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수기] 우리 가족의 운명 (2)
- 북민위
- 2024-04-25 08:1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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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 그리고 설움
그때부터 저의 가족은 아버지 없는 가족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하러 나간 저의 여동생이 자정이 지났는데도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리려도 동생은 끝내 집에 오지 않았습니다.
친구들 집에도 찾아다녔지만 모두 허사였습니다. 이미 제 동생은 중국에 드나드는 도강자를 통해 탈북한 뒤였습니다.
이제 저의 집은 월남자가족 뿐 아니라 탈북자 가족이란 죄까지 쓰게 되었습니다.
온 동네에서 수군거리는 마을 아주머니들의 사나운 소리, 사람들 마다 피하는 눈길뿐이었습니다. 게다가 보안원과 보위지도원의 감시 속에 우리가족의 행동 하나하나가 감시당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어머니는 시내 친척집에 나들이만 갔다 와도 오늘은 어딜 갔으며 뭘 하고 왔느냐는 등 보안원과 보위지도원의 보고 문건 속에 올려야만 했습니다. 저 역시 같았습니다.
우리 가족은 온 동네의 감시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우리어머니는 집을 이사하기로 결심했고 제가 탈북하기 두 달 전인 시내 근처로 이사를 갔습니다. 남동생 두 명은 이미 조선인민군으로 군복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 때 우리 식구는 어머니와 나 둘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저의 생활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저는 점점 이 제도가 싫어졌고 이 모든 것을 떠나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동생의 무소식으로 눈물 흘리고 밤을 새우는 어머니를 혼자 두고 불효막심하게 저까지 탈북하게 되었습니다. 제 결심을 어머니에게 말씀드렸지만 어느 부모 제자식 멀리 이역나라로 가는 험한 길을 떠나는 것에 동의하겠습니까.
하지만 어머니는 이내 저를 이해해 주셨고 기둥처럼 저를 믿고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저의 길을 막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를 혼자 두고 떠나는 저의 모습은 하염없는 눈물로 얼룩졌습니다.
저는 어머니에게 꼭 소식을 보내겠다고, 내가 떠난 후 누구네 집에서 소식을 전해 들으시라고, 부디 건강한 몸으로 앓지 말고 제가 모시러 올 때 까지 살아 계시라고 몇 번이고 당부하면서 저는 한 맺힌 북한 땅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 이 약속을 지켜드리지 못하는 불효자식이 되었습니다.
제가 탈북한 당시 나이는 26살이었습니다. 저는 그 때 연길시 조선족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었는데 우리 같은 탈북자들은 한국에 가야만 산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저는 이 조선족을 통해 로녕성 심양시 농촌마을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집은 마을에서 그리 못 사는 측도 아니고 잘 사는 측도 아닌 평범한 집이었습니다.
저의 남편이라는 사람은 저와 나이가 17살 차이로 삼춘, 아니 아버지나이라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였습니다.
저는 글로도 말로도 통하지 않는 이집에 들어와 음식도 생활풍습도 다른 한족들의 생활을 하며 살아가던 어느 날 마을의 조선족 학교에서 교원을 하는 교포 여선생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부터 저는 그 교원이 퇴근시간을 기다렸다가 집에 가서 중국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우리 어머니와 나이가 같았으며 전 어머니처럼 따르고 또 그 교원은 저를 딸처럼 사랑해주었습니다.
제가 음식이 맞지 않아 하는 것을 알고 된장과 고추장, 김치도 가져다주었으며 저녁마다 집에 오면 냉면국수도 말아주면서 친절히 대해주셨습니다. 당시 제가 살던 집에는 한국 위성텔레비전이 있었는데 저는 그것을 보며 한국의 현실에 대해 차츰 알 수 있게 되었고 한국 분들이 자유와 권리를 위해 투쟁하고 시위하는 모습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이 한족 남자와 더는 살 수 없었기에 집을 탈출하여 저를 팔아먹은 조선족을 다시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북녘에 두고 온 어머니소식이 너무나도 안타까워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조선쪽에 경계가 심해 전화도 오지 않는다고 하면서 여기 연길은 검문이 대단히 심하니 다른 곳으로 또 시집을 가라고 했습니다. 또 팔려가라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대답이 없자 그는 요번에 가면 돈도 얼마간 주겠다고, 그 돈으로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한테 자기가 직접 가서 전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거짓이라는 것을 뻔히 알았지만 갈 곳이 없었던 저한테는 별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또 다시 조선족인간들의 돈벌이 농락물이 된 저는 그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팔려 갔으며 또 다른 연변 조선족에 의해 흑룡강성 대경시에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온성군에서 왔다는 24살 난 처녀와 같이 동행하였는데 우리가 도착하자 이들은 대경시의 어느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한 후 우리를 사기 위해 온 한족 남자들에게 맞선을 보게 했습니다.
그 때 남자들이 왔는데 한 명은 30살 난 하체 장애자 였고 한명은24살의 한족 총각이었습니다. 이들은 그들에게 만 이천이라는 돈을 요구하였는데 다리를 저는 남자는 그만한 돈이 없는지라 24살 난 총각이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 때 나와 함께 온 함경도 온성 출신의 여자는 저보다 키도 작고 인물 또한 못하여 나이가 많았지만 저를 데려간 것 같았습니다.
이들은 저를 차에 태우고 대경시에서 3시간도 더 들어가는 농촌 마을에 데려갔습니다.
도착해 보니 지붕도 없는 움막 같은 집이었으며 이 집이 제가 앞으로 생활하게 될 그 남자의 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은 농사로 힘들게 사는 이 마을에서 제일 곤란한 집이었습니다. 앞뒤로는 산이 보이지 않는 넓디넓은 사막이었고 삼일에 한 번씩 황사바람이 집을 흔들 정도로 불어대는 지역이었습니다.
집이란 어찌 더러운지 또 아무리 치워도 치운 티가 나지 않고 아무리 닦아도 닦은 티가 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저의 동생보다도 더 어린 남자를 남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일이 더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고운 한족 식구들이라 저는 그런대로 하루하루를 생활하며 농사일도 했습니다. 이곳에서 저는 농사일을 하면서 개인 농기계의 우월성을 체험하기도 했습니다.
이 남자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이렇게는 살 수 없었던 저는 또다시 이집을 탈출하여 제가 처음 팔려갔던 조선족을 다시 한 번 찾아갔습니다.
어머니소식이 궁금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를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 생각으로 돈을 벌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습니다. 자나 깨나 나의 소식만을 기다리고 눈물 흘리며 가슴 앓을 어머니를 위해 나를 희생하자는 생각을 하고 있던 저에게 조선족은 또 다시 저를 속이려고 했습니다.
여기나와 갈 곳 없고 반겨 줄 사람 없는 저를 잘 알고 있는 조선족은 이번엔 자기가 직접 나서겠다면서 다시 한 번 한족에게 시집을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돈을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었던 저는 다시 한 번 이들의 돈벌이 농락물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눈물만 흘릴 따름이었습니다.
탈북자의 운명은 어디가나 같았습니다. 팔리고 또 팔리고... 그것은 탈북여성들의 당연한 고통이었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이 남자와 같이 산동성 워이방시 어느 자그마한 시내로 가게 되었으며 저는 여기서 또 어느 탈북자 여성의 소개로 한족 집에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집은 좀 잘 살았지만 아들이라는 사람은 25살 이였지만 7살 난 아이의 인식수준을 가진 뇌막염 환자였습니다. 첫날에는 그의 행동에 의문이 갔지만 알고 나서는 더 이상 생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소개해준 탈북여성의 집에 전화를 하게 되였고 그들은 저를 데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는 자기는 소개비만 받았다고 하면서 이 많은 돈을 다시 물어주자면 너는 다시 다른 집에 시집을 가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같은 처지의 동료인지라 저를 따뜻이 대해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또다시 흑룡강성 목단강시의 어느 자그마한 농촌에 5살 난 아이가 있는 홀아비 한족 남자한테 팔려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 여성은 저에게 돈 이천 원을 몰래 주면서 어머니에게 도움을 주라고 만약에 이 집에서 살기 힘들면 자기에게 연락하면 일자리를 소개해 주겠다는 것입니다.
비록 팔려가는 몸이면서도 그 여자의 말 한마디는 저의 마음을 울려놓았습니다.
그 돈 이천 원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었고 어머니를 도와줄 수 있다는 큰 희망 이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저는 반년이라는 길지 않은 기간에 4번이나 운명을 내싣고 다니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4번이나 팔려 다니는 서러움을 당해야만 했던 나...
이것은 나 뿐 아니라 탈북여성들의 누구나 겪는 공통의 설움이었습니다.
팔리고 팔려 다녀야만했던 이국땅에서의 설움은 나에게는 크나큰 고통 이였지만 한편으로는 또 하나의 체험을 쌓는 관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일 북한이 중국보다 잘 사는 나라였다면 우리가 이렇게 팔리우는 몸이 되었겠는가, 말로만 강성대국을 부르짖는 저 북한은 어찌하여 한 개 국가로서 많지도 않은 인구를 먹여 살리지 못해 이렇게 수많은 인민들이 이역만리땅 까지 헤매게 하는가. 350만 명의 주민들을 굶어 죽게 한 북한이 과연 국가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봐야하는지...
지금도 나날이 굶어죽는 사람들을 보고도 아무런 대책하나 없는 지옥의 국가, 또한 인민의 눈을 가리고 눈뜬 소경으로 만들어놓고 입과 귀를 정신적으로 마비시키는 악몽의 국가, 인권유린 국가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은 이리저리 팔리는 몸으로 살 수 없다고 생각한 저는 이집에서 마음의 자리를 잡으려고 결심하였지만 이 결심 또한 어리석은 결심이었음을 곧 깨달았습니다.
남편이라는 사람은 술을 많이 마셨는데 술만 마시면 트집을 걸고 제가 온지 일주일도 안 되어 저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이 술질로 하여 본처와도 이혼 하였다는 것이었습니다.
비통한 어머니의 소식
그리하여 저는 또 이 집을 탈출하여 다시 산동으로 탈북여성을 찾아가게 되었고 여기서 저는 그를 통해 일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가 소개해준 회사는 한국 사람이 운영하는 식품회사였고 이 회사는 산동성 청도 부근에 있는 교주시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김치 포장하는 일을 하게 되었고 이회사의 상호는 "환영식품회사" 였습니다.
월급은 말로는 800원이라도 하였는데 정작 우리 탈북자들에게는 550원도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받아 주는 것만으로도 고마웠으므로 말없이 일했습니다.
그러던 저는 월급을 타 가지고 두 달 만에 어머니가 걱정되어 연길로 나갔는데 우연히 버스 안에서 알게 된 연길 조선족분의 도움으로 저는 어머니와 전화상으로 대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돈도 얼마간 보내주면서 다시 제가 연락할 때 까지 뜨지 말고 기다리라고 당부하고 또 당부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어머니와 저의 마지막 작별이 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연길에서의 일을 끝낸 저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연길 버스 정거장에 도착하여 길림으로 가는 버스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버스가 출발하려는데 공안경찰들이 올라와 검문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신분증이 없었던 저는 이내 탈북자로 발각되어 공안국에 잡혀 들어가고야 말았습니다.
이들은 저를 여기에 오게 된 동기를 말하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기막힌 저는 물 한 모금 밥 한 술 들지 않고 눈물로만 시간을 보냈습니다. 막연한 생각으로 눈앞이 다 캄캄했습니다.
그러는 제가 불쌍하였던지 파출소장은 식당에 데려가 쉬게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식당에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가 한 분 있었는데 그 아주머니는 저를 친절하게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고 제가 겪은 고생에 대해 불쌍히 여겨 주었습니다.
공안국 경찰들은 제가 가지고 온 가방을 가져다주면서 세수하고 화장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한테는 다시 회사로 돌아가려고 돈900원이 있었는데 이 돈은 고스란히 회수 당하고 말았습니다.
식당아주머니는 자기가 20년간 공안국 식당을 해왔다며 이렇게 잊지 말고 빨리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우리 단 둘만이 있었으므로 아주머니만 눈감아주면 얼마든지 탈출 할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는 길까지 알려주면서 짐을 가지고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너무도 고마운 아주머니였습니다. 이렇게 저는 그 곳에서 탈출하게 된 저는 지금도 그 때 일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공안국 경찰들이 어느 구석에서 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고 당장이라고 뒷덜미를 잡힐 것만 같았던 그 때 심정...
공안으로 부터 탈출은 했지만 돈 한 푼 없는 저는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다 생각 없이 가방에 문을 열었는데 이게 웬 일입니까.
그 안에는 돈이 500원이나 있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알았습니다. 일부러 저를 도망치게 도와준 공안경찰...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곧 저는 다시 회사에 돌아와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지런히 일하여 이번에는 어머니를 꼭 모셔 오리라... 그러던 올해 3월에 하도 어머니의 소식이 궁금하여 전화를 하였더니 청천벽력과도 같은 비통한 소식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우리 두 딸의 탈북으로 인해 함경남도 어느 이름 모를 농촌으로 추방당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도 뜻밖의 슬픈 소식을 전해들은 저의 마음은 뼈가 저미도록 아팠습니다. 어머니를 데려오지 못한 저의 비통한 후회는 이미 때늦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어머니 하나 지켜주지 못한 단말인가.
나는 어머니 하나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단 말인가.
불쌍하신 나의 어머니 지금쯤 어느 산골짜기에서 헤매며 모진 고생 다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자식 된 도리를 다하지 못 할망정 또 다시 어머니를 고통을 겪게만 하는 이 죄 많은 자식은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사랑하는 어머니. 탈북한 두 딸의 죄로 우리 어머니가 당해야할 고통은 과연 무엇이기에 불쌍한 나의 어머니를 인적도 없는 그런 산골짜기로 추방 보낸단 말입니까.
이것이 국가가 흩어진 가족들에게 베푸는 선물이란 말입니까.
이것이 슬프고 비통한 인민의 한가족 한가족에게 주는 대가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과연 김정일이 말하는 인덕정치라는 것입니까.
짐승도 주인이 먹이를 주지 않으면 굴 안에서 뛰쳐나오기 마련입니다.
하물며 창조성, 의식성, 자주성을 가진 인간들이 굶어죽기를 바라며 앉아서 사회주의도 아닌 사회주의를 죽음으로 지키라는 것입니까.
이것이 북한의 현실입니다.
이런 정치 고수하겠다는 것은 인민들을 짐승보다도 못한 인간으로 만들겠다는 것이 아니고 과연 무엇입니까. 어찌 피도 같고 언어도 같은 한민족인 저 한국과는 이토록 다른 길을 가는 것인지 ....
만약 한국에서 우리가 태어났다면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당했을까 생각해봅니다.
과연 이것이 북한에서 말하는 인간자주화 방침이란 것입니까.
6.25 전쟁시기에는 헤어진 월남자 가족들이 남으로 나간 가족들과의 상봉이 두려워 국경지대로 쫒아 보내 서로의 소식을 끊게 하는 것이 바로 북한 땅에서 김정일이 베푸는 인덕정치입니다. 이것이 바로 북한에서 말하는 인간의 권리이며 자유입니다.
어찌 우리가 북한인권문제를 침묵으로, 그리고 "기권" 으로 외면할 수 잇단 말입니까.
한민족이 겪는 고통과 슬픔이 어찌 자기가 겪는 고통과 슬픔이 아니라 고해서 모르는 체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 글을 읽는 모든 탈북자들과 북한인권에 관심을 가져주시는 한국에 존경하는 동포여러분!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고 우리 땅이 하나가 되려면 북한인권문제를 소홀히 해서는 안됩니다.
북한에 있는 우리부모형제들을 비인간적인 자유와 권리 속에서 하루빨리 해방시키기 위하여 모든 힘과 노력을 다 바쳐주기를 여러분께 진심으로 호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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