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꽃제비의 설음
  • 북민위
  • 2023-08-01 05:3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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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중국땅에 넘어오자마자 우리는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어 내몽골 지역에 중국돈 만천원에 팔려갔다. 너무 억울했다. 자기나라에서도 추위와 배고픔에 찢기고 동생이 죽고 가족마저 ㅤㅎㅜㅌ어져 생사를 알지 못하거만 살려고 목숨을 걸고 찾아온 중국에서 또 이렇게 팔려다녀야 하는가.
나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겨자먹기로 42살난 중국 한족사람한테 팔려갔다. 그때 16살인 나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여 아직 초경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그남자는 밤마다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여자로 보이던날 난 쭈욱 밤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여자인 나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여자로 이 세상에 태여나게 해준 부모님 원망도 했다. 몸은 다 헐어...서 걷기 조차 힘들다. 하지만 조선사람이라는 신분때문에 신고가 들어갈까봐 병원에도 갈수 없다. 그리고 어린 나이의 여자가 몸이 다 헐어 있으면 병원에서 놀려댈지 몰라 수치심과 함께 두려움이 있었다.
그 한족한테서 밤마다 묶이운채 성욕구만 채워주고 있던 어느날 난 도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신고로 나는 바로 공안에 체포되었다. 악몽같은 생활을 끝내고 고향과 가족을 볼수 있으니 차라리 잘되였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그렇게 중국 도문 변방대를 거쳐 북송되여 북한 온성군 보위부 구루장에 들어 갔다. 다행히 미성년자로 분류되여 온성 아동꼬빠크로 들어갔다. 보위부사람은 나에게 “야 이 종간나야 쪼꼬만 간나가 중국 남자새끼들이랑 얼마나 놀아났으면 몸이 다 헐었냐?” 고 욕질해댄다. 그때 나는 미처 성장하기도전에 중국남자에게 심하게 당한 것이 몸속에 상처가 생겼고 제때에 치료하지 않아 그 통증때문에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것이다. 정말로 괴롭고 죽고싶었다.
6개월을 꼬빠크에서 생활한 후 함께 나온 언니와 같이 또 탈북했다. 북한이 너무 싫은 것이다. 이번엔 팔려가지 않으려고 나와 그 언니는 우리 둘만의 힘만 믿고 눈물의 두만강을 힘차게 건넜다.
두만강 건너 살림집에 들어가 일을 해줄테니 차비 돈만 좀 달라고했다. 우린 그렇게 산골짜기 같은데 가서 그 농부의 일을 3개월 해주고 차비로 사용할수 있는 돈 100원을 받았다. 일단 그 곳이 위험한 것 같아 우리는 그 농부한테 북한에 돈을 전해주러 돌아간다고 하고는 중국남쪽행 기차를 타려고 역전에 갔다.
무섭다. 그리고 두렵다. 누가 와서 내 목덜미를 잡는듯한 느낌이 들어 우리는 차표를 샀다. 목적지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른다. 100원어치 두명의 차표를 끊었다.
몇 개월 후, 행방도 모르고 기차를 탔던 우리는 시내의 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국말을 모르니 서빙은 못하고 설거지만을 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말을 하는 한 남자손님을 만났다. 대화가 되는 우리말을 들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차츰 나는 그가 좋아졌고 그도 날보러 매일 와서 밥을 먹었다.
그 남자는 내가 조선족인줄로 알고 있었다. 나를 보고 나이도 어린애가 서빙을 하지 아줌마들이하는 설겆이는 왜 하냐고 했다. 어느날 나는 진심으로 대해주는 그가 믿음이 가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조선에서 와서 중국말을 모른다고... 그랬더니 내가 가지고있던 짐들을 가지고 나오라고 하며 자기집으로 무작정 데리고 갔다. 내가 조선에서 왔다고하니 불쌍해보인 모양이다. 서로를 좋아하던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날 일이 끝나 집에 가보니 웬 여자들이 내짐들을 밖으로 다 내다놓고 있는 것이다. 누구냐고했더니 내가 사귀는 사람의 엄마와 누나 여동생들인 것이다. 당장 나가라고 한다. 조선에서 온 거지년이 어디로 짐까지 싸가지고 들어와서 살림 챙기냐는 것이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소리가 커지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까봐 짐은 밖에 있는채로 놔두고 몸부터 피해 달아났다.
그런데 그 여자들 택시까지 타고 쫓아와 머리끄뎅이를 잡는다. 내 가방속의 속옷들을 얼굴에 던지며 하는소리가 정직하게 사는 내아들 내 동생의 물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 몸은 더럽다며 넌 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랑 자봤냐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처음엔 그 남자 옛날 사귀던 애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나는 무작정 빌붙어 보려고 애썼다. 무릎 끓고 빌었다. 제발 신고만 하지말아달라고 당장이라도 떠나겠다고 울면서 말했다.
한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안정적으로 꿈같은 생활을 하던 나는 그렇게 목적도 없는 곳으로 또 떠나야만 했다.
몇 년 후, 꼬박꼬박 모은 돈 몇푼이 생기니 나는 고향의 가족생각이 났다. 중국 도문으로 나가서 인편으로 가는 무역업자에게 부탁해 우리집은 ㅤㅎㅜㅌ어져 연락이 안되니 외할머니집이라도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난 외가집에 가지고있던 돈을 보냈다. 마음이 얼마나 후련해지는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였다면 내동생처럼 흰쌀밥 먹지못해 굶어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에 나는 시름이 좀 놓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는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였고 귀인을 통해 대한민국까지 입국했다. 내인생에 첫사랑이나 다름이 없고 처음으로 마음 설례며 사랑해 본 중국에서의 그 남자가 그리워 연락을 하게 되였고 결국 그남자랑 국제결혼을 하여 지금은 국내에서 잘살고 있다.
나와 남편은 10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모진 시련과 아픔을 가슴에 품고있는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남편이 고맙다. 남편은 지나온 나의 과거를 다는 모른다. 오직 안다면 그때 남편의 동생과 엄마 누나가 와서 나한테 화풀이 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당시 가족들 행패로 강제로 나와 헤여진 남편은 나를 찾아 헤매다가 출근을 안하게 되었고 직장에서 쫓겨나 일을 그만두게된 상태였는데 마침 내가 연락을 하여 결혼까지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 모질게 나를 쫓아내던 시누이와 시엄마는 나이가 훨씬 어린 나에게 “며느리, 올케, 형님” 이라고 부르며 한국 좀 오게 초청해 달라고 애걸한다. 어이없다. 불쌍하기도하다. 하지만 그냥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내인생이 가엽게만 느껴질뿐이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고 낮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재직자 직업훈련과정을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와서 모은 돈으로 북한에서 모진 고생을 해오신 우리 엄마와 연락이 돼 지금은 엄마를 한국으로 모셔와 한동네에서 살고 계신다. 엄마가 한국에 온 후 언니생각을 너무 하시는 것 같아 언니네 가족모두를 탈북시켜 지금은 3국에서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다.
암흑속에 뭍혀 가느다란 생명줄을 찾아 떠돌고 떠돌던 삶은 이제는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맞아 자유를 만끽하며 새로운 삶과 꿈을 꾸려가고 있다.
소리없이 저 북녘땅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쳐보고 싶다.
자유는 꼭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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