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자수기] 살아있는 지옥 -서옥화-
- 북민위
- 2023-11-27 08: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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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수기] 살아있는 지옥 -서옥화-
(이 글은 현재 중국에 거주 중인 탈북자 서옥화(가명)씨가 2003년 12월 중국 공안에 체포, 북한으로 송환되고 나서 7개월 동안 겪은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일부 우매한 사람들은 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수십만 명이 해외에 불법 체류하고 있다면서, 나아가 전 세계에는 자기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 불법 체류하는 사람들이 많다면서 탈북자들도 이러한 ‘중국내 불법체류자’에 불과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옳습니다. 형식으로만 따지자면 탈북자들은 중국 내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 글을 읽어본다면, 탈북자들이 다른 나라의 여느 불법체류자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 송환된 불법체류자들을 이렇게 처벌하는 나라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서옥화씨는 다시 탈북에 성공하였으며 지금 구호단체의 보호 아래 있습니다. 대학노트 서른 장 분량으로 빽빽이, 그녀는 7개월 동안 겪었던 일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보내왔습니다. 자신이 수감되었던 구류소, 단련대 등의 구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형벌의 방식에 대해 그림으로 설명해 놓았습니다. 글과 그림을 통해 우리가 어느 정도 그 지옥의 참상을 알 수는 있겠지만, 그녀가 겪었던 고통의 깊이를 어찌 가늠조차 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그녀는 북한에 두고 온 어머니와 딸을 중국으로 데려올 수 있도록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한이 민주화되는데 자신의 힘을 바칠 것을 결의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건투를 빌며 가슴 아픈 이 기록을 독자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먼 옛날의 일이 아닙니다. 바로 10개월 전의 일입니다.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이웃 나라, 우리 민족의 땅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 필자의 신변보호를 위해 이글의 각종 지명은 모두 실제와 다르게 표기했음을 밝혀둡니다.
강냉이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의 모국(母國)을 사랑할 것이다. 나 역시 조상의 넋이 묻히고 자기의 태를 묻은 내 고향을 사랑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고향을 버리고 산 설고 물 선 중국 땅으로 오게 된 데에는 피눈물 나는 사연이 있다.
1998년 나는 5살 난 딸애를 데리고 중국 땅으로 왔다. 당시 나의 나이는 27살이었다. 1994년부터 시작된 식량난은 우리 집에도 큰 재난을 가져왔다. 1994년에 딸애를 낳고 시름시름 않던 나는 림파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때 나는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딸애와 함께 살았는데 우리 집은 나 하나 밖에 노력자1) 가 없다보니 나까지 병이 나자 큰 고난에 부닥치게 되었다. 약을 사대야지 몸도 추세워야지 집의 가산을 다 팔아 병구완을 하였지만 병이 좀처럼 차도가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집갔던 언니가 남편이 사망한 후 자식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식솔은 단번에 여섯 식솔로 되었다. 씀바퀴, 냉이, 능쟁이까지 다 뜯어 먹어보고 느릅나무 껍질까지 벗겨 식량으로 이용해 보았으나 여섯 식구가 살기엔 너무 힘이 들었다.
그러던 중 1996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당시 우리가족들은 돌피가루2)에 풀을 섞어 연명하였는데 아버지가 영양실조에 걸렸다. 며칠째 아버지가 않아 누웠지만 우리 집 형편에 쌀미음 한 숟가락도 대접시킬 수 없었다.
“강냉이 밥이라도 실컷 먹어봤으면 좋겠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그때 나는 굶어서 돌아가신 아버지를 부르며 목 터지게 울었지만 불쌍한 아버지는 한 많은 세상을 그렇게 떠나가셨다. 아버지가 세상을 뜬 후 언니는 “사랑하는 동생아, 안녕!”하고 쓴 짤막한 글쪽지를 남겨놓고 1997년에 두 딸과 함께 어디론가 떠나가 버렸다. 그까짓 쌀 한줌이 뭐기에 사랑하는 아버지도 빼앗아가고 언니와도 이별해야하는가!
그때 우리 동네에서는 기근으로 하여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도 많았고 길을 가다가 굶어서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집은 며칠째 굶다 일곱 식구가 집안으로 문을 걸고 쥐약을 먹고 몰살하였다. 한줌 쌀이 무엇이기에 이렇게 많은 생명들을 빼앗아 가는가!
나는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금방 병을 앓은 후였지만 부지런히 일했다. 어머니와 함께 산비탈도 뚜지고3) 풀도 뜯었다. 하지만 심어놓긴 해도 집에 지킬 사람이 없으므로 다 도둑 맞히고 나면 빈 밭만 뎅그렇게 남는다. 도적 맞힌 곡식그루를 붙잡고 통곡한 적은 또 얼마 였으랴. 그러던 중 나는 언니가 중국으로 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 길은 조국을 등지는 것뿐
1998년에 나는 중국으로 오려고 작심하였다. 1월의 맵짠 눈보라가 기승 치던 어느 날이었다. 쌔근쌔근 잠든 귀여운 5살짜리 딸애를 무작정 등에 업고 길을 떠났다. 숨이 꺽꺽 막히게 사납게 불어치는 눈보라 속으로 허둥지둥 어머니와 함께 내처 걸었다. 사방이 눈에 덮혀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밭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눈이 무릎까지 오는데다 바람이 부니 사방을 분간할 수 없었고 강냉이 그루터기에 찔려서 여간 발이 아프지 않았다. 편리화4)를 신은 발은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가야한다, 죽어도 가야한다는 결사의 각오를 하니 겁도 나지 않았고 십리길도 멀지 않았다. 얼마나 걸었는지……. 드디어 두만강 뚝이 바라보이는 큰 밭에 도착하자 마음이 긴장해졌다. 뚝 위로 왔다갔다 전지(電池) 불을 비추며 순찰하는 경비대 군인들의 모습이 보였다. 1시 경이 되자 뚝 위가 조용해졌다.
어머니와 나는 조심조심 뚝을 기어올랐다. 뚝은 2.8m 가량높이로 쌓았다. 재빨리 뚝을 넘어서 내려서니 숲 속이었는데 5m가량 숲 속을 통과하니 괴물 같은 것이 여기 저기 우뚝우뚝 솟아있었다. 긴장하여 머리카락이 쭈뼛이 일어났지만 살금살금 다가가 보니 군대들의 보초막이었다. 소름이 끼쳤다. 한창서서 동정을 살피노라니 초막 안에서 코를 고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손에 땀을 쥐고 초막사이로 빠져나와 20m가량 걸었는데 “누구얏!” 하는 소리가 들리고 전지불이 번뜩 비쳤다. 순간 큰 나무 뒤에 숨어서 꼼짝 않고 있다가 조용해진 후에 다시 냅다 달렸다. 검은 마수가 당장 뒷덜미를 움켜쥐는 듯했다. 몇 분 후에 두만강 얼음 위에 들어서게 되었다. 등골로 식은땀이 흘러 온통 물바다가 되였다. 얼음을 다 지나고 중국쪽 기슭에 도착하니 안도의 숨이 나왔다.
훈춘에서 언니의 소식을 듣고 우리는 연길로 들어갔다. 언니는 연길시 모 식당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나를 보고 둘이 붙잡고 울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설움
다음날 언니와 함께 여기 저기 다니며 월세집을 구했는데 한달에 70원씩(한국돈 1만원 정도) 내는 집이였다. 말이 집이지 창고와 같았다. 규격이 맞지 않는 문틈으로 푸른 하늘이 내다 보였고 눈보라가 칠 때마다 눈가루가 신발 벗는 곳에 날리어 들어와 쌓였다.
여섯 식구가 살기엔 너무나 비좁았다. 차례로 눕고 나면 발 디딜 자리도 남지 않는 10평짜리 작은 집이였다. 이불도 없어서 6명이 담요 한 장으로 하반신을 가리고 상반신은 동복을 덮고 머리에 수건을 쓰고 잤다. 아침에 자고 깨어나면 물이 다 얼고 손발이 까들어 온몸이 쓰시고 아팠다. 아침을 먹으면 나무 주우러 가고 피발시장5)에 가서 시래기도 주어왔고 언감자며 언귤도 주어왔다. 언감자와 시래기는 그런대로 먹을 수 있었지만 언귤은 녹으면 써서 먹기 힘들었다.
하지만 조선에 비하면 그것은 꽃이었다. 나도 한 달 후에 양고기 뀀6)집에 취직하였는데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무척 애를 먹었었다. 어느 날 한족(漢族) 손님이 나를 보고 소금을 가져다 달라고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하여 그만 조선 사람이라는 것이 발각되어 그 뀀점에서 쫓겨났다. 거기서 10일간 일했지만 5일분의 공자(급여)를 타가지고 나왔다.
이렇게 쫓겨나기를 몇 번, 피타는 노력 끝에 뀀점에서 쓰는 말은 대충 알아들을 수 있었다. 1년간 뀀점에서 일하면서 한족말(중국어)을 많이 익힌 후에는 그런대로 벌어먹을 수 있었지만 옷 한 견지(벌) 사입기도 바빴다. 3년간 이런 생활을 지속하였지만 고달픔보다도 아이를 배불리 먹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했다.
2002년 4월 어느 날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던 중 나는 뒤에서 오는 택시 차에 치어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온몸이 시퍼렇게 멍이 들고 골도 조금씩 아파서 일할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그때까지 내 운명은 이리 지지리도 궂은가 하고 팔자타령만 하였다. 조선 사람이라는 단하나의 이유로 차 사고를 당하고도 경찰에 신고 할 수 없는 처지, 언제 붙잡힐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에서 사는 것이 너무도 싫었다.
당시 어머니가 한 성도님의 전도를 받아 교회로 나가고 있었다. 서럽게 우는 나를 달래시며 어머니가 나보고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였다. 그러면 평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나도 마음속에 하나님을 영접하게 되였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마음속으로 늘 감사했고 평안했으며 안정된 생활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이때부터 하나님 없으면 살수 없는 존재가 되었고 행복한 생활을 맛볼 수 있었다.
도문변방구류소
그러던 중 2003년 12월에 뜻밖에도 중국 공안에 온 가족이 체포당하게 되었다. 누군가가 우리 식구를 고발했던 것 같다. 이리하여 중국으로 온지 5년 만에, 꿈에서 조차 돌아가기 무서웠던 나의 모국 조선으로 다시 나가게 되였다.
우리 가족을 연행하여 싣고 간 곳은 3층으로 된 변방대 사무실 이였다. 변방호텔 2층으로 데리고 올라가는 것이었다. 나는 이것이 현실이 아니고 꿈이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하고 생각했지만 냉정한 현실이었다.
“여기가 어딘지 알지? 조선으로 말하면 보위부라는 곳이다.”
40대를 갓 넘은 듯한 경찰 하나가 위협적으로 말했다.
“너 조선여자지? 이름은 000, 일 한 곳은 연길시 xx시장. 그리고 이 사진을 좀 봐, 네가 맞지?”
“맞습니다. 나는 조선 사람입니다.”
나는 더 변명하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7∼8명의 경찰들이 번갈아 가며 질문을 들이댔다. 거기서 문건작성이 끝나자 도문(圖們)변방대에 우리를 넘겼다. 연길에서 40분간 차를 타고 도문에 도착하니 3m 높이의 어마어마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우리를 맞이했다.
시커먼 색깔의 육중한 철대문이 꽉 닫혀져 있었다. 마치 괴물의 아가리처럼 신호 장치를 누르자 대문이 열렸다. 우리를 넘겨받으려고 두 사람이 나왔는데 우리를 데리고 철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아우성소리……. 2층으로 된 변방감옥은 원형이었는데 아래 위에 사람들이 꽉 차있는 듯싶었다. 붙잡혀 온 조선 사람들이 아마 350명 가량 있는 것 같았다.
“옷 벗어라!”
안경 낀 여자가 다가와서 한족말로 소리쳤다. 못 알아들은 척하며 벗지 않고 서있자 서투른 조선말로 옷 벗으라고 또 소리쳤다. 우리와 함께 변방대로 이송된 세여자도(어머니, 두 딸) 함께 있었는데 가족이듯 싶었다. 주변에 가득히 서있는 20세 좌우 남자 변방대원들이 지켜보고 있어서인지 처녀애들은 겉옷만 벗은 채 속옷은 벗지 않고 있었다.
속옷도 벗으라고 안경낀 여자가 말하자 “속옷은 못 벗습니다. 아무것도 입지 않았어요.”하고 항거했다. “션머(뭐라고)? 초우니마?7) 여기가 어디라고 함부로 대답질이냐?”
안경 낀 여자가 발로 힘껏 그의 배를 걷어차자 그 처녀애가 “아이고” 하며 나뒹굴었다. 다시 밟으려고 또 처녀애에게로 다가드는 순간 그 애의 어머니가 막아서며 “너희들 나를 때려라”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때 남자 변방대원 한명이 다가와서 그 처녀애의 귀박을 후려치고 그 어머니도 후려졌다.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한참 분풀이를 한 후에 속옷만 입히고 우리를 4호 감방(2층)에 끌어다 넣었다. 검사기로 우리 몸을 검사하고 몸에 지닌 돈과 사품(私品)들을 전부 회수하였다. 4호 감방에 들어가니 30여명의 여자들이 중국각지에서 붙잡혀왔다.
조선에 가면 이것도 없어
비록 감방 안이었지만 난방시설도 괜찮았고 담요도 한 장씩 주었다. 저녁이 되자 살창문 틈으로 “밥 주겠다, 줄 서!” 하며 변방대원들이 소리쳤다. 한사람씩 차례로 서서 밥과 국을 받았다. 밥은 이밥이었는데 약간 뜬 냄새가 났고 국은 시래깃국 이였는데 잘 익히지 않아 꼭 배추를 씻어낸 후 부스러기들이 물 위에 뜨는 듯했다. 간은 전혀 넣지 않은 듯 슴슴한8) 국이었다.
“소금 달라!”
우리전체 감방은 밥을 먹지 않고 소금을 줄 때까지 단식했다. 어떤 날은 너무 짜서 국을 먹을 수 없었다. 나는 감방에 들어간 며칠간 밥을 먹지 않고 계속 남들에게 주었다.
“지금 여기 있을 때 부지런히 먹어둬. 조선에 가면 이것도 없어.”
우리 곁에 있는 한 언니가 귀띔해 주었다.
변방구류소는 6시에 기상하였는데 6시가 되면 “도문 변방구류소 규정”하고 쨍쨍한 여자의 목소리가 방송에서 울려나오면 일어나서 자리 정돈하고 세수를 한다. 그다음 아침밥 타먹고 취급(조사)받으러 나간다. 취급을 다 받으면 빨간 도장을 다섯손가락에 다 찍고 사진을 찍으면 끝난다. 애들이 다섯 명 가량 4호감방에 있었는데 철부지들이 좋아라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놀아도 가만 뒀다.
변방구류소에서 11일간 구류되었다. 12일째 되는 날 우리는 온성보위부로 이관되었다. 소형뻐스에 앉아서 10분가량 달리다가 창밖을 내다보니 낯선 조선의 건물들이 눈앞에 안겨왔다. 이때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리고 5∼6년간 정든 모든 사람들, 모든 것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이 가슴을 저몄다.
우리는 중국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가게 되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꼭 다시 중국에로 돌아오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중국에 와서 영원한 생명 - 천국복음을 받고 하나님을 영접했다. 이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축복인지……. 이 축복, 이 행복을 안고 살아가는 내가 무슨 고난인들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을 것만 같았다.
“사람을 무서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잠언 29:25)
나는 하나님께서 꼭 우리가족을 지켜주심을 굳게 믿었다.
지옥문에 들어서다
온성보위부에 도착하니 5∼6명가량의 보위부 사람들이 우리를 인계받았다.
“개 간나새끼들, 빨리 빨리 걸어!”
5∼6년간 들어보지 못한 쌍스러운 욕지거리 소리를 들으니 진정 조선으로 왔다는 실감이 새삼스럽게 났다. 저녁 6시쯤 되었다. 한손을 다른 사람과 같이 묶어왔는데 차에서 뛰어내리자니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시커멓게 그을은 듯한 낮은 단층건물이 우리를 반겼다. 전기불도 없는 까만 나라였다. 나는 복잡한 속에서도 딸애의 손목을 꼭 잡았다.
“힘내야해, 떨지 말아. 그리고 어머니가 곁에 있다는 생각만 해라.”
이렇게 말하며 딸애를 애무하는데 뒤에서 “야-야, 쌍 개간나새끼, 무슨 말이야. 아가리 못다 물개?”하고 나의 뒤통수를 주먹으로 후려갈겼다.
“너네 가족이지? 너는 3호 감방, 너는 복도로 가!”
이리하여 딸은 3호 감방에 들어가고 나는 복도에 구류되었다. 구류장은 1호, 2호, 3호 감방이 세 개였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터질 지경이었고 그 안에 앉은 사람들은 너무 더워서 증기욕을 하는 것처럼 땀을 흘렸다. 복도에까지 사람이 빼곡히 앉았는데 마치 콩나물시루와 같았다.
안에 들어가니 모두 번호를 불렀다. 나에게 98번이라는 번호가 차례졌다. 1, 2호 감방은 남자 감방이었는데 매질소리가 그칠 새 없었다. 구류장에 들어가면 간수들과 취급원들에게 지켜야 할 보고법과 예모, 감방안의 규율부터 배워준다. “선생님 x번 소변 볼 수 있습니까?” “선생님 X감방 Y번 소변보고 돌아왔습니다.” “선생님 C번 취급받으러 나왔습니다.”하는 따위였다. 만약 말을 잘못하면 쌍욕을 먹고 얻어맞아야 한다. 남자감방에서는 만일 누가 보고법을 틀리게 하면 감방의 죄수조장이 잘못한 죄수를 죽도록 때린다.
온성보위부에 들어간 첫날이었다. 내가 머리를 숙이고 생각하는데 뒤에서 “98번 나와!”하고 소리쳤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간수가 도끼눈을 하고 나를 쏘아봤다. 나는 뒤로 걸어 나가 그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앉았다. 징을 박은 구둣발로 나의 뒤통수를 찼다. 다시 구둣발로 정수리를 내려 찼다.
“대가리는 왜 숙이고 있어! 너 졸았지? 내 정신 들게 해주마.”
그리고 귀뺨을 5∼6번 후려 갈겼다.
“정신 들지? 자리로 가봐.”
나의 두 눈에서는 불이 이는 것 같았다. 매를 맞은 아픔보다도 격분해서 울었다. 우리 딸애도 함께 울었단다.
그 다음날 이였다. 온성보위부에서는 밥을 주지 않고 국수 죽을 두어 숟가락 훌 마시면 없는 정도로 주었다. 그런데 들어온 지 5일 된다는, 은덕군에 살았다는 여자가 자기가 가져온 고추장을 죽에다 놓아먹다가 여러 사람들이 달라는 바람에 주위가 집중되었다.
“뭐야? 너 여기로 나오라. 왜 그래?”
간수가 은덕 여자보고 나오라고 했다. 그 여자가 주춤거리자 “빨리!”하고 소리쳤다. 그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자 “너 고추장 가져와. 입 벌려!”하고는 그 고추장을 그의 입에 마구 짜 넣었다. 그리고는 그와 함께 나눠먹은 세 여자도 나오라고 하였다. 세 여자도 나와서 무릎을 꿇고 앉았는데 나무곤봉으로 마구 내리쳤다. 한 여자는 입을 맞았는데 입술이 훌떡 뒤집어져서 돼지 입처럼 부풀어 올랐다. 그리고 한 여자는 이마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는데 피가 터져 순식간에 얼굴이 피범벅이 되였다. 딱- 딱-. 곤봉에 얻어맞는 소리가 골수를 찌르는 것처럼 들려왔다. 네 명 다 죽도록 얻어맞고 울며 용서를 빌었다.
“가서 세수해.”
피 터진 여자더러 간수가 소리쳤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주여, 보고 계시나이까?
며칠 후 조금 급(級)이 높은 듯한 한 사람이 들어왔는데 손에 가위를 들고 들어왔다.
“노랑대가리들9) 몽땅 일어섯. 내가 이제부터 너희들 대가리를 빡빡 깎아 놓겠다.”
7∼8명의 여자들이 일어섰는데 그중에 도문변방소에서 안경쟁이에게 얻어맞던 처녀애도 있었다. 그 애의 머리칼이 특별히 노랗게 보였다.
“황색바람이 든 년들! 너, 나와.”
그 애가 무릎을 꿇고 앉자 머리채를 손으로 거머쥐고 머리칼을 싹둑 잘랐다.
“선생님 잘못했습니다.”
그 애가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울었다.
“잘못? 네 에미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해. 이런 간나들은 못 고쳐!”하며 머리채를 휘둘러 벽에다 짓찍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앉은 그 애의 무릎을 구두 발로 사정없이 짓밟았다. 어린 것의 비명소리에 우리는 치를 떨었다.
‘짐승같은 악마들…….’
감방안의 사람들이 모두 분개했다.
그날 오후였다. 점검을 하겠다며 갑자기 온 감방안의 사람들을 다 밖에 내보내는 것이었다. 그날은 소한(小寒) 날이어서 맵짜기 그지 없었다. 홑옷바람에 2시간가량 밖에 세워 놓았는데 우리 딸애랑은 너무 추워서 울음을 터뜨렸다.
2시간 후 5명씩 들어가서 몸수색을 당하였다.
한줄배기10) 20살도 되나마나한 처녀애가 검사를 하였는데 지독스러웠다. 나도 다른 네 명과 함께 검사받으러 들어갔는데 15살짜리 소녀도 있었다. 옷을 다 벗긴 후 한줄배기 여자가 와서 15살짜리더러 “너 시집갔어? 너 젖가슴 좀 봐. 더러운 간나새끼!”하고 그 애 귀뺨을 쳤다.
“아니요, 시집 안 갔어요.”
“안 갔어? 너무 주물러서 축 처졌는데 안가긴 뭐 안가?” 하며 허리에 찼던 가죽 띠로 그 애의 젖가슴이며 홀딱 벗은 몸을 굴뱀이 가게 때렸다. 앗 앗 소리치는 그 애의 비명소리에 가슴이 찔렸다. 그 애더러 한참 욕질하고 때리던 그녀가 이번에는 40대를 넘은 한 아주머니를 몰아세웠다.
“나잇살이나 건사했다고 그리 뻣뻣해? 건방진 간나새끼, 너 이 간나 맛 좀 봐라!”
“…….”
“다리 벌려. 이제부터 앉았다 일어섰다 500번 해.”
그 여자가 앉았다 일어섰다 100개를 좀 더 하고 비틀거렸다.
“개간나. 네 간나 새끼도 사람이니?”
그녀가 마구 욕질했다. 제 자식보다도 더 어린 것한테 체조를 받는 그 아주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아, 불쌍한 조선 여성들! 주여, 보고 계시나이까? 구원 하시옵소서. 이 불쌍한 조선 여자들을 구원해주시옵소서.’
나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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