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자수기] 북한에서 태어난것을 저주해요! (1) 임철·소연
  • 북민위
  • 2023-08-23 06:2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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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식량 구하러 떠나다  
1998년 5월 아빠는 이대로는 계속 살아갈 수 없다면서 식량 구하러 떠나겠다고 하였다. 엄마는 눈물을 흘리며 『떠나세요. 가서 몸조심하고 식량을 많이 구해와요』라고 말하며 아빠의 배낭에다 마른 풀떡 몇 개를 넣어 주었다. 떠날 때 소연이도 아빠한테 『아빠 먹을 거 많이 가지고 와요』라고 말하면 서 아빠 품에 안겼다. 아빠는 『음, 먹을 거 많이 가지고 올 테니 기다려라 』라고 말하고는 집을 떠났다.
아빠가 떠난 다음 엄마는 아빠가 올 때까지 살아서 기다려야 한다며 신발 수리를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아빠가 없다 보니 또 한 가지 난관이 있었다. 전에는 아빠가 탄광에서 퇴근할 때 집안에 땔 석탄을 매일 가져왔는데 이제는 가져올 사람이 없었다. 그때 또 외할아버지는 늙고 굶어서 병에 걸렸었다. 외할머니도 건강이 좋지 못했다. 때문에 가져올 사람은 엄마밖에 없었다.
그런데 엄마는 신발 수리를 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또 나를 보내 자고 하니 너무 작아 근심이 될 것 같았다.
엄마는 매일 한 번씩 석탄 가지러 가기 위해 시간을 짜내었다. 일을 쉬지 않고 빨리 해치우고 시간이 생기면 옷과 배낭을 지고 밖으로 달려나갔다. 그리고 한 2~3시간 지난 후에 들어오곤 하였다. 들어와서는 석탄을 부려놓고 또 작업을 시작했다.
엄마는 귀하게 시간을 짜내서 석탄을 가지고 온 걸 보면 대단히 무거웠으며 양도 또 대단히 많았다. 나는 속으로 항상 「엄마가 매우 힘드시겠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엄마가 이렇게 애써도 풀죽도 배 불리 먹기 힘든 것이었다.
-외할아버지의 사망
바로 이때 외할아버지가 낮에 누워 계시다가 사망하셨다. 외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손을 배 위에 올려놓고 사망하셨다. 이때 외할머니와 엄마는 대단히 세게 울었다.
그때 외할머니는 온 종일 우셨다. 그때 동네 사람들이 모여와 집에 있던 널 들을 가지고 棺(관)을 만들어 거기에다 외할아버지를 넣어가지고 산에 묻었다. 나도 매우 슬펐다. 이제 내겐 외할아버지가 없구나 하고 생각하니 더욱 슬펐다. 이렇게 나의 외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그것도 풀죽도 제대로 잡 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이후에도 엄마는 계속 힘들게 일해 나갔다. 시간이 있으면 신발을 수리하고 시간만 있으면 석탄 지러 가곤 하였다. 나는 이런 엄마가 불쌍했다. 그래서 하루는 내가 엄마에게 『엄마, 엄마가 힘든데 제가 석탄 지러 가 보겠어요』라고 했다. 그러자 엄마는 『안된다. 대단히 힘들단다』라며 안 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내가 계속 가겠다고 졸라대자 엄마는 한번 가 보라고 하였다. 그래서 나는 배낭을 지고 석탄 가지러 버스 역전으로 갔다. 가보니 낡은 버스가 맥을 잃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한 아줌마에게 『저 버스 안 가요?』라고 물어보자. 하는 말이 『저 버스는 기름이 없어 못 간다』하는 것이었다.
이러면 어찌 하는가? 탄광까지 거리가 10리는 되었다. 걸어가자고 해도 1시간이 걸릴 것이고 더군다나 힘들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나는 한 번 가보자 하고 걸었다. 절반도 못 갔는데 다리가 아프고 맥이 없었다. 그래서 한번 쉬고 다시 걸었다.
탄광에 도착하자 석탄 무더기가 쌓인 곳에는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탄을 줍고 있었다.
이 사람들이 석탄을 줍기에 나도 거기에 있는 검은 것들을 다 배낭에 집어 넣었다. 몇 덩이 넣지 못했는데 배낭이 다 차 집으로 돌아오려고 내려왔다 . 배낭이 작아 그리 무겁지 않았다. 그런데 한참 가다보니 완전히 주저앉을 것처럼 다리가 아팠다. 그래서 쉬고 또 쉬어가지고 겨우 집에 돌아왔다. 나는 이때 엄마가 얼마나 맥이 없었을까 하고 다시 생각해 보았으며 이런 엄마가 불쌍하였다.
집에 오니 엄마는 내 배낭을 받아가지고 헤쳐보았다. 그런데 이게 뭔가. 모두 뚝덩이들이었다. 석탄이 아니라 완전한 돌들이었다. 엄마는 이걸 보고 웃으면서 석탄이 어떤 건가 가르쳐 주며 다음부터는 호미를 가지고 가서 잘 파 오라는 것이었다. 이때 나는 대단히 부끄러웠다
-에미야, 맥을 잃지 말고 불사조처럼 일어나야 한다』
다음에 나는 또 석탄을 지러 갔다. 이번엔 호미를 가지고 가서 하나하나 골라 가지고 왔다. 그런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깨가 아팠다. 집에 와서 헤쳐 보니 이번엔 완전한 석탄이었다. 나는 대단히 기뻤다. 그런데 어깨가 대단히 아팠다. 그래서 헤쳐 보니 글쎄 피부가 시뻘겋게 벗겨진 것이었다. 이때 나는 많이 아팠다. 내가 이런데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싶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는 몸이 불편하다면서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 기침까지 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감기겠지 하고 가만 있었는데 점점 더 아팠다. 그래서 병원에가서 진찰해 보니 「늑막염」이라는 병이었다. 이 병은 너무 무거운 것을 져서 늑막에 물이 찼다는 것이다. 이 병을 치료 하려면 약을 많이 써야 되지만 기본은 운동을 하지 말고 가만히 휴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엄마가 휴식하면 우리 집안은 누가 먹여 살린단 말인가? 엄마는 이런 진단을 받고도 받은체 만체하고 계속 일에만 열중했다. 원래 하루 24시간이라면 20시간은 쉬어야 되는데 엄마는 한두 시간씩 쉬곤 하였다 . 이러다 보니 엄마의 병은 날이 갈수록 더 악화되었다. 외할머니는 엄마가 아파할 때마다 『야, 에미야. 맥을 잃지 말고 불사조처럼 일어나야 한다』 라고 계속 힘과 용기를 더해 주곤 하였다. 이러면 엄마는 계속 힘을 되찾고 일어나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낮에 집에 누워계시던 외할머니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다가 사망하셨다. 엄마에게 그렇게 힘과 용기를 주시던 외할머니도 이젠 돌아가 셨다. 엄마는 외할머니가 사망하신 걸 보고 거의 까무라칠 정도로 우셨다.
『어머니, 이렇게 죽 세 끼도 변변히 먹지 못하고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난 혼자서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라고 통곡하며 우는 엄마의 울음소리 는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나와 소연이도 그때 슬프게 울었다. 나와 소연이는 이젠 외할아버지, 외할 머니를 다 잃어버린 셈이었다. 우리는 엄마와 함께 외할머니 곁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이젠 외할머니를 내가자니 棺이 없었다. 그래서 의논하던 끝에 우리 집 앞에 있는 나무 창고를 허물어 그 나무로 관을 만 들어 거기에다 외할머니를 눕혔다.
관은 썩고 부슬부슬 떨어질 정도였지만 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를 소달구지 에다 태우고 산에 올라가 외할아버지 곁에다 눕혔다. 지금도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란히 누워 계실 것이다.
-엄마의 사망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부터 엄마는 병이 더 악화되어 자리에 눕게 되었다 . 소연이와 나는 학교도 못 가고 집에서 엄마를 간호해 드렸다. 소연이는 엄마의 머리에 수건으로 찜질도 해주고 다리도 주물러 줬으며 나는 석탄을 날라오고 집에 불을 땠다. 그런데 이렇게 앓는 엄마에게 미음을 쑤어 줘야 하는데 풀죽도 겨우 먹는 상태에 어떻게 미음을 쑤어 주겠는가? 집에는 먹을 것이 다 떨어졌다. 그러자 엄마는 또다시 일어나 신발 수리를 시작하였다. 아픈 몸에 허약하고 얼굴은 창백하며 찌푸린 인상이 당장 쓰 러질 것 같은 모양이었다. 오는 손님들도 엄마를 근심해주며 어떤 사람들은 약도 갖다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엄마에겐 힘이 되지 않았고 오히려 병은 점점 더해갔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는 갑자기 나보고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을 데리고 오라는 것이었다. 소연이는 엄마 곁에 있게 하고 나는 병원으로 쏜살같이 달려갔다. 의사 선생님을 만나 우리 엄마가 아픈데 빨리 가자고 재촉하고는 집으로 왔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엄마가 마지막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내가 엄마한테 다가가 『엄마 , 왜 그래?』라고 물어보았다. 그런데 엄마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며 아무 대답도 없이 손만 내 저을 뿐이었다. 이러던 엄마가 갑자기 숨 쉬던 것을 뚝 그치고 손을 맥없이 떨구는 것이었다. 내가 웬일인가 손을 들어 심장에 대보니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심장이 뛰지 않았다.
갑작스레 놀란 나는 『엄마! 엄마!』 하고 계속 불러보았으나 눈을 뜬 엄마는 아무런 반응없이 꼼짝 않고 있었다. 이제서야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너무 어처구니 없어 놀라 한동안 멍청해 있었다. 이러다가 옆에서 소연이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야 정신을 차렸다. 어느새 나의 눈에는 나도 모르게 눈물이 글썽해 있었다.
소연이도 내가 우는 것을 보고 알아차렸는지 자기도 엄마를 붙잡고 『엄마 ! 엄마!』하고 울었다. 이때 우리의 울음소리를 들은 마을 사람들이 달려와 엄마가 돌아가신 걸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막 떼놓았다. 어느새 우리집에는 사람들이 꽉 찼다. 나는 마을 사람들을 비집고 밖으로 나와 벽에 기대고 통곡하며 울었다. 『엄마! 엄마!』 하고 엄마를 부르며 우는 나의 울음소리는 온 마을에 울려퍼졌다. 소연이는 아직도 엄마 곁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내가 밖에서 집안으로 들어와 보니 어느새 마을 사람들이 엄마를 이불로 덮어 놓고 그 겉에다 보를 쳐놓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다시 한번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었다.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를 달래며 울지 말라고 위로해 주었으나 「이제는 엄마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살아갈까」 하고 생각하니 더 슬펐다.
엄마가 죽은 이날 밤 나는 엄마 곁에서 자려고 했으나 마을 사람들이 안된다는 바람에 옆집에서 잤다.
-외할머니 옆에 어머니를 묻다
다음날 마을 아주머니들은 우리 집에 와 여러 가지 음식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저씨들은 무엇을 의논하고 있다. 내가 가서 들어 보니 엄마를 내갈 관이 없다는 것이다. 온 마을을 다 뒤져도 관이 없고 우리 집에도 없었다.
그래서 아저씨들은 아빠가 있던 직장에 찾아가 棺을 만들어 달라고 하였다 . 직장장은 우리 집에 직접 와보고는 판자들을 모아 겨우 허술하고 작은 관 하나를 만들었다. 그날 오후 사람들은 엄마를 관에 안장하였다. 나는 이때 다시 한번 설움이 북받쳐 엄마의 시체에 다가가 울었다.
어느새 엄마는 관 속으로 들어갔고 관 뚜껑을 닫았다. 사람들은 엄마를 소 달구지에다 싣고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있는 산에 가서 엄마를 그 곁에 조용하고 편히 잠들도록 묻어주고 물고랑도 파주었다. 이렇게 나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엄마를 잃어버렸다.
엄마가 죽은 후 집에는 우리 둘만 있게 되었다. 밥은 탄광 노동자 합숙에서 먹곤 하였다. 아침이면 집을 나서 합숙으로 밥 먹으러 가곤 하였다. 점심, 저녁도 합숙에서 먹고 집에 돌아와 잠을 자곤 하였다. 그런데 저녁에 우리끼리 자자니 너무 무서웠고 두려웠다.
그래서 어느날은 불도 끄지 않고 온 밤을 지샐 때도 있었다. 합숙에서 주는 것은 물과 옥수수를 섞은 밥, 풀죽, 감자 삶은 것, 또 옥수수 국수 등인 데 옥수수 국수는 너무 부풀어 대단히 굵으며 먹을 때면 막 메스꺼울 정도 였다.
그래도 우리에게 이만큼이라도 차려지는 것이 다행이었다. 그런데 합숙에서 먹으면 늘 배가 고팠다. 그저 조금씩 주나마나 하는데 이것을 먹고 한 시간도 못 가서 또 배가 고프다. 나는 이때 인민학교 3학년을 다녔고 소연이 는 1학년을 다녔다. 나와 소연이는 배고프다 보니 어느 땐 학교에 가고 어느 땐 가지 않고 하였다.
배고프고 돈이 없다 보니 우리는 그저 장마당의 먹을 것들이나 구경하고 먹고 싶어하며 하루를 보내곤 하였다. 소연이는 먹을 것들을 볼 때마다 먹고 싶어 군침을 삼키곤 했고 어떨 땐 침까지 흘렸다.
그래서 한 번은 이런 소연이가 불쌍해서 아줌마한테 『그 빵 절반만 좀 주세요』라고 빌었더니 그 아줌마는 눈을 부라리며 『가라, 가라, 가라, 안 된다. 어디 너희들을 줄 것이 다 있겠니?』라고 말하며 못 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빌어봤으나 욕이나 먹을 뿐 헛수고였다. 마을 사람들도 우리를 동정만 해 줄 뿐 우리를 자기 집에 데려다가 밥 한끼 먹여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하긴 자기들도 먹지 못하는데 어떻게 우리를 먹여 주겠는가.
이 중에서도 나를 동정해 주고 불쌍히 여겨주는 옆집 아저씨가 있었다. 이 아저씨는 나이가 많으셨는데 우리에게 잘 해 주셨다. 어느날 이 아저씨가 우리집에 찾아와 말하기를 『철이야, 너희 친할아버지 친할머니가 계신다 던데 그 곳에 가서 살지 않겠냐?』라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데 연락을 못하잖아요. 가면 좋은데…』라고 대답하자 그 아저씨가 『그럼 한번 전보를 쳐보자. 그러면 연락할 수 있잖니?』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자고 하고 친할머니에게 전보를 쳤다.
그런데 전보를 치고 한 달을 기다려도 할머니는 오지 않았다. 그래도 또 한 장을 쳤다. 그런데도 종 무소식이었다. 그래서 안타까웠다. 한 장 더 쳐 보기로 하고 한 번 더 쳤다.
-집은 국가 집이기 때문에 국가에 바쳐야 한다』
친할머니에게 세 번째 전보를 친 다음날 아빠가 다니던 직장 사람이 우리집에 왔다. 내가 왜 왔느냐고 물으니 집 때문에 왔다는 것이다. 내가 『집이 어째서요』 물으니 『너희 집을 내놓아야 한다. 이 집은 국가 집이기 때문에 국가에 바쳐야 한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안 돼요. 이 집은… 이 집을 내 주면 우리는 어디 가랍니까 ? 제발 이 집은 다치지 말아 줘요』 하고 간구하자 그 아저씨가 말하기를
『우리도 이러고 싶지 않았는데 郡黨(군당)에서 지시하는 바람에 지금 집을 내놓아야 한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제는 할 수 없었다. 그 아저씨가 안 된다고 딱 잘라 말하기 때문에 나는 『그럼 아저씨, 제가 할머니한테 전보를 쳤는데, 저희 할아버지가 우리를 데려갈 때까지만 기다려 주세요. 네, 부탁이에요. 이 집이 없으면 우리는 갈 데가 없어요』라고 애타게 말하자 아저씨는 할 수 없는지 『그럼 내가 한 번 말해보겠다』라고 대답하고는 집에서 나갔다.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부터 나는 더 무서웠고 두려웠다. 사태가 이런데 할 머니에게 보낸 전보는 무소식이니 대단히 안타까웠다. 그 아저씨가 왔다 간 다음에도 집 때문에 몇 번이나 왔다갔다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그렇게도 기다리던 할머니가 우리집에 도착했다. 할머니는 전에도 우리집에 왔다 간 적이 있다. 우리가 집에서 누워 있는데 『똑똑』 하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또 집 때문에 온 사람일 거라고 생 각했었다. 그런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은 집 때문에 온 사람이 아니라 할머니였다. 나는 너무 기다리고 또 뜻밖이어서 할머니를 보자마자 할머니 한테 안겼다. 한동안 슬프게 울었다. 전보를 세 번 보내고 또 석 달이 지나도록 기다렸던 할머니었다.
-『할머니하고 같이 가서 살자』
할머니는 나와 소연이를 앉혀놓으시고 집안을 둘러보시더니, 『네가 전보에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썼는데 이것이 정말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사망하셨다고 대답하고 엄마가 사망한 경과를 할머니에게 자세히 알려 주었다. 울면서 듣던 할머니는 내 말이 다 끝나자 장판을 주먹 으로 치며 통곡하였다. 『야, 에미야 어쩌다가 이렇게 됐니…』 하며 몇 시간 동안이나 우셨다.
할머니가 집에 온 다음날 소연이와 나는 할머니와 같이 엄마를 묻은 산으로 음식을 가지고 올라갔다. 가서 먼저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엄마에게 갔다. 할머니는 엄마 묘지로 다가가 푹 주저앉으며 또다시 통곡했다.
『이 에미야, 어째 이렇게 빨리 가는 거냐. 그럼 이 불쌍한 아이들은 어떡하구. 아! 어쩌다 이렇게 됐냐, 어쩌다 이렇게 됐냐…』 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온 산에 울려퍼졌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내가 얘네를 데려갈 테니 에미는 안심하고 있어라』라는 말을 남기고 절을 한 뒤 함께 산에서 내려왔다. 할머니는 집에 와서 우리에게 『할머니하고 같이 가서 살자. 너희들끼리 여기서 어떻게 살겠냐. 며칠 있다가 떠나자』라고 말하였다.
우리는 이 말을 듣고 좋았지만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특별히 사랑하는 엄마를 두고 가자니 슬프기도 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할머니를 따라가야만 살 수 있었다. 할머니가 온 다음에도 집 때문에 사람이 왔었다. 그 아저씨는 할머니와 집을 언제 비울 것인가를 확인하고 돌아갔다. 며칠이 지나 우리는 짐을 다 싸가지고 할머니와 함께 그동안 엄마와 함께 지냈던 정든 집을 나섰다. 이 집은 참으로 뜻이 깊은 집이었다. 엄마와 함께 고난을 극복해 나가던 일들이 서서히 떠올랐고 엄마가 사망하던 일이 서서히 떠올랐다.
나는 이 집을 떠나는 것이 대단히 아쉬웠다. 그래서 가는 길에도 몇 번이고 고개를 돌려 보았다. 남몰래 떠나니 바래 주는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가던 길에 한 번 더 엄마를 보려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지막으로 엄마에게 절을 올린 다음 산을 내려와 고원역으로 향하였다. 이때가 엄마와의 마지막 상봉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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