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교화소 이야기] 절대로 도주 않고 끝까지 살아 나가야 - 리 준 하 -
  • 북민위
  • 2023-08-01 05: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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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앙~’ 
규칙적으로 높아졌다 낮아졌다 반복되는 고동소리가 온 교화소 골안에 울려 퍼졌다. 이때는 죄수나 간부나 모두 귀를 쫑긋 세우고 전시상황을 방불케 하는 비상행동지침에 따라 움직이게 된다.
‘누가 또 도주했구나!’
“작업 중지! 모두 하던 일을 멈추고 교화소로 내려간다. 빨리빨리 서두르라!”
담당 보안원과 초병이 산에 흩어져 나무를 찍고 있던 죄인들에게 서두르라고 악을 썼다. 곧장 38명의 죄인들이 모이자 인원점검을 끝내고 산을 내려가 모두 감방 안에 감금되었다.
...
“잡부조장, 어느 반이오?”
철문을 통과하여 감방으로 들어오던 반장이 반마다 인원점검을 마치고 철문을 잠그던 잡부조장에게 물었다.
“4과에서 도주자가 났소.”
바쁘게 보이는 잡부조장에게 더 이상 말 걸기가 미안했는지 반장은 곧장 감방 안에 들어와 바닥에 드러누워 버렸다. 교화소에서 도주자가 생기면 도주자가 붙잡힐 때까지 죄인들 전원이 감방 안에서 갇혀 지내야 했다. 이때는 작업도 없었다.
“모두들 나와 모이라!”
3일 동안 감방 안에 갇혀 있던 죄인들은 본소 마당에 반별로 집결하였다. 나가면서 보니 낙후자 휴게실 앞 공터에 말뚝이 세워져 있고, 얼마나 두들겨 맞았는지 반죽음이 다된 도주자가 거기에 묶여 있었다.
“다들 조용하라!”
보안과장 남병식 보안원의 말에 술렁대던 죄인 대열이 순간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모두 눈깔 뜨고 똑똑히 보라! 도주하는 새끼는 어떻게 되는지! 시작하라!”
남병식 보안원의 말이 끝나자 교화과장이 앞에 나서서 판결문을 펼쳐 들고 엄숙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도주자 ○○○는 사회공민시절 자신의 안락과 이익을 추구하여 귀중한 국가재산을 절치(절도)한 죄로 1999년 ○월 ○일 6년형을 선고 받고 전거리 제12교화소에 입소하였다. 나라와 인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교화소에 들어왔으면 자기의 죄를 인정하고 교화노동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 수용자가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다.
하지만 이 자는 공화국의 관대한 법적 제재에 도전하여 도적질로 자기 배나 채우면서 노동을 게을리 하다가 끝내는 자기에게 개전의 길을 열어준 고마운 어머니 조국을 배반하여 도주하였다가 ○월 ○일 경각성 높은 전거리 마을 인민들에게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그러므로 나라와 인민을 배반하고 도주한 ○○○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중앙교화국 재판소의 판결에 따라 사형에 처한다!”
교화소 마당에서는 죄인들의 침 넘어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사격수 앞으로!”
경비소대장의 구령에 따라 4명의 사격수가 어깨총 자세로 자동보총을 들고 나와 도주자가 묶인 말뚝의 전방 5m 앞에 나란히 섰다.
“우로 돌아!”
경비 초병들의 발걸음 소리만이 교화소 마당에 울려 퍼졌다.
“도주자 ○○○을 향하여 장탄! 단발로 쏴! 쏴! 쏴!”
“탕, 탕, 탕!”
귀를 찢는 총성이 교화소 안에 울려 퍼졌다. 첫 번째 사격으로 이마에는 구멍이 나고 살점과 함께 턱뼈가 튀어나갔으며, 두 번째 사격으로 가슴과 배에 피가 튀겼고, 세 번째 사격으로 허벅지와 무릎 관절이 부서졌다.
말뚝에 묶여 있던 도주자는 다리가 풀리며 무릎 꿇는 자세가 되어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았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었다.
“도주자의 말로가 어떻게 되는지 눈깔 크게 뜨고 똑바로 보라!”
보안원들은 죄인들이 일렬종대로 서서 시체 앞을 지나가게 하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이 전신에 퍼졌다.
총탄에 맞아 사방으로 뿌려진 살점과 핏자국들이 우리들의 눈을 시리게 했다. 우리들은 감방에 들어와서 한참이 지난 후에도 모두가 입을 열지 못하고 손장난하는 사람조차 없이 조용히 있었다. 떨리는 가슴이 진정되지 않았다.
“다들 왜 말이 없니?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살아있는 우리야 살아야 될 게 아닌가? 자, 다들 긴장 풀고 위생사업(이잡이) 할 사람들은 위생사업하고 누워 잠잘 사람은 누워!”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반장 말이 끝나기도 전에 창살 밖에서 잡부조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두 강당에 모이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나오라는 보안과장 선생님의 지시요!”
들으나 마나한 보안과장의 강연이 시작된다는 소리였다.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는 보안과장의 강연을 듣기 위해 반원들과 함께 강당으로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강당 앞에서 보안과장이 일장 연설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금부터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는 제목의 강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셨습니다. 나라와 인민 앞에 죄를 짓고 개전 생활(잘못을 뉘우치고 마음을 다잡을수 있는 생활)을 하는 수용자들에게 있어서 노동은…….”이라며 말을 뗀 보안과장은 무려 2시간 반 동안 연설을 이어갔다.
보안과장의 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죄인들의 괴로움은 더해 갔다. 허리는 끊어지는 것 같았고 엉덩이뼈가 배겨서 이마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이 정적을 깨고 교화과장의 욕설이 울려 퍼졌다.
“보안과장 선생이 여기 나와서 말하기 좋아해서 너희 짐승 같은 새끼들에게 입 아프게 연설하는 줄 알아? 개 같은 새끼들이 말이야.”
교화과장은 졸고 있던 한 죄인을 일으켜 세워놓고 악에 찬 욕설을 퍼부었다.
총성으로 시작된 그날 하루는 길고도 길었다. 오후 내내 강당에 앉아 있던 우리 죄인들은 후다닥 저녁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상 학습’시간을 갖게 되었다.
당시 나는 벌목방에 전방된 지 세 달밖에 안 된 신참 죄인이었기 때문에 학습시간에는 큰소리로 김정일 명언을 외쳐야 했다. 고참 죄인들은 그저 입만 뻥긋거릴 뿐 소리는 내지 않는다. 나도 나중에 조장이 되고 나서는 학습시간에 입만 뻥긋했다.
나는 감방 벽에 붙어 있는 명제카드를 응시하며 입을 뻥긋거렸지만 아침에 목격한 도주자의 사형 장면에 정신을 빼앗기고 있었다.
취침구호와 함께 자리에 누워서도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에는 ‘절대로 도주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 나가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반드시 살아 나가서 어머니를 만나야 한다고 다짐했다.
교화소에서 아무리 총으로 쏴죽이고 입 아프게 연설을 해도 해마다 2~3명이 도주를 시도했다. 그런데 그 이후로 도주자에 대한 총살이 없어졌다.
도주자는 사형이 아니라 무조건 남은 형기를 포함해 교화 15년형으로 형기가 늘어났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이것은 리인모 노인 덕이었다.
비전향 장기수 리인모는 한국 사람들도 잘 알 것이다. 그는 한국에서 34년간 감옥 생활을 하다가 조선으로 돌아왔는데, 몇 개의 교화소를 돌아보고는 “나 같은 사람은 이런 곳에서는 34년이 아니라 3년도 견디지 못할 것”이라고 중앙당에 보고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 덕분에 그때부터 전거리 교화소에서 사형당한 도주자는 없었다. 여기서 리인모 노인의 말을 놓고 보아도 조선 교화소의 실태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알 수 있다.
그래도 리인모 노인이 방문했던 교화소라면 감출 것은 감추고 사전에 잘 꾸며 놓았으련만, 그 정도마저도 34년간 감옥 생활을 한 리인모 노인에게는 큰 충격이었던 것이다.
인간을 쥐처럼 먹이고 소처럼 일시키며, 짐승만도 못한 존재로 인식하는 조선의 교화소야말로 지구상에서 인간의 자유와 인권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들의 비난과 저주를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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