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수기]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2) 김 춘 애
- 북민위
- 2024-10-11 07:42:59
- 조회수 : 284
[탈북수기]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2)
김 춘 애
탈북여성(2003년 6월 입국)
화룡시 변방구류소, 무산군 노동단련대, 청진 집결소 경험자
단련대에 가니 저녁도 안주고 굶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딸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담당주재원이 우리 딸을 데리고 들어갔는데 한시간만에 맞아서 새파래져서 돌아왔습니다. 이 사람들이 보기에 분명 우리가 평양사람인데 딸을 붙잡아 평양사람인가 속였는가 알아보기 위해서 때린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가 무슨 죄가 있냐”고 막 따졌습니다. 초소장이랑 두루두루 말해보니까 기막히게도 동생 신랑과 친구지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야기가 전해져 동생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면회를 안시켜줘서 울타리 높은 데서 동생은 밖에서, 나는 안에서 소곤소곤 말했습니다.
먹는 거라곤 썩어서 시꺼먼 밀가루로 죽을 쑨 것이었습니다. 냄새가 너무 심해서 한입도 못먹겠는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더 먹겠다고 식사시간이면 우리 주변으로 모였습니다. 본 지방 사람인 무산아이들이 콩이랑 강냉이를 가져오면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걸 바꿔 먹기 위해 옷도 다 벗어주고 팬티만 입고 다니면서도 창피한 줄도 몰랐습니다.
어떤 여자는 강간을 너무 심하게 당해 자궁이 다 썩어서 뒤집어져 있었습니다. 걷는 것조차 힘들어 다리를 벌리고 걸었는데, 밤에는 썩은 자리가 저려서 잠도 못자고 괴로워했습니다.
그런 여자도 20리를 뛰게 했습니다. 8월이니까 뛰어다니면서 배추 영양단지도 키우게 하고, 무산에 있는 높은 산에 올라가 나무도 해오게 합니다. 저는 다리가 팅팅 부어서 뛰지 못하니까 빨리 뛰라고 뒤에서 돌로 막 깝니다. 그런다고 뛸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니까 딸도 엄마 보위하겠다고 같이 맞으면서 뒤따라 달렸습니다.
6. 또 다시 두만강을 넘어
그렇게 3일이 지나 8월 14일이 되었습니다. 딸이 감기를 앓아서 막 열이 나고 설사가 나서 보초 서는 아이를 보고 약을 가져다 달라고 했습니다. 작업을 하러 나가는데 뜬금없이 저에게 대열에서 떨어지라고 하기에 일단 떨어져 나오면서도 왜 그런 줄은 몰랐습니다. 경리가 나를 불러 외출시키면서 돼지고기 2kg에 맛내게 고춧가루를 사가지고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동생이 통하는 사람과 짜고 그런 줄도 모르고 딸을 거기다 두고 나왔습니다. 아침에 나가서 저녁 5시까지 들어오라고 하면서 그래도 경리가 뒤따라 다녔습니다.
그래서 먼저 동생네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랬더니 동생이 하는 말이 “언니, 빨리 (중국으로) 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너무 아파서 변도 못보고 손이 다 마르고 다리는 한없이 부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속이 타면 변이 새까맣게 타서 간신히 똘롱똘롱 떨어집니다. 일 보는게 애 낳는 것보다 더 힘들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몸이 안 좋으니까 창피라는게 없었습니다.
그걸 보고 우리 동생은 일단 저라도 먼저 살아나가야 한다고 더 다그치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무산군 바닥에서 뛰어봤자 어디로 뛰겠습니까. 5시까지 들어오라고 했는데, 5시면 벌써 기차도 안 다니고 금방 잡힐텐데. 그래서 저는 그날로 두만강을 건널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는 첫째 딸부터 찾으러 다시 중국으로 나갔습니다.
평양시는 사람이 하나 없어지면 금방 수사포치(수배)를 했습니다. 인민반장이었던 사람이 없어졌고, 그리고 제가 무산으로 간다고 방향을 알렸으니까 무산 보위지도원들이 두 세 번씩 무산까지 잡으러 왔지만 동생들은 언니 여기 온 적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때마침 1997년 9월에 무산쪽에 열차사고가 많이 나서 사람들이 꽤 죽었는데, 그래서 저는 거기서 죽은 것으로 되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중국으로 가기 위해 무산에서 칠성다리를 건너 산을 넘었는데, 오르막길은 그래도 걷겠는데 관절에 부종이 와서 내리막길을 못 걸을 지경이었습니다. 오로지 살아야 하니까 질질 끌고라도 가야하고, 5시까지 무산군을 벗어나지 못하고 잡히면 죽는다는 생각에 새끼도 뭐고 모르겠고, 동생이 딸은 알아서 봐주겠다고 했으니 무조건 뛰었습니다.
그래서 무작정 중국으로 뛰려는데 장마철이라 물길이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렇잖아도 삐쩍 말라 힘도 없었기 때문에 강물에 떠내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는데, 한 조선족 할머니가 논판에 씨앗을 뿌리러 나왔다가 정신을 잃고 떠내려 온 저를 업어다가 화룡시 룡현에 있는 집으로 데리고 가셨습니다. 깨어나 보니 하혈을 해서 온통 피였습니다. 그런데 그 할머니와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 조카들도 거기를 건너 다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 동생도 그 집을 건너다니며 저를 찾겠다고 수태 헤매고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게 바로 운명이라는 것인가 봅니다. 그래서 그 집에서 3일 동안 있으면서 한국으로 먼저 간 남동생이 남겨둔 삐삐 번호로 연락을 해보았지만 연결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 그집 강냉이밭에 숨어서 꼬박 잠을 잤습니다. 그러던 중 화룡현 남편과 3일만에 연락이 닿았고, 남편은 택시를 타고 달려와 저를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이제 딸을 살려야겠기에 옷가지 입던 거랑 두루두루 팔아 남편에게 500원을 주어 보냈습니다. 저를 살려준 할머니를 통해 북한으로 연락이 닿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 있던 동생 조카가 국경지역으로 잠깐 나와서 딸은 탈출한 엄마 대신에 무지하게 매를 많이 맞았다는 소식을 전하고 돈을 갖고 돌아갔습니다. 딸은 걸상으로 머리를 맞는 등 나를 잡겠다고 많이 맞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딸이 워낙 이악하고 일도 잘하고 하니까 2달 반만인 11월 달에 풀려났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렸습니다. 하지만 딸을 풀어놓고 나를 잡겠다고 계속 감시하고 있었습니다. 18살이 된 딸은 스스로 500원에 팔려가기로 마음 먹고 그 돈으로 “우리 엄마한테 면회를 가 달라”고 하면서 조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합니다. 그후 딸이 제가 있던 할머니 집에 들러 엄마도 여기 있다가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딸이 할머니한테 말해서 팔려가기로 약속하고 그 돈 500원을 조카한테 줬습니다. 조카도 사촌누나가 그렇게 팔려가니까 마음 아파서 둘이서 붙잡고 막 울었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도 도저히 못 봐주겠더라고 했습니다. 저는 딸이 건너왔다는 소리를 듣고 전화만 내내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딸은 제가 마음 아파할까봐 연락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딸은 훈천에 가서 또 잡히고 말았습니다. 잡혀서 파출소에 가니까 파출소사람들이 또 5,000원에 딸을 팔려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다행히도 5,000원은 비싸다고 한족들이 안 샀다고 합니다.
하지만 3일 있으면 딸은 다시 송환될 판이었습니다. 젊은 파출소 공안이 그런 이야기를 해주자 딸은 막 울었지만, 그런데도 혹시나 엄마가 잡힐까봐 제가 어디에 있다는 소리는 절대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늘의 도움이었을까요. 그날 저녁 9시쯤 족쇄(수갑)에 묶여 있던 딸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쇠꼬챙이를 주워 구류소에서 익히 들어본 적이 있는 방법을 떠올려 운좋게 족쇄를 열고 3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습니다. 그리고 다리를 다친 줄도 모르고 택시를 잡아타고 500원을 뻐쳐서(외상으로) 택시를 타고 화룡의 그 할머니 집으로 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둘째딸이 살아 돌아오자 이제 아들이 걱정되었습니다. 아들은 화룡으로 나오다가 잠복에 걸려 다시 북송되고 변방대로 끌려갔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도망쳤다가 잡혔으니까 큰 문제였습니다. 아들 역시 화룡변방대에서 무산군으로 넘겨졌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월경자들을 심하게 대하지는 말라는) 김정일 방침이 떨어져 있었는지 심하게 처벌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한편, 우리는 2000년에 다시 북한으로 잡혀 들어갔습니다. 송환되는 사람들이 “뺏기지 않으려면 돈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모아둔 돈을 먹었습니다. 토하면 또 삼켰습니다. 딸은 먹은 돈이 나오지 않도록 아예 아무 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보위원들이 “이 년들이 중국에서 얼마나 잘 먹었길래 여기서 안먹느냐”며 막 때렸습니다.
그곳에서는 저희처럼 돈 먹는걸 알기 때문에, 변을 볼 때는 여자들도 화장실이 아닌 바깥에서 누게 하고 일일이 검사했습니다. 딸이 오랫동안 변을 안보니까 이것들이 세 번에 먹을 변비약을 한번에 먹였습니다. 딸은 너무 아파 데굴데굴 구르면서도 참았습니다. 거기서 저는 줄반장을 해서 끝에 앉았는데, 우연히 보초와 이야기 하다가 그의 어머니 얘기가 나왔습니다.
그런데 들어보니 제가 군대생활 할 때 특무장으로 있던 여자였습니다. 서로 그걸 알게 되니까 좀 봐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보초의 눈을 피해 감방 안에 설치된 칸막이 간이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바닥에서 건져서 돈을 하나를 건졌고, 근데 또 배가 아파서 설사를 했는데 하나는 건지고 하나는 보위원이 다가오기에 그냥 포기하고 떠내려 보냈습니다.
12월에 잡혀온 여자가 한명 있었는데, 그녀는 중국에서 한국으로부터 온 친척을 만나 3000원을 받았다는 죄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허약했기 때문에 정치범수용소로 바로 못 보내고 치료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주사를 맞으러 나왔다가 우리가 돈을 먹고 들어온 것을 일렀습니다. 그래서 종합지도원에게 끌려가 맞았습니다. 한국이나 기독교와 관련되었는지 계속 취조를 당했습니다. 저는 죽어도 관계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틀 정도 취조를 하더니 다른 사람들은 보위부로 보내는데, 우리는 무산군안전부로 넘겨졌습니다. 안전부 감방에서 하루밤을 재우고 다시 단련대로 넘겼습니다.
7. 청진집결소에서의 40일
일주일 후 우리는 청진집결소로 보내졌습니다. 이동하는 동안 손가락 족쇄가 채워졌습니다. 19살 남자와 같이 손가락 족쇄가 채워진 딸은 청진까지 가는 길에 또 핀침으로 족쇄를 풀기도 했지만, 엄마가 있어서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집결소로 갔더니 또 검사를 했습니다. 아주 조그마한 방이었습니다. 10~15명씩 들어가는데 빈대가 너무 많아서 잠도 못잘 지경입니다. 저녁 5시에 일 끝나고 밥을 먹고 들어가면 6시부터 7시까지 한 시간만 전기가 들어옵니다.
정전되면 빈대라는 빈대는 다 나와서 배꼽짬, 손가락짬, 발가락짬, 귓구멍짬 안 들어가는 데가 없습니다. 어쨌든 빈대가 너무 많아서 제대로 앉아있지도 못하고 40일 동안 박쥐처럼 창문에 매달려 밤을 지냈습니다. 남은 돈 100원을 가지고 엿 1kg를 사다 달라고 부탁해서 그걸로 버텼습니다. 청진집결소에서는 7개월 된 여자아기를 담요로 덮어 강압적으로 죽이는 것도 보았습니다. 담요에 싸서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잔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8. 다시 탈북
40일째가 되던 날, 평안남도 송천에서 68호 군수품 안전원 하나가 집결소로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을 따라 어머니가 계신 송천군으로 보내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도저히 그곳에서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습니다. 딱하게 여긴 지도원이 제 출신지를 평양이 아닌 송천군으로 고쳐주었습니다. 그 안전원은 기차가 한달이 걸릴지 열흘이 걸릴지 모르니, 식사보장을 시키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전 핸드백밖에 없는 빈털터리였습니다. 집결소에서 나와 청진역으로 가는 길에 저는 가지고 있던 핸드백을 500원에 팔고 돼지발족(족발), 두부를 200원어치 사서 안전원에게 먹였습니다. 자기는 이밥을 먹으면서 우리에게는 먹어보라는 말도 안합니다.
안전원이 끌고 다닌 사람들은 우리까지 모두 5명이었습니다. 집결소에서 가지고 온 강냉이밥을 옆에 있던 남자에게 불쌍해서 주니 너무 고마워하며 울었습니다. 우리가 도망온 걸 알고 그 남자도 도망가겠다고 했습니다. 안전원은 술을 마시고 쓰러져 있고, 동행한 5명과 함께 있다가 화장실을 갔다 와서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섯 명이 다 달아나면 금방 잡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한낮 11시쯤 “나도 화장실 다녀오겠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딸이 뒤따라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딸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나만 따라오라”고 하고는 가로질러 뛰고 뛰었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무조건 뛰어 도착한 곳은 어이없게도 다시 집결소 마당이었습니다. 근처에서 돌고 돈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근처 아파트 복도에서 새벽 3시쯤까지 쭈그리고 잤습니다. 새벽에 나와서 다리 밑에서 통근차를 타고 수성까지, 그리고 무산까지 걸어서 갔습니다. 2000년 8월 29일이었습니다.
9. 탈북보다 더한 인신매매의 위협
다시 무산에 돌아와 아들을 찾으려고 보니까 장마가 닥쳤습니다. 무산에서 물난리가 나 사람들이 죽고 난리가 났습니다. 돈이 없어서 아들을 찾지도 못하겠기에 빨리 돈을 모아 중국으로 가야겠다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 장사하는 동생들과 동원 다니고 돌도 날랐으며, 인민반장 일을 따라다니면서 도왔습니다.
하지만 북한 남촌에서 다시 잡혔습니다. 대낮에 두만강을 못 건너니까 밤에 나왔다가 정치소 순찰에게 딱 걸렸습니다. 그냥 당당하게 이야기 했습니다. 중국에 친척이 있어서 돈 빌리러 가는 길이니 다시 오는 길에 꼭 뇌물을 좀 주겠다고 속였습니다. 밤에 조용히 림강쪽으로 걸어 높은 산을 넘어서니 중국 숭선 쪽이었습니다. 하지만 넘어가다가 다시 인신매매꾼인 백가라는 놈에게 걸리고 말았습니다.
저는 “팔려도 좋다”고 하면서, 대신 화룡 시내로만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며칠간 낮에는 호박씨를 벗기는 일을 하고 밤에는 산 중턱에 초막을 치고 숨어 지내야 했습니다. 하루에 10원을 받았습니다. 화룡에 오니 산동인-한족에게 저를 넘기는 것이었습니다.
기회만을 노리며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보니 조양촌이었습니다. 역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는 길에 오줌을 누겠다고 하니까 인신매매꾼은 길바닥에서 오줌을 싸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기차 역전으로 들어가 손씻고 오겠다고 하고서는 무조건 도망쳤습니다. 그 놈은 다리가 얼마나 긴지 금새 쫓아와서 제 옷을 붙잡았습니다. 살려달라고 소리를 쳤지만 아무도 안 돌보아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조선족 하나가 지나가다가 그 남자를 붙잡아 공안으로 넘기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돈은 줄 수 있지만 제발 공안에게만은 넘기지 말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 조선족 집으로 따라가다가 문득 이 사람도 인신매매꾼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그 높은 벽을 뛰어넘었습니다. 허허 벌판이었지만 비행기가 지나가는 것을 보며 방향을 잡아 수태 걸어가니 태양이라는 마을이 나타났습니다. 그 곳에서 남편과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했습니다. 그런데 시댁에서는 이제 저에게 다른데로 가라고 했습니다.
10. 드디어 한국으로
둘째 딸은 이미 청도를 거쳐 2003년 1월 한국에 들어와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저는 북한사람이라는 이유로 공장에서 쫓겨났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부탁해서 500원으로 조선족이라는 거짓 신분증을 만들어 한국인이 하는 노래방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 이전글[탈북자수기] 악으로 버틴 10년 북창 수용소 생활 (1) 박옥순 (북창수용소, 1979~1989 수감) 24.10.11
- 다음글[탈북수기] 끊임없이 팔리고 팔려다니며..... 김 춘 애 2024.10.11 07:38: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