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수기]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 김 춘 애
- 북민위
- 2024-10-11 07:3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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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수기]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
김 춘 애
탈북여성(2003년 6월 입국)
화룡시 변방구류소, 무산군 노동단련대, 청진 집결소 경험자
저는 평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1997년에 탈출하여, 한국에는 2003년 6월 15일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에서의 인신매매는 제 자식들도 당했고, 제가 직접 본 것도 많았습니다. 북한에서는 1995년부터 배급이 끊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도 1995년 6월부터 배급이 줄어들었습니다. 저는 인민반장이었기 때문에 반원들을 관리해야 하는 주어진 임무가 있어서 장사도 하기 힘들었고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맏딸은 1년 동안 청년근위대에 나갔습니다. 근위대 생활은 실제 군대생활하고 똑같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는 자꾸 딸에게 도둑질을 시켰습니다. “벽돌 채워라,” “모래 채워라.” 그래서 딸은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서 매를 맞기도 했고, 결국 집으로 도망쳐 왔습니다.
3일째가 되니까 1개 분대가 잡으러 왔습니다. 저는 처음에는 밤새 설득하다 못해 마지막에는 때리기도 하면서, 군대를 등지는 건 조국을 배반한 것과 같으니 강압적으로 끌고 새벽에 다시 군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만에 다시 도망쳐 나왔습니다. 또 도둑질을 시킨 것이었습니다. 또 문제가 제기되니까 부소장이 우리 애만 24시간 보초근무를 세우고, 못살게 한 것이었습니다. 청년근위대 안간 것, 배치 받고 자기 배치지역으로 안간 것, 학교 안간 것 등 나쁜 것들만 막 적어내니까, 저는 딸을 숨길 수도 없고 너무 속상해서 무산으로 보냈습니다.
1997년 8월 15일에 기차에 태워 딸을 보냈는데, 한달이 지나도록 소식이 없었습니다. 뭔가 잘못됐구나 생각이 들었지만 연락체계가 다 끊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막내아들을 집에 두고 16살 된 둘째 딸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담당 주재원을 찾아가 통행증을 부탁했지만 거절했습니다. 국경에는 도강생(월경자)들이 많기 때문에 안 되며, 옛날에는 안면(뇌물)도 통하고 했지만 이제는 그마저 안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옛날에 살던 곳의 지도원을 찾아가 당증까지 맡겼습니다.
당증은 곧 정치적 생명이니까 믿어주었고, 9·9절에 받는 고급담배 두 갑을 주고, 통행증이 분실되었다는 확인증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둘째 딸은 “당증 맡기고 갔다가 사고가 났다간 큰일 난다”고 펄쩍 뛰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는 중국에 가서 딸을 구해오겠다는 생각밖에 없었기 그런 생각조차 못했던 것입니다. 잘못되면 정치적 생명이 끊길 수 있다는 생각이 번쩍 들어 다시 돌아가 당증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확인증을 반납하고 당증을 돌려받았습니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서 대동강을 지나 강동까지는 통근열차를 타고, 어머니와 막내동생이 사는 청천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큰 딸 이야기를 듣고 어머니는 펄쩍 뛰시며 무산에는 도강생이 많은데 굶어죽지 않았다면 중국으로 넘어갔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도 중국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떠나는 날 아침에 어머니가 소금을 뿌려주셨습니다.
막내동생의 신랑이 안전부에 있었기에, 성천군 집결소에 가서 통행증 분실 확인서를 받아 성천 역전에 가서 청진까지 기차표를 받았습니다. 검열이 계속되었고, 결국 걸렸습니다. 남편이 압록강체육단에 있다고 속여 아들이 있으면 내가 체육단에 넣어주겠다고 봐달라고 했습니다. 다행히 험한 대우는 받지 않았습니다. 통행증이 없는 사람들을 한데 모아 부령에서 내려놓으려고 하기에 줄을 지어 내리던 중간에 살짝 빠져나와 다시 기차에 올랐습니다.
기차는 다시 달려 부령선을 지났지만 국경선 근처에 이르자 다시 검열이 시작되었고, 결국 또 걸리고 말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돈은 100원이 전부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이를 찾으러 가니 제발 봐달라고 애걸하면서 그 돈을 모두 주었습니다. 더 이상 그렇게 무산까지 가면 다시 걸릴 것 같아 철산에서 내려 남동생이 있는 무산까지 15~20리 정도를 둘째 딸과 함께 걸었습니다.
<무산에 도착하니 남동생도 얼굴이 새까매져 있었습니다. 맏딸이 시누이와 함께 사발을 팔러 중국으로 건너간 것 같은데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딸이 없다는 걸 알았으니, 무산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혹시나 10월 10일까지 기다려보다가, 중국으로 건너갈까 아들을 남겨두고 온 평양으로 돌아갈까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아들은 평양에 있고 친척들이 있는데, 중국에 간 딸은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무슨 일을 당할까 더 걱정이 됐습니다.
그래서 갈림길에서 망설이다가 중국으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10월 10일이 당창건기념일이라 군대도 휴일이겠거니 생각하고 건너려고 했지만, 눈이 내리는 통에 다음날인 11일 저녁 6시에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너려는데 눈이 녹아 불어난 물살에 둘째 딸을 놓쳤습니다. 한 두 시간 찾지 못하고 헤맨 것 같습니다. 이리 저리 헤매다 결국 저도 떠내려갔는데, 운 좋게도 딸은 돌 하나에 걸려 살아 있었습니다. 은인과 같은 돌이었습니다. 둘째 딸을 겨우 찾아 인공호흡을 시켜 정신을 차리게 하고 강 건너 둑으로 올라갔습니다. 근데 올라가 보니 변방대 차가 있었습니다. 도로로 나서려면 5m 정도의 바위를 타고 올라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100m 정도 옮겨가는데 차소리가 들리면 다시 숨고 숨기를 반복했습니다. 차 불빛에 보니 변방대 같았습니다. 그래서 차가 지나간 다음에도 도로로 나서지 못하고 맨발로 논밭을 뛰어갔습니다. 뛰어간 곳에는 한 농가가 있었고 중년의 조선족부부와 딸이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 옷이 다 얼어 있으니 조선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이불도 씌어주고 옷도 주었습니다. 그렇게 30분쯤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하얀 이밥(쌀밥)까지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보고 둘째 딸은 평양에서 굶고 있을 동생이 생각난다며 울었습니다. 저도 이밥은 1996년 이후 보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2. 계속되는 인신매매
그 부부로부터 중국에서는 조선여자들을 가리켜 나이도 상관없이 모두 ‘돼지’라고 부르며, ‘한 마리, 두 마리’ 하며 다 팔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그 곳에서 얼마간 일하는 것이 안전하겠다고 생각하여 일자리를 부탁했습니다. 그 부부로부터 소개 받아 화룡시에서 보모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 일한지 일주일 정도 지난 어느 날, 채소를 사러 장마당에 갔다가 돌아오니 둘째 딸까지 없어졌습니다. 딸이 어디 갔는지 물어보아도 그들은 모른다고만 대답했습니다.
저는 딸 찾으러 정신병자처럼 한 달 동안 헤메다 11월 5일, 22살 된 한 조선여자를 만났는데, 팔려와 있었던 그녀는 갈 곳 없는 제 처지가 딱해 보여 자기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3일 정도 그 집에 머무르며 저보다 10살 아래의 한 남자를 알게 되었는데, 두 딸을 다 찾아주겠다는 말에 동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에게 식모살이하던 집의 약도를 그려주었습니다. 그가 그곳을 찾아가보니 처음에는 모른다고만 대답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한때 용정시 깡패였던 남편이 그곳에 아는 사람이 있어서 데리고 가니까 가르쳐 주는 것이었습니다. 보모로 있던 그 집에서 둘째 딸을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주인집에서 직접 못 팔고 자기 친구에게 넘겼다고 했습니다.
계속 알아보니, 딸은 흑룡강성 마룡현으로 4,000원에 팔려간 상태였습니다. 그곳에 찾아가니까 팔아먹은 당사자가 잠적하여 찾지 못했습니다. 두 달 동안 못 찾고 헤맸지만, 인신매매범도 수중에 돈이 다 떨어져 화룡현에 와있다는 것을 알고 붙잡았습니다. 16세인 딸은 팔려간 곳에서 매일 울었고, 불쌍해보여서 매일 이웃집들에서 재워주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동네에는 약 100세대가 있었는데 거의 각 집마다 조선여자가 팔려와 있었다고 합니다. 남편은 경찰을 꼬아내기 시작했고, 시아버지로부터 4,000원을 내와서 양력 설날 즈음 딸을 데리고 왔습니다.
하지만 파출소에서는 계속 저희들을 잡으려고 했습니다. 다행히 마침 파출소장이 남편과 동창이라서 돈을 좀 먹였습니다. 그런데, 옆집에 살았던 혜영이라는 조선여자에 대해서는 파출소에서 계속 잡으려고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 집에서는 그 여자를 인신매매꾼들에게 다시 팔았습니다.
그녀는 그 집에 팔려 와서 열 세달 동안 며느리 구실을 했는데, 길림에 있는 한족에게 또 팔아먹은 것이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화룡의 인신매매꾼에게 넘겨졌고, 화룡에 왔다가 또 다시 어디론가 팔려 갔습니다. 문제는 그녀가 길림에 있는 동안, 인신매매꾼들에게 화룡현에서 살던 옆집에 조선에서 온 모녀가 함께 있다는 말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인신매매꾼들로서는 저희 집 하나를 치면 두명이 나오는 돈벌이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한달 가량 저희들을 감시하고 순찰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게 1999년 5월 즈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저희들은 낮에는 하루 종일 일하고, 밤에는 소외양간에서 숨어서 잤기 때문에 그들이 아무리 순찰을 돌아도 찾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저희들 또한 인신매매꾼들이 저희들을 잡아가려고 밤마다 순찰을 돌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너무 아프고 해서 딱 하루만 집 안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잠깐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습니다. 이제 영화하겠다 싶어 정신이 빠져 문도 걸지 않았습니다. 술 좋아하는 남편은 취해서 잠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9시 20분 정도 되니 세명의 인신매매꾼들이 갑자기 나타나 하남 파출소에서 왔다고 하면서 후다닥 방안으로 들이닥쳤습니다. 황급히 남편을 깨우려고 하니까 못 깨우게 제지했습니다. 급한 김에 손길이 닿은 남편의 허벅지를 꼬집어 비틀었습니다. 어슴푸레 잠이 깬 남편이 놀라 눈을 뜨자, 인신매매꾼들은 그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머리를 발로 눌러 밟았습니다.
그들은 파출소에서 나온 것처럼 남편을 속이기 위해 호구를 보자고 했고, 남편이 바로 앞집인 시댁에 있으니 가져오겠다고 둘러대니까 나가지는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더니 딸과 저의 팔을 비틀면서 무조건 옷을 입으라고 했습니다. 제가 그들에게 신분증을 보여달라고 했지만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밖으로 나가서라도 이 사람들이 진짜 파출소에서 왔는지 재차 확인하려고 하니까 제 뺨을 때리기도 했습니다. 딸이 “엄마 환자인데 왜 때리냐”고 악을 쓰니까 그들은 “그래 너희 엄마 심장병 있어서 환자인거 다 안다”고 윽박을 질렀습니다.
벌써 저희들을 감시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단은 순순히 따라나서는 척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제 가면 다시 못올 집이니, 반드시 가지고 갈게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증과 시민증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그건 가지고 가서 뭐하나”하는 것이었습니다. 파출소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서 보니까 파출소 차도 아닌 택시가 서 있었습니다. 딸에게 도망가라는 눈짓을 보냈습니다. 택시 쪽으로 끌려가던 딸이 오줌이 마렵다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냥 그 자리에 앉아서 싸라”고 말했고, 딸은 정말 앉아서 오줌을 싸는 척 하다가 후다닥 밭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농촌이고 밤이라서 온통 새까맣기 때문에 금방 눈앞에서 달아났습니다. 인신매매꾼들이 당황한 틈을 타 저도 도망을 쳤습니다. 도망가면서 저희가 비명을 지르니까 그 사람들은 황급히 택시를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던 찰나 저는 건너 시댁으로 달려가 사람들을 깨웠습니다. 그렇게 시부모님들이 밖으로 나오니 그 때부터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면서 하염없이 눈물이 났습니다. 그렇게 위험에서 일단 벗어났습니다.
그러나 2달도 채 안되어 1999년 7월에 그들이 또 들이닥쳤습니다. 그날은 비가 축축하게 내려 외양간에 머물지 못하고 집안으로 들어가 자야했습니다. 밤 11시쯤 되었는데, 그 때는 바깥에서 남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날도 술에 취해 깊은 잠에 들어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일로 개를 기르기 시작했는데, 개가 짖는 통에 무서워서 딸을 데리고 뒷문으로 도망을 치려고 했지만 이미 포위된 상황이었습니다. 한 남자가 칼을 배에 들이대며 저의 입을 틀어막아 옷도 챙겨 입지 못하게 하고 파출소 차인 것처럼 검게 칠한 차에 실어 끌고 갔습니다. 소리도 못 지르고 뛰지도 못하고 그대로 끌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화룡시 소가자 마을이었습니다. 찬찬히 보니 그 놈들은 한패가 아니라 두패였습니다. 운전수는 차를 대는 한 패였고, 뒤의 두 명은 납치를 맡는 다른 패였습니다. 운전수는 보초를 섰고, 둘은 저희를 데리고 꼬불꼬불한 길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좁은 곳에 가둬두고 며칠 동안 감시당하며 지냈습니다. 제가 몸이 안 좋으니까 일부러 말이 통하지 않는 한족병원으로 데려갔고, 혹시나 말이 통할까 계속 감시 했습니다. 그들은 한족말로 계속 전화를 하는데 분위기상 저쪽에서 저희 딸을 달라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딸이 팔려가는 것이 어쩔 수 없다면 제발 저도 같은 마을로 팔려가게 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들은 조금이나마 감동하였는지 딸을 그 한족들한테는 못주겠다고 했습니다. 어쨌든 저희들은 화룡현 탄광이 있는 곳에 만원씩에 팔려가기로 결정되었고, 길림에 있는 사람들이 사러 온다더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딸은 그 때 삼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갇혀있던 그 집 주인이 몰래 다가와 조용히 하는 말이 “가다가 도망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과 함께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일을 잘해서 한달에 500원씩 번다며, 같이 일하면 얼마든지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좋다. 전화번호를 달라”고 말했습니다.
다음 날, 너무 덥고 해서 앞 개울에 목욕을 하러 나갔는데, 화장실이든 어디든 말도 없이 나갔다고 막 욕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 중 한 명과 언성을 높이며 싸웠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옆집에 사는 한족사람이 조선말을 알아듣고 헌정대에 신고를 했습니다. 눈치를 챈 집주인도 나가고 저와 싸운 놈도 달아난 뒤, 혹시나 했는지 한 명만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집주인도 안 나타나고 우리도 도망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때 밖에서 누가 전화기 검열을 하러 왔다고 하면서 들어왔습니다.
제가 노골적으로 신분증을 보자고 했고 북한에서 왔다는 것도 말했습니다. 알고 보니 옆집에서 신고가 들어가자마자 파출소에서 집주인 패거리를 계속 감시했던 것이었습니다. 달아난 줄 알았던 집주인은 이미 잡혀서 족쇄가 채워져 있었고, 저는 헌정대에서 나온 듯한 사람에게 삼촌에게 빌려준 돈을 받으러 온 것 뿐이라고 했습니다. 헌정대는 집주인을 마구 때렸고 우리는 변방대로 넘겨졌습니다.
3.화룡시 변방구류소에서의 40일
거기서 12살짜리 여자아이를 만났습니다. 가정이 뭔지 시집이 뭔지도 모르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던 남자 전화번호를 옷춤에 감추고서는 “다시 중국에 오게 되면 그 아저씨를 찾을거야”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너 그래서 그 아저씨가 뭐가 좋니” 물어보니, 밥을 해서 무릎에 앉혀놓고 먹였다는 것입니다. 12살짜리면 한참 부모 손 밑에서 어리광 부리고 응석부리고 공부할 아이인데 그 아이가 뭘 알았겠습니까. 그 아저씨가 매일 무릎에 앉혀 밥 먹이고 하다가 시장에 옷 사 입히러 나왔다가 잡혔다고 했습니다.
변방대에 있으면서 별별 이야기를 다 들었습니다. 가만 들어보면 질나쁜 조선족들은 북한 여자를 파는데, 거저 팔지도 않았습니다. 대개 저희가 실컷 데리고 놀다가 파는데, 고분고분 응하지 않으면 족쇄를 채워 강간하지 않으면 스패너를 자궁에다 꽂기도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무산에서 온 한 여자는 북한에 남편과 애가 두명 있는데 그 가정을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 팔려가면서 남편에게 500원을 주고 나왔습니다. 남편은 자기 각시를 팔면서 임신만 되지 말고 돌아오라고 했다고 합니다. 가정을 유지하려니까 각시마저 팔 수밖에 없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그녀는 석달 동안 한족이랑 결혼해서 살다가 임신이 되었습니다. 한족말도 모르니까 병원을 찾아가 유산시켜달라고 할 수도 없어서 자기 발로 파출소에 뛰어 들었다고 합니다.
한족 시누이가 파출소로 찾아와 이제라도 동생이랑 살겠다면 돈을 들여서라도 꺼내주겠다고 하는 걸 거절했다고 합니다. 북한에 두고 온 새끼들이 있어서 제 발로 잡혀간 것이었습니다. 엄마가 딸을 팔아먹은 것도 있었습니다. 어쨌든 옛날에 심청이가 자기 아버지를 위해서 쌀 삼백섬에 팔려갔다는 이야기는 전설이 아니고, 지금의 북한이 그렇습니다. 저는 변방대에 40일 동안 있으면서 그걸 알았습니다. 딸이 엄마를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마누라가 남편과 자식을 위해서 팔려가질 않나, 식구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자기가 자기 몸 하나를 희사하질 않나. 그곳에 1999년 7월 2일에 들어가서 40일만인 8월 10일 북송되어 무산보위부로 끌려갔습니다.
4. 치욕스러웠던 무산보위부
무산보위부로 끌려갈 당시까지도 우리는 납치꾼들이 비싼 값에 우리를 팔아먹으려고 입힌 찐바바지(청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미국 청바지 입고 왔다며 보위부 회관에서 당장 벗기는 것이었습니다. 여름인데 딸이 팬티만 입고 또 뭐 입었겠습니까? 그래서 한 여자가 입고 있던 춘추내의를 얻어 입히고 저는 하늘하늘 비치는 잠옷바지를 입었습니다.
무산회관에서 집주소를 조사하고 보위부로 보내졌습니다. 가니까 여자들이 열명 있었는데 모두 발가벗겼습니다. 머리에 낀 핀침까지 다 벗겼습니다. 가슴이 큰 여자들은 그 밑까지 들춰 검사합니다. 옛날에 누가 가슴 밑에 돈을 감추고 반창고까지 붙이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발가락 짬(사이)이며, 머리카락 속까지 다 검열합니다. 그리고 여자들은 팔을 머리 뒤로 넘겨 손가락을 끼게 하여 60번 앉았다 일어났다, 뽐쁘훈련이란 걸 시킵니다.
자궁이나 항문에 돈을 숨겨뒀으면 힘주면 나온다고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60번 일어났다 앉았다를 시키는데, 관절이 안좋아서 도저히 못하겠다고 하니까 그것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겨우 60번을 채우고 나니까 모두 엎드리라고 했습니다. 돈이 나왔나 안나왔나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여자들 생리대 갈피갈피까지 다 검사합니다.
2달 짜리 갓난아기를 한족씨라며 책으로 그 갓난아기 머리통을 막 때립니다. 애는 소리치며 막 웁니다. 애가 뭘 압니까. 태어난 것도 죄입니까.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임신한 여자들을 발로 막 찹니다. 저는 그 때 심장이 안 좋아서 약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도 다 제 놈들 주머니로 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다 검열해서 옷, 전화번호, 돈까지 모조리 뜯어 검사하고 무산군 안전부로 보냅니다. 군안전부에서 또 검사합니다. 거기서 그 날로 단련대로 보내집니다. 군안전부에서 단련대까지 그 먼 거리를 뛰어가도록 시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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