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꽃제비의 설움
  • 북민위
  • 2023-08-01 05: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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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나를 그토록 멸시하던 중국인 시누이의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지금과는 대조적인 처지에서 억울하고 캄캄했던 지난날 기억들을 떠올리며 글을 적는다. 
우리 아버지는 전쟁고아이시고 일찍이 군대에 나가 판문점 쪽에 있는 경보부대에서 11년 복무를 마치고 제대해 어머니와 결혼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힘든 훈련으로 가슴을 상한 아버지는 내가 어릴 때 일찍이 세상을 떠나셨다. 아빠를 여윈 어머니는 우리 세 딸과 함께 살아야했고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셨다.
우리 집은 아버지는 안계셨지만 어머니의 노력과 지극한 사랑으로 단란한 생활을 유지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주사 한대 놓아주...었다고 고마워하는 중국사람한테서 월병 1박스를 받아 어린 우리한테 갖다 준 것이 죄목으로 비사회주의 구루빠에 발각되어 여관 같은 곳에서 매일 취조 받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 다녀온 후 엄마가 잡혀있는 여관으로 도시락을 가져다 드리곤 하였다. 외할머니는 외동딸인 엄마가 너무 불쌍해 눈물만 지었다. 할머니가 흘리시던 그 눈물이 지금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머니를 잡아간 보위부에서는 조선사람도 아닌 외국사람한테서 뇌물을 받은 것이 엄청난 큰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마을에는 머리를 깎고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며칠 후 엄마가 로동당에 입당할 때 보증을 선 같은 병원 당비서가 우리 집에 찾아와 우리자매에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잘해결될거라고 위로해주고 돌아갔다.
당시 언니는 15살이고 나는 12살 동생은 9살이었다. 철없는 동생은 엄마가 오늘도 당직 서냐고 계속 묻고 언니는 학교에서 농촌동원 나가서 1달 넘게 있어야 집에 온다. 그날따라 귀엽게 기르고 있던 고양이 울음소리마저 너무 처량하게 들려 집에서 내쫓아냈다. 엄마는 진짜로 감옥 갈지도 모른다. 우리 어린형제들은 이제부터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일하는 병원의 당비서가 청진에 있는 함경도 무역관리국에 좋은 남자가 있으니 재가(재혼)하는 것이 어떠냐고 그러면 풀어줄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엄마는 독방에서 17일간 조사 받다가 마지막 날에 정리시간을 갖고 집에 왔다가 당비서 아지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엄마도 감옥이 무서웠던 것 같았다. 아빠 없이 몇 년을 씩씩하게 살아나가시던 엄마인데 쉽게 청진으로 가서 재가하는 길을 선택하신 것으로 보아 문제는 엄청나게 컸던 모양이다.
엄마의 선택으로 우리는 청진으로 갔다. 고지식한 이붓 아버지는 배급도 없이 오로지 로동당에 충실한 분이셨고 아들 2명과 같이 살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살다가 우리가정은 가정불화가 아닌 배급을 전혀 안주는 미공급 시기를 맞아 밥가마에 넣을 쌀이 없어 각각 흩어지기 시작했다. 나와 동갑인 오빠는 나무하러 갔다 온다고하며 집을 나가서 안 들어오고 남자동생은 놀러 간다고 나가서 안오고 모두가 집 나가선 돌아오지 않았다. 다들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나도 집에 있기 싫어 청진역으로 갔다. 하지만 청진역에는 나처럼 먹을것이 없어 밖에 나와 방랑하는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셀수없을만큼 엄청 많았다.
그때부터 나의 유랑생활은 시작되었다. 1996년도 13살때 나는 청진역에서 방랑하면서 작은 배를 어떻게 하면 채워볼까 하는 생각으로 청진, 포항, 수남, 송평, 라남 등지를 떠돌며 남들이 먹다버린 쓰레기통을 뒤지고 뒤져 한끼 한끼를 에워 가고 있었다. 밤에는 수남다리 밑에 가서 성수천물로 비누도 없이 머리와 얼굴을 씻고 다음날엔 또 음식물 버려진 것이 없는지를 땅이 뚫어지게 ㅤㅎㅜㅌ으며 돌아다닌다. 그땐 쓰레기통은 다 말라있었고 음식물조차 땅에서 보이지 않았다.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주으니말이다.
그럭저럭 1년이 지나도 난 계속 그런 생활이다. 하늘에 대고 소리도 쳐본다. 이런 삶이 언제쯤이면 가셔질지를... 울기도 많이 운다. 맹물 조차 먹기 힘들어 하늘에서 내리는 빗물이 감사하다. 빗물로라도 굶주린 작은 배를 채울 수 있으니 말이다.
쓰레기조차 입에 넣지 못했던 3일째부터는 온몸에 맥이 없다. 4일째에는 잠만 잔다. 작은 비닐방막 쪼각 하나를 깔고 말이다. 그다음엔 모른다. 얼마나 더 잤는지를.
누군가가 말하는 소리가 가늘게 들린다. 이 사람들 다 죽은 사람들이니 가마니에 싸서 산에 가져다 묻으라고 한다. 나는 시체들 속에 묻혀 소달구지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대로는 죽을수 없어서 겨우 신음소리를 냈다. 마침 마지막 용기를 내여 소리낸 작은 신음이 어느 사람 귀에 들린 것이다.
“자는 살았째?”
나를 보고 말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구사일생으로 시체더미에서 제외됐다. 하마터면 산채로 땅속에 그냥 묻힐 뻔했다.
다시 청진역으로 돌아온 나는 허기진 몸을 더 이상 가누지 못하고 맥을 놓고 쓰러졌다. 며칠을 정신을 놓고 쓰러져 있던 나는 어떤 꽃제비아이가 가져다준 물 한 모금을 마시고 악착 같이 살아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아이는 1년 만에 보는 내 여동생인 것이였다. 청진역을 돌아다니며 방랑하던 내 동생이 아직도 살아있은 것에 나는 너무 고마웠다.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살아있어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그렇게 동생을 만나 함께 지내던 어느날 며칠을 굶은 동생이 뭘 잘못 주어먹었는지 거품을 물고 쓰러져 있었다. 동생은 쓰러져가면서 마지막 기력을 다해 “언니, 엄마와 큰언니 찾으면 우리 흰쌀밥 먹을수 있겠지?” 라고 한다. 그러는 동생을 쳐다보는 나는 너무 가슴 아파 차마 눈뜨고 볼수 없었다.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웅” 하고 대답을 하였지만 쓰러진 동생에게 내가 해줄수 있는건 아무것도 없다.
이대로 두었다간 동생이 죽을수 있다는 든다. 난 남의 것을 훔쳐서라도 내동생한테 흰쌀밥 한끼만 먹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동생에게 금방 돌아올 것을 약속하고 수남장마당으로 향했다. 그땐 흰쌀밥이 쓰러져가는 사람들에게 모든 병의 특효약인줄로만 알고있었다. 장마당에 가서는 무작정 빌어볼 작정이었다. 동생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급했지만 허기진 나는 뛰어도걸어도 내걸음 내 다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수남장마당까지 20리길을 달려갔지만 흰쌀밥은 고사하고 아무 음식도 구하지 못하고 다시 청진역 동생이 누워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생의 몸은 이미 굳어있었다. 별로 슬프지도 않다. 차라리 죽어있는 동생이 행복해 보인다. 내가 앞으로 살아나갈 날들을 생각해보니 더 가엾어진다. 눈물이 나온다.
1998년 10월 19일 청진시의 날씨는 몹시 추웠다. 어느덧 나는 16살이 되었다. 청진역에서 옷을 이쁘게 차려입은 한 언니가 부러워서 계속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 언니가 나를 보더니 오라고 손짓한다. 나는 너무 좋아 뭐 먹을거라도 주려나하고 다가갔다. 갑자기 그 언니는 “너 중국 갈래?” 라고 묻는다. 나는 중국에 가면 잘 먹고 옷도 잘 입을수 있냐고 물으니 마음대로 입고 배부르게 먹을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언니는 자기 옷을 벗어 나에게 입혀주었다. 언니가 잘대해주기에 중국에 가면 잘먹고 잘입을수 있다는 말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난 그 언니를 따라 청진을 떠나 국경지역에 도착하였고 새벽시간을 틈타 두만강 살얼음을 건너 중국땅에 도착했다.
그런데 중국땅에 넘어오자마자 우리는 인신매매단에 걸려들어 내몽골 지역에 중국돈 만천원에 팔려갔다. 너무 억울했다. 자기나라에서도 추위와 배고픔에 찢기고 동생이 죽고 가족마저 ㅤㅎㅜㅌ어져 생사를 알지 못하거만 살려고 목숨을 걸고 찾아온 중국에서 또 이렇게 팔려다녀야 하는가.
나는 입술을 깨물고 울며겨자먹기로 42살난 중국 한족사람한테 팔려갔다. 그때 16살인 나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하여 아직 초경도 경험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한테 그남자는 밤마다 달려들었다...
처음으로 내가 여자로 보이던날 난 쭈욱 밤이 무서워졌다. 그리고 여자인 나 자신이 너무 싫어졌다. 여자로 이 세상에 태여나게 해준 부모님 원망도 했다. 몸은 다 헐어서 걷기 조차 힘들다. 하지만 조선사람이라는 신분때문에 신고가 들어갈까봐 병원에도 갈수 없다. 그리고 어린 나이의 여자가 몸이 다 헐어 있으면 병원에서 놀려댈지 몰라 수치심과 함께 두려움이 있었다.
그 한족한테서 밤마다 묶이운채 성욕구만 채워주고 있던 어느날 난 도망을 시도했다. 하지만 그 남자의 신고로 나는 바로 공안에 체포되었다. 악몽같은 생활을 끝내고 고향과 가족을 볼수 있으니 차라리 잘되였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그렇게 중국 도문 변방대를 거쳐 북송되여 북한 온성군 보위부 구루장에 들어 갔다. 다행히 미성년자로 분류되여 온성 아동꼬빠크로 들어갔다. 보위부사람은 나에게 “야 이 종간나야 쪼꼬만 간나가 중국 남자새끼들이랑 얼마나 놀아났으면 몸이 다 헐었냐?” 고 욕질해댄다. 그때 나는 미처 성장하기도전에 중국남자에게 심하게 당한 것이 몸속에 상처가 생겼고 제때에 치료하지 않아 그 통증때문에 걸음걸이가 이상했던 것이다. 정말로 괴롭고 죽고싶었다.
6개월을 꼬빠크에서 생활한 후 함께 나온 언니와 같이 또 탈북했다. 북한이 너무 싫은 것이다. 이번엔 팔려가지 않으려고 나와 그 언니는 우리 둘만의 힘만 믿고 눈물의 두만강을 힘차게 건넜다.
두만강 건너 살림집에 들어가 일을 해줄테니 차비 돈만 좀 달라고했다. 우린 그렇게 산골짜기 같은데 가서 그 농부의 일을 3개월 해주고 차비로 사용할수 있는 돈 100원을 받았다. 일단 그 곳이 위험한 것 같아 우리는 그 농부한테 북한에 돈을 전해주러 돌아간다고 하고는 중국남쪽행 기차를 타려고 역전에 갔다.
무섭다. 그리고 두렵다. 누가 와서 내 목덜미를 잡는듯한 느낌이 들어 우리는 차표를 샀다. 목적지가 어디까지인지도 모른다. 100원어치 두명의 차표를 끊었다.
몇 개월 후, 행방도 모르고 기차를 탔던 우리는 시내의 한 식당에서 설거지를 하는 일을 찾아 자리를 잡게 되었다. 중국말을 모르니 서빙은 못하고 설거지만을 할수 있었다. 그러다가 조선말을 하는 한 남자손님을 만났다. 대화가 되는 우리말을 들으니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다. 차츰 나는 그가 좋아졌고 그도 날보러 매일 와서 밥을 먹었다.
그 남자는 내가 조선족인줄로 알고 있었다. 나를 보고 나이도 어린애가 서빙을 하지 아줌마들이하는 설겆이는 왜 하냐고 했다. 어느날 나는 진심으로 대해주는 그가 믿음이 가기에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조선에서 와서 중국말을 모른다고... 그랬더니 내가 가지고있던 짐들을 가지고 나오라고 하며 자기집으로 무작정 데리고 갔다. 내가 조선에서 왔다고하니 불쌍해보인 모양이다. 서로를 좋아하던 우리는 그렇게 함께 살게 되었다.
어느날 일이 끝나 집에 가보니 웬 여자들이 내짐들을 밖으로 다 내다놓고 있는 것이다. 누구냐고했더니 내가 사귀는 사람의 엄마와 누나 여동생들인 것이다. 당장 나가라고 한다. 조선에서 온 거지년이 어디로 짐까지 싸가지고 들어와서 살림 챙기냐는 것이다. 나는 너무 무서웠다. 소리가 커지면 경찰에 신고가 들어갈까봐 짐은 밖에 있는채로 놔두고 몸부터 피해 달아났다.
그런데 그 여자들 택시까지 타고 쫓아와 머리끄뎅이를 잡는다. 내 가방속의 속옷들을 얼굴에 던지며 하는소리가 정직하게 사는 내아들 내 동생의 물을 어지럽히지 말라는 것이다. 조선에서 온 여자들 몸은 더럽다며 넌 또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랑 자봤냐고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처음엔 그 남자 옛날 사귀던 애인인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였다. 나는 무작정 빌붙어 보려고 애썼다. 무릎 끓고 빌었다. 제발 신고만 하지말아달라고 당장이라도 떠나겠다고 울면서 말했다.
한동안 좋아하는 사람과 안정적으로 꿈같은 생활을 하던 나는 그렇게 목적도 없는 곳으로 또 떠나야만 했다.
몇 년 후, 꼬박꼬박 모은 돈 몇푼이 생기니 나는 고향의 가족생각이 났다. 중국 도문으로 나가서 인편으로 가는 무역업자에게 부탁해 우리집은 ㅤㅎㅜㅌ어져 연락이 안되니 외할머니집이라도 소식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난 외가집에 가지고있던 돈을 보냈다. 마음이 얼마나 후련해지는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였다면 내동생처럼 흰쌀밥 먹지못해 굶어죽지는 않겠지라는 생각에 나는 시름이 좀 놓인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나는 중국에서 많은 사람들을 알게 되였고 귀인을 통해 대한민국까지 입국했다. 내인생에 첫사랑이나 다름이 없고 처음으로 마음 설례며 사랑해 본 중국에서의 그 남자가 그리워 연락을 하게 되였고 결국 그남자랑 국제결혼을 하여 지금은 국내에서 잘살고 있다.
나와 남편은 10살 차이가 난다. 하지만 모진 시련과 아픔을 가슴에 품고있는 나를 한결같이 사랑해주는 남편이 고맙다. 남편은 지나온 나의 과거를 다는 모른다. 오직 안다면 그때 남편의 동생과 엄마 누나가 와서 나한테 화풀이 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당시 가족들 행패로 강제로 나와 헤여진 남편은 나를 찾아 헤매다가 출근을 안하게 되었고 직장에서 쫓겨나 일을 그만두게된 상태였는데 마침 내가 연락을 하여 결혼까지하여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때 모질게 나를 쫓아내던 시누이와 시엄마는 나이가 훨씬 어린 나에게 “며느리, 올케, 형님” 이라고 부르며 한국 좀 오게 초청해 달라고 애걸한다. 어이없다. 불쌍하기도하다. 하지만 그냥 얼마 살아보지도 못한 내인생이 가엽게만 느껴질뿐이다.
지금 나는 대한민국에서 많은 것을 배워가고 있고 낮에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고 저녁에는 학원에서 재직자 직업훈련과정을 배우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국와서 모은 돈으로 북한에서 모진 고생을 해오신 우리 엄마와 연락이 돼 지금은 엄마를 한국으로 모셔와 한동네에서 살고 계신다. 엄마가 한국에 온 후 언니생각을 너무 하시는 것 같아 언니네 가족모두를 탈북시켜 지금은 3국에서 한국행을 준비하고 있다.
암흑속에 뭍혀 가느다란 생명줄을 찾아 떠돌고 떠돌던 삶은 이제는 사람답게 살수 있는 세상을 맞아 자유를 만끽하며 새로운 삶과 꿈을 꾸려가고 있다.
소리없이 저 북녘땅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생명들에게 미친 듯이 소리쳐보고 싶다.
자유는 꼭 올 것이라고, 희망을 가지라고...
2007년 9월 8일 이충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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