 공장들에 파견하여 고급기술기능공만이라도 구원해보려고 긴급대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기아로 인하여 퉁퉁 부은 것을 일단 가라앉게 하였으나 다시 붓기 시작하게 되자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어 가장 아끼던 고급기술기능공마저 2.000여명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군수공장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일반 공장이나 비생산기관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형편이 못된다.
1996년 가을에 중앙당 비서국에서는 식량사정이 걱정되어 그해 양곡생산 정형을 검토해 보았더니 평년작의 절반도 안되는 210만 톤(겉곡으로)밖에 생산되지 못하였다. 이것 가지고서는 군량미도 안될 것이라고 모두 걱정하였다. 사실 그해 12월에는 군량미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어 농민들이 자기 식량으로 남겨두었던 양곡가운데서 3개월 분을 무조건 군대에 바치는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들 중앙당 비서들도 시장에 나가 쌀을 200㎏씩 사서 군대에 헌납하였다.
우리는 평양시민들이 겪고 있는 심한 식량난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보고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고 있다는 것을 알고 너무 걱정이 되어 식량사정과 아사자 통계를 직접 장악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중앙당 조직지도부 책임간부와 만나 주민들의 아사상태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조직부 책임간부의 말에 의하면 1995년에는 당원 5만 명을 포함하여 50만 명이 아사하였으며 1996년에는 11월 중순까지 벌써 아사자수가 100만 명에 도달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1996년에 양곡생산이 210만 톤밖에 안되기 때문에 긴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고 이대로 나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식량배급으로 살아나가는 북한제도에서 식량배급까지 중단되다보니 사회적 혼란 상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1. 북한의 1995년-1998년 위기와 대(對)북한전략
1) 북한의 위기의 심각성
1995년에 이르러 북한은 최악의 경제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경제전반에서 부문간의 연계와 균형이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경제적 파국이 전국을 휩쓸게 되었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에서는 보통 5개년 계획을 세우고 있지만 북한은 1년 계획도 세우지 못하여 국가계획위원회가 매달 기업소들에 생산지령을 내려보내는 형편이었다.
북한의 전력생산 능력은 약 600만㎾라고 하지만 1995년-1996년에는 연간 약 190만㎾밖에 생산되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도중손실 38만㎾와 발전소 자체소비 7만㎾를 제하고 나면 145만㎾가 남는다. 북한에는 24시간 단 1분간도 전기공급이 중단되어서는 안되는 특수대상이 있는데 이러한 특수대상이 사용하는 전력이 80만㎾이다. 이것을 제하고 나면 일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전력은 65만㎾밖에 되지 않는다.
북한에는 1급 공장으로부터 7급 공장에 이르기까지 대소규모의 공장이 모두 약 1만5천 개 가량 된다. 이러한 공장들을 비롯하여 전국의 도시와 농촌의 모든 대상들에 전력을 충분히 공급하려면 1.000만㎾가 필요하다. 200만㎾의 전력으로는 10%의 공장이나 겨우 돌리고 나머지는 농촌경리에 돌리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 통치자들은 생산설비에 대한 점검보수와 갱신에는 응당한 관심을 돌리지 않고 그저 만부하로 돌릴 것만 요구하다보니 생산설비들이 다 노후하게 되어 제 능력을 내지 못하고 있으며 기술수준이 낮다보니 단위당 전력소비량이 크다.
당면하여 전력생산을 늘이기 위해서는 석탄생산을 늘여야 하겠는데 탄광들의 생산조건이 말이 아니다. 1997년 1월에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시를 받고 우리는 평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중요한 채탄기지인 덕천 탄광연합기업소를 찾아가 석탄 생산을 정상화하기 위한 사업을 도와주었다.
이 탄광은 수도 평양에서 가깝고 이름난 탄광으로서 당적으로 중요시하고 있는 대상 이였으나 생산 조건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안전등을 가지지 못한 탄부가 절반 이상이었으며 탄을 운반하는데 쓰는 벨트콘베아는 300M 가량 다 낡아빠져 쓸 수 없게 되었다. 전력이 약하기 때문에 탄광갱내에서 석탄을 실은 탄차를 갱 밖으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형편이었으며 동발을 대주지 못하여 낙반사고가 빈번했다. 화물자동차는 약 300대 가량 있었으나 그 대부분이 타이어가 없어서 가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석탄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으며 석탄이 생산되지 않다 보니 화력발전소들을 돌릴 수 없으며 석탄을 쓰는 모든 산업시설들에서 생산을 할 수 없었다.
강철 생산능력은 월간 20만 톤 수준이라고 하지만 1개월에 평균 1만 톤 수준으로 떨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1955년도 수준이라고 한다.
1996년 여름에 강철생산 정형이 궁금하여 국가계획위원장을 만난 기회에 강철생산정형을 물어보았더니 그 달에는 생산이 잘되어 1만 8천 톤을 생산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가운데서 5천 톤은 외국에 팔아야 다음 달에 필요한 원자재를 수입할 수 있는데 인민군대에서 큰 별을 단 사람들(장성)이 와서 무조건 다 내라고 하여 다 주고 나니 다음달 강철 생산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막막하다고 걱정하였다.
그해 개천에 있는 원유정제공장에서 생산된 나프타가 저장탱크를 넘어나 유실되고 있다는 보고가 김정일에게 올라갔다. 귀중한 나프타가 유실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 크게 노한 김정일은 중앙당 경제담당비서를 비서국에서 비판하라고 지시하였다. 우리 비서들이 모여 경제담당비서를 무책임하다고 비판하자 그는 『사정은 내가 더 잘 알고 무진 애를 쓰고 있으나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 나프타를 운반하는 탱크 차가 다 낡아서 기름이 샌다. 탱크 차를 수리하자면 강판이 있어야 하겠는데 강판은 생산하는 대로 군대가 가져가다 보니 강판을 구할 재간이 없다』고 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1996년 겨울에는 수도 평양시에 있는 화력발전소를 돌리지 못하여 중앙당 청사에서까지 스팀이 돌지 않아 국제부의 외국손님 면담실에 있는 어항의 금붕어가 다 얼어죽었다.
공업생산이 전반적으로 마비상태에 빠지게 되자 비료를 비롯한 영농물자와 농기계 부속품 같은 것을 농촌에 공급할 수 없게 되어 농업생산이 급격히 감퇴되었으며 1990년에 들어가서는 매년 식량을 50만 톤∼100만 톤 수입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94년 12월에도 중앙당 농업담당비서와 도당책임비서들 사이에서 1995년도 식량이 100만 톤 이상 부족하기 때문에 시급히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문제가 심각히 논의되었다. 중앙당 농업비서의 주장은 각 도당 책임비서가 제출한 양곡생산보고에 기초하여 식량계획을 짰는데 각도에서 식량이 부족하다면 중앙당에 허위보고를 한 도당책임비서들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각 도당 책임비서들은 군당에서 올라온 보고가 잘못되었는데 현실적으로 식량이 모자라는 만큼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1994년 7월에 김일성이 사망한 다음 김정일은 온 나라를 눈물의 바다로 만들어 놓고 이러한 추모분위기를 계속 유지하는 데만 전력을 다하였으며 현실적인 경제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을 돌리지 않았다.
김일성이 생존시에는 그가 최고 고문격으로 경제부문사업을 지도하여 왔지만 그가 사망하자 경제간부들이 국가적으로 해결해야 할 중요한 경제문제가 제기되어도 하소연할 중심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하여 1994년 말에 1995년도 식량문제를 놓고 경제담당 간부들이 서로 책임을 회피하면서 똑똑한 대책을 세우지 못한 채 1995년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1995년 여름에 평안북도에서 큰 홍수로 인하여 많은 수재민들이 나왔으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식량예비를 깡그리 동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북한 통치자들은 속수무책으로 1995년의 최악의 식량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군수공장 노동자는 약 50만 명이 있었는데 가족까지 합치면 약 200만 명 가량 되었다. 군수공장은 행정적으로는 정부로부터 독립되어 있는 제2경제위원회가 관리하지만 당적으로는 중앙당 군수공업부가 직접 장악지도하는 중요한 대상이다. 그러므로 일반 공장들에 비하여 생산조건도 월등하고 대우도 좋았다. 그러나 1995년에는 군수공장에도 9개월 이상 식량배급이 중단되어 공장 노동자들이 대부분 출근하지 못하고 가족들과 함께 집에 누워있었으며 아사자가 속출하게 되었다.
중앙당 군수공업 담당비서가 중앙당 책임일군들 협의회에서 보고한데 의하면 전국 군수공장들에서 기술기능이 뛰어난 공장의 보배로 불리 워 오던 고급기술기능공만 하여도 2.000여명이 굶어죽었다는 것이다.
중앙당 군수공업부에서는 기아사태가 엄중하다는 것을 고려하여 직접 간부들을 각 공장들에 파견하여 고급기술기능공만이라도 구원해보려고 긴급대책을 세웠다. 그리하여 기아로 인하여 퉁퉁 부은 것을 일단 가라앉게 하였으나 다시 붓기 시작하게 되자 어떻게 할 수가 없게 되어 가장 아끼던 고급기술기능공마저 2.000여명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군수공장이 이 지경이었으니 다른 일반 공장이나 비생산기관들의 참상은 이루 말할 형편이 못된다.
1996년 가을에 중앙당 비서국에서는 식량사정이 걱정되어 그해 양곡생산 정형을 검토해 보았더니 평년작의 절반도 안되는 210만 톤(겉곡으로)밖에 생산되지 못하였다. 이것 가지고서는 군량미도 안될 것이라고 모두 걱정하였다. 사실 그해 12월에는 군량미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어 농민들이 자기 식량으로 남겨두었던 양곡가운데서 3개월 분을 무조건 군대에 바치는 소동이 벌어졌던 것이다. 우리들 중앙당 비서들도 시장에 나가 쌀을 200㎏씩 사서 군대에 헌납하였다.
우리는 평양시민들이 겪고 있는 심한 식량난과 지방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보고들을 통하여 사람들이 무더기로 굶어죽고 있다는 것을 알고 너무 걱정이 되어 식량사정과 아사자 통계를 직접 장악하여 김정일에게 보고하는 중앙당 조직지도부 책임간부와 만나 주민들의 아사상태에 대하여 물어보았다.
조직부 책임간부의 말에 의하면 1995년에는 당원 5만 명을 포함하여 50만 명이 아사하였으며 1996년에는 11월 중순까지 벌써 아사자수가 100만 명에 도달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는 1996년에 양곡생산이 210만 톤밖에 안되기 때문에 긴급히 대책을 세우지 않고 이대로 나간다면 1997년에는 200만 명이 굶어죽을 것이라고 걱정하였다.
식량배급으로 살아나가는 북한제도에서 식량배급까지 중단되다보니 사회적 혼란 상태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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