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무죄(4) - 김광일 (1)
  • 관리자
  • 2010-06-15 13:4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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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병방, 허약반

급식과 위생환경이 너무도 열악한 교화소에서는 수용자들이 허약과 여러 가지 질병으로 끊임없이 죽어나간다. 교화소의 정량만 먹고는 누구도 예외 없이 허약으로 되어 죽어날 수 있기에 수용자들은 어떻게든 밥 한술, 국 한 그릇이라도 더 얻어먹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린다.

길가의 담배꽁초를 주어서는 성냥개비만한 담배를 말아 구내반의 ‘티’들에게 주고 밥 한 덩이와 바꾼다. 바느질하는 자는 모자, 옷, 장갑들을 만들어 바꾸어 먹는데 모든 깁각질은 손으로 밖에 할 수 없는 교화소에서 어떤 수용자들은 재봉으로 한 것처럼 고르고 일매지게 바느질 한다. 바늘 한 대가 밥 한 덩이이다. 쇠바늘도 없어 구리줄로 몇 일이고 갈고 사기조각으로 우비여 바늘귀를 만들어 쓰는 것도 있다.

과 배급을 나를 적에는 몇 개 반이 동원되는데 양철판을 가는 골무모양으로 만들어 끝이 뽀족한 쪽을 등에 진 자루 밑에 박고 거기로 흘러나오는 옥수수알을 받아먹는다. 이렇게 하다가 들키면 매질을 당하고 급식이 잘린다. 그래도 눈을 피해가며 훔쳐 먹으며 길바닥에 떨어진 한 알의 옥수수알을 보고 그 무거운 40kg의 자루를 지고서도 허리를 굽혀 주어먹는다.

소똥속의 옥수수알을 먹는다는 것이 사실이다. 풀이면 풀, 뿌리면 뿌리, 먹고 죽지 않을 것이면 다 입으로 간다.

그나마도 좀 배를 달랠 수 있는 계절은 한창 풀이 돋는 봄철과 가을 남새철이다.

봄이 되면 산으로 갈 때 선생들이 좀 시간을 주면 수용자들은 산나물을 채취한다. 4~50명이 30분이나 한 시간을 뜯으면 큰 자루에 너덧 개는 실이 되는데 좋은 것으로 선생들이 돼지먹이와 토끼풀로 두세 자루를 내놓고 나머지를 데쳐서는 물에 헹구어 줴기를 만들어 나누어준다.

“싸각 싸각…….” 제대로 풀물과 풀독이 우러나지 않았어도 정말 맛있게 먹는다. 소금이나 된장이 조금만 있으면 그 이상의 감칠맛이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봄철에는 호박도 식량이다. 과와 선생들이 집의 돼지먹이로 심은 호박을 수확해서는 한 개씩 나누어주면 날것으로 먹는데 두세 살짜리 어린이 머리만한 것을 먹어도 더 먹고 싶어 한다. 수용자들은 오이와 호박을 놓으면 오이는 물냄새가 나서 아무 맛도 못 느껴 호박을 먹는다.

뱀, 쥐도 식량이다. 뱀 한 마리에 밥 여섯 덩이를 바꾸며 쥐 한 마리에 밥 두 덩이를 바꾼다.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씨가 너무도 배가 고파 쥐를 먹었다고 했는데 북한의 교화소들에서는 쥐를 먹은지 너무도 오래전 일이며 없어서 못 먹는다.

가을철에는 기회가 생겨 무와 양배추를 생것으로 숨이 차서 더 먹지 못할 때까지 먹고는 온 밤 설사하고 오줌발이 서서는 변소에 드나들어 다음날에 수분이 싹 빠져 허탈해진다. 간혹 담당선생들이 마음을 써서 무와 배추를 먹게 하면 국통에 넣어 끓여서 물을 찌우고 탕을 쳐서 또 끓여 죽같이 하여 먹는다.

감자철에는 선생들이 눈을 피해 생것으로 열 개 이상 먹는다. 그러고는 밤새 설사하고 다음날이면 수분이 싹 빠지는 경우가 있어 순간에 허약이 된다.

봄과 가을에는 이렇게라도 먹을 것이 있어 주린 배를 달래지만 겨울철에는 근본 입에 대볼 것이 없으니 누가 찾아줄 사람이 없는 수용자들은 먹을 것에 대한 허겁질에 옴하여 허약에 빠진다.

눈은 점점 확 속으로 들어가고 광대뼈는 나와서 해골같이 되어서는 밀면 민대로 넘어져 벌레같이 뒹군다. 그래도 악이라도 있는 자는 주둥이를 까불지만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그들에게는 멸시만이 차려진다.

과들에서는 교화반들에서 시끄러운 존재로 천대받아 주눅 들어 기를 못 펴고 시들해지는 이들을 그대로 죽일 수는 없지 하니 한데 모아 6반이라고 허약반을 만들어 놓고 하루에 멀건 죽을 한 그릇씩 더 먹이며 추겨 세워 보려하지만 다 기운 운명들은 좀처럼 쉽지 않다.

허약 기준이라는 것이 바지를 벗겨 놓고 엉치(엉덩이)사이가 벌어진 것이 주먹세운 것 만큼이면 허약 1도, 주먹 눕힌 것 만큼이면 2도 눕힌 것과 세운 것 만큼이면 3도로 평가하는데 2도면 벌써 건들건들 하다가 인츰 3도로 넘어 죽어나간다.

사람이 너무도 여위면 주글주글한 살가죽이 뼈에 헝겊씌운 것 같이 붙어있고 벌어진 다리 골반 사이로는 항문이 토끼꼬리처럼 나온다.

이렇게 육체가 폐물이 된 수용자가 많고 똥에 버무린 것 같은 교화소 일상에 온갖 질병들이 휩쓴다.

감기는 보통으로 좀만 지속되면 결핵으로 넘으며 회충은 질겁할 정도로 뭉치져서 구불대고 이와 빈대는 온몸과 감방에서 득실거리며 보리알만한 것들이 열매처럼 머리와 옷들에 붙어있다가 뚝뚝 떨어져서는 밥그릇에 들어오기도 한다.

이것들이 수용자들의 생명을 위협하는 발진티부스나 옴 같은 피부병들을 퍼지여 놓는데 똥진이 푹 배어 있는 6~70명이 모여서 우글대는 감방에서는 순식간에 온 감방에 전염된다. 옴이 번지면 험한 자들은 진물이 줄줄 흐르며 살이 썩어 나간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열병’이라고 파라티부스가 매해 겨울마다 덮쳐든다.

아침이면 위생원이 매 감방마다 체온기 한 개를 들고 다니는데 누가 이상증세가 있으면 체온을 재보고 37도가 넘어가면 휴역이고 하루 더 지속하면 ‘병방’으로 격리시킨다.

소금, 고추, 마늘 같은 일체의 조미료를 못 먹게 된 수용자들은 몸에 열량이 생길수가 없어 35도 5부가 정상 체온이며 37도가 넘어가면 열이 많은 것으로 된다.

나도 입소한 해 12월초에 열이 나서 재보니 37도가 넘어섰다. 밥도 먹지 못하고 저녁에 다시 체온을 재니 39도를 넘어 열병으로 보고 병방으로 격리시켰다. 이때 반장이 ‘까마귀날개’에 조금씩 끼여 있는 속개기를 ‘티’라고 혼자만 먹는 것을 주며 밥을 먹으라고 했는데 정말 못 먹겠다.

“야 징역에서 밥맛 떨구면 죽어!”

병방에 들어가니 2과와 5과의 열병환자들을 다 모아놓았는데 거의 30명이 드러누워 있었다. 일체 악물치료라는 것은 없고 오직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격리라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이다. 기껏해야 정 먹지 못하는 환자에게 ‘백죽’이라고 알락미쌀로 쑨 죽을 주는데 교화소에서는 “백죽을 먹는 자는 다 죽는다”는 말이 있는데 정말 다 죽어나갔다.

내가 들어가서 이틀 만에 발밑에 누워있던 수용자들이 새벽에 한 명, 오후에 한 명씩 죽어나갔다.

“죽은 사람은 가는 음식은 먹는다.”다고 내 오른쪽으로 두사람 건너에 있던 수용자는 밥을 한 술도 못 먹다가 그날만은 먹여 주는 대로 받아먹는 것이 눈에 초점이 없고 무의식적으로 입을 놀리는데 오후에 가래를 끓더니 스르르 맥없이 죽는다. 그때 내가 병방에 있는 12일 동안에 여섯 명이 죽어나갔다.

교화소에서는 겨울이면 이 열병이 수용자들의 생명을 무섭게 위협한다. 죽으면 즉시 시체를 담아 내여 본소 구내반 창고구석에 몇 구가 모일 때가지 먹던 밥딸보를 얼굴에 덮어둔다.

수용자들은 시체가 나가기 전에 자기보다 나은 옷이면 벗겨 바꾸어 입고 죽는 자들의 소원을 들어주어 반마다 가져다 준 펑펑이떡이 손에 쥐여있으면 누군지 모르게 벌써 뺏어낸다. 시체들은 처리될 때까지 있노라면 쥐가 눈, 코, 귀, 발가락 같은 것은 다 파먹는다.

네댓구가 되면 본소 잡부들이 커다란 손달구지에 담아 싣고 ‘불망산’으로 간다. 죽은 수용자들을 불태워버리는 곳이라고 해서 ‘불망산’이라고 하는 곳에는 철로 만든 로가 있는데 거기에 쓸어 넣고 태워서 없애버린다.

북한도 화장제도가 있지만 아직은 선호하는 사람이 극히 적어 화장하면 두벌 죽음으로 여기는데 수용자들은 죄를 씻지 못하고 죽은 반역자로 간주 되여 로 속에 넣어 ‘오물’ 같이 태워버리는 것이다.

누구도 그 ‘오물’을 제대로 태우지 않다나니 로 속에는 채 타지 않은 뼈가 언제나 수북이 쌓여 있으며 그 골짜기에는 값없이 죽어간 원혼들의 영혼이 떠도는 것 같아 그곳을 지날 때는 섬직한 감이 든다.

금방 살아있던 사람이 시체가 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순간 정신 줄을 놓으면 나도 저렇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에 악을 쓰고 기력을 모았다.

“어떻게든 살자. 이 징역에서 개죽음을 당하지 말자.”하고 생각하고 밥을 넘겨보려고 씹었으나 너무도 열이 나고 어질어질하니 입에서 모래알들이 도는 것 같아 넘길 수 없었다.

나는 속내의를 벗었다. 고상한 모양의 중국산이였는데 병방배식을 담당한 수용자가 내가 들어온 날에 보고 “내의 좋다.”하며 욕심내는 것을 아직 교화살이의 눈을 못 떠 그 욕심을 몰랐던 것이다.

“이거 갖소.”
“…….”
“날 된장 한 숟가락만 좀 주오.”

교화규정에 바꿈질은 못하게 되어있어 누가 바꿈질을 했다고 하면 처벌을 받게 되었으며 더욱이 식량이나 간새 같은 교화소 급식물에 손질하다 걸리면 ‘탕’을 맞아 ‘시래기’로 되어야 할 수도 있어 조심하지만 어느 정도에서는 서로 통하여 눈치를 보아 비닐종이에 된장을 싸주었다.

나는 그 된장을 금처럼 아껴 먹었다. 3일 동안 밥을 몇 술 억지로 입에 넣고는 된장을 소금알만큼 찍어 입안에서 굴리고 하며 먹었다.

지금도 나는 그 때 일을 생각하면 된장을 먹고 살았다고 한다. 그 된장에 내 입맛이 돌아서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13 일 만에 열이 내리며 살아나왔다.

열병환자가 계속 불어나니 열이 내린 환자는 본 반으로 보내 일주일씩 회복시키게 한다.

교화소에 거울이 없어 보지 못했지만 그때 내 모습은 꼭 해골이었을 것이다. 싸고 뭉개고 하는 병방에서 나온 내 몸에서는 물씬 하는 똥내가 났겠지만 몸 가눌 기력도 없는 나는 냄새도 가리지 못할 정도로 절어있었다.

일주일이 못되어 출력했는데 길을 가다가 남들이 넘어서는 홈채기를 넘지 못해 빠져서는 발을 들 맥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다 “광일이 다 죽게 됐구나.”하며 담당선생이 손잡아 주어서야 나왔다.

공화국의 법을 집행하는 법관들이라지만 개중에는 인간성이 있는 선생들도 있었다.


4. 면회

살가운 가족 친척들이 있는 수용자들은 손꼽아 면회날을 기다린다. 일을 끝나고 와서 누가 면회 왔다고 하면 그 기쁨이란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부모 형제 처자를 만난다는 기쁨에 앞서 한 끼 일지라도 맛있는 것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도 기쁘고 반가운 것이다.

선생을 따라 본소에 도착하면 면회장 밖에서 면회 온 사람들이 수용자들 속에서 자기 혈육을 찾느라 눈길이 바쁘다. 서로가 찾는 눈길이 마주치면 반가움에 소리 없는 웃음을 활짝 지으며 손을 흔들지만 수용자들은 반갑다는 눈짓과 끄덕이는 고개뿐 죄수의 신분 때문에 말을 할 수가 없다.

대기실에 들어가면 1과부터 5과까지의 모든 면회자들이 모여들다나니 3평 되는 좁은 공간에 20명이 빼곡히 서서 자기 순번을 기다린다. 대기실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역시 3평 되는 음식 먹는 칸이 있으며 우측 문을 열고 들어가면 면회장인데 테이블 두 개를 놓고 교화과 면회담당선생이 앉고 그 양쪽에서 가족과 수용자가 서서 몇 마디 말을 한다.

잘 있었나, 앓지 않았나, 언제 또 와 달라 등등 짧은 시간에 요건을 묻고 말하고는 인츰 들어간다. 더 있자 해도 대기실에 순번을 기다리는 많은 수용자들 때문에 있을 수도 없지만 온 신경이 쏠려있는 음식과 면회품을 면회반장이 먼저 가지고 들어가 먹는 칸에 들여다놓고 무슨 다른 물건이(비납입품)있는지 떡까지 쪼개보며 간혹 요긴한 물건을 빼낼 수도 있고 아직 면회를 하지 못한 수용자들이 참을 수 없는 탐욕에 남이 음식이라도 새까만 손으로 마구 덮쳐가는 일들이 많기 때문이다.

찾아와준 가족들에게 고맙다는 말은 고사하고 황급히 먹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음식그릇을 덥석 쥐고 정신없이 먹는다. 많이 먹기 위하여 서서 먹는다. 떡, 밥, 고기, 순대…….

사회생활 할 적에 먹던 음식생각에 군침만 꿀꺽꿀꺽 하며 눈앞에 어른거리던 음식을 현실로 보고 먹을 수 있으니 그 순간만큼은 입이 흡족하고 배가 만족하다. 먹고 먹고 더 먹고 배가 부른 다음에는 옆 수용자의 음식도 서로 먹어보며 목구멍까지 채운다. 이것도 순간, 사람이 먹어야 얼마만큼 먹겠는가. 가족들이 가져온 많은 음식들을 살이 떨어지는 것 같은 아쉬움 속에 남겨두고 새로 면회 끝난 수용자들이 들어오면 밀려 나가야 한다. 먹다 남은 음식들은 면회 반장이 범법처럼 바께쯔에 모아 담았다가 본소 결핵반이나 허약반에 가져다준다는데 그것은 명색뿐이고 대부분 통하는 ‘티’들이 소비한다.

이 면회를 올 때 가족들이 펑펑이가루를 5~30kg에 이르기까지 능력껏 가져오는데 규정은 15kg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 15kg를 본인이 다 먹지 못한다. 과별로 다르지만 2과는 무조건 10kg를 떼내 반에 공동으로 바치고 나머지 5kg만을 먹어야 한다.

왜 10kg를 바쳐야하는가? 교화반의 60여명의 수용자들 속에 면회자가 8~12 명밖에 없다.

먹을 것이 귀한 북한에서 펑펑이가루를 가지고 면회를 온다는 것이 웬만한 마음으로는 일반가정들에서는 감당해내기 힘들다. 옥수수 1kg에 집을 팔고 몇키로에 잘못하면 살인이 일어나는 판에 한 끼 벌어서 한 끼 먹고사는 사람들은 제 입건사도 하기 힘들다.

교화소에 들어온 사람들도 대개가 생활성 범죄자들로서 옥수수라도 먹을 것이 있었으면 누가 도적질을 했고 누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다녔겠는가. 물론 개중에는 돈벌이를 목적한 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말 생활을 유지하기 힘들어 범죄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라 그가 교화소에 온 다음에는 그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기 십상이며 있다 해도 면회 다닐 형편이 못된다. 혈육이 귀하지 않아서, 정이 없어서, 못된 놈이어서가 아니라 내부터 살아야하기 때문이다.

또 먼 곳에 있는 가족들은 교통이 매우 불편한 북한 실정에서 적게 잡아도 6~10일 걸리는 면회길에 돈을 내고 ‘써비차’를 타고 오다나면 펑펑이가루 15kg를 들여 주기 위해 3~4배의 값을 치러야 하니 감당해 낼 수가 없어 아예 포기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런 수용자들이 대부분인 교화소의 실정은 공급하는 급식만으로는 허약과 질병으로 인한 떼죽음을 막을 수 없으니 면회자들한테서 10kg씩 떼내서는 ‘가루탕’을 쑤어 공동으로 먹게 한다.

‘가루탕’이라는 것은 반마다 있는 국통에 철따라 배추, 무, 호박, 산나물 정 없을 때에는 맹물을 끓여서 거기에 펑펑이가루를 3~4명분을 모아서 풀어넣어 휘저어 한 돌기, 두 돌기 많을 적에는 세 돌기씩 ‘또로배’에 받아서 먹는 것인데 이날은 면회 없는 수용자들도 배를 채워볼 수 있는 날로서 명절인 것이다. 하기에 누가 면회 왔다하면 면회 없는 수용자들도 기뻐하며 두어 명만 더 오면 또 한 번 ‘가루탕’을 먹어볼 수 있겠는데 하며 반에 면회자가 생기기를 바란다.

면회자들은 10kg를 바치고 나면 5kg를 먹어야 하니 아쉬운 마음에 가족들에게 면회 시 눈치를 보아 쪽지를 보내 20kg 이상을 가져오라고 한다. 가족들은 제 혈육이라 죽이지 말아야겠으니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가져온다.

분기에 한 번 하게 된 면회지만 기다림에 죽을 것 같아 한 달에 한 번씩 오려면 규정위반이라고 초소에 담배 한 갑을 주고 통과하고 면회 담당선생한테 2~3갑을 주어야만 면회를 시킨다. 아마 면회 담당선생은 하루에 북한에서 쫄쫄히 돈이 될 수 있는 담배를 다섯 막대기는 받을 것이다. 한 막대기가 열 갑이다.

이 펑펑이가루도 1993년 북한으로 송환된 이인모씨가 북한의 구류장과 교화소를 가보고 이렇게 살면 2년도 못살고 죽었을 것이라고, 남쪽에 있을 때 김대중씨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이 영치금을 후원해주어 많은 도움이 됐다고 하며 무엇인가 먹을 것을 받아주어야 한다고 해서 받아들인 것이란다.

실제로 1993년 이전에는 그 자리에서 먹을 음식 외 다른 식품은 받지 않았다.

이런 펑펑이 가루를 이고지고 끌고 하며 하루에도 수십 명씩 면회를 왔으니 수용자들은 여태껏 들어온 펑펑이가루면 ‘남포갑문’을 쌓았을 것이라고 한다.

교화소에서는 수용자와 가족들에게 면회 시 의약품, 전구, 책 등 교화소에 필요한 물품들을 가져와야 면회를 시킨다고 한다. 별 수 없다. 가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요구하는 수량을 가져다 받쳐야하니 그 부담은 배가 되는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자기들이 가족들을 시켜 필요한 물건을 장마당에서 사와서는 면회 온 수용자가족들에게 비싸게 팔아먹게 한다. 어쩔 수 없이 면회하려니 비싸도 그것을 사야한다.

이렇게 교화소는 수용자들과 가족들의 혈세로 운영해나간다.

면회가 한 번 오면 소리가 높아진다. 면회는 수용자들 속에서 등급이며 힘이며 영향력이다. 면회가 오면 가루 한 줌 떡 한 줴기를 얻어먹기 위해 살갑게 겨드랑이게 파고드는 친구들이 많아진다. 그 가루로 필요한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으며 그 가루로 사람을 울리고 때릴 수 있다. 하기에 먹을 것이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교화소에서는 “밥덩이는 내화이고 펑펑이가루는 달러이다.”하는 말이 있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면회 오는 수용자는 우선은 더 먹는 것이 있으니 다른 수용자에 비해 몸 상태가 좋아 힘을 쓸 수 있어 그들보다 나으며 또 가정형편이 어떻던 면회를 다닐 수 있는 조건이니 담당선생의 눈에 들어 이용가치가 있는 수용자로 일반 ‘시래기’들하고 분리되며 이용자도 대개가 면회 잘 오는 자들이 차지한다.

힘 있는 자가 일을 더 많이 할 수 있으며 일을 더 많이 하다 보니 소리가 높아지고 소리가 높아지니 다른 수용자들을 통제하게 되어 자연히 이용자감이 될 수 있다.

선생들은 면회 잘 오는 수용자들이 가족들과 이렇게 저렇게 결탁하여 자기의 생활공간을 조성하며 ‘탁’자리 하나 주는 것으로 그 대가를 지불한다.

선생들의 이런 심리를 알고 능력이 되는 수용자 가족들은 연고를 찾아 뚫고 들어서는 선생과 연계를 갖고 자기 가족들을 이용자 자리에 앉히려고 많은 공작과 투자를 한다.

교화소의 기본 ‘탁’자리에는 다 그런 배경이 있다.


5. 암투

쇠도 녹인다는 교화소에서 살아남자면 남들보다 쉬운 일을 하던가 더 먹던가 해야 하는데 더 먹고 쉬운 일을 하자면 장, 즉 ‘티’가 되어야 한다.

한명 한명의 수용자치고 잡혔으니 죄수이지 결코 머저리가 아닐진대 그런 속에서 장 자리를 차지한다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다.

수용자들은 너나없이 오직 자신의 생존을 위하여 능력껏 수단과 방법을 다하는 집합체이기에 장 자리를 위한 피 터지는 암투가 벌어지며 이 암투는 교화생활 끝나는 날까지 지독하게 계속 된다.

통 털어 이용자들인 이 장들은 낮아서 조장으로부터 감시, 계산공, 반장이다. 여기서 조장들은 그 자리가 크게 알리는 자리가 아니지만 반장, 감시, 계산공은 유급이나 같다.

교화소에서는 수용자 관리를 용의하게 하기위한 차원에서 이 이용자들에게 징벌노동과 감방생활에서 다른 수용자들을 통제 관리 할 수 있는 제한된 권한을 부여하는데 이용자들은 이 권한을 아주 유용하게 활용하여 자신을 지키고 다른 수용자들을 제약한다.

장자리만 차지하면 우선 노동에서 자신은 일하지 않고 다른 수용자들을 지시하고 통제하게 되니 육체적으로 힘들지 않다.

교화 생활에서 고역으로 이어지는 징벌노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쉽게 살아 나갈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자리를 차지한 수용자들은 그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다른 수용자들과 날카로운 신경전을 벌린다.

어느 한 수용자가 두드려져서 선생이 눈에 들어 자기의 영역을 위협한다고 생각하면 온갖 권모술수를 다 짜내어 비방하고 헐뜯고 몰아주며 사소한 잘못도 크게 부각시켜 처벌받게 만들어 심신이 졸아들게 해서 무맥한 존재로 만든다.

입소한지 석 달이 되던 어느 겨울날 심봉이라는 곳에 피나무 채벌을 갔을 때였다. 불을 피우고 너덧 명의 선생들이 감자구이를 하는 곳에서 담당선생이 부른다.

“라40 김광일 불러서 왔습니다.”
“광일이 너 계산공 할 수 있어?”
“…….”

계산공이라는 것은 반 생산실적과 매 수용자들이 출력정형을 집계하여 징벌과제 수행여부를 평가하고 과에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는데 계산공들이 작성한 기록에 따라 먼저는 매 개인의 급식량이 결정되며 크게는 형기단축이 적용된다. 이 업무는 원래 담당선생들이 하게 된 것이라는데 계산업무가 시끄러워 좀 학력이 있는 수용자들을 시키는 것으로 대개가 형식적인 장부일 따름이다. 그러나 계산공은 어찌 보면 반장보다 낫다고 할 수 있다. 반장은 수용자들을 작업을 시켜야하고 통제하며 감시를 하여야 하는데 혹시 도주가 생기면 연대적인 책임을 지고 독방에 들어가 대사를 못 받게 되어 악을 쓰며 다녀야겠으나 계산공은 그런 부담이 없다.

2과에서는 감시가 계산공을 겸하는 것이 보통인데 1반에서는 감시가 그런 계산을 할 지적능력이 안 되어 계산공이 결석상태였는데 나를 지명한 것이다.

“너 계산이랑 다 할 수 있어?”
“예. 제 금속단과대학 나왔습니다.”
나는 주저하는 것처럼 하면서도 능력 있다는 표현을 했다.
“봐. 광일이 할 수 있어.”

2과 생산지도원을 하는 신철순이라는 선생이 감자를 먹으며 말했다.

알만했다. 신지도원은 나와 한 고향 사람인데 우리 어머니와 신지도원 어머니가(신뚱띠) 한 때 막역한 사이였다. 교화소 실정을 어느 정도 파악한 어머니가 신지도원을 통해 나에게 장자리를 시키려고 그 연줄을 쥐고 뒤 공작을 한 것 같았다.

“오늘부터 하라.”
“예.”

그날로 계산공이 되었다.

교화소의 장 자리는 코로 붙인 자리라는 말이 있다. 선생이 임명하면 그날로 되고 무엇이 시답지 않아 떼 치우면 그날로 ‘시라지’로 전락된다. 규정은 교화과의 비준을 받아야 된다지만 선생이 시키고 보고하면 끝으로 장 자리의 숨통은 담당선생이 쥐고 있기에 절대 권력자인 선생한테 잘 보여 신망을 얻어야만 장 자리를 할 수 있다.

금방 들어온 내가 계산공이 되니 교화생활을 오래한 ‘징역귀신’들과 조장 반장의 눈길이 달라졌다. 조장들은 나한테 눌려야 되고 반장 감시는 자리를 위협당할 존재로 생각했다. 여직껏 일개 ‘시라지’로 저녁이면 자기들의 심심함을 덜어주는 이야기꾼으로만 알던 것이 순식간에 경쟁자로 부상하니 긴장해졌던 것이다.

당시 나는 장 자리를 바라지 않은 것은 아니나 내 영향력이 아직 너무도 못미치는 것을 알기에 현재 상태를 안전히 유지하려고 했으나 반장의 견해는 사뭇 달라 나의 일거일동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시비하고 비방하여 어떻게 하나 나를 헐뜯으려고 했다.

면식가루 같은 것도 이용자들은 때로는 다 받쳐야 한다며 자기도 그런다고 하며 수용자들에게서 호응을 받아 어떻게든 없애치우려고 온갖 술수를 다 부렸다. 선생한테 가서 “이번에 면회자들이 적은데 계산공 가루를 다 털어서 씁시다. 가야 계산공인데 이용자가 그쯤도 못하겠습니까.” 하고 말하여 어느 명절에는 내 것을 몽땅 털어냈다.

인신매매로 13년형을 받고 벌써 5년을 살아 터가 잡혀 올빼미처럼 여기저기 다니며 제 먹을 것을 다 찾아 먹는 그자와 금방 들어온 내가 같을 수 없다. 이 자의 목적은 나를 허약으로 되게 해서 반을 따라다니기 힘들게 만들어 구실 못하는 자로 밀어내자는 것이다.

교화소에서는 키가 1m 70cm을 넘어가는 사람은 살아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키가 큰 사람은 큰 만큼 배에 더 차는 것이 있어야 되는데 여느 수용자들과 똑 같은 급식을 하다보면 쉽게 허약에 빠져 빌빌거릴 정도가 되어 죽어나는 수가 많다.

입소하였을 적에 키 큰 나를 보고 누군가 그 말을 했는데 내 키가 1m 75cm로서 항시적으로 못 먹어서 사람들이 자라지 못한 북한에는 큰 키였다. 교화생활에서 큰 신장을 가진 약점으로 하여 남들보다 더 힘든 나에게서 펑펑이가루가 큰 힘이였는데 그것을 없애버리려고 작당하였던 것이다.

이자는 어떻게든 나에게서 밀어낼 언질을 찾으려고 별 비열한 방법을 다 썻다. 자신은 자리 잡힌 능력을 발휘하여 ‘가루탕’을 끓일 적마다 국거리라도 더 얻어오고 밥덩이도 얻어다 나를 몰아줄 수 있는 완력이 있는 ‘징역귀신’들에게 던져주며 자기는 이렇게 반을 위해 무엇을 가져오는데 이용자라는 게 아무것도 안내놓는다며 수용자들 속에 나에 대한 비난을 조성하였다.

반장의 비위를 맞추어야만 일이 쉽고 무언가 부스러기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고 생각한 일부 수용자들은 여기에 합세하여 나의 결함을 만들어 내여 각색하여 선생에게 보고하는 것이 업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입자라 해도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아차하고 신경줄을 놓으면 순간에 뎅 먹어(교화소에서는 ‘티’들이 ‘시라지’로 전락되는 것을 뎅이라고 한다.) 장을 안하기보다 못하기 때문에 그대로 있을 수 없다.

초 신경전을 했다. 교화소에서는 일 생활총화라고 매일 모여서 하루 생활을 총화하는 제도가 있는데 서로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이 장소에서는 자극적인 것은 앞으로의 보복 때문에 될수록 피하는데 여기에서 반장의 은밀한 추동 하에 나에 대한 공격을 해서 선생한테 나의 무력함을 느끼게 한다.

죄수들의 심리를 파악할 대로 파악한 노련한 담당선생은 그런 장소의 소리에 그리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기본은 매일같이 수시로 진행하는 개별담화이다. 여기서 정말 힘들고 억울한 수용자들은 진실을 말하고 펑펑이가루를 좀 먹게 해 달라고 청원도 한다. 인간성이 있고 공정한 선생들은 이런 청도 들어주며 그들을 통하여 반 내 동향을 장악하여 눌러 놓을 것은 눌러놓고 살릴 것은 살린다. 이 담화를 나도 적중히 활용하여 자신을 지킨다.

반장이 나를 밀어내려고 악을 쓰고 그 추종자들이 곁따라 날뛰어도 60여명이 수용자들 속에는 그를 미워하는 수용자들도 많았다. 특히 김영식이라는 수용자는 나보다 네 살 적었는데 언제나 공정히 말하였다. 선생도 영식의 견해를 많이 참작하고 매번 불거지는 일들에서 옳은 판가름을 했다.

영식이와 나는 서로 옆자리였다. 감방 안에 들어가서는 먹고 자고 앉는 자리가 고정된 생활은 아무리 교화소라고 해도 가까이에 있으면 인간적으로 친해진다. 그는 형들이 보위원, 초급당비서, 지배인을 하는 토대가 좋은 집안 출신인데 군 제대된 후 생활밑천을 마련하려고 군대 때 친구들과 함께 수입물자 차량을 털다가 국가재산 절취로 12년형을 받았는데 정말 입이 무겁고 호감 가는 친구였다.

그와 함께 들어온 수용자들은 다 네다섯 살 이상인데 우리 소대장이 자기들의 죄를 다 썻다고 해서 자기들은 2~3년인데 소대장은 12년이라고 항상 미안해하며 교화소에서도 소대장 소대장 했다. 어린 나이에 군관을 하며 네다섯 살 이상의 하전사들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것은 그에게 인간애가 있음을 말해준다. 나는 옆자리여서가 아니라 그의 됨됨에 반했다.

집은 너무도 먼 평안도 숙천이라 면화가 없는 그에게 어떻게든 펑펑이가루를 좀 먹여보려고 면식을 나갔다가는 다 먹지 않고 겨드랑 밑, 사채기, 양말 짬, 주먹 안에 감추고 들어와서는 쥐여 주고 선생한테 청원하여 1kg씩 먹게 하군 했다.면식자들에게 얻어먹으려고 별 비굴한 짖을 다하는 수용자도 있지만 그는 결코 그러지 않았으며 그랬다면 나는 반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런 그였기에 너면 너, 나면 나 하는 교화생화에서 면회가 없이도 선생의 신임과 반 사람들의 신망으로 내가 출소하기 두달 전에 반장이 됐다.

반장하고 나는 같은 회령 출신이다. 교화소라고 해도 형기가 끝나면 나가서 서로 볼 수 있는 사람들인데 이 자는 5 년 동안에 교화소에 구축한 죄수토대를 출소 후에도 사회에서 지속할 수 있으리라고 망상하는 정신적 불구자 같았다. 자기 보신을 위해 다른 조장 감시하고도 과잉 반응으로 조폭하게 행동하다나니 수용자들의 원한이 쌓이고 쌓여 폭발했다.

회령출신의 54살 전재진이라는 수용자가 도를 넘는 구박에 더는 못 참고 그자를 ‘귀족행세’를 한다고 교화과에 고발했다. 교화과에서 죄수를 조사하여 취급하면 사소한 위반행위도 엄중처벌이 된다.

다 불거져 나왔다. 발 주무르게 한 것, 더 먹은 것, 누구를 때린 것, 담배 피운 것, 학습시간에 누워 있은 것 다 걸려들었다. 즉시 ‘뎅’먹어 독방에 일주일을 들어갔으며 두 달 후에 실시한 대사를 받지 못하여 2년을 더 살았다.

감시가 반장이 되고 내가 감시와 계산공을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감을 갖고 생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여덟 달이 못가서 담당선생의 ‘앞’이 들어왔다.

조금만 잘못해도 “감시란 게 저래.”하며 일반 수용자들 앞에서도 다 그어댔다. 반장 감시들에 대해서는 담당선생은 물론 다른 선생이나 초병들도 써먹어야겠기에 정 어긋나는 일이 아니고는 심한 욕을 안 하는데 그즈음 해서 욕설하는 것이 어딘가 깔린 뜻이 있어보였다.

면회 온 어머니로 하여 눈치 챘다.

“거 뚱띠 아들(신지도원), 나뿐 새끼 너무한다. 그저 돈돈 한다. 내 늙은 게 무슨 돈 기계야. 어휴 죽을게 내지…….”

면회를 지켜보는 면회선생은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나는 알만했다.

“됐소. 엄마 일체 중단하오.”

출소 후에 들으니 신지도원은 갈 때 마다 돈을 바랐다고 했다. 그의 처와 딸까지도 돈을 달라고 했다고 한다. 너무 했다. 76살의 늙은이가 교화소 뒷바라지를 하는 것을 그는 돈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내가 도움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우리 어머니한테 무슨 돈이 있겠는가. 한 번 면회 오는데 드는 돈이면 어머니 혼자서 이밥에 좋은 찬을 드시며 두 달은 넘게 사실 수 있는데 늙은 몸이 장마당에 앉아 추위에 떨며 꼬깃꼬깃 번 돈을 교화 뒷바라지를 하게 하는 내가 너무도 죄스러웠다.

어머니를 놓고 두 선생이 암투가 시작된 것이다. 신지도원은 자기소개로 그렇게 됐는데 자기를 더 생각해야 한다고 했을 것이고 담당선생은 자기가 직접 봐주는데 알아주는 것이 적은 것 같아 그 표현을 나한테 한 것이었다.

출소 후에 들으니 담당은 정말 담배 몇 갑밖에 받은 것이 없었으며 또 양심상 늙은 어머니를 보고는 별로 요구한 적이 없다고 했다. 출소 후에 어머니 대신 내가 인사 했지만 그때에는 나한테 오는 ‘앞’이 싫었고 어머니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 모든 상황을 짐작으로 알았고 결론을 내렸다.

“영식이 내 7반가겠다.”
“왜? 가지 말라. 같이 있자.”
“아니, 가야한다. 더 있으면 안 된다.” 하고 어머니를 두고 벌어지는 두 선생의 암투를 말했다. 웬만한 수용자와 이렇게 선생에 대하여 말하면 자칫했다간 고자질하여 독방감인데 그 정도로 나와 영식이는 가까웠다.

“선생님 나를 7반 보내주시오.”
“왜?”

선생은 놀랐다. 내가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산에 돌아다니며 벌목이나 하다 나가겠습니다.”
“안되. 못가.”

선생도 그 정도까지 되니 출소가 얼마 남지 않은 나와의 재회가 생각되어서인지 못 간다고 딱 잘랐다. 그래도 몇일이고 제기하고 정 안되어 과장한테까지 제기했다.

“광일이 너 7반 벌목이 힘들어. 그래도 가겠어?”
“예, 보내 주십시오.”
“후회하지 말라. 너 담당선생은 널 보내지 말래.”
“가겠습니다.”
“너 정말 갔다가 힘들다고 후회하지 말라.”

물론 힘들 줄 알았다. 그러나 가야만했다. 이렇게까지 되니 신지도원과 담당선생은 나와 마주치는 눈길을 피한다. 죄수와 선생사이도 역시 심리전이다. 이 심리전에서 지면 죄수는 죽을 수도 있고 선생은 바지를 벗어야 할 수도 있다.

며칠 후 7반으로 갔다. 일은 힘들었지만 7반 반장이 회령에서 전부터 알던 사람이라 괜찮았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났을까, 1반에서 ‘뎅’먹어 독방에 들어갔다가 ‘낙후자’반에(도주 위험분자 처벌자들을 집합하여 6달 동안 교화하는 반) 가있던 자가 다시 본과로 와서 구내반에 몇 달 있더니 7반으로 왔다. 원수처럼 미운 놈끼리 또 마주서게 됐던 것이다. 이 자는 나보다 네 살 이상인데 싸이코 같은 정신상태의 소유자 같았다.

처음 얼마동안은 눈치를 보더니 또 본성이 들어나 반을 복잡하게 만들었고 그 모든 것을 교묘히 돌려 7반 담당의 추궁이 나한테 오게끔 조작했다. 여기에 금방 서른 살을 넘긴 담당은 나를 끓어 앉히고 무릎을 밟아 놓았다. 그자가 무슨 술수를 부렸는지 담당은 사사건건 나를 걸고 들어 멸시하려고 했다. ‘가루탕’을 할 때도 나만은 무슨 건덕지를 잡아서라도 ‘눈빨기’를 시키는 비열한 짓도 했다.

‘눈빨기’라는 것은 ‘가루탕’을 해서 한 돌기씩 돌아갈 때 다른 수용자가 먹을 그릇을 넘겨만 주고 자신은 먹지 못하고 눈으로 맛있게 먹는 그들을 보게만 하는 것으로 굶주린 수용자에게는 기갈이 나서 죽게 만드는 정신적인 고문인 것이다. 그 ‘가루탕’이 내 가루로 쑤어진 것인데 나를 먹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죄수 새끼 면회 있다고 그게 제 것 인가 하재?”

다 털어서 ‘가루탕’으로 없애 치우겠다는 것이다. 그 가루가 어떻게 온 가루라고 이 자가 이렇게까지 파렴치한 짓을 하는가. 더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또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어섰다. 인제는 신자도 아니며 더구나 거의 일 년이 넘는 감시 계산공 경력을 가진 ‘티’였던 것이다. 과장을 만나 그의 부정행위와 선생의 착오를 에둘러 말했다.

“자, 제게 다른 사람이 면회품들을 가지고 바꿔치기하여 반에 부식들을 들여오는데 일이 힘들고 면회자가 적은 7반에서 수용자들을 그런대로 입을 놀릴 수 있게 하니 담당선생이 좀 눈감아줘서 1반 때처럼 행동하며 매일 복잡한일들을 지어내니 수용자들이 다 싫어합니다. 저 새끼 좀 더하면 내 교화과에 제기하겠습니다.”

나는 정말로 제기할 생각이었다. 여기서 내가 노린 것은 과나 반에서 범칙자가 발생하면 해당 선생들이 교양을 잘못한 것으로 되어 책벌을 당할 수 있는데 더구나 독방 전과가 두 번씩이나 있었던 자가 또 범칙을 한다는 것이 제기되면 문제가 심각히 번질 것을 우려하여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그자를 다른 곳으로 보내던가 나를 다시 1반으로 보내길 바랬다.

이 자의 먼저 번 일로 해서 과장과 1반 담당선생이 추궁을 당했었다. 권력을 쥔 자들이 죄수 하나 휘여놓지 못해 망둥이처럼 날뛰게 하고 그 풍에 놀아났다면 선생이 능력이 없다는 것으로 평가되기 마련이고 또 일이 불거지면 이미지가 비웃음거리가 될 수 있었다.

담당하고도 신경전이 벌어졌다. 그자의 술수에 넘어가 방향 없이 놀던 담당에게 과장 앞에서와 똑같은 말을 했다.

얼마간 잠잠했다. 이대로 끝나는가…….

오직 눈길 싸움이었다. 죄수는 선생을 마주 못 보게 되어있다. 그러나 모든 뜻을 다 담을 수 있는 나의 눈길에는 내 의사가 실천 안 되면 결단코 일은 터진다는 의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신경전을 벌린 지 보름쯤 되어 저녁에 감방으로 과장과 담당이 들어왔는데 따라들어 오는 담당이 기죽은 상이다.

“7반 일이 힘들지?”

과장이 힘들다고 말하는 자에게는 좋지 않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말투를 던졌다.
…….

침묵이다.

“야 경호, 너 7반 일이 힘들다고 다른 곳으로 가겠어?”

18살에 강간죄로 들어온 제일 나이 적은 경호는 위협적으로 들리는 그 물음에 기가 죽었다.

“아니, 난 가겠단 말 안했습니다.”
“보라. 이 어린아도 버텨내는데 야 광일이 너 가겠어?”
“…….”

그제야 상황을 파악한 반 내 수용자들이 술렁거렸다. “가겠다 해라.” 여기저기서 은근한 눈길을 보내며 조용히 부추긴다. 그들도 나와 그자와이 암투관계를 알고 있었으며 거기에 놀아나는 담당의 유치한 처사를 속으로 은근히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겠습니다.”
“그래? 보내라.”

너 같은 것은 상대할 가치가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는 나갔다. 담당도 아무 소리 없이 따라 나갔다.

나는 나의 소지품들을 들고 일어섰다.

“내 가오. 반장, 그동안 미안했소. 다 건강하기오.”
“갈건 가야지. 건강하오.”
“건강하기오.”
한 사에서 다른 감방으로 이동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같이 고생하던 사람들이라 남은 정이 있었다. 그 일이 벌어지는 동안 그 자는 벌레 씹은 상을 하고 구석에 박혀있었다.

나는 죄수로서 쉽지 않은 생각을 했고 실천 해냈다. 승리자의 쾌감을 느꼈다. 그 자는 다음날 구내반으로 갔다.

이렇게 넉 달이 7반 생활이 끝나고 다시 1반으로 왔다. 1반은 그새 반장이 바뀌었지만 원래부터 알던 수용자들이라 낯선 것이 없었다.

다시 영식의 옆자리에 자리 잡았다.

“그 봐. 또 올걸 가긴 왜가. 내 가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내가 돌아 온 것이 너무도 반가워 영식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반이 달라지면 얼굴만 볼뿐이지 좀처럼 이야기 나눌 조건이 못된다. 그날 둘은 거의 밤을 새우며 조용히 이야기 했다.

“영식이, 내 이겼다.”
“조심하라. 앞으로.”
“그래.”

그때 1반은 갱일을 했다. 아침에 출력하여 철조망 울타리를 둘러친 곳에 도착하니 조그마한 굴 입구가 보였는데 이것이 갱이란다. 폐갱시켰던 것을 중국에서 동광을 사겠다고 해서 다시 헤치고 들어가 그전에 채굴하던 곳들에 조금씩 남아있는 동광석을 뜯어내는 것이다.

커다란 나무 질통을 지고 한 줄로 서서 막장까지 가는데 좁은 굴길로 1500m들어가야 한다. 굴 천정이 사람 키 보다 낮은 곳이 많고 폭이 3m와 1.5m로 넓혀졌다 좁혀졌다 하는 굴길에 한 쪽으로는 막장에서 흘러나오는 물길이 있고 그 벽면에 아무런 피복이 돼있지 않은 고압선이 3선 지나갔고 또 조명선이 2선 있어 항시적인 감전 위험이 있는 곳으로 수용자들은 아무런 노동보호물 착용도 없이 들어간다. 오직 30~50m 거리에서 벌겋게 보이는 전구가 길안내를 하는데 구불구불한 길이 앞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어 막대기를 들고 다니면서 앞사람을 툭툭 쳐가며 소경 걸음을 할 때도 있다.

50m쯤 들어가면 바닥에 고인 물에 신발이 다 젖는다. 수용자들에게는 신발이 매우 든든해야 하는데 6개월에 한번쯤 한 반에 열둬개씩 공급되는 신발로는 맨발로 걸어 다녀야 할 형편이다. 그나마 면회가 있는 수용자들은 가족들이 가져다준 신발을 신는데 면회가 없는 자들은 되물리고 되물린 신발을 수단껏 얻어서 깁고 덧 깁고 하여 신는데 말이 신발이지 고포(헝겊)뭉치 같은 것을 걸치고 다니며 짝이 다른 것은 보통이고 여름발의 겨울신이 있으며 겨울발의 여름신이 있다. 면회 때 신발이 새것이 오면 선생이나 초병들이 달라고 하는데 안줄 수가 없다
.
갱일에는 안전모와 장화가 있어야 하는데 반에 안전모가 2개, 장화가 3개인데 그나마 2개는 새는 것이다. 이런 차림으로 막장에 들어가서는 착암수들을 물도 없이 건식으로 착암하고 수굴조는 3명이 한 조가 되어 함마와 정대로 발파구멍을 뚫고 나머지는 광석을 담아지고 꼭 조별로 돌아 나온다. 개인별로 나오게 되면 무거운 광석을 조절하여 어느 고굴에 쏟아버리기 때문이다.

한참을 나오다 보면 옆으로 희뿌옇게 보이는 곳이 있는데 그전에 하던 수직갱이 하늘하고 연결되어 아찔하게 내려다보이는데 여기서 숱한 사람이 죽었다고 한다.

갱일에서는 붕락사고가 많아 4반에서도 한 번에 네 명이 죽은 적이 있었는데 내가 일하는 두 달 사이에는 다행이도 사고가 없었다. 딱 한 번 커다란 바위덩이 같은 돌이 굴리는 낙석사고가 있었는데 깔렸던 사람은 천명인지 밑에 홈채기가 있는 곳에서 눌리다나니 약간의 부상을 입었을 뿐이다.

앞으로 출소까지 넉 달을 두고 있는 나는 어느 순간에 닥칠지 모를 위험 속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영식이 내 부식공 하겠다.”
“그래, 어떻게 할 수 있겠소.”
“아니. 하겠다. 봐라.”

그날 저녁 개별담화를 할 때 였다. 선생은 나에게 왜 7반에 가겠다고 했냐고 물었다.

“…….”

나는 답변을 피했다.

“왜? 생산선생 때문이야?”
“선생님 난 죄수입니다.” 감히 선생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표현을 했다.
“일없어. 말하라.”
“선생님 사실은 어머니한테서 눈치 채고 내가 떠나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생산선생이 다른 일 없었어?”
“잘 모르겠습니다.”
“됬어. 생활 잘하라. 멀지 않아 출소하겠는데.”
“알았습니다. 저 선생님 제 나가는 날까지 부식이라도 더 먹게 해주십시오.”
“알았어.”

그날 저녁으로 부식공이 되었다. 부식공은 작업에는 참가하지 않고 식사 때마다 국을 끓여서 밥과 함께 나누어 주는 일을 하는데 만지는 놈이 더 먹기 마련이라 그런대로 군입질을 하게 되고 남들이 좀처럼 제 맛을 보기 힘든 된장, 소금도 자기만큼은 간을 맞추어 먹을 정도로 항상 굶주림 속에 있는 수용자들에게는 누구나 한번쯤 해봤으면 하는 자리이다.

어느 날 밖에서 부식을 한참 끓이는데 생산선생이 와서 보더니 “광일이 너 수 높구나. 7반 가고 싶으면 가고 다시 오고 싶으면 오고.”하고 말한다.

아무런 대답도 안했다. 그때만큼은 다시 돌아볼 사람 같지 않았다.

출소하는 날까지 몸 관리나 하면서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두 달을 못 넘겼다.

어느 날 반들을 순회하던 과장이 국을 끓이는 나를 보더니 “1반선생 광일이 저 새끼 왜 부식공 해요? 아새끼 7반 싫다고 온 새끼 당장 막장에 들여 보내요.”하고 지시했다.

나는 죄수다. 죄수를 봐주는 것도 미워하는 사람의 눈앞에서는 한계가 있다. 생산선생과 7반선생이 출소날이 얼마 남지 않은 내가 부식공을 하는 것이 눈에 아니꼬웠을 것이니 과장에게 은근히 상정시킨 것 같았다. 과장이 한 개 반에 누가 부식공을 하던 좀처럼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에라 까짓거. 여직껏 살았는데 두 달 못살까.” 나는 출소하는 날까지 수굿이 살았다.

그즈음 원래 반장이 7반으로 가고 영식이가 반장이 됐다. 그가 반장이 된 것이 내일처럼 기뻤다.

- 다음에 계속 -

2010년 5월 김광일

무죄(1) - 김광일

무죄(2) -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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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님의 댓글

열정 작성일

우리가 태여나고 나서 자란 고향이지만 어느나라에도 없는 법을 내놓고 사람들의 등살에 못살게 만드는 더럽고 치욕스러운 세상을 낱낱이 까밝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