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변화와 대응원칙 (8)
- 관리자
- 2010-06-07 15:3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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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남북한 문제의 본질
남북한간의 대립과 통일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우선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남북한의 대립과 통일문제를 민족내부의 문제로만 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북한의 통일문제를 전적으로 민족내부의 문제로 보면서 통일문제는 외부의 간섭이 없이 남북한의 당국자들이 민족화해의 정신에 따라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주민들이 같은 민족이고 남북한의 대립이 한 민족, 한 강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민족 내부의 문제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의 분단과 대립은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제2차대전의 종결로 조선민족은 일본제국주의 기반에서 해방되었으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하여 한반도는 두 부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영향 밑에 사회주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영향 밑에 자본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되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냉전의 중요한 대결장으로 되었다. 이것은 남북간의 분단과 대결이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국제적 범위에서 냉전은 종식되었으나 냉전시기에 형성되고 공고화된 북한의 변태적인 독재체제는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 결과 남북간의 체제상의 대립은 의연히 남북을 갈라놓고 대립시키는 기본 요인으로 되고 있다. 여기에서 남북간의 대립은 민족내부에서 남쪽과 북쪽간의 지역적인 대립인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두 체제간의 모순이며 그것은 의연히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을 수 있어도 독재체제와 민주주의체제 사이의 모순인 것은 틀림없으며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모순은 현 시기 국제무대에서 역사적 흐름의 기본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북한간의 체제상 대립의 본질을 왜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모순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북한의 체제상의 대립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립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을 계급적 모순으로 보며 사회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대표하는 진보적 사회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역사발전과정을 계급투쟁 과정으로 잘못 이해한데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회주의 사상은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제기되었다.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의 결과 봉건적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새 사회가 건설되었지만 실제로는 빈부의 차이와 경제적 불평등이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인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더욱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제도를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을 내놓았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계급적 차이로 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의 차이로 보았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즉 인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제도나 사회주의제도 자체를 귀중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민주주의가 더 발전된 사회로 본 것이 아니라 계급적 입장에서 역사발전 과정을 고찰하는데로부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차이에 귀착시켰다. 즉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고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맞고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 계급이 국가정권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근로인민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계급이 정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노동계급의 독재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우월하고 사회주의적 공동소유제도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제도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사회에 자기 자리를 내주는 것이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생존과 발전을 실현하는데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온갖 지배와 예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을 자유롭게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이러한 근본 요구에 맞는 사회는 발전되고 진보적인 사회이며 이런 요구에 배치되는 사회는 뒤떨어지고 불합리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사회제도의 진보성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자주적인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어느 제도가 더 잘 보장해 주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여야 한다.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사상의 본질이 바로 인민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주인의 지위를 보장하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보장해 준다는데 있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진보성을 민주주의 원리를 어느 제도가 더 잘 구현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어느 사회가 인민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잘 보장해 주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권은 노동계급의 독재정권 또는 공산당 독재정권이라고 한다. 생산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다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공산당의 독재라고 하지만 각이한 직업을 가진 많은 공산당원들이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다고 볼 수 없다.
지난시기 소련에는 2천만의 공산당원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니다.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 것은 공산당의 수령과 수령의 독재체제를 직접 관리해나가는 관료들 뿐이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런 특권층은 당원 총 수의 약 5%정도 된다고 보고 있다. 일반 비당원 근로대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독재체제를 직접 관리하는 관료를 제외한 공산당원들은 공산독재정권을 지지옹호하는데서 앞장설 의무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적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의 높은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국가라는 사람은 없다. 결국 국가정권을 독점한 수령과 그의 관료들이 국가적 소유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장이나 농장의 재산을 맘대로 관리하고 처분하는 것은 수령과 그의 관료들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국가재산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침범하지 말데 대한 의무만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수령과 그의 관료들은 국가정권과 국가재산의 주인으로서 인간에 대한 지배권과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다 같이 독점한 막강한 특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권에 비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특권은 보잘 것 없다. 자본가들은 비교적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 국가재산의 한 부분이며 매개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국가재산 전체를 소유한 공산독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국가정권에 대하여서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특권도 가지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독재정권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라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계급주의자들의 궤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지도기관을 선거하는데 자본가들만 참가하고 자본가계급 출신만이 선거될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민들이 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신분적 평등과 자유는 자본가들 뿐아니라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층, 사무원 등 모든 사회성원들이 다 향유한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재민의 원칙에 의거하여 일반대중이 정권활동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시정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치제도를 자본가계급의 독재라고 하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생활분야에서도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기업활동도 할 수 있다. 또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부당하게 대할 때에는 파업할 자유도 가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근로자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수령과 그의 관료들의 명령지시에 따라 일할 의무만 지니며 파업할 권한도 없고 사표를 내고 그만둘 자유도 없다.
정신문화 생활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차이는 더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다 누리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민들이 이러한 자유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사회주의적 독재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간단히 비교해 보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보다 비할바 없이 높다는 것이 뚜렷하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발전된 사회인 것이 아니라 뒤떨어진 사회이며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인 것이 아니라 퇴보된 낡은 사회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사회주의적 독재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반대하다보니 민주주의 이전 사회인 봉건사회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독재는 봉건적 전제주의를 부활하는 방향에서 후퇴하였다.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와 수령의 개인독재는 봉건 왕을 연상시킨다. 대표적인 실례는 북한의 수령절대주의체제에서 정권을 세습적으로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데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민주주의발전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제도의 진보성 여부를 규정하려고 한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들의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러한 명백한 이론적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정권은 다 계급적 독재정권인데 노동계급의 정권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이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 정권은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사회주의 독재야 말로 수령과 그의 관료집단인 소수가 전체 근로인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반 인민적 독재정권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인 만큼 현시대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시대라든가, 미래는 사회주의에 속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도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소유형태는 계속 변화되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소유형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독재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소련 식 사회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에서 소련의 패배의 본질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비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우월성에서 찾기 전에 소련의 무산계급독재체제에 비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소련의 계획경제가 응당한 생활력을 발휘하지 못한 근본원인도 경제관리에서 민주주의가 결여되고 독재와 관료주의가 지배하게 된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봉건적 전제주의 정치체제로부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이행은 위대한 혁명적 전환이었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체제로부터 소련 식 사회주의 독재체제로의 이행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체제를 더욱 발전 완성시켜야 할 역사적 과업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이 역사적 과업을 외면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무산계급독재에 의거하여 새로운 사회제도를 무리하게 창조해보려고 시도하였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현실보다 이상을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할 데 대한 이상적인 민주주의 구호를 내걸고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동정을 끌었다. 그들은 적어도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이러한 이상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자마자 독재자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장악한 새 정권은 노동자, 농민의 정권인 만큼 착취와 억압과는 인연이 없는 정권이기 때문에 모든 근로자가 무조건 지지하고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자기들의 지배적 지위를 절대화하는 데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인민에게 충실하였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로 변질되는 과정을 걷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사회가 자본주의사회와 교체되어야 할 새로운 보다 발전된 사회라고 주장하였지만 인간해방의 견지에서 볼 때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뒤떨어진 사회였다. 사회주의는 새것의 가면을 쓴 낡은 것이었다. 독일의 파시즘 독재도 새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새것의 가면을 쓰고 역사무대에 등장한 낡은 것이었다.
더구나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독재보다도 훨씬 더 퇴보된 중세기적 독재체제인 만큼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체제와는 대비도 안되는 낡은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동정하는 사람은 진보적 인사에 속하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려고 하는 사람은 보수주의에 속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 시대는 결코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 방법으로 때려부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인 것이 아니라 특권을 견제하고 점차 없애나가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나가는 것이 역사의 전진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개혁의 시대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노동계급의 처지를 개선하는 문제도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폭력적 방법으로 자본주의체제를 때려부수고 노동계급의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업관리를 더욱 민주주의적으로 개선하는 개혁을 통하여 실현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요구에도 맞고 노동계급의 이익에도 맞는 옳은 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시대의 기본 모순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이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간의 모순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오늘날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 사이의 대립은 우리 시대의 기본 특징인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 사이의 대립의 일환으로 된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대립을 단순히 민족내부의 모순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국제적인 문제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재는 폭력에 의거하고 있으며 폭력은 침략과 전쟁의 화근으로 되고 있다. 오늘날 독재국가들은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도발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장본인으로 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나가는 진보적인 국제사회 앞에는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데 대한 과업과 침략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할 데 대한 일대 과업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2대 과업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한반도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문제는 민족적 과업인 동시에 국제적 과업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남북간의 대립의 본질이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대립이라는 것도,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세계 인민들의 공동과업의 일환이라는 것도 다 망각하고 남북간의 대립을 민족 내부의 모순으로 묘사하면서 남북의 당사자들끼리 민족적 화해와 협력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원인과 결과를 전도하여 생각하고 있다는데 대하여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남북의 대립과 불화가 원인이 되어 북과 남이 정 반대되는 두 체제가 수립되었는가, 아니면 북에 독재체제가 수립되고 남에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된 데로부터 남과 북의 불화와 대립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편견 없이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대전이 종결되고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 기반에서 해방된 시점에서 우리 나라는 식민지 반봉건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나라가 반봉건 민주주의 개혁을 거처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것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다.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는 것이 옳았다는 것은 오늘날 남북간의 판이한 발전상의 격차를 통하여 생동한 역사적 현실로서 여지없이 실증되었다. 결국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대립되어 6. 25전쟁의 불행까지 겪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이 우리 나라의 사회발전 단계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수립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북한에 수립된 독재체제는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혹심한 인권유린의 중세기적 암흑의 땅으로 만든 근본원인으로 될 뿐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는 기본장애로 되고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평화를 수호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나라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첫째로도, 둘째로도 그 기본 장애인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을 것이다.
또 북한의 독재체제와 남한의 민주주의체제의 대립이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한국은 마땅히 자유민주주의의 국제적 아성인 미국과의 동맹에 튼튼히 의거하고 일본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나라들과의 국제적 협조 밑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을 확고부동하게 견지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로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는 나라들을 평가하는 데서도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지난 시기의 사회주의적 독재를 버리고 개혁개방을 택한 나라들이 눈부신 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이 발전의 모델이 되는 것처럼 환상을 가지는 것은 시기 상조한 것이다. 이 나라들의 급속한 발전은 지금까지 사회주의 독재에 의하여 너무도 억압되어온 인민 적 에너지가 민주주의의 도입으로 해방된 결과 이룩된 것이지 이 나라들의 현재 사회체제가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 이런 나라들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한 것처럼 보면서 바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하는 것이 발전의 제3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현 역사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을 잘 못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 역사발전단계에서는 민주주의원칙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더욱 잘 구현해나가는 것이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기본 추동력으로 되고 있다.
오늘 개혁개방으로 나가고 있는 나라들의 민주주의 발전수준은 아직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민주주의 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전반적인 사회발전 수준이 오늘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을 따라 잡기 전에는 이 나라들의 과도적인 사회체제에 대하여 마치도 그것이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발전형태인 것처럼 속단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나라들은 아직도 민주주의 길로 전진하는데서 시련의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론을 버리고 개인과 사회적 집단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담보하는 새로운 정치이론에 의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북한과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를 계급적 연대성의 견지에서 동지적 관계를 맺고 옹호해나가는 것은 이 나라들의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물론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데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간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현시대의 전진운동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 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데서 인간이 의거하여야 할 원리가 민주주의원리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현 역사적 시대에서는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완성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철저히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고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기본 방도로 된다.
민주주의를 개선 완성해야 할 여지는 많다. 우선 민주주의원리를 정치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분야와 문화분야도 민주주의원리에 따라 발전시켜야 한다. 즉 경제분야와 문화분야에서도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고 인민대중의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 것이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올바른 방도로 된다.
인간생활을 민주화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주인으로 되게 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생활을 자주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비인간적인 것을 제거하고 사회생활을 더욱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요구에 맞게 개조해나간다는 점에서는 인간생활을 더욱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시기 민주주의를 개선완성하는데서 기본 장애로 되는 것은 폭력에 의거한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이다. 폭력과 약육강식은 다 동물세계의 잔재로서 반 사회적이며 비인간적인 요인이다. 민주주의를 개선완성해나가는 과정은 폭력적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을 반대하고 인간생활의 자주화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이에 기초하여 사회적 협조의 범위를 확대강화함으로써 인간생활의 사회화수준을 높여나가는 과정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적 원리는 인간생활에서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인류공동의 생존과 발전의 원리인 만큼 매개 나라들에서 뿐아니라 국제사회 전체를 규제하는 세계인민들의 공동의 생존원리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원리는 인류공동의 생존과 발전의 원리로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일부 독재국가들에서는 인권유린이 혹심하지만 국제사회가 수수방관하고 있으며 국제분쟁문제해결에 폭력의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평화가 완전히 담보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인민들이 공동의 노력으로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완성하여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구현해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업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민주주의원리를 국제사회 전체에서 구현하자면 민주주의원리를 훌륭히 구현한 세계정치질서와 세계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인간생활의 자주화와 사회화가 세계적 범위에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생활공동체의 단위가 오늘날의 민족이나 국가를 단위로 하는데로부터 인류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부터 인류를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의 이행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직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데서 획기적인 역사적 전환으로 될 것이며 이때부터 현 시대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위대한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시작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맞이할 때까지는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을 반대하고 인간생활을 자주화, 사회화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발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우리 한반도에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립도 최악의 경우에는 국제적인 대립과 결부되어 오래 끌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운명 문제에서 주체는 우리 민족인 것만큼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문제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투쟁하는가, 특히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 역량이 어떻게 투쟁하는가에 많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남북한간의 대립과 통일문제의 본질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고 있다.
우선 여기에서 문제로 되는 것은 남북한의 대립과 통일문제를 민족내부의 문제로만 불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북한 통치자들은 남북한의 통일문제를 전적으로 민족내부의 문제로 보면서 통일문제는 외부의 간섭이 없이 남북한의 당국자들이 민족화해의 정신에 따라 해결할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물론 남북한의 주민들이 같은 민족이고 남북한의 대립이 한 민족, 한 강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라는 점에서 민족 내부의 문제라는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남북한의 분단과 대립은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다.
제2차대전의 종결로 조선민족은 일본제국주의 기반에서 해방되었으나 남한에 진주한 미군과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에 의하여 한반도는 두 부분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북한은 소련의 영향 밑에 사회주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남한은 미국의 영향 밑에 자본주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때부터 북한은 사회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되고 남한은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일원으로 되어 서로 대립하게 되었으며 한반도는 양대 진영의 냉전의 중요한 대결장으로 되었다. 이것은 남북간의 분단과 대결이 처음부터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는 것을 말하여 주고 있다.
소련의 붕괴로 국제적 범위에서 냉전은 종식되었으나 냉전시기에 형성되고 공고화된 북한의 변태적인 독재체제는 그대로 남아있으며 그 결과 남북간의 체제상의 대립은 의연히 남북을 갈라놓고 대립시키는 기본 요인으로 되고 있다. 여기에서 남북간의 대립은 민족내부에서 남쪽과 북쪽간의 지역적인 대립인 것이 아니라 양립할 수 없는 두 체제간의 모순이며 그것은 의연히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이라고는 할 수 없을 수 있어도 독재체제와 민주주의체제 사이의 모순인 것은 틀림없으며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모순은 현 시기 국제무대에서 역사적 흐름의 기본 내용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남북한간의 체제상 대립의 본질을 왜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모순으로 보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남북한의 체제상의 대립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립으로 보고 있다. 이와 같은 견해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대립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을 계급적 모순으로 보며 사회주의를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대표하는 진보적 사회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역사발전과정을 계급투쟁 과정으로 잘못 이해한데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사회주의 사상은 민주주의를 완성하려는 목적으로부터 제기되었다.
반봉건 민주주의혁명의 결과 봉건적 신분제도가 철폐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기본이념으로 하는 새 사회가 건설되었지만 실제로는 빈부의 차이와 경제적 불평등이 남아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불만을 가진 인본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더욱 완성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제도를 사회주의적 소유제도로 바꾸어야 한다는 사회주의 사상을 내놓았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들이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차이를 계급적 차이로 본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발전의 차이로 보았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즉 인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제도나 사회주의제도 자체를 귀중한 것으로 본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다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가치를 가진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민주주의가 더 발전된 사회로 본 것이 아니라 계급적 입장에서 역사발전 과정을 고찰하는데로부터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노동자와 자본가의 계급적 차이에 귀착시켰다. 즉 노동계급의 이익에 맞고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가계급의 이익에 맞고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와 질적 차이를 가지고 있을 뿐아니라 절대적으로 우월하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자본가 계급이 국가정권과 생산수단을 독점하고 근로인민대중을 착취하고 억압하지만 사회주의 사회는 노동계급이 정권과 생산수단의 주인으로 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근로인민대중에 대한 착취와 억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은 노동계급의 독재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보다 우월하고 사회주의적 공동소유제도가 자본주의적 사적소유제도보다 우월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자본가계급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는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다하고 노동계급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사회에 자기 자리를 내주는 것이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인간은 자기의 생존과 발전을 실현하는데 절실한 이해관계를 가진다. 인간은 온갖 지배와 예속에서 벗어나 스스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기 운명을 개척하기 위한 창조적 활동을 자유롭게 진행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이러한 근본 요구에 맞는 사회는 발전되고 진보적인 사회이며 이런 요구에 배치되는 사회는 뒤떨어지고 불합리한 사회이다.
그러므로 사회제도의 진보성은 사회에서 차지하는 사람들의 자주적인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어느 제도가 더 잘 보장해 주는가를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여야 한다. 주권이 인민에게 있다는 민주주의사상의 본질이 바로 인민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주인의 지위를 보장하고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보장해 준다는데 있다. 이것은 사회제도의 진보성을 민주주의 원리를 어느 제도가 더 잘 구현하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어느 사회가 인민들에게 국가와 사회의 주인으로서의 지위를 잘 보장해 주는가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사회주의 사회에서 정권은 노동계급의 독재정권 또는 공산당 독재정권이라고 한다. 생산에 종사하는 많은 노동자들이 다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공산당의 독재라고 하지만 각이한 직업을 가진 많은 공산당원들이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다고 볼 수 없다.
지난시기 소련에는 2천만의 공산당원이 있었는데 그들이 다 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 것은 아니다.독재자로서의 특권을 누린 것은 공산당의 수령과 수령의 독재체제를 직접 관리해나가는 관료들 뿐이다. 나라마다 사정이 다를 수 있지만 이런 특권층은 당원 총 수의 약 5%정도 된다고 보고 있다. 일반 비당원 근로대중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독재체제를 직접 관리하는 관료를 제외한 공산당원들은 공산독재정권을 지지옹호하는데서 앞장설 의무만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가적 소유를 사회주의적 소유의 높은 형태로 인정하고 있다. 국가라는 사람은 없다. 결국 국가정권을 독점한 수령과 그의 관료들이 국가적 소유의 실질적인 주인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공장이나 농장의 재산을 맘대로 관리하고 처분하는 것은 수령과 그의 관료들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국가재산을 신성불가침한 것으로 여기고 절대로 침범하지 말데 대한 의무만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수령과 그의 관료들은 국가정권과 국가재산의 주인으로서 인간에 대한 지배권과 재산에 대한 처분권을 다 같이 독점한 막강한 특권을 행사하고 있다.
이러한 특권에 비한다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가들의 특권은 보잘 것 없다. 자본가들은 비교적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전체 국가재산의 한 부분이며 매개 자본가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은 국가재산 전체를 소유한 공산독재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다. 자본가들은 국가정권에 대하여서는 직접적으로 아무런 특권도 가지지 못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정권이 자본가계급의 독재정권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의 독재라는 주장은 말도 되지 않는 계급주의자들의 궤변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지도기관을 선거하는데 자본가들만 참가하고 자본가계급 출신만이 선거될 자격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공민들이 다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진다. 신분적 평등과 자유는 자본가들 뿐아니라 노동자, 농민, 소자산계층, 사무원 등 모든 사회성원들이 다 향유한다. 뿐만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주권재민의 원칙에 의거하여 일반대중이 정권활동을 비판하고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을 시정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법적 권리를 가진다. 이러한 자본주의 정치제도를 자본가계급의 독재라고 하는 주장은 전혀 사실과 맞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생활분야에서도 사람들이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자유롭게 기업활동도 할 수 있다. 또 자본가가 노동자들에게 부당하게 대할 때에는 파업할 자유도 가진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근로자들이 국가에 고용되어 수령과 그의 관료들의 명령지시에 따라 일할 의무만 지니며 파업할 권한도 없고 사표를 내고 그만둘 자유도 없다.
정신문화 생활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의 차이는 더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사상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를 다 누리고 있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인민들이 이러한 자유를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와같이 사회주의적 독재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를 간단히 비교해 보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이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보다 비할바 없이 높다는 것이 뚜렷하다. 이것은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보다 발전된 사회인 것이 아니라 뒤떨어진 사회이며 진보적인 새로운 사회인 것이 아니라 퇴보된 낡은 사회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사회주의적 독재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반대하다보니 민주주의 이전 사회인 봉건사회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주의 독재는 봉건적 전제주의를 부활하는 방향에서 후퇴하였다. 수령에 대한 개인숭배와 수령의 개인독재는 봉건 왕을 연상시킨다. 대표적인 실례는 북한의 수령절대주의체제에서 정권을 세습적으로 자기 아들에게 물려준데서 찾아볼 수 있다.
독재가 민주주의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며 민주주의발전을 기준으로 하여 사회제도의 진보성 여부를 규정하려고 한 사회주의 사상의 창시자들의 사상과도 모순된다. 이러한 명백한 이론적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정권은 다 계급적 독재정권인데 노동계급의 정권은 다수가 소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이지만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자본주의 정권은 소수가 다수를 억압하는 독재정권이라는 이론을 내놓았다. 그러나 모든 사실은 사회주의 독재야 말로 수령과 그의 관료집단인 소수가 전체 근로인민대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반 인민적 독재정권이라는 것을 실증해 주고 있다.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넘어가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퇴보인 만큼 현시대가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 이행하는 사회주의혁명의 시대라든가, 미래는 사회주의에 속한다든가 하는 따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주장이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잘못된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민주주의도 계속 발전하고 있지만 소유형태는 계속 변화되고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본질적 차이를 소유형태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무산계급독재체제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차이에서 찾아야 한다.
이것은 소련 식 사회주의와 미국식 자본주의 사이의 경쟁에서 소련의 패배의 본질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에 비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의 우월성에서 찾기 전에 소련의 무산계급독재체제에 비한 미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소련의 계획경제가 응당한 생활력을 발휘하지 못한 근본원인도 경제관리에서 민주주의가 결여되고 독재와 관료주의가 지배하게 된데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봉건적 전제주의 정치체제로부터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정치체제로의 이행은 위대한 혁명적 전환이었지만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체제로부터 소련 식 사회주의 독재체제로의 이행은 발전이 아니라 퇴보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 근본 이유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체제를 더욱 발전 완성시켜야 할 역사적 과업이 제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이 역사적 과업을 외면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무산계급독재에 의거하여 새로운 사회제도를 무리하게 창조해보려고 시도하였다는 사정과 관련되어 있다.
바로 여기에 현실보다 이상을 앞세운 공산주의자들의 비극이 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와 억압을 근절할 데 대한 이상적인 민주주의 구호를 내걸고 많은 양심적인 사람들의 동정을 끌었다. 그들은 적어도 정권을 잡을 때까지는 이러한 이상에 충실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권을 잡자마자 독재자로 변질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장악한 새 정권은 노동자, 농민의 정권인 만큼 착취와 억압과는 인연이 없는 정권이기 때문에 모든 근로자가 무조건 지지하고 받들어 나가야 한다는 점만을 강조하면서 정권을 장악한 자기들의 지배적 지위를 절대화하는 데로 나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역사는 정권을 잡기 전에는 인민에게 충실하였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정권을 잡은 이후에는 인민을 억압하는 독재자로 변질되는 과정을 걷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사회주의사회가 자본주의사회와 교체되어야 할 새로운 보다 발전된 사회라고 주장하였지만 인간해방의 견지에서 볼 때 사회주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보다 뒤떨어진 사회였다. 사회주의는 새것의 가면을 쓴 낡은 것이었다. 독일의 파시즘 독재도 새것이라고 주장하였지만 결국 새것의 가면을 쓰고 역사무대에 등장한 낡은 것이었다.
더구나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는 소련의 스탈린주의 독재보다도 훨씬 더 퇴보된 중세기적 독재체제인 만큼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체제와는 대비도 안되는 낡은 것이라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사람들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를 동정하는 사람은 진보적 인사에 속하고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를 수호하려고 하는 사람은 보수주의에 속하는 사람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것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보면 현 시대는 결코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를 혁명적 방법으로 때려부술 것을 요구하는 사회주의 혁명의 시대인 것이 아니라 특권을 견제하고 점차 없애나가기 위하여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나가는 것이 역사의 전진운동을 대표하고 있는 민주주의적 개혁의 시대라고 특징지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예컨대 노동계급의 처지를 개선하는 문제도 공산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폭력적 방법으로 자본주의체제를 때려부수고 노동계급의 독재정권을 수립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기업관리를 더욱 민주주의적으로 개선하는 개혁을 통하여 실현하는 것이 사회발전의 요구에도 맞고 노동계급의 이익에도 맞는 옳은 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시대의 기본 모순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간의 모순이나 노동계급과 자본가계급 사이의 모순이 아니라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간의 모순이라는 것을 말하여 준다.
오늘날 북한의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와 남한의 자유민주주의체제 사이의 대립은 우리 시대의 기본 특징인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 사이의 대립의 일환으로 된다. 그러므로 남북한의 대립을 단순히 민족내부의 모순으로 볼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역사적 흐름 속에서 국제적인 문제의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독재는 폭력에 의거하고 있으며 폭력은 침략과 전쟁의 화근으로 되고 있다. 오늘날 독재국가들은 폭력으로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하고 있을 뿐 아니라 침략과 전쟁을 도발하고 평화를 위협하는 장본인으로 되고 있다. 그러므로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 완성해나가는 진보적인 국제사회 앞에는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할 데 대한 과업과 침략과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수호할 데 대한 일대 과업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같은 2대 과업은 독재와 민주주의가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 한반도에서 더욱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문제는 민족적 과업인 동시에 국제적 과업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 일부 사람들이 남북간의 대립의 본질이 독재와 민주주의간의 대립이라는 것도, 독재를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세계 인민들의 공동과업의 일환이라는 것도 다 망각하고 남북간의 대립을 민족 내부의 모순으로 묘사하면서 남북의 당사자들끼리 민족적 화해와 협력의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한반도 문제의 본질을 왜곡하는 과오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자기들이 원인과 결과를 전도하여 생각하고 있다는데 대하여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즉 남북의 대립과 불화가 원인이 되어 북과 남이 정 반대되는 두 체제가 수립되었는가, 아니면 북에 독재체제가 수립되고 남에 민주주의 체제가 수립된 데로부터 남과 북의 불화와 대립이 나오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편견 없이 다시 한번 돌이켜 보아야 할 것이다.
제2차대전이 종결되고 우리 나라가 일본제국주의 기반에서 해방된 시점에서 우리 나라는 식민지 반봉건 사회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사회발전의 합법칙성의 견지에서 볼 때 우리 나라가 반봉건 민주주의 개혁을 거처 자본주의 길로 나가는 것이 옳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었다. 자본주의의 길로 나가는 것이 옳았다는 것은 오늘날 남북간의 판이한 발전상의 격차를 통하여 생동한 역사적 현실로서 여지없이 실증되었다. 결국 우리 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대립되어 6. 25전쟁의 불행까지 겪게 된 것은 전적으로 북한지역을 점령한 소련이 우리 나라의 사회발전 단계를 무시하고 사회주의 독재체제를 수립한데 그 근본원인이 있다는 것이 명백하다. 북한에 수립된 독재체제는 북한을 기아와 빈궁의 땅으로, 혹심한 인권유린의 중세기적 암흑의 땅으로 만든 근본원인으로 될 뿐 아니라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고 우리 민족의 통일을 방해하는 기본장애로 되고 있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서 평화를 수호하고 민주주의에 기초한 나라의 평화적 통일을 실현하기 위하여서는 첫째로도, 둘째로도 그 기본 장애인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수령절대주의 독재체제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보다 더 명백한 것은 없을 것이다.
또 북한의 독재체제와 남한의 민주주의체제의 대립이 처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제적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이 명백한 만큼 한국은 마땅히 자유민주주의의 국제적 아성인 미국과의 동맹에 튼튼히 의거하고 일본을 비롯한 자유민주주의 나라들과의 국제적 협조 밑에 한반도 문제를 해결하는 입장을 확고부동하게 견지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회주의로부터 개혁개방의 길로 나가는 나라들을 평가하는 데서도 올바른 기준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지난 시기의 사회주의적 독재를 버리고 개혁개방을 택한 나라들이 눈부신 발전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은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이 발전의 모델이 되는 것처럼 환상을 가지는 것은 시기 상조한 것이다. 이 나라들의 급속한 발전은 지금까지 사회주의 독재에 의하여 너무도 억압되어온 인민 적 에너지가 민주주의의 도입으로 해방된 결과 이룩된 것이지 이 나라들의 현재 사회체제가 이상적인 것이기 때문이라고 속단할 수 없다. 이런 나라들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한 것처럼 보면서 바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를 혼합하는 것이 발전의 제3의 길인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현 역사발전 단계에 대한 인식을 잘 못 가지고 있는 것이다.
현 역사발전단계에서는 민주주의원칙을 정치, 경제, 문화의 모든 면에서 더욱 잘 구현해나가는 것이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기본 추동력으로 되고 있다.
오늘 개혁개방으로 나가고 있는 나라들의 민주주의 발전수준은 아직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의 민주주의 발전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개혁개방으로 나가는 사회주의 나라들의 전반적인 사회발전 수준이 오늘의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을 따라 잡기 전에는 이 나라들의 과도적인 사회체제에 대하여 마치도 그것이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발전형태인 것처럼 속단하여서는 안 될 것이다. 이 나라들은 아직도 민주주의 길로 전진하는데서 시련의 고비를 넘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의 계급투쟁과 무산계급 독재론을 버리고 개인과 사회적 집단의 민주주의적 발전을 담보하는 새로운 정치이론에 의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아직도 북한과 같은 최악의 독재국가를 계급적 연대성의 견지에서 동지적 관계를 맺고 옹호해나가는 것은 이 나라들의 민주주의적 발전에는 물론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적 발전의 요구에 맞지 않는다는데 대하여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민주주의와 비 민주주의(독재)간의 대립을 주축으로 하는 현시대의 전진운동은 어디까지 계속될 것 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데서 인간이 의거하여야 할 원리가 민주주의원리만이라고는 볼 수 없다. 그러나 현 역사적 시대에서는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완성하여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 철저히 구현하는 것이 인간의 자주적 지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고 사회발전을 촉진하는 기본 방도로 된다.
민주주의를 개선 완성해야 할 여지는 많다. 우선 민주주의원리를 정치분야의 원리로만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경제분야와 문화분야도 민주주의원리에 따라 발전시켜야 한다. 즉 경제분야와 문화분야에서도 인민대중이 주인이 되고 인민대중의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 것이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는 올바른 방도로 된다.
인간생활을 민주화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에서 인간이 주인으로 되게 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생활을 자주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지만 비인간적인 것을 제거하고 사회생활을 더욱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요구에 맞게 개조해나간다는 점에서는 인간생활을 더욱 사회화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현시기 민주주의를 개선완성하는데서 기본 장애로 되는 것은 폭력에 의거한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이다. 폭력과 약육강식은 다 동물세계의 잔재로서 반 사회적이며 비인간적인 요인이다. 민주주의를 개선완성해나가는 과정은 폭력적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을 반대하고 인간생활의 자주화수준을 높이는 동시에 이에 기초하여 사회적 협조의 범위를 확대강화함으로써 인간생활의 사회화수준을 높여나가는 과정으로 되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적 원리는 인간생활에서 보편적 가치를 가지는 인류공동의 생존과 발전의 원리인 만큼 매개 나라들에서 뿐아니라 국제사회 전체를 규제하는 세계인민들의 공동의 생존원리로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민주주의원리는 인류공동의 생존과 발전의 원리로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하고 있다. 아직 일부 독재국가들에서는 인권유린이 혹심하지만 국제사회가 수수방관하고 있으며 국제분쟁문제해결에 폭력의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평화가 완전히 담보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세계인민들이 공동의 노력으로 민주주의를 더욱 개선완성하여 국제사회에서 보편적으로 구현해나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절박한 과업으로 제기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민주주의원리를 국제사회 전체에서 구현하자면 민주주의원리를 훌륭히 구현한 세계정치질서와 세계경제질서를 확립하는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인간생활의 자주화와 사회화가 세계적 범위에서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인간이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생활공동체의 단위가 오늘날의 민족이나 국가를 단위로 하는데로부터 인류를 하나의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민족과 국가를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부터 인류를 단위로 하는 생활공동체로의 이행은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자주적 직위와 창조적 역할을 높이는데서 획기적인 역사적 전환으로 될 것이며 이때부터 현 시대와 질적으로 구별되는 위대한 새로운 역사적 시대가 시작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역사적 시대를 맞이할 때까지는 독재와 약육강식의 경쟁을 반대하고 인간생활을 자주화, 사회화하기 위한 민주주의적 발전을 계속해야 할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볼 때 우리 한반도에서 독재와 민주주의의 대립도 최악의 경우에는 국제적인 대립과 결부되어 오래 끌 수도 있다는 것을 예견하는 것도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운명 문제에서 주체는 우리 민족인 것만큼 조국통일을 앞당기는 문제는 우리 민족이 어떻게 적극적으로 투쟁하는가, 특히 우리 민족의 민주주의 역량이 어떻게 투쟁하는가에 많이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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