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8·15
- 관리자
- 2010-09-02 13:18:33
- 조회수 : 20,348
[황장엽의 민주주의 강좌]
꼭 65년 전 광복이 되던 날, 강원도 삼척의 작은 시멘트 공장에서 징용노동을 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곧바로 일본 도쿄의 주오(中央)대 야간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고학을 했다. 일제는 1944년 1월 나를 비롯한 재일 조선인 100여 명을 송환해 징용노동에 처했다. 이후 1년 6개월 동안 일했던 오노타 시멘트 공장은 소성로(벽돌 등을 구워내는 가마)가 하나였고 굴뚝이 하나인 작은 공장이었다.
강제징용이 어떤 것인지 지금 젊은 청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젊었기 때문에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배가 고픈 것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고학을 할 때 단식도 많이 했지만 노동을 하니까 배가 고파서 못 견딜 정도였다. 통강냉이(옥수수)를 삶아서 쌀을 조금 섞어 주는 것이 최고로 좋은 식사였다. 제일 나쁜 것은 대두박(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이었는데 정말 못 먹을 정도였다. 콩 냄새는 하나도 안 났다. 곡식의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징용공(원래 26명으로 시작했으나 하나 둘씩 떠나고 광복 무렵에는 8명만 남았다)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 중에 싸움을 잘하는 손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도쿄에서 고학을 할 때부터 아는 친구였는데 노동판에 나와서도 싸움을 잘해 감독이 “하루 노임을 거저 줄 테니 제발 그냥 돌아가 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싸움 실력이 있었다. 그가 선두에서 선동을 하는 바람에 모두 한 달 반 동안 누워서 파업을 했다.
삼척경찰서가 우리를 감독했다. 문제가 생기니 강릉에서 검사가 내려왔다. 우리 중에 말 잘하는 몇몇이 공격을 하니까 검사는 “알았다. 조치를 취하겠다”며 돌아갔다. 검사가 이후 경찰서장을 불러서 주의를 주었는지 이후에는 대두박은 나오지 않고 수수를 먹을 수 있었다. 일설에는 그 사건으로 경찰서 사람들이 우리를 명단에 ‘주의해야 할 인물’로 적어두고 필요하면 총살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 광복의 그날, 인산인해 이루던 삼척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날은 상황을 잘 몰랐다.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한다고 해서 징용공은 모두 손을 놓고 라디오 앞에 모였으나 잡음이 많아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모든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삼척은 조그만 읍이었고 공장이 있던 정라진 일대는 읍에서도 1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읍내로 나갔더니 동네가 터질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북한에서 장마당(시장)이 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고 일본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독립된 조국을 위해 이 한 생명 어떻게 바칠 것인가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압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지금까지 무거운 무쇠 가마를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훌훌 벗어던진 것 같았고 또 억눌려 있던 내 키(당시 1m70cm 정도)가 하늘을 향해 자꾸 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모여서 토론을 했다. 나보다 4년 위였던 손 씨가 역에 나가 화물칸에서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나눈 대화의 주제는 ‘미국을 따라갈 것인가, 소련을 따라갈 것인가’였다. 나보다 2년 위로 기독교를 믿는 친구는 미국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우리처럼 못사는 나라는 다 같이 잘산다는 소련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소련이 뭔지 미국이 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미국인은 도쿄에 있을 때 잡혀온 포로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내가 그 포로에게 ‘야, 너 부모나 있냐’고 했더니 그는 이내 울먹울먹했다.
잠시 그 생각을 하는데 동료 징용공들이 “너도 가만있지 말고 한마디 해라”라고 했다. 나는 “야, 꼭 어떤 나라를 따라가야 되니? 우리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끼리 잘살도록 하면 되지 않니?”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야, 그게 파시즘이야!”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했다.
다음 날인 17일 징용공 8명은 삼척읍 유지들의 도움으로 목탄을 연료로 하는 화물차 편으로 서울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화물차에 태극기를 달고 의기양양하게 삼척 읍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태극기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차를 세운 헌병은 권총을 빼든 채 총살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무기가 없는 우리는 패망으로 잔뜩 독이 오른 자들에게 대항하여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틀 동안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왔다.
○ 서글픈 반일 보복 무용담
손 씨는 우리를 감시하면서 괴롭혀 온 조선인 형사를 혼내주고 떠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의 의견에 모두 찬동했다. 마침 그 조선인 형사도 우리와 같은 차편으로 춘천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형사가 차를 타려고 여관으로 왔다. 나이는 35세 정도로 유도나 검도를 한 듯 몸이 매우 날쌔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8명이었고 단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 아무 두려움 없이 형사를 둘러쌌다. 손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민족의 반역자이므로 마땅히 처단되어야 한다.”
그러자 형사는 태연하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당신들을 해친 적이 없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우리는 자그마한 단도를 믿었는데 그 자가 권총을 뽑아들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씨가 다시 나섰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야. 당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형사로서 당신들을 감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실지로 당신들을 해치지는 않았어. 일본이 망했다고 당신들이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돼.”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설교했다. 권총을 당할 수 없음을 안 손 씨가 마무리를 했다.
“좋다. 그 문제는 앞으로 기회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러고는 싱겁게 그 자를 놓아주었다. 손 씨가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서 처단하기는 어려워서 그냥 보냈다. 그래도 우리와 같이 간다니까 가다가 외딴곳에서 기회를 봐서 죽이자.”
이번에도 우리는 찬동했다. 형사와 우리 8명이 탄 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서로 눈짓을 했다. 차는 우거진 솔밭으로 난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단도를 감추고 손 씨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헌병 지프가 나타났다. 지프가 전조등으로 신호를 하자 형사가 손을 들었다. 헌병 지프가 화물차를 세웠다. 그러자 그 형사가 훌쩍 뛰어내려 지프에 올라타고는 우리를 비웃듯이 가버렸다.
우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헌병차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허탈해했다. 광복을 맞은 우리의 서글프면서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무용담은 이것이 끝이다.
○ 서울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분단
춘천에 도착해 여관을 잡아 든 시간은 밤 10시였다. 서울 용산 사단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삼척 출신의 청년이 일본인 분대장을 때려눕히고 탈영했다가 삼척에서 징용을 살던 유학생들이 여관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하룻밤을 자고 올라온 서울은 전혀 딴판이었다. 사방이 조용하고 파출소에 전부 일본인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있었다. 치안을 일본 경찰이 맡았던 것이다. 조선 새 정부가 들어서면 여운형이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이승만과 김일성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진짜 김일성이 있구나 생각했다. 축지법도 하고 그런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빨치산 투쟁하는 사람을 찾아가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손 씨를 비롯해 남쪽이 고향인 학생은 다른 숙소로 가고, 나는 고향 친구들을 따라 대학교수를 하는 친구의 형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 밤 교수의 친구들도 와서 토론을 하는데 우리와 같은 내용이었다. 미국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소련을 따라갈 것인가.
나는 우선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 뵙고 나중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할 요량으로 1945년 8월 20일 평양을 향해 떠났다. 평양은 떠들썩했다. 학도지원병과 징용에 끌려갔다 온 젊은이들은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군도(軍刀)를 차고 보안대라고 적힌 완장을 두르고는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모교인 평양상업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의 선배들은 “마침 잘 왔다. 지금 일본인 교사들이 다 가버려서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어. 장엽이 자네가 학교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8월 23일 서울∼평양 간 기찻길이 끊겼다. 이윽고 소련군이 들어왔고 38선이 끊어졌다. 용감한 사람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갔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평양에 주저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1946년 11월 16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 “남한에 역사 잊어버린 사람 너무 많아”
돌이켜보면 65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고생은 했지만 삼척 시멘트 공장에서 좋은 경험이 많이 있었다. 주문진은 아주 깨끗했다. 강릉에서도 좋은 감이 났다. 광복 직후 어떤 부잣집에서 쌀막걸리를 만들어 돌렸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시큼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삼척을 떠난 지 60년 만에 다시 갔더니 완전히 천지개벽이었다. 우리가 돌을 까러 올라갔던 돌산이 없어지고 공장이 들어섰다. 우리가 100% 가동하면 연간 8만 t이 나온다던 시멘트 생산량이 1100만 t이라고 했다. 기계화되어서 종업원은 그때보다 더 줄었다고 했다. 삼척읍에서 바다로 흐르며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했던 개울은 방향이 바뀌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 남한은 도처가 완전히 지상낙원이다.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다. 북한은 그때보다 더 퇴보했다. 여기 지상낙원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 그때를 전혀 모르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사람까지 나오니 우리가 얼마나 속이 상하는가. 나라가 분단된 조건을 딛고 이런 기적을 창조했는데 이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았는지,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공산주의자가 얼마나 악독한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사상교육, 역사교육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동아일보]
꼭 65년 전 광복이 되던 날, 강원도 삼척의 작은 시멘트 공장에서 징용노동을 하고 있었다. 1941년 12월 평양상업학교를 졸업한 나는 곧바로 일본 도쿄의 주오(中央)대 야간 전문부 법과에 입학해 고학을 했다. 일제는 1944년 1월 나를 비롯한 재일 조선인 100여 명을 송환해 징용노동에 처했다. 이후 1년 6개월 동안 일했던 오노타 시멘트 공장은 소성로(벽돌 등을 구워내는 가마)가 하나였고 굴뚝이 하나인 작은 공장이었다.
강제징용이 어떤 것인지 지금 젊은 청년은 상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젊었기 때문에 일은 힘들지 않았지만 배가 고픈 것이 문제였다. 일본에서 고학을 할 때 단식도 많이 했지만 노동을 하니까 배가 고파서 못 견딜 정도였다. 통강냉이(옥수수)를 삶아서 쌀을 조금 섞어 주는 것이 최고로 좋은 식사였다. 제일 나쁜 것은 대두박(콩기름을 짜고 난 찌꺼기)이었는데 정말 못 먹을 정도였다. 콩 냄새는 하나도 안 났다. 곡식의 맛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를 포함한 징용공(원래 26명으로 시작했으나 하나 둘씩 떠나고 광복 무렵에는 8명만 남았다)들은 반란을 일으켰다. 우리 중에 싸움을 잘하는 손씨 성을 가진 친구가 있었다. 도쿄에서 고학을 할 때부터 아는 친구였는데 노동판에 나와서도 싸움을 잘해 감독이 “하루 노임을 거저 줄 테니 제발 그냥 돌아가 달라”고 사정할 정도로 싸움 실력이 있었다. 그가 선두에서 선동을 하는 바람에 모두 한 달 반 동안 누워서 파업을 했다.
삼척경찰서가 우리를 감독했다. 문제가 생기니 강릉에서 검사가 내려왔다. 우리 중에 말 잘하는 몇몇이 공격을 하니까 검사는 “알았다. 조치를 취하겠다”며 돌아갔다. 검사가 이후 경찰서장을 불러서 주의를 주었는지 이후에는 대두박은 나오지 않고 수수를 먹을 수 있었다. 일설에는 그 사건으로 경찰서 사람들이 우리를 명단에 ‘주의해야 할 인물’로 적어두고 필요하면 총살하도록 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한다.
○ 광복의 그날, 인산인해 이루던 삼척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된 날은 상황을 잘 몰랐다. 일본 천황이 라디오 방송을 한다고 해서 징용공은 모두 손을 놓고 라디오 앞에 모였으나 잡음이 많아 무슨 소린지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다음 날 모든 사실을 알고 정말 놀랐다. 삼척은 조그만 읍이었고 공장이 있던 정라진 일대는 읍에서도 10리 정도 떨어져 있었다. 읍내로 나갔더니 동네가 터질 정도로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다.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들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광복의 기쁨을 나누고 있었다. 나중에 북한에서 장마당(시장)이 열릴 때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고 일본인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해방의 기쁨과 함께 고민에 빠졌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내가 독립된 조국을 위해 이 한 생명 어떻게 바칠 것인가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그래도 압박에서 해방되었다는 사실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지금까지 무거운 무쇠 가마를 뒤집어쓰고 다니다가 훌훌 벗어던진 것 같았고 또 억눌려 있던 내 키(당시 1m70cm 정도)가 하늘을 향해 자꾸 자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모여서 토론을 했다. 나보다 4년 위였던 손 씨가 역에 나가 화물칸에서 가져온 음식을 나눠 먹으며 나눈 대화의 주제는 ‘미국을 따라갈 것인가, 소련을 따라갈 것인가’였다. 나보다 2년 위로 기독교를 믿는 친구는 미국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다른 사람은 ‘우리처럼 못사는 나라는 다 같이 잘산다는 소련을 따라가야 한다’고 했다. 나는 당시만 해도 소련이 뭔지 미국이 뭔지 잘 이해가 안 됐다. 미국인은 도쿄에 있을 때 잡혀온 포로를 본 것이 처음이었다. 내가 그 포로에게 ‘야, 너 부모나 있냐’고 했더니 그는 이내 울먹울먹했다.
잠시 그 생각을 하는데 동료 징용공들이 “너도 가만있지 말고 한마디 해라”라고 했다. 나는 “야, 꼭 어떤 나라를 따라가야 되니? 우리나라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우리끼리 잘살도록 하면 되지 않니?” 했더니 다른 사람들은 “야, 그게 파시즘이야!”라고 했다. 당시만 해도 민족주의와 파시즘에 대해 잘 몰랐던 나는 그냥 얼떨떨하기만 했다.
다음 날인 17일 징용공 8명은 삼척읍 유지들의 도움으로 목탄을 연료로 하는 화물차 편으로 서울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 그날 아침 우리는 화물차에 태극기를 달고 의기양양하게 삼척 읍내를 돌며 독립만세를 부르다가 일본 헌병에게 붙잡혀 태극기를 빼앗기는 치욕을 당했다. 차를 세운 헌병은 권총을 빼든 채 총살을 하겠다고 위협했다. 무기가 없는 우리는 패망으로 잔뜩 독이 오른 자들에게 대항하여 개죽음을 당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이틀 동안 묵었던 여관으로 돌아왔다.
○ 서글픈 반일 보복 무용담
손 씨는 우리를 감시하면서 괴롭혀 온 조선인 형사를 혼내주고 떠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우리는 그의 의견에 모두 찬동했다. 마침 그 조선인 형사도 우리와 같은 차편으로 춘천으로 올라간다고 했다. 형사가 차를 타려고 여관으로 왔다. 나이는 35세 정도로 유도나 검도를 한 듯 몸이 매우 날쌔 보였다. 하지만 우리는 8명이었고 단도를 하나씩 가지고 있어 아무 두려움 없이 형사를 둘러쌌다. 손 씨가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민족의 반역자이므로 마땅히 처단되어야 한다.”
그러자 형사는 태연하게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당신들을 해친 적이 없어. 나를 죽이려 한다면 나도 방어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러고는 권총을 뽑아들었다. 우리는 자그마한 단도를 믿었는데 그 자가 권총을 뽑아들자 멈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손 씨가 다시 나섰다.
“당신을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야. 당신이 지은 죄를 스스로 깨닫게 하려는 것이지.”
“형사로서 당신들을 감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건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나 실지로 당신들을 해치지는 않았어. 일본이 망했다고 당신들이 무분별하게 행동해서는 안 돼.”
그는 오히려 우리에게 설교했다. 권총을 당할 수 없음을 안 손 씨가 마무리를 했다.
“좋다. 그 문제는 앞으로 기회 있을 때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그러고는 싱겁게 그 자를 놓아주었다. 손 씨가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서 처단하기는 어려워서 그냥 보냈다. 그래도 우리와 같이 간다니까 가다가 외딴곳에서 기회를 봐서 죽이자.”
이번에도 우리는 찬동했다. 형사와 우리 8명이 탄 차는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서로 눈짓을 했다. 차는 우거진 솔밭으로 난 길을 올라가고 있었다. 단도를 감추고 손 씨의 신호를 기다렸다. 그때 등 뒤에서 갑자기 헌병 지프가 나타났다. 지프가 전조등으로 신호를 하자 형사가 손을 들었다. 헌병 지프가 화물차를 세웠다. 그러자 그 형사가 훌쩍 뛰어내려 지프에 올라타고는 우리를 비웃듯이 가버렸다.
우리는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듯이 헌병차를 바라보다가 서로의 얼굴을 보면서 허탈해했다. 광복을 맞은 우리의 서글프면서도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무용담은 이것이 끝이다.
○ 서울에서 평양으로, 그리고 분단
춘천에 도착해 여관을 잡아 든 시간은 밤 10시였다. 서울 용산 사단에 징병으로 끌려갔던 삼척 출신의 청년이 일본인 분대장을 때려눕히고 탈영했다가 삼척에서 징용을 살던 유학생들이 여관에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다.
하룻밤을 자고 올라온 서울은 전혀 딴판이었다. 사방이 조용하고 파출소에 전부 일본인이 기관총을 걸어놓고 있었다. 치안을 일본 경찰이 맡았던 것이다. 조선 새 정부가 들어서면 여운형이 무슨 자리를 차지하고 이승만과 김일성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했다. 나는 진짜 김일성이 있구나 생각했다. 축지법도 하고 그런 김일성 장군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고 빨치산 투쟁하는 사람을 찾아가자는 이야기도 있었다.
손 씨를 비롯해 남쪽이 고향인 학생은 다른 숙소로 가고, 나는 고향 친구들을 따라 대학교수를 하는 친구의 형 집에서 하루를 묵었다. 그날 밤 교수의 친구들도 와서 토론을 하는데 우리와 같은 내용이었다. 미국을 따라갈 것인가 아니면 소련을 따라갈 것인가.
나는 우선 고향에 가서 부모님을 만나 뵙고 나중에 서울에 와서 공부를 할 요량으로 1945년 8월 20일 평양을 향해 떠났다. 평양은 떠들썩했다. 학도지원병과 징용에 끌려갔다 온 젊은이들은 일본인의 재산을 몰수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었다. 그들은 군도(軍刀)를 차고 보안대라고 적힌 완장을 두르고는 거들먹거리며 돌아다녔다.
모교인 평양상업학교를 찾아갔다. 그곳의 선배들은 “마침 잘 왔다. 지금 일본인 교사들이 다 가버려서 학교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어. 장엽이 자네가 학교 일을 좀 도와줘야겠다”고 말했다. 그러다 8월 23일 서울∼평양 간 기찻길이 끊겼다. 이윽고 소련군이 들어왔고 38선이 끊어졌다. 용감한 사람은 38선을 넘어 남쪽으로 갔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는 그렇게 평양에 주저앉았다. 지금 생각하면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1946년 11월 16일 조선노동당에 입당했다.
○ “남한에 역사 잊어버린 사람 너무 많아”
돌이켜보면 65년이 너무 빨리 지나갔다. 고생은 했지만 삼척 시멘트 공장에서 좋은 경험이 많이 있었다. 주문진은 아주 깨끗했다. 강릉에서도 좋은 감이 났다. 광복 직후 어떤 부잣집에서 쌀막걸리를 만들어 돌렸는데 정말 맛이 좋았다. 파리가 둥둥 떠다니는 시큼한 막걸리를 한 사발씩 먹은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삼척을 떠난 지 60년 만에 다시 갔더니 완전히 천지개벽이었다. 우리가 돌을 까러 올라갔던 돌산이 없어지고 공장이 들어섰다. 우리가 100% 가동하면 연간 8만 t이 나온다던 시멘트 생산량이 1100만 t이라고 했다. 기계화되어서 종업원은 그때보다 더 줄었다고 했다. 삼척읍에서 바다로 흐르며 개구리 울음소리가 요란했던 개울은 방향이 바뀌었다.
과거에 비하면 지금 남한은 도처가 완전히 지상낙원이다. 상상할 수 없었을 정도다. 북한은 그때보다 더 퇴보했다. 여기 지상낙원에서 살게 된 사람들이 그때를 전혀 모르고 김정일을 찬양하는 사람까지 나오니 우리가 얼마나 속이 상하는가. 나라가 분단된 조건을 딛고 이런 기적을 창조했는데 이것을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나라를 빼앗기고 되찾았는지, 6·25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공산주의자가 얼마나 악독한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다. 그래서 사상교육, 역사교육을 다시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출처=동아일보]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