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인권문제(5)
  • 관리자
  • 2010-06-07 15:2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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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재자로서의 김일성과 김정일

수령의 개인독재 체제에서는 수령개인의 자질과 성격도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나는 1958년 1월초부터 1965년 4월까지는 김일성의 이론서기로 일하였고 그 후에는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으로서 그의 자녀들의 교육을 책임진 관계로 그와 자주 접촉하고 연계를 가졌다. 그리고 1972년 부터는 최고인민회의 의장으로서, 그리고 주체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는 문제 때문에 그와 자주 만나 사업을 같이 하였다. 1979년 부터는 당중앙위원회의 주체사상 담당비서, 과학교육 담당비서, 국제사업 담당비서로서 김일성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내가 그의 이론서기를 할 때 받았던 인상은 매우 좋았다. 김일성은 근면하고 지혜롭고 위신 있게 행동하였다. 매주 한번씩 거진 빠짐없이 정치국 회의를 자기 집무실 옆에 있는 소회의실에서 진행하였는데 우리 서기들은 꼭 참가시켰다. 김일성은 먼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가 설명하였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말하였다. 그의 특징은 제기된 문제에 대하여 다른 사람들이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놓지 않도록 쉬운 말로 철저히 해설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이 다 정당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기 의견을 충분히 말한 다음 참가한 간부들의 의견을 물어보았다. 여기서도 부자연스러운 점이 없었다. 그는 제기된 의견에 대하여 모두 정확하게 해명하여 주었다. 나는 이 정치국 회의에 참가하여 김일성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는 우리 서기들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자기가 공장이나 농촌을 현지지도 할 때에는 꼭 따라다니라고 하였다. 그러나 우리들이 해야 할 사업이 많기 때문에 항상 따라다니지는 못하였다. 어떤 때에는 그가 먼저 나가 현지지도를 하다가 우리를 부를 때도 있었다. 그는 공장과 농촌에 대한 현지지도 때에도 구체적으로 잘하였다. 노동자, 농민들의 의견을 충분히 들었으며 공장과 농촌지도 일군들에게 조금도 압박감을 주지 않고 지도하였다.

몇가지 실례를 들어보기로 하자.

1958년에 김일성은 지방에 있는 자체의 유휴자재와 원료를 이용하여 지방에서 생활필수품을 만드는 작은 공장들을 대대적으로 건설할 데 대한 방침을 내놓으면서 여성들이 직장에 나와 일할 데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하였다.

이 시기에 공장 기업소들과 기관책임자들의 회의가 있었다. 김일성은 지배인들에게 가정부인들을 직장에 진출시킬 데 대한 당의 방침을 설명해 주고 각 직장에서 여성들을 대담하게 채용하라고 하였다. 그러자 많은 지배인들이 반대의견을 제기하였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여성들을 채용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노동력이 부족하여도 남자들끼리만 일하는 편이 낫다는 것이었다. 어느 지배인은 여성을 채용하는 것은 국가의 손해가 됩니다. 그 이유로 첫째는 여성들에게 선전산후에 유급휴가를 주어야 하며(처음에는 90일이었으나 그 후 150일로 늘어났다.), 둘째는 어린아이가 조금 감기만 걸려도 직장에 나오지 않으며, 셋째는 말만 많이 하고 일은 안하며 특히 뒤에서 간부들의 흉을 보는 것을 일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김일성은 그 지배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다음과 같이 결론지었다.

우리가 여성들을 직장에 내보내자는 것은 단순히 노동력이 부족 되어서가 아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집에서 부엌일만 하고 있으면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진다. 사회생활에서 뒤떨어지면 자연히 남편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이해하지 못하여 방해하게 된다. 사실상 부엌일만 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국가와 사회의 주인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여성들을 부엌에서 해방하고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제부터 여성들이 아이들을 기르는데 걱정 없이 마음놓고 직장에 나갈 수 있도록 모든 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를 건설해 주도록 하여야 한다. 그 후 도시와 농촌 곳곳에 탁아소, 유치원, 진료소가 운영되었고 여성들이 대대적으로 사회에 진출하게 되었다.

1959년이었다. 그 해에는 공업은 발전되었지만 농사가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양식을 사오는 문제가 정치국 회의에서 논의되었다. 쌀은 비싸기 때문에 잡곡을 사와야 하겠는데 잡곡 가운데서도 무슨 잡곡이 좋겠는가 하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논의되는 것을 한참 듣고 있던 김일성은 나는 여러 가지 잡곡을 다 먹어보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것이 고량(수수)같이 생각되었다. 고량을 사오는 것이 어떤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면서 모든 어려운 생활을 다 겪어 본 분이 다르구나하고 속으로 감탄하였다.

어느해 평안북도 창성군의 농촌을 현지지도 했을 때의 일이다. 리(理)당 비서가 김일성을 안내하였는데 리당비서의 집이 지주집을 몰수한 것으로서 좋은 기와집이었다. 리당비서는 해방 전에 그 지주집에서 머슴을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은 집을 돌아보고 부엌에 들어가 살림형편도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옆집에도 들렀다. 그 옆집은 작은 집이었는데 깨끗이 꾸려져 있었다. 부엌에 들어가 보니 가마 안에 점심 밥그릇을 넣어 두었기 때문에 밥이 식지 않고 따끈따끈 하였다. 또 장 단지와 채소절임단지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김일성은 이 집주인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하고 물었다. 리당비서는 그는 해방 전부터 목수일(목공)을 해온 사람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의 월수입은 리당비서의 절반도 안되었다. 그러나 살림은 오히려 훨씬 문화적이었다. 김일성은 리당비서에게 이 목수집 같이 집을 잘 거두고 문화적으로 규모 있게 살라고 충고를 주었다. 그리고 수행원들에게 수입이 많다고 반드시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문화수준이 문제이다. 해방 전 목수는 해방 전 머슴보다 문화수준이 높기 때문에 수입은 리당비서보다 절반밖에 안되지만 살림은 오히려 리당비서보다 낫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일성의 높은 식견에 감탄하였다.

김일성은 손님들을 접견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정치대표단들 뿐 아니라 학자대표단, 예술인 등 외국인대표단을 많이 만났다. 김일성은 대중집회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간부들과 협의회도 많이 하였고 협의회 참가자들의 의견도 열심히 들었다. 정적(政敵)에 대해서는 무자비하였으나 동료들과 아랫사람들에 대해서는 관대하였다. 그는 공식적인 회합 이외에 측근자들만 모아놓고 술파티같은 것을 조직하는 일이 없었다.

김일성은 아랫사람들의 의견을 많이 참작하여 정책을 결정하였으며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에는 반드시 간부들을 모아놓고 자기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서기들이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아래 당 조직에 내려보냈다. 아래기관에 지시할 때에는 직접 책임간부들을 부르든가 전화로 하였다. 자기가 방향을 준 다음에는 구체적인 문제들을 보좌하는 간부들이 자체로 결심하여 처리하도록 맡겨두었다.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많이 하였으며 현지실정에서 많은 것을 착안하였다. 또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실천에 옮길 때도 한 단위에서 먼저 실험 삼아 해보고 경험을 쌓은 다음 그것을 더욱 일반화하였다. 남의 것을 기계적으로 모방하지 않고 자기 나라의 구체적 실정에 맞게 해나가도록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큰 나라들의 나쁜 영향을 거진 받지 않았다.

이는 내가 1958년부터 1965년 초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를 할 때에 느낀 인상이다. 다만 내가 그의 작풍(作風)에서 부정적이라고 느낀 점은 <자기 친척들을 지나치게 신임하고 그들의 말을 잘 듣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김일성이 점점 교만하게 되고 일을 잘못 처리하게 된 것은 1974년에 당시 제2인자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던 자기 동생(김영주)을 내쫓고 자기 아들인 김정일을 후계자로 정한 다음부터라고 생각된다.

1945년부터 1974년까지는 김일성의 독재정권이 수립되고 공고화되는 <김일성시대>였다.

1974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일성·김정일의 2중정권시기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김정일은 제2인자가 아니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와는 지위가 달랐다. 물론 형식상으로는 김정일이 제2인자의 자리에 있었으나 그는 처음부터 실권자였다.

그가 실권을 장악하면서 자기의 정치강령으로 내놓은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원칙>에는 수령(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는 후계자(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에 의하여서만 담보된다.는 것이 명기되었다. 이는 김정일의 영도적 지위를 법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일적 영도>와 <유일적 지도체제>라고 표현은 좀 달리 하였지만 진의도는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는 김정일의 유일적 영도를 통하여서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어떠한 사소한 보고도 김일성에게 올라가지 못하게 되었고 김일성의 지시는 김정일을 통하지 않고는 아래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실현될 수도 없게 되었다.

첫 시기에는 김일성이 자기의 권력을 김정일에게 자진하여 넘겨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이 모든 부분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자 김일성도 김정일을 어떻게 할 수 없게 되었으며 1990년대에 들어서서는 김일성은 김정일의 <고문격>이 되고 말았다. 물론 김일성과 김정일은 부자간이고, 또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권력을 넘겨주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고 김정일은 김일성의 권위를 이용하는데 이해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양자간의 모순이 표면화 되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1974년부터 1985년경까지는 <김일성·김정일> 2중 정권시대였다고 볼 수 있고 1985년부터 1994년까지는 <김정일·김일성>의 2중 정권시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1985년경부터 김정일은 사실상 모든 부문의 사업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대외적으로도 자기의 부하들을 통하여 자신이 최고지도자라는 사실을 선전하도록 하였다. 특히 1991년 그가 인민군 최고사령관이 된 다음부터는 정식으로 최고 권력의 승계가 끝났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군 최고사령관의 명령에는 전당과 전국가가 무조건 복종하기로 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다보니 김일성이 오히려 김정일의 눈치를 보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1992년 김정일의 생일 50돐에 즈음하여 김일성은 동서고금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내용으로 부왕이 왕세자를 칭송하는 송시를 써 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이 모든 것을 규정한다는 정치논리의 냉혹성을 보여 주는 산 실례로 된다.

김일성은 자기 아들에게 정권을 넘겨줌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하였으며 자기 아들의 권력앞에 아부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마지막 과오를 범하고 말았다. 만일 김일성이 1960년대 말까지만 활동하고 한 생을 끝마쳤더라면 가짜 김일성이건, 진짜 김일성이건 관계없이 항일무장투쟁의 역사도 살아났을 것이며 해방후 북한의 지도자로서의 역사도 살아남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권을 자기 아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김정일과 더불어 수치스러운 길을 걷게 되었으며 그의 한 생의 전반부까지도 다 망쳐 버리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김일성의 한 생을 그르치게 한 데에는 김일성 자신보다도 김정일의 책임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애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의 하나는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한 것이다. 이 문제에서 두 사람 가운데서 누가 더 큰 책임이 있겠는가?

일반적으로는 김일성에게 더 큰 책임이 있는 것처럼 보고 있지만 이 문제에 있어서도 절반 이상의 책임이 김정일에게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르크스즈의자들은 스스로를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부족점을 극복한 가장 철저한 민주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는 만큼 비록 계급적 독재는 불가피한 것으로 인정하여도 정권을 세습적으로 승계 한다는 것은 도저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문제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일반적인 상식을 깨고 북한에서는 현실적으로 정권의 세습적 승계가 실현되었다. 이 점에서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나 김일성은 소련 땅에서 군정훈련도 받았고 마르크스-레닌주의 기본에 대한 상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정권을 세습적으로 물려주는 문제를 처음부터 생각한 것 같지는 않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에게도 자기 자식이 더 귀여운 것만은 어떻게 할 수 없거든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김일성은 공산주의자로서 자기 자식이나 남의 자식이나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대하려는 민주주의적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그의 개인 독재기간이 장기화되고 정치적 기반이 강화되면서 그는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자만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권을 자기 개인의 소유물과 같이 여기는 사상이 자라나게 되었다.

김정일은 절대적인 독재자의 가정에서 그 어떤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1949년에 생모인 김정숙이 사망한 후에는 그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고 자라났다. 김일성의 후처(김성애)는 김일성에게 복무하던 여성이었으므로 처음부터 김정일에 대하여 계모의 입장에서 대한 것이 아니라 받들어 주는 입장에서 대하였다. 또 김정일 스스로 아버지에게 자기는 계모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않고 <아주미>로 부르겠다고 제기하여 승인을 받았다고 한다.

김정일은 어릴 때부터 왕자와 같이 행세하였으며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에서 늘 자기를 최고 권력자인 김일성의 대리인으로서 제멋대로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그는 커가면서 자기 밸대로만 행동하는 품성이 더욱 자라나게 되었으며 이것이 아버지의 권력을 자기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1959년에 내가 김일성을 따라 모스크바에 갔을 때 김정일도 같이 갔다. 그는 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그와 같이 생활하는 과정에서 나는 그가 17세의 소년답지 않게 지나치게 정치적으로 민감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아침에 김일성이 공식행사를 위하여 숙소를 떠날 때 자기가 직접 아버지의 몸을 부축하여 현관까지 모시고 나와 구두장에서 신발을 꺼내 신겨주었다. 그때 김일성은 47세였는데 청년들도 따를 수 없을 정도로 원기왕성하였으나 김정일이 몸을 부축해 주고 신발을 신겨주는데 대해 매우 만족해하였다. 그리고 김정일은 저녁에 아버지가 숙소로 돌아올 때 반갑게 마중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김일성을 따라다니며 가까이에서 모시는 주치의사와 간호원, 부관들을 자기 방으로 불러 그들이 김일성을 어떻게 모셨는가를 물어보고 다음날 계획과 주의사항을 이야기하여 주었다. 김일성을 수행한 고위급 간부들이 많았으나 김정일은 아버지의 활동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지는 입장에서 하나하나 간섭하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김정일이 앞으로 반드시 자기 삼촌을 내쫓고 자리에 앉게 될 것이며 혹 <그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하는 예감을 가졌다. <그 이상의 것>이란 권력의 세습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그때는 설마 그렇게 까지야 되지 않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나는 김정일에게 모스크바 종합대학에 유학할 것을 권고하였으나 그는 정치는 아버지에게서 배워야 하며 아버지의 일을 돕기 위해서는 유학하여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당시 김정일의 모든 언행으로 보아 권력을 세습적으로 승계 하는데 있어서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이 더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업적의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보면 김일성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적할 수 있지만 김정일의 경우에는 긍정적인 면을 찾기 어렵다.

김일성의 혁명활동 역사를 왜곡 날조하고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를 터무니없이 강화하여 정권을 김일성 일가의 세습정권으로 만든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또 김일성의 영도 밑에 축성해 놓았던 자립적인 민족경제를 다 망쳐먹고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전변시킨 주되는 책임도 김정일에게 있다.

그리고 북한의 문화를 수령절대주의 문화로 전환시킨 것도 김정일이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여 북한 사회에 변형된 형태로나마 남아 있던 사회주의적 요소를 일소하고 북한 사회를 전체주의와 봉건주의를 결합시킨 전대미문의 개인독재체제로 전변시킨 책임이 바로 김정일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업적의 면에서 평가한다면 김정일은 <제로>(0)도 못되고 <마이너스>(-)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사업방법과 작풍의 면에서 김정일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독재자로서의 성격 면에서 김일성과 김정일을 비교해 보면 김일성은 너그럽고 포용력이 있는 독재자라는 인상을 주지만 김정일은 성격상 타고난 독재자 같이 보인다. 김일성이 자기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불가피하게 독재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김정일은 독재자체에서 기쁨을 느끼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나는 1958년부터 1965년 4월까지 김일성의 이론서기로서 당중앙에서 당생활을 하였다. 그때에는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가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그러나 내가 1979년에 당중앙의 비서로 다시 중앙당으로 돌아왔을 때에는 김정일이 당사업을 주관하였다. 나는 오랜만에 중앙당으로 다시 돌아와서 너무 많은 것이 달라진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전의 중앙당 생활이 국가의 최고 수뇌부에서 사는 기쁨과 긍지를 주는 생활이었다면 다시 체험하게 된 중앙당 생활은 <독재의 고압선>바로 옆에서 다칠세라 걱정하면서 잠시도 긴장성을 풀지 못하고 있는 불안한 생활이었다.

이전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당생활만 통제하는 본부 당위원회라는 상설적인 조직자체가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시대에 와서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본부당 위원회가 신설되었으며 여기에는 중앙당 일군들의 조직생활을 지도하는 과와 사상생활을 지도하는 과 그리고 비밀정보사업을 지도하는 과 등을 두고 중앙당 일군들의 생활을 2중, 3중으로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김정일은 사람들이 화목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싸우도록 하고 오직 자기 한사람에게만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당조직 생활을 강화한다고 할 때에는 자기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규율을 엄격히 세우는 한편 회의를 열고 당원들이 서로 비판하게 하는 것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다. 상호비판에서는 김정일의 사상과 지시에 충실하였는가, 충실하지 못하였는가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상호비판이 강화되고 당원들이 격렬하게 싸울수록 김정일의 권위는 높아지게 된다. 그는 당생활에서 무풍지대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어떤 자그마한 결함이 나타나도 그것을 큰 사건과 같이 만들어(이것을 <사건화)라고 한다) 가지고 당세포들에서도 사상투쟁을 벌이게 하고 본부당적으로는 <대논쟁>과 <사상투쟁회의>를 빈번히 벌이도록 하였다. 한마디로 말하여 그는 당원들의 생활을 잔잔한 상태에 두는 것을 반대하고 늘 풍파를 일으키고 들볶는 것을 좋아한다.

김일성은 회의에서도 긍정적인 예를 많이 들어 사람들을 고무해주고 부정적인 것은 적게 비판하였다. 그는 늘 긍정으로 감화하는 방법으로 부정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김정일은 부정을 비판하는 것을 위주로 할 것을 요구하며 강한 상호비판의 분위기 속에서 회의가 진행되었을 때 회의가 <혁명적>분위기 속에서 잘 되었다고 높이 평가한다. 또 회의에서 비판에 잘 참가하지 않는 사람을 혁명성이 없다고 배격하며 남의 결함을 목청을 돋구어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혁명성이 강하고 수령에게 충실한 당원이라고 높이 평가한다. 그는 사람들이 서로 투쟁하는 것을 커다란 흥미를 가지고 바라본다. 그러므로 본부 당위원회에서 중앙당적인 <사상투쟁회>나 <대논쟁>을 조직하도록 지시한 다음에는 자기 집무실에 앉아서 <텔레비죤>(폐쇄회로 화면)을 통하여 회의 정형을 자세히 살펴본다.

김정일은 정치적 지도에서는 각 부서들이 정책안을 제의서 형식으로 올려 비준(결재)받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문제와 원칙적인 문제는 예외 없이 제의서를 제출하여 비준받도록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이것은 김일성때에는 거진 없었던 현상이다.

당중앙위원회 안에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위시하여 여러 부서들이 있다. 부서에는 여러 개의 과가 있으며 몇 개과를 지도하는 부부장이 있다. 부서 책임자인 부장이 있고 몇 개 부서 또는 한 개 부서를 담당하여 지도하는 비서가 있다. 비서가 한 개 부서만 지도할 때에는 부장을 겸하게 되는데 대체로 큰 부서인 경우에 비서가 부장을 겸한다. 큰 부서에는 자기 부문 사업에서 독자적으로 책임지는 제1부부장이 몇 명되기 때문에 부장이 여러명 있는 것과 같다. 제1부부장은 부부장과 동격이 아니라 부장과 동격이라고 볼 수 있다.

매개 과에서는 정책과 관련된 제의서 또는 정세자료보고를 작성하여 부부장, 부장을 거쳐 비서에게까지 올라와 통과되면 매주 한번씩 부서별로 문건을 김정일에게 올린다. 현재는 그가 당총비서이지만 그 전에는 총비서대리인으로서 사실상 총비서나 다름 없었다. 당중앙 각 부서들에서 올리는 제의서들과 보고서들의 양은 방대하다. 내가 사업한 국제부만 해도 매주 30건-40건이 되었다. 중앙당 외에도 내각과 외무성, 군대, 사회안전성, 국가안전보위부 등 직접 제의서를 올리는 단위들이 있다. 김정일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제의서는 모두 자기가 직접 보고 결론을 준다. 심지어 비서들이 직접 올린 문건인 경우 내용이 중요하다고 인정될 때는 비준한 문건을 직접 자신이 특수한 봉투에 넣어서 친필로 비서이름을 쓰고 봉인하여 내려 보내준다.

이 모든 것은 방대한 작업량이지만 김정일은 이 사업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한다. 김정일의 중앙당 부서와의 사업은 기본적으로 <제의서>를 통한 사업이다.

그런데 제의서를 비준해 주는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김정일이 자기 이름과 날짜를 친필로 써 준 것은 무조건 집행해야 할 법적 문건으로 된다. 날자만 써준 것은 제의서를 올린 부서가 책임지고 집행할 수 있다. 줄만 두 개 써준 것은 집행해도 좋고 안해도 좋으니 부서결심에 따라 하라는 뜻이다. 중요한 부서들에서는 1주에 한번 제의서를 올리는 것 이외에 매일 수시로 모사전송기를 통하여 김정일에게 보고 올려 결론을 받는다.

이와 같이 김정일은 직접 사람을 대상(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제의서>라는 문건을 통하여 사업한다. 이런 점에서 김정일의 정치는 <제의서 정치>라고 볼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은 직접 사람을 대상으로 정치를 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김정일의 정치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술파티>이다. 김정일은 <술파티>를 자주 조직하는데 여기에는 예술인들이 참가하여 공연을 한다. 원래 이 파티는 김정일이 자기의 <가신단>을 꾸리기 위하여 마련한 것으로 추측된다. 여기에 자기가 신임하는 일군들을 참가시켜 술을 먹여놓고 그 성품도 검열하며 특히 측근자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더욱 충성을 다하도록 만들자는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술파티인만큼 술을 잘 먹고 잘 놀 줄 아는 사람들이 자주 참가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자리에서 이것저것 이야기도 듣고 말하게 되면 그것이 곧 정책으로 될 때가 있다.

술파티에서 술이 좀 취한 후에는 김정일 한 사람에 대하여서만 절대적 경의를 표할 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는 직위고하를 따지지 않는다. 술파티에서는 김정일 한사람밖에는 그 누구도 인정하지 말라는 김정일의 유일적 지도체제의 요구가 철저히 집행되고 있는 셈이다.

김정일은 이런 자리에서 집행하기 어려운 지시를 즉흥적으로 내렸다가 조령모해(朝令暮解)로 끝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원래 김정일은 이해타산을 빨리 잘하지만 성격이 너무 급하고 변덕스러워 즉흥적으로 불합리한 명령과 지시를 내릴 때가 적지 않다. 예를 들어 그는 한때 외국에 출장을 나가는 사람은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한 국산품 시계를 차라고 지시하였다. 그리하여 <주체>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양시계공장에서 생산되는 시계는 매우 낙후한 것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그 시계를 차고 외국에 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또 여성들이 흰 저고리에 까만색 치마를 입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으나 중앙당의 여직원 이외에는 이 지시에 잘 따르지 않고 있다. 그는 겨울에는 눈이 있어야 기분이 좋다고 하면서 중앙당 구내에서는 눈을 치지 말라는 쓸데없는 지시까지 하였다.

김정일은 자기가 친필로 비준하여 준 제의서도 그 후에 그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때에는 제의서를 올린 사람을 비판하고 처벌한다. 중앙당 조직지도부 교시편찬 과장은 김정일이 학생 때부터 비범한 사상이론 활동을 하였다는 것을 선전하기 위하여 김일성종합대학 교수들을 동원하여 15권에 달하는 방대한 김정일 문헌집을 만들었다.(물론 이것은 100%조작한 것이다.) 과장은 하나하나 김정일의 비준을 받아 출판하였다. 그러나 후에 그 내용이 어느 개인의 권위를 높여주는데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 제기되자 과장과 문헌집필에 동원된 교수들을 처벌하고 문헌집을 전면 개작하도록 지시하였다.

김일성은 쓸데없는 형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정일은 사람들을 수령에게 절대 복종시키기 위한 형식을 많이 만들어 놓았다. 중요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축하문 같은 것을 최상의 정중성을 다하여 올리도록 하였으며 김일성의 동상과 열사능에 화환을 증정하는 의식을 진행하게 하였다. 명절 때마다 각 직장들에서는 수령께 충성을 맹세하는 선서모임을 하게 된다. 이때에는 먼저 김일성을 칭송하는 노래와 김정일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고 선서가 끝날 때는 김일성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와 김정일의 만수무강 축원의 노래를 부르게 한다.

김일성 때는 아래 사람들한테 선물을 보내거나 자기가 차리는 연회에 초청할 때 별다른 의식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명절에 선물을 받을 때도 선물명세서를 책임간부들이 나가서 전달하고 배려에 보답하겠다는 <결의토론>을 5명 정도에게 시킨다. 연회초대장도 책임간부들이 나가서 일정한 의식을 진행한 다음 초대장을 수여한다. 이렇게 모든 것을 수령의 배려로 느끼도록 하기 위한 의식이 많다 보니 김일성, 김정일에게 맹세문과 감사문을 올리는 모임도 자주 가지게 된다.

연말인 12월 31일 밤에는 국가적인 송년회 또는 신년맞이 모임이 진행된다. 이런 경우에 김정일은 공식모임에는 참가하지 않고 측근자들, 파티멤버들을 모아놓고 따로 논다. 그러다가 밤 12시나 새벽에 중앙당 부서 책임자들에게 지난해에 모두 일을 잘했다. 새해에 더욱 분발하여 큰 승리를 이룩하자와 같은 간단한 인사말을 모사전송기로 보내준다. 그러면 정월초하루인 명절날에도 부서 책임자들이 비상소집을 하여 김정일의 신년 축하 편지를 받드는 의식을 하고 결의문이나 맹세문을 만들어 올려 보낸다. 김정일은 이렇게 하는 것을 좋아한다.

김정일은 늘 모임이 있을 때마다 두 가지 주의사항을 강조하게 한다. 그 하나는 당의 비밀을 지키라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개별적 간부들에 대한 환상을 가지지 말라는 것이다. 공개적인 것보다도 비밀리에 무엇을 하기 좋아하며 남이 잘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질투하는 것은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 같이도 생각된다.

김정일은 공개적으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대중들 앞에서 연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연회를 차리는 것보다 자기 측근자들을 모아 놓고 놀기를 좋아한다. 그는 낮에 일하는 것보다 밤에 놀고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는 질투심이 병적으로 강하다. 김일성은 자기에게 충실한 부하에 대해서는 질투하지 않았다. 그는 건방진 사람은 미워했지만 자기에게 충실히 복무하는 사람은 대중의 신망이 높다고 하여 질투하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충실한 부하도 대중의 신망이 높으면 질투한다. 또 다른 나라에서 일이 잘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며 다른 나라 지도자가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아도 질투한다. 물론 이러한 김정일의 성격상 특징은 결국 그의 철저한 이기주의적 사상관점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그는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다. 그는 자기의 자질을 높이고 인민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복무하는 원칙적인 방법으로 스스로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과 모략의 방법으로 자기에 대한 환상을 조성해보려고 애쓴다. 그는 남한과의 경쟁에서도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방법으로 이기려고 하지 않고 테러와 모략의 방법으로, 그리고 무력 침공의 방법으로 이기려고 한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무참히 죽였으며 공개할 수 없는 많은 비행을 저질렀다. 그는 이러한 비행이 폭로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고 있다. 이 때문에 그는 당생활에서 비밀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라고 하면서 신문에 공개된 것 이외는 모두 비밀이기 때문에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비밀이 새나간다고 하여 당중앙의 부부장 이상 간부들의 부인은 원칙상 직장에 나가 일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김정일은 자기에 대한 우상화를 위하여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지만 사람들이 다른 간부들에 대하여 좋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숭배를 반대한다고 한다. 자기는 인민의 영도자이기 때문에 <개인>이 아니지만 다른 간부들은 인민의 지도자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개인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어떤 도당 책임비서가 일을 잘하여 인민들 속에서 신망이 높게 되면 꼭 교체해버린다. 때로는 인민들 속에서 개인에 대한 환상을 조성하였다고 하여 <반당분자>의 모자를 씌워 숙청해 버리기도 한다.

그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인간관계 외의 인간관계는 허용하지 않는다. 그는 가족주의, 지방주의를 <종파의 온상>이라고 배격하며 동창회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형태의 친목회를 모두 반대한다. 심지어 그는 사제지간 관계나 선배후배관계를 따지는 것도 반대한다. 그의 요구는 수령과 가까운 사람과는 가깝게 지내고 수령과 먼 관계에 있는 사람과는 먼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곁가지>를 반대하도록 전당에 조직적으로 지시하여 김일성의 후처 아들들인 이복동생들을 대중과 절연시키기 위한 대책을 철저히 세웠다. 김정일의 이복동생들로부터 사소한 선물을 받거나 편지를 받았다 하여 직위에서 파면되고 추방된 사람이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일반대중은 <곁가지>대상과는 인사도 하지 않고 만나서 악수도 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반대로 김정일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하여 응당한 호의를 표시하지 않을 때에는 크게 노한다. 그는 자기에게 기쁨을 주고있는 가무단을 매우 사랑한다. 원래 이 가무단들은 김정일을 위하여만 복무하게 되어 있지만 때로는 김정일이 당중앙 일군들에게 <큰 배려>를 돌려주어 그 공연을 보여 줄 때가 있다. 이때 중앙당 간부들이 박수를 잘 치지 않았다 하여 김정일은 중앙당 일군들 속에서 사상투쟁을 벌이도록 지시한 일이 있다. 그 후부터는 김정일이 사랑하는 배우들이 출연하는 공연을 볼 때는 중앙당 간부들이 손이 아프고 팔이 저릴 정도로 오랫동안 박수를 쳤으며 공연이 끝난 다음에도 몇 번 막이 올랐다 내렸다 할 때까지 박수를 치고 더 이상 공연자들의 반응이 없어야 자리를 뜨게 되었다.

김정일은 자신을 무조건 따르는 추종분자들을 동원하여 자기를 세계가 공인하는 대정치원로로 21세기의 태양으로, 만능의 천재로 떠들게 하고 있다. 북한 통치자들이 떠드는 북한의 수령의 위대성과 북한의 비참한 현실은 천양지차의 대조를 이루고 있다.

확실히 김정일의 독재는 가혹하고 그의 독재 능력은 탁월하다. 그는 바로 이 <탁월한> 독재능력으로 자기 아버지를 망치고 북한 사회를 망쳤으며 그를 추종하는 많은 순진한 사람들을 망치고 있다. 앞으로 그가 이 탁월한 독재능력에 의거하여 남한과 외국의 많은 선량한 사람들을 망치고 7천만 우리 동포들에게 유례 없는 재난을 가져오지 않을 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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