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교화소 이야기] 허약해 도끼질에 온 몸 흔들려 - 이 준 하 -
- 북민위
- 2023-08-01 05:0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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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21살 되던 해의 어느 날, 하루 노동을 끝내고 감방으로 돌아와보니 신입반에서 6명의 죄인들이 우리 벌목반에 전방되어 왔다. 그중에는 구류장에서부터 허약 1도에 걸려 교화소에 입소한 류영남이라는 20살짜리 청년도 있었다.
20살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자랐는지 아직 뼈도 굳지 않은 것 같은 왜소한 체격에 성격 또한 온순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영남이는 3살 아래 누이동생 영희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중국 땅을 건너다니며 쌀을 얻어먹었다고 한다. 영남이는 중국 농촌 마을에 건너가서 쌀을 얻어오다 여러 번 국경경비대 군인들에게 붙잡혀 보안서까지 끌려가기도 했다.
취침 구령이 울려 퍼지자 감방 제일 뒤편에 있는 내 자리에 누워 반장과 영남이가 나누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입소했던 첫날이 떠올라 영남이에게 동정심이 생겼다.
하지만 늘 그랬듯이 신입자들과 며칠 동안 말도 주고받지 않고 그들의 인물됨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벌목반은 반장부터 인정 있는 사람이라는 소문을 귀동냥했던 터라 신입자들은 반장과 다른 사람들의 질문에 공손하게 대답했으며, 사이좋게 생활할 것을 약속했다.
다음날 식사시간이 되자 나는 말없이 반장 옆에 앉았다. 영남이는 반장과 함께 밥을 먹는 나를 힐끔힐끔 훔쳐보았다. 다른 신입자들도 나이 어린 내가 반장과 함께 밥을 먹는 것을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우리 작업반의 1조 조장이었다. 감방 안에서 반장, 조장과 일반 죄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환갑을 넘은 사람도 반장과 티 앞에서는 존댓말을 써야 했고, 반장과 조장은 무조건 반말로 이야기했다.
사실 나이 어린 내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반말을 하면서 드세게 놀지 않으면 반장과 함께 교화반을 이끌어 갈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입자들이 나를 어려워하도록 처신했다. 반장은 반장 생활을 오래 하다 보니 처음 보는 사람들의 눈빛만 보고도 그 사람의 성격상 특징과 인간됨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
나 또한 시간을 두고 사람을 관찰하는 습성이 생겼다. 본성이 착한지, 말로 사람을 갈구리(해코지)하는 습관이 있는지, 의리가 있는지, 똑똑한지, 먹을 것 앞에서 물불을 안 가리는 사람인지를 대강 파악할 수 있었다.
사회처럼 마음을 터놓고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없는 교화소에서 사람의 눈빛만 보고 내면을 파악하지 못하면 교화반을 이끌어갈 자격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영남이와 같은 신입자들이 지옥 같은 교화소 생활에 빨리 적응하도록 하는 데 첫 번째는 노동에 단련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교화소는 일반 사회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감방에 들어와서까지 꼬박꼬박 줄을 맞춰 학습하고, 욕을 먹으며, 매를 맞아야 하는 곳이다. 이런 생활을 이겨나가자면 웬만한 투지와 인내력으로는 부족했다. 따라서 우선적으로 그들의 인내력을 키워줘야 했고, 죽기 직전에 처한 그들을 한 번씩 일으켜 세워주는 것이 반장과 내가 할 일이었다.
나는 노동시간 외에는 신입자들과 말도 하지 않았으며 그들이 뭘 물으면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식으로 냉정하게 굴었다. 또한 감방에 먼저 들어온 사람이건, 늦게 들어온 사람이건 조금이라도 눈치 없이 행동하거나, 몸을 사리면서 노동할 때는 가차 없이 짧고 굵은 욕설을 뱉어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우려는 사람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두들겨 팼다. 하지만 나는 반원들의 신뢰를 잃지 않았다. 아무리 욕을 하고 주먹을 휘둘러도 일요일마다 말없이 강냉이가루 죽을 쑤어 그들의 주린 배를 채워 주었기 때문에 나를 무시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영남이가 전방되어 우리 교화반에 온 지 두 달쯤 되었을 때 나는 학습하고 있는 영남이의 생김새를 차분히 살펴보았다. 툭 튀어나온 광대뼈, 푹 꺼져 들어간 눈, 귓바퀴가 눈에 띄게 움푹 팬 관자놀이, 길쭉한 귀, 가느다란 목에 볼록 솟은 목젖…….
“영남이, 허약 걸려 죽자고 그래?”
갑자기 놀란 영남이가 영문을 몰라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영남이, 그러다간 살아서 집에 못가. 먹을 궁상 그만해라!”
반장도 영남이를 보고 무게 있게 한마디 거들었다.
“영남이, 이리 오라!”
내 말에 영남이는 내 앞에 와 앉았다. 제 딴에는 재빠르게 행동한다고 했지만, 허약병에 걸린 몸은 엉기적거리며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남이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쏘아보는 내 눈빛에 긴장하고 있었다. 감방 사람들 전체가 숨을 죽이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제 네 자리로 가라!”
영남이는 더욱 얼떨떨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내 눈치를 살폈다.
“영남이, 나에게 왔다가는 동안은 먹는 궁상 못했지?”
나는 그때서야 부드럽게 웃어 주었다. 내가 두 달 만에 영남이에게 보여 준 첫 미소였다. 감방 내의 팽팽한 긴장감이 일거에 풀렸다.
“누구든 힘들면 가족을 생각하라. 우리는 하루 세끼 강냉이밥이라도 먹지만 밖에 있는 가족들은 풀죽을 먹으면서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의 짧은 연설에 모두가 쥐 죽은 듯 조용했다. 반장도, 나도, 영남이도, 다른 죄수들도 모두 사랑하는 가족들 생각에 빠졌다.
“반장, 사 선생이 돌아보고 있소!”
감상적인 시간도 잠시,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면서 감방마다 제대로 학습을 하는지 살피는 잡부조장의 말에 모두가 또다시 장군님의 교시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다음날 우리 조의 노동 과제가 다 끝나자 나는 영남이에게 다가갔다. 울상을 해가지고 도끼질을 하는 영남이를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느다란 팔로 힘들게 도끼를 휘둘러보지만 오히려 도끼질에 온몸이 흔들려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끼질에 튀어 오르는 도끼밥이 눈꺼풀을 때려 눈물까지 찔끔찔끔 흘리면서 낑낑거렸다. 당시 영남이는 전방된 지 두 달이 넘도록 혼자서 나무 하나를 찍지 못해서 담당 관리의 채찍에 얻어맞는 일이 잦았다.
“영남이, 비켜라!”
나는 얼른 나무를 찍어 절단해서 영남이의 하산바에 메어주고 나무가 잘 끌리도록 밑면을 다듬어 주었다. 멍하니 나를 바라보는 영남이의 눈길에서 고마움이 묻어났다. 사람들과 생활하다 보면 뭔가 줘도 미운 사람이 있고, 아무것도 안 줘도 고운 사람이 있듯이 나에게 영남이는 친동생 같은 존재처럼 다가왔다.
그것은 영남이가 착하고 남에게 해를 끼칠 줄 모르는 깨끗한 마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은 춥고 배고프면 남이야 죽든 말든 자기만 생각하는데, 영남이는 자신이 어려워도 남에게 양보할 줄 알았으며 나에게서 밥덩이를 한 개 받아도 꼭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었다. 또한 우리 반 담당 보안원이 영남이를 살짝 불러 나와 반장에 대해 캐물을 때도 영남이는 매를 맞으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나는 반장과 힘을 합쳐 영남이의 허약을 퇴치시켜야겠다고 생각하고 특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하루는 작업에 나가면서 영남이에게 휴역(작업에 나가지 않고 감방에서 대기하는 것)을 지시하고 펑펑이가루 5kg을 안겨 주었다.
감방마다 1~2명 정도는 반장의 권한으로 휴역을 지시할 수 있었다. 원래 휴역자들은 병방 1호실에서 위생원의 관찰하에 감금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강냉이떡을 빚어 먹을 수 있는 비닐주머니와 물 한 동이를 떠다 놓고는 영남이를 그대로 감방에 놔두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웠다.
1호 위생원과 잡부조장에게는 사 선생이 점검할 때 적당히 막아달라고 부탁하고, 영남이에게는 “아무 걱정 말고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보이지 않게 감시창 밑에 바짝 붙어서 자라!”고 말하고 작업에 나섰다. 저녁 때 감방에 돌아와 보니 내가 놓고 간 펑펑이가루는 별로 줄어있지 않았다. 못해도 2kg은 먹어치웠을 줄 알았는데 먹은 흔적이 별로 없었다.
“영남이, 왜 안 먹었나? 어디 아프니?”
“아닙니다. 여느 때는 이걸 혼자 먹으라면 다 먹을 것 같았는데 정작 옆에 사람도 없고 혼자 먹으려고 하니 금방 배가 불러서 얼마 못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남은 것은 교화반 사람들과 나누어 먹겠다고 말했다. 나는 물끄러미 영남이를 바라보다가 “너는 꼭 산다!”고 말해줬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다음날 다시 먹겠다고 할 상황인데 허약 1도가 된 몸을 가진 그는 자기 앞에 차려진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어 먹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생각할수록 영남이에게 정이 갔다.
네 달 만에 영남이 몸무게는 67kg까지 됐다. 키가 163cm인 영남이가 67kg이 됐으니 얼굴과 몸이 퉁퉁 부었는데, 나는 그 부은 살이 근육으로 가면 된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했다. 나는 영남이에게 ‘뭉그덩’이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어느 날 내가 “야, 영남아!” 하고 불렀는데 대답이 없자, “야, 뭉그덩!”이라고 다시 부르니 거침없이 “예!”라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 바람에 반원들 모두가 박장대소를 터뜨렸고 그날부터 영남이의 별명은 ‘뭉그덩’이 되었다.
하루는 영남이를 데리고 취사장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쉬는 명절날이나 일요일 같으면 취사장 조장 량명학이 의례히 내가 먹을 밥을 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는 단지밥이 아니라 사람이 먹는 그릇에 따끈한 밥을 담고 된장까지 척 얹어서 인간다운 식사를 했다.
취사장에 들어간 영남이는 연신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면서 안절부절 못했다. 취사장은 몇몇 반장, 조장들을 제외하고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서랍식으로 된 고압 밥가마, 그 밑에 큰 뚜껑 두 개가 마주 붙어 있는 국솥(전기가 없어 장작을 태우는 보일의 증기를 이용하는 솥), 밥을 뒤집는 판, 삽, 밥 찧는 단지, 물탱크, 분쇄기 등 영남이는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이것저것 살펴보았다.
“그러고 보니 여기 들어와 보지 못한 반장들보다 네가 높구나!”라는 말에 량명학이 웃음을 터뜨렸다. 량명학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영남이가 갑자기 울먹이며 말을 꺼냈다.
“조장, 감사하오.”
“으이그, 누가 죽었니?”
“예전 신입자 때 조장이 처음으로 내 나무를 찍어주며 ‘힘들지?’ 하고 물었을 때 그것이 얼마나 힘이 되던지……. 처음에는 조장이 말이 별로 없어서 무섭고 독한 사람인 줄 알았소. 그리고 내가 허약에 걸렸을 때 ‘너는 꼭 산다!’고 말해줬을 때 정말 신심이 생겼소. 조장이 없었으면 나는 아마…….”
“됐다, 임마! 남자 새끼가 울긴.”
영남이 이후로 동생뻘 되는 신입 죄인들이 6명 정도 들어왔지만, 나는 영남이처럼 관심을 보여주지 못했다. 데리고 가는 곳마다 눈치 빠르게 처신해주며 누구에게나 귀여움을 받는 영남이를 나는 항상 옆에 끼고 다녔다.
하지만 나와 영남이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허약으로 죽을 고비에서 살아난 그가 내 곁을 떠나 불망산으로 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영남이가 떠난 날은 몹시도 추운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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