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자
- 2010-06-07 15: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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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NK는 중국에서 체류중인 탈북자 리준하씨가 5년간 회령 전거리 제22호 교화소에서 겪은 내용을 엮은 ‘교화소 이야기’(도서출판 시대정신刊)를 연재합니다. 저자 리준하 씨는 이 책 서문에서 “북조선 교화소에서 벌어지고 있는 온갖 악행과 인권침해에 대해 같은 민족인 한국 인민들과 자유와 인권을 옹호하는 세계 인민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서 책을 쓰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북한 교화소의 생생한 모습을 전하는 리준하 씨의 육필 수기에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편집자註
[교화소 이야기①]“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 입술은 파래지고”
어머니는 시금치죽을 먹으면서도 사탕장사로 한 푼 두 푼 돈을 모아 두 달에 한 번씩 면회를 왔다. 정말이지 부모 곁을 떠나 보아야 부모의 사랑이 얼마나 크고 따뜻한가를 알 수 있다. 나는 그 말의 참뜻을 5년간의 감옥살이를 통해 온몸으로 체험하였다.
2000년에 있었던 일이다.
저물어가는 12월 어느 날 나는 새해를 맞으며 어머니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면회할 때는 얼굴만 보고 손조차 잡아 볼 수 없었으므로 나는 어머니가 위안 삼을 만한 글을 전하기로 작정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어서 연필과 종이를 펴놓고 편지 내용에 대해 궁리했다. 좀처럼 어머니에게 힘이 될 만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았다. 누워서 궁리하던 머릿속으로 그때까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아니,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날의 일들이 삼삼히 떠올랐다.
1998년 11월 26일, 친구 광일이의 생일이라 놀다가 오후 1시경에 집으로 돌아왔다. 여느 때는 “준하냐?” 하며 반기던 어머니가 웬일인지 누워서 한숨만 푹푹 쉬었다.
“어머니, 어디 아픕니까?”
“아니……”
내가 무슨 일이냐고 여러 번을 물어서야 어머니는 겨우 말을 떼었다.
“준하야. 너가 모르게 기철이 삼촌한테 돈 2,000원(당시 북한 노동자 한 달 월급은 70~100원)을 꾸어 주었는데, 1년이 다 되도록 갚을 생각을 안 하는구나. 그동안 여러 번 받으러 갔는데 매번 꼭 갚겠다고 하기에 양보를 해왔다. 그런데 오늘 가보니 ‘내가 돈이 어디 있어?’ 하면서 엄마를 막 때리려고 하더라. 너무 사정을 하기에 돈을 빌려줬는데, 이제는 받을 수 없을 것 같다. 어쩌면 좋니?”
어머니와 먼 친척뻘 되는 그 사람을 나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그는 평생을 술로 살았다. 술에 미쳐서 나중에는 아내와 자식들 몰래 자기 집 재산을 팔아서 술과 바꿔먹고는 집에 도적이 들었다고 거짓말까지 했다. 그런 삼촌을 나는 평소부터 무시했고, 길에서 만나도 못 본 척했다.
‘자기 집을 망하게 한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우리까지 괴롭히려 들다니……’
게다가 어머니를 때리려고 했다는 말에 나는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는 나를 말리려다가 “돈을 꼭 받아 오겠다”는 내 말을 듣고 더 이상 막지 못했다. 당시 조선 돈 2,000원이면 적지 않은 돈이었다.
나는 곧 삼촌 집에 도착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삼촌 아내가 나를 보고는 울상을 지었다.
“준하야, 미안해서 어떻게 하니? 저 인간이 글쎄, 네 엄마 돈까지 술과 바꿔먹었으니. 나도 이젠 더는 같이 못 살겠다.”
“아줌마가 나에게 미안할 것이 뭐가 있소? 다 저 사람이 문제지!”
나는 금방 술이 깬 듯 흰자위가 뻘겋게 충혈된 삼촌을 끌고 대문 밖까지 나왔다. 담벼락에 기대서서 담배를 피우던 삼촌은 내일까지 돈을 갚아달라는 말에 삐딱한 태도로 나왔다.
“야 이 새끼야, 너도 알다시피 이 삼촌이 돈이 어디 있니?”
“그럼 돈 빌려 갈 때는 갚을 생각도 없이 그냥 가져갔소?”
“임마, 엄마하구 내가 버무린 일인데 왜 네가 끼어들어? 쪼끄만 것이 버릇없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주먹이 그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담벼락에 머리를 찧고 엎어진 그의 머리에서 피가 흘렀다.
“엄마 일인데 아들인 내가 왜 상관이 없소? 사람 알기를 더럽게 아는구만!”
아줌마가 뛰어와서 더 때리지 말아달라며 말리기에 분을 삭였다.
“무조건 내일까지 갚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소.”
“알았다. 며칠 내로 꼭 갚아주마.”
“언제요?”
“열흘 안에 갚아 줄게. 임마!”
정확히 10일 후에 갚겠다는 다짐을 받고 나서야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가 어떻게 모은 돈인데 그냥 떼먹자고 드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생각할수록 기가 막혀 나 혼자 투덜거렸다. 그런데 이게 웬 날벼락인가? 삼촌이 정신을 잃은 채 병원에 실려 갔단다.
보안원(경찰)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이 같은 사실을 알려 주었다. 보안원은 나에게 자기와 함께 보안서(경찰서, 한국의 파출소에 해당하는 기관은 ‘분주소’라 함)로 가자고 했다. 어머니의 항의도 무시한 채 보안원은 나를 보안서로 데리고 가서는 임시로 대기실이라는 방에 가두어 놓았다.
“삼촌이 살아나면 적당한 처분만 받고, 죽으면 너도 죽어야지 어쩌겠냐?”
대기실 철문을 잠그면서 보안원이 말했다. 나는 삼촌이 죽는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나와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멀쩡한 정신에 10일 후에 돈을 갚겠으니 기다려달라고 하던 사람이 무슨 일로 죽는단 말인가? 또 지난번처럼 술을 너무 마셔서 위경련이 왔겠지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갇혀 있노라니 저녁 8시가 되었다. 문이 열리면서 보안서 부서장이 나더러 나오라고 했다.
“집에 가기 전에 비판서에 손지장만 누르고 가라!”고 하면서 나를 데리고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면 그렇지. 삼촌이 죽을 일이 있나?’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면서 부서장을 따라 어느 기다란 집에 들어갔다. 보안서 문전에도 가보지 못했던 나는 그 건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부서장의 사무실인가보다 생각하면서 아무생각 없이 따라 들어갔다. 밖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는 안에 들어갔던 부서장이 인차 나오면서 나더러 들어가 보라고 했다.
‘다른 사람에게 지장 찍는 일을 시켰는가 보다’ 하고 문을 열고 들어가니 또 문이 있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더니 안에서 들어오라는 소리가 들렸다. 인사를 하고 들어서니 옷을 벗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순간 당황하여 “옷은 왜요?”라고 했더니 앞에 섰던 보안원이 발길질을 했다.
“왜 때립니까?”
“이 새끼가 어디라고 대들면서 지랄이야?”
“비판서에다 지장만 찍고 집으로 가라기에 왔는데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때립니까?”
“조용히 해! 여기는 죄인들을 가두는 구류장(유치장)이야. 한번만 더 소리치면 가만 안 둬!”
그 말을 듣고 하는 수 없이 옷을 벗었다. 그 계호원(간수)은 내 옷에서 일체의 금속물들을 모조리 뜯어 버렸다. 가슴이 쿵쿵 뛰고 심장이 떨리면서 뭔가 불길한 예감이 들어 그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 다시 옷을 입자 그는 나를 2호 감방으로 데리고 가서는 “야 감방장, 그 새끼 사람 죽인 살인자야. 교양 잘해라”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런, 내가 살인자라니 말도 안 돼. 그럼 삼촌이 정말 죽었단 말인가?’
억이 막혀 말이 나가질 않았다. 예심(심문, 사전적 의미는 범죄사실 등을 밝혀내는 소송행위)을 받으면서 나는 삼촌이 벽에 머리를 부딪친 다음 땅에 넘어지면서 바닥에 박혀 있던 뾰족한 돌에 머리를 찧어 병원에서 4시간 만에 사망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후회와 반성의 모대김과 함께 5개월간의 예심과정을 거쳐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제145조 2항 '과실적 중상의 살인' 죄로 7년형을 언도 받았다. 삼촌의 사망 감정결과는 ‘차수막 뇌출혈에 의한 사망’이었다.
그 추운 겨울날 어머니는 입술이 파랗게 되고 손등은 꽁꽁 언 채 나에게 따뜻한 밥을 먹이려고 국과 밥을 품 안에 넣어 보온하면서 보안서 철문 앞에서 장시간을 기다렸다. 힘든 내색도 하지 않고 면회를 다니는 어머니에게 편지로나마 위안의 글을 드려야겠는데, 쓰려고 펜을 드는 순간 정전이 되었다. 나는 투덜거리면서 새벽녘에 일어나서 쓰리라 생각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피곤한 터라 기상총소리와 함께 일어나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고 하여 끝내 편지를 다 쓰지 못하고 말았다.
[교화소 이야기②]간수들, 죄수가 움직이면 권총으로 손등 찍어
5개월간의 구류장 생활은 놀라움과 함께 모멸감으로 얼룩졌다. 구류장에 도착해서 처음 3호 감방 안에 들어갔을 때 총 8명의 죄인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하, 어디서 요런 삐에로가 들어왔나?”
반갑다는 것인지 아니면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인지 감방장이 나에게 던진 첫 말이다.
“야, 감방장!”
“예.”
“그 새끼, 살인자 새끼야. 교양 좀 해라.”
“알았습니다.”
말이 끝나는가 싶더니 감방장이 내 배를 걷어찼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그의 발길질이 생각보다 약했다. 맞은 둥, 마는 둥 그냥 서서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감방장은 조금 당황해 하더니 이번에는 주먹으로 내 얼굴을 치려고 했다.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그에게 선제공격을 가했다. 그리고 양 옆으로 달려드는 다른 사람들도 엎어뜨렸다.
감방장이 얼굴을 싸맨 채 비명을 지르고, 두 사람이 땅에 머리를 부딪치고 나뒹굴자 나머지 사람들은 소리만 꽥꽥 지를 뿐 덤비지는 못했다.
철창 밖에서 상황을 이해한 말단 계호원이 난로 옆에 있던 쇠갈퀴를 들고 감방 문을 열며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쳤다.
철창 문 밖으로 나가자 간수들 둘이 쇠갈퀴와 몽둥이로 사정없이 나를 내리쳤다. 나는 얼굴을 땅바닥에 묻고 두 팔이 늘어질 때까지 죽도록 맞아야 했다.
계호원들은 반죽음이 된 나를 4호 감방으로 끌고 갔다. 감방 안에 있던 죄인들이 시체처럼 늘어진 나를 차디찬 돌바닥에 눕혀 놓았다.
온몸이 쿡쿡 쑤시고 뒤통수가 땅기면서 몸에 한기가 스며들어 왔다. 이가 ‘탁탁’ 부딪칠 만큼 온몸이 떨려왔다. 제일 뒤편에 앉아 있던 창호라는 사람이 아무 말 없이 자기가 깔고 앉아 있던 담요를 내게 덮어주었다.
잠시 후 구류장 복도로부터 불고기 냄새가 풍기면서 죄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감방 앞쪽 난로 옆에서 근무를 서는 계호원까지 합쳐 6명의 계호원들이 자기네 침실에서 술을 마시는 것이었다. 그 덕분에 모든 감방 죄인들은 다리를 펴거나 벽에 기대어 옆 사람과 잡담을 나눌 수 있었다.
“나이가 어떻게 됐소?”
나에게 담요를 덮어줬던 창호라는 사람이 물었다.
“올해 19살입니다.”
창호 형은 31살로 나와 같은 이 씨였다. 창호 형과 통성명을 끝내자 옆 감방에서 창호 형을 찾는 목소리가 들렸다.
“창호야, 새로 온 그 새끼 집이 어디야? 니가 콱 죽여버려라!”
“강철아, 이제 그만해라. 네가 좀 참아라. 아직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들이 주고받는 말을 듣고 있자니 지금 내 앞에 펼쳐진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진짜 현실인가? 내가 정말 15평도 안 되는 이 좁은 감방에서 죄인들과 함께 있는 것인가? 영화로만 보던 철창들, 반미터도 안 되는 콘크리트 칸막이 변소, 기름때에 절은 나무 바닥, 3m는 더 되어 보이는 천장.
철창 앞에서 통방하던 창호 형이 내 옆으로 오더니 말을 건넸다.
“저쪽 아이들이 너 욕하는 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내보내라.”
하지만 나는 창호 형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 대신 나무 바닥과 벽에 씌여진 희미한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나는 내일 나간다! 324일!’
‘나가서 보자! 개새끼들아!’
‘저주받을 이곳에 날벼락이나 떨어져라!’
자유를 구속당하고 여기서 고생하던 사람들의 절규가 여기저기 지저분하게 써 있었다. 나무 바닥에 바늘로 긁어서 글자를 새겨 놓은 것도 보였다.
12시가 다 돼서야 “이제 몽땅 뻗어 자라!”는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감방 안의 인원이 12명이었으니 당연히 방금 들어온 내 자리는 나무판자가 없는 콘크리트 바닥이었다.
나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는 다른 사람들이 너무 원망스러워서 웅크리고 앉아 있었더니 창호 형이 나에게 한마디 던졌다.
“준하야! 취침시간에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모두가 기상해서 벌을 받아야 한다.”
그러더니 창호 형은 자기가 깔고 있던 모포 한 장을 내게 건넸다. 모포를 둘둘 말고 눕긴 했지만 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한참을 떨다가 얼핏 잠이 들었는데 웬일인지 온몸이 점점 더워지더니 이내 간지럽기 시작했다. 일어나 모포를 걷어 부치고 웃옷을 벗어보니 시커먼 이들이 온몸에 달라붙어 있었다.
“넌 왜 안 자고 일어나?”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소위 계급을 단 보안원이 뒷짐을 진 채 나를 추궁했다.
“너, 오늘 들어왔던가? 그냥 참고 얼른 자라!”
보안원이 사라지자 나는 손톱으로 이를 잡았다. 도대체 몇 마리가 내 몸에 붙어 있는지 숫자를 헤아리다 보니 100마리가 넘었다. 이잡이를 할 만큼 하고 나서 다시 모포를 둘러쓰고 자리에 누웠더니 이번에는 계호원이 들어와서 “기상!”을 외쳤다.
옆 사람들이 하는 대로 나도 무릎을 꿇고 뒷짐을 진 채 머리를 숙이고 있으니 1호 감방부터 점검이 시작됐다.
“선생님, 1호 감방 청소 및 정돈 끝났습니다. 앉을 준비 할 수 있습니까?”
감방마다 보고 방식은 똑같았다. 그렇게 1호 감방부터 10호 감방까지 보고가 끝나자 자리에 앉으라는 계호원의 지시가 떨어졌다. 구류장의 죄인들은 울방자(양반다리)를 틀고 앉아 양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는 90도 각도로 숙인 채 움직이지 말아야 한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8시까지 앉아 있으니 아침식사가 시작됐다. 계호원이 밥이 담긴 그릇을 쌓아올린 작은 수레를 끌고 감방 앞을 지나가며 “밥 먹을 준비를 하라!”고 소리쳤다. 그러면 두 줄로 앉아 있던 죄인들은 그 자리에서 양쪽 벽을 등지고 마주 앉았다.
“선생님, 1호 감방 밥 먹을 준비 끝났습니다!”는 보고가 10호 감방까지 끝나고 나면 계호원이 밥을 퍼주기 시작했다. 창살 앞에 앉은 사람이 우리 방 인원이 12명이라고 보고하자 국그릇 하나 드나들 수 있는 조그만 배식구로 그릇들이 들어왔다.
1차로 먼저 밥을 주고 2차로 국을 퍼주는데, 이때 밥을 받던 사람이 재빠르게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밀어서 국을 받아야 한다. 계호원은 담배를 꼬나물고 뒷짐을 진 채 한 손으로 국을 퍼주는데 어떤 그릇은 국을 적게 담고 어떤 그릇은 국이 넘치도록 담아 국을 받는 사람이 손을 데는 경우가 많았다.
내 앞에 차려진 국그릇을 처음 봤을 때는 구역질이 날 뻔했다. 때가 잔뜩 낀 플라스틱 그릇에 새까만 시래기 건더기 한 줄기만 동동 떠 있었다. 내 옆 사람은 그 시래기 건더기조차 없었다.
“먹으라!”
계호원의 구령이 떨어지자 죄인들은 국에 밥을 말아서 훌훌 떠 넣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까지 이틀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어쩔 수 없이 그 밥과 국을 입으로 밀어 넣었다.
구류장에서는 앉아 있는 그 자체가 고문이고 형벌이다. 규정대로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머리를 숙인 채 앉아 있다 보면 목과 엉덩이가 아프고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뒤척거리면 창살 앞에 서 있는 계호원에게 들통이 났는데, 그러면 계호원들은 움직인 사람을 철창 앞으로 불러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게 했다. 그러고는 권총으로 손등을 내리찍었다.
구류장에 오래 갇혀 있던 사람들은 이 찰나에 눈치껏 목도 돌리고, 허리도 구부렸다 폈다.
나는 구류장에 들어간 첫 주 동안은 하루에 2~3번씩 철창 앞에 불려나가 권총으로 손등을 맞았다. 나에게 제일 악하게 굴었던 계호원들은 리종수, 철민, 성혁, 이 세 사람이었는데 아무리 긴장을 하고 앉아 있어도 그들의 트집잡기를 피할 수 없었다.
그들이 감방 근무를 설 때마다 나는 권총으로 머리와 손등을 맞거나 머리를 땅에 박고 뒷짐을 진 채 1시간 동안 버텨야 하는 벌을 받아야 했다.
[교화소 이야기③]어머니 면회하려다 수술대에 올라
구류장에 들어간 지 8일째 되던 날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오전 11시경 계호 책임자가 감방에 들어왔다.
“준하! 너의 어머니가 이 추운데 너에게 밥 먹이겠다고 정문 앞에서 보안서장 자동차를 가로막아 난리가 났다! 너희 어머니 같은 사람 흔치 않아! 어머니 잘 만난 줄 알고 생활 잘해!”
계호 책임자의 말을 들으니 눈물이 왈칵 솟았다.
“네 엄마 배가 불룩해서 뭔가 했더니 밥이 식을까 봐 옷 속에 품고 있더라!”
나는 계호원을 따라 면회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에는 파랗게 얼어 있는 어머니가 있었다.
“준하야, 배고프지? 아픈 데는 없니? 춥지? 옷 가져 왔으니 우선 옷부터 입어라!”
“일 없습니다. 걱정하지 마오.”
어머니가 가져온 옷을 입고 나니 추위 걱정이 없어졌다. 하지만 어머니와의 면회는 5분도 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어머니, 빨리 나가오. 조금 있으면 정치부장(정치사상사업을 전문으로 맡아보는 직책)이 온다니까 그 전에 빨리 나가시오!”
담당 계호원의 성화에 나와 어머니는 몇 마디 말도 못 나누고 헤어졌다. 그 뒤로 어머니는 보안서장에게 부탁하여 밥을 넣어주었지만 나는 한 번도 받아먹지 못했다. 계호원들이 중간에 농간질을 하여 계호원들의 잡일을 도맡았던 죄인 떡봉이에게 그 밥을 모두 주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면회한 지 5일째 되던 날 나는 어머니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기 위해 꾀를 냈다. 나는 형을 선고 받고 교화소에 가기 전에 어머니와 단 하룻밤이라도 같이 지내고 싶었다. 그래서 맹장이 터진 것처럼 연극을 시작했다. 나는 오후 4시부터 오른쪽 아랫배를 쥐고 뒹굴었다.
그때가 리종수 계호원의 근무시간이었는데, 그는 내가 아파죽든 말든 상관 안 한다며 아예 대기실에 앉아 철문까지 닫아버리고 상부에는 보고도 하지 않았다. 아프지 않은 배를 쥐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감방 안의 다른 죄수들도 내가 꾀병을 부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윽, 어후~ 아!”
아무리 비명을 지르고 뒹굴어도 리종수 계호원은 들은 척도 안 했다. 그의 근무가 끝나고 성혁이라는 22살짜리 어린 계호원이 근무에 들어왔다.
“이거 어느 새끼가 고아대? 주댕이를 콱 문질러 버리고 말까보다. 어느 새끼야?”
계호원 성혁이는 악을 쓰며 뒹굴고 있는 나를 보자 대뜸 난로 옆에 있던 참나무 몽둥이를 손에 들더니 “야, 창호! 그 새끼 이쪽으로 끌고 와!”라고 소리를 질렀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끌어 철창 밑 배식구 앞에다 눕혀 놓자 그는 철창 사이로 몽둥이를 휘둘러 내 머리를 내려쳤다. 머리에서는 피가 흘렀지만 나는 속으로 이 아픔을 참아야만 어머니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몽둥이질을 하건 말건 배를 움켜쥐고 계속 뒹굴었다.
계호원 성혁이는 나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살인자 새끼, 콱 썩어져라!”며 내 얼굴에 침을 뱉었다.
저녁 10시경 계호원 영호가 근무를 교대하면서 내 비명소리를 듣고 전화로 계호 책임자에게 보고를 올렸다. 계호 책임자는 감방에 도착하자 조용히 창호 형을 불러서 내가 꾀병인지 아닌지 묻더니 창호 형과 다른 죄인 한 명에게 나를 끌어내라고 지시했다.
내 손과 발에는 족쇄가 채워졌고, 창호 형의 등에 업혀 나는 군(郡) 병원으로 실려 갔다. 나는 중학생 시절 친구 영춘이가 학교 수업 중에 맹장이 터져서 그를 업고 병원에 간 적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병원에서 영춘이를 담당했던 의사의 질문과 진찰과정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당시의 기억 때문에 의사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대답할 수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내 배를 이리저리 눌러 보았다. 그러고는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에게 통증이 시작된 시간을 묻더니 지금은 사람이 없어서 피검사를 못한다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덜컥 겁이 나 있었다. 계호원의 몽둥이질에 피를 흘리면서도 꾹 참고 여기까지 왔지만 정작 배를 가르고 수술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후회가 몰려왔다.
의사가 진찰하는 동안 계호원과 창호 형은 밖으로 나가고 나와 의사 단둘이 수술실에 남게 됐다.
“너 꾀병이지? 솔직히 너 아픈 기색이 안 보인다.”
“예? 어째 병원에 오니까 아프던 것이 사라졌습니다. 수술 안 하겠습니다.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나를 떠보기 위한 의사의 질문에 내가 너무도 당당하게 아프지 않으니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자 의사는 오히려 긴장하기 시작했다. 의사는 내 맹장이 터져 버려서 통증을 못 느끼는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의사는 곧장 긴급수술을 결정했다. 오히려 맹장이 터진 환자를 이제 데리고 오면 어떻게 하냐며 나를 호송했던 계호원을 책망했다.
나에게 몽둥이질과 발길질을 했던 계호원 성혁이는 “준하야, 너네 어머니에게 연락할 테니 수술 잘 받고 와라!” 하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옷을 홀딱 벗고 수술실로 들어가니 심장이 쿵쾅거렸다. 수술대에 눕자마자 의사가 내 두 팔을 수술대에 묶더니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었다.
마취제 없이 수술을 하다 보니 그 고통이 엄청났다. 칼을 대는 배로부터 전해지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속이 메스껍고 온몸이 덜덜 떨렸다.
뱃속을 살피던 의사는 내 얼굴 위에 덮여 있던 천을 들더니 “너 정말 배가 아프긴 아팠니?”라고 물어왔다.
“선생님, 사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거짓말로 아프다고 했습니다. 달아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니 그냥 어머니와 며칠간 병원에 있다가 교화소에 갈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의사는 내가 살인범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무슨 일인지 계호원을 속이고 내가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승인해줬다. 가른 배를 꿰매는 동안 나도 모르게 다리가 뒤틀리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봉합이 끝나고 나서 나는 혼자 일어설 수 없었다. 고통을 참느라 팔에 너무 힘을 준 탓인지 팔이 굳어서 구부려지지 않았고 몸에 힘을 줄 수도 없었다.
의사의 부축으로 겨우겨우 발걸음을 떼서 옷을 챙겨 입고 204호 병실로 움직였다. 수술실 바닥에 흘려진 피 냄새를 맡으니 머리가 핑핑 돌고 연신 구역질이 났다.
어떻게 2층 병실까지 갔는지 지금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머니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실에 누워 있었다. 통증은 아침 7시가 돼서야 멎었다.
나는 의사의 배려로 일주일 뒤에 뽑아야 할 실을 10일 뒤에 뽑았다. 실을 뽑고 구류장으로 돌아가던 날, 보안서 정문 앞으로 배웅 나온 친구와 동네 사람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는 철문 안으로 들어갔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뒤를 돌아보니 어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오열하고 있었다. 나는 애써 웃음을 지으며 어머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교화소 이야기④]인권 참상에 대한 어떠한 벌 가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
나는 구류장에 돌아온 후에도 어머니와 친척들이 들여보내는 음식을 하나도 받지 못했다. 구류장에 있는 죄인에게 음식을 넣어주려면 계호원들에게 담배 한 보루씩 쥐어줘야 했는데 어머니 형편에서는 그런 고급 담배를 장만할 돈이 없었던 것이다.
계호원들은 담배나 술을 바치는 사람들의 음식만 전달해주고 나머지는 자기들이 먹어치우거나 떡봉이에게 줬다. 그러다 보니 권세 있는 사람들은 구류장에서도 집에서 해오는 밥을 먹었지만 나 같은 평백성들은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치사하게 음식으로 농간질하는 감옥은 이 세상 천지에 조선(북한)밖에 없을 것이다. 인간중심의 사회라고 말로만 떠들 뿐 구류장 간부들이 벌이는 짐승 같은 수작은 정말 치 떨리는 것들이다.
철민이라는 21살짜리 계호원은 자기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죄인들에게 입을 벌리게 해서 거기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이런 일이 여러 번 반복되자 분노한 죄인들이 재판을 받을 때 예심원에게 항의하여 침 뱉는 일은 사라졌지만 그만큼 몽둥이질이 더 늘었다.
내가 구류장에 있을 때 계호 책임자는 3호 감방에 있던 32살의 여성을 강간하기도 했다. 게다가 사실을 발설하면 평생 교화소에서 썩게 하겠다고 협박하여 한 여성의 인격을 악질적으로 파괴했다. 먹고 살기 바빠서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붙잡혀 온 이 여성은 훗날 이 사건이 남편에게 알려져 이혼을 당하고 종적을 감추었다고 한다.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간부들의 악행은 보통 사람의 상식으로는 짐작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계호원 성혁이는 감방에서 악취가 난다며 세면장의 얼음물을 퍼다가 감방 안에 쏟아 붓기도 했다. 그래서 난방도 안 되는 한겨울에 하루 종일 사시나무 떨듯 떨어야 했다.
또한 죄인 한 명이 잘못을 하면 감방 전체 죄인들에게 벌을 주는 것도 대표적인 악행 중 하나다.
계호원들은 툭하면 죄인들을 철창에 매달리게 했는데, 철창에서 떨어지는 죄인들에게는 몽둥이질을 가했다. 12명이 사람 위에 사람이 매달리는 식으로 엉겨 붙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킬킬거리는 그 인간들의 누런 이를 볼 때면 승냥이가 떠올랐다.
구류장 변기에서는 항상 악취가 났다. 변기 아래에 있는 수로는 계호원들이 사용하는 세면장의 물탱크에서 물을 틀어야만 물이 흐를 수 있었는데, 계호원들은 귀찮다는 이유로 하루에 한 번밖에 물을 틀지 않았고 죄인들이 대변보는 것도 싫어했다.
그래서 계호원들에게 보고하지 않고 몰래 대변을 보다가 매를 맞는 사람, 변비 때문에 고생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구류장 감방 안에는 변기 위로 조그만 공기창이 있었는데, 가끔 사람들이 공기창에 매달려 한 사람이 세 모금 빨면 밑에서 망을 보던 사람이 세 모금 빠는 식으로 12명이 번갈아 가며 몰래 담배를 피웠다.
담배는 계호원들이 난로 옆에서 담배를 피다가 버린 꽁초를 주워서 피웠다. 그 방법 또한 절묘했다. 나는 담요에 있는 실을 뽑아 아주 얇게 꼬아서 길이가 5m 정도 되는 끈을 만들었다.
여기에 어머니가 만들어 준 버선을 벗어서 한쪽 끝을 끈과 연결해 좁은 배식구 구멍으로 팔을 뻗어 난로 옆으로 던지면 된다. 그때 다른 사람들은 계호원이 감방 철문 안으로 들어오는지 안 오는지를 감시했다.
그렇게 버선을 던져서 끈을 잡아당기면 담배꽁초까지 끌려왔다. 이 방법을 옆 감방 사람들이 보고 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감방마다 양말, 버선 등이 동원되어 경쟁적으로 난로 옆에 떨어진 담배꽁초를 획득하기 위한 전투가 벌어졌다.
하지만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이다. 결국 6호 감방 사람들이 담배꽁초 낚시질을 하다가 계호원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 밤 6호 감방 사람들은 바닥에 땀이 흥건하도록 벌을 받고 녹초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조선 구류장에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참상을 세상에 고발하자면 한도 끝도 없다. 계호원들은 가족들이 보내준 음식들을 난로 옆에 모아 두었다가 발로 툭툭 차서 철창 배식구 앞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배식시간에 그 음식들을 국통에 모두 쏟아 넣고 국자로 휘휘 저어서 돼지 사료처럼 만들어서 죄인들에게 주었다. 아마 자기들 집에서 개를 키운다면 개한테도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계호원들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배식구로 국그릇을 내미는 사람의 얼굴에 뜨거운 국을 쏟아 부어 화상을 입히기도 했다.
죄인들을 때리는 참나무 몽둥이에 못을 박아 사람을 반주검으로 만들어 놓기도 했다. 이들의 만행은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떠한 징벌을 가해도 용서받지 못할 것이다.
지난 일이지만 재판과정에서 변호사라는 사람은 “나이가 어리니 형기를 감하여 줄 것을 건의합니다.”라는 단 한 마디만 남겼다. 그래도 나는 기뻤다. 구류장의 간부들은 내가 최소 교화 10년은 받을 거라고 했기 때문이다. 판사가 7년을 선고하자 나는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교화소 이야기⑤]“도주자는 쏜다!”
아침부터 칙칙한 잔비가 내리는 교화소(감옥, 징역형을 받은자들을 구금하는 시설) 철문 앞으로 옷이 축축이 젖은 채 초라한 모습으로 걸어가는 19살 된 한 소년이 있다. 그가 본의 아니게 살인죄를 짓고 교화소에 입소하는 나 리준하다.
터벅터벅 걸어서 철문 앞에 멈춰서 보니 어마어마하게 크고 시커먼 철문이 앞에 있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서 있는데 갑자기 공기를 째는 날카로운 초병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가리 떨구라!”
엉겁결에 머리를 숙였는데 ‘꽈르르릉~~’ 하는 요란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교화소 철문 열리는 소리였다. 그 순간 눈에서 불이 번쩍하며 뒤통수에 타격이 왔다.
“이건 어디서 굴러먹던 어방둥이(모자란 사람) 새끼야?”
“대가리 숙이고 빨리 기어 들어가!”
아픔을 생각할 사이도 없이 후다닥 뛰어 들어가는데 뒤에서 그 철문 닫히는 아츠러운 소리에 머리끼가 오싹해왔다. ‘꽈르릉~ 꽝~’ 너무 무서워 눈도 뜨지 못한 채 서 있는데. “야 임마! 날 따라와” 하는 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한 보안원이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돌아서서 걸어가는 것이었다.
무작정 걸음을 옮기며 이리저리 살펴보니 오른쪽에 크고 시커먼 붓글씨로 "도주자는 쏜다!", "도주는 자멸의 길이다!"라는 글이 무시무시하게 써 있었다. 두려움에 떨며 계속 따라가면서 왼쪽을 보니 팔에다가 위생표(+)를 붙인 죄인들이 자주82호라는 큰 차에다가 통나무 같은 것을 마구 적재하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나무인 줄로만 알았는데 찬찬히 살펴보니 죽은 죄인들의 시체였다. 순간 가슴이 후두둑 뛰면서 온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다. ‘나도 이제는 죽었구나’ ‘감옥에 가면 80%는 모두 허약에 걸려 죽는다던 말이 거짓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보안원을 따라서 나는 ‘사’라고 불리는 보안원들의 사무실 앞에 이르렀다. 그 보안원이 들어가면서 뭐라고 말을 하자 곧 소위를 단 군의라는 자가 나왔다.
“돌아 섯! 바지 내렷!”
집안도 아닌 밖에서, 그것도 여러 죄인들이 지나다니는 장소에서 바지를 벗으라고 하니 참 기가 막혔다. 주춤거리다가 팬티만 남겨두고 바지를 벗었다.
뒤에서 노려보던 군의라는 자가 갑자기 내 급소를 걷어찼다.
‘악~’
너무 큰 통증에 허리를 펼 수 없어 꼼짝 못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군홧발이 내 얼굴로 날아왔다. 억울하고 분하기가 말할 수 없었지만 그렇게 코와 입으로 피를 쏟으면서 팬티를 벗고 위생검열을 마쳐야만 했다.
렌트겐(X-ray) 촬영실에 가서 촬영까지 마치고 나자, 그 보안원은 “야, 신입반장! 이 새끼 입소시키는 문건 작성해!” 하고는 날 데리고 신입반이라는 데로 데려갔다.
뒤따라가면서 보니 감방 복도에 연기가 꽉 차서 눈을 뜰 수 없었다. 각 감방을 데우는 화구간(불을 떼는 곳)이 복도에 있는데 불이 잘 붙지 않아 연기가 심하게 났었다.
이윽고 신입반이라고 쓴 복도 한 끝에 있는 감방 앞에 이르렀다. 그자가 문을 열고 신발을 신은 채 들어가기에 나도 그래야 되는 줄 알고 신을 신은 채로 들어섰는데 누군가가 갑자기 나의 귀뺨을 때렸다.
“이 새끼 어디라고, 신발 벗어!”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고 군의라는 새끼한테 얻어맞은 것만 해도 분해 죽을 지경인데, 같은 죄인이 날 죄인 다루듯 한다는 생각에 분을 참을 수 없어 주먹을 휘둘렀다. 그자가 피를 뿌리며 방바닥에 엎어지자 앞에 앉아 있던 8명의 죄인들이 나에게 몰매를 안겼다.
구류장에서 150일을 앉아 있던 터라, 다리맥이 다 풀린 나는 저항도 못하고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다. 너무 목이 말라 눈을 떠보니 병방(수인들 치료실)이라는 곳이었다.
아마도 정신을 잃었던 나를 여기에다 눕혀놓은 모양이다. 너무도 분하고 억울하여 입술만 깨물고 있는데, 나이 지긋한 위생원(수인이 맡아서 일한다)이 와서 맥을 짚어보는 것이었다.
“너 몇 살이냐?”
“19살입니다”
“너무 어리구나. 어린놈이 무슨 죄를 지었냐? 도적질?”
“아닙니다”
“그럼?”
“145조 2항입니다”
“음, 어쩌다가 어린 나이에 살인을 쳤냐?”
내 입으로는 도저히 사람을 죽였다고 할 수가 없어서 법조만 얘기해 줬는데 그 위생원은 알고 있었다.
“위생원도 살인으로 들어왔습니까?”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난 침을 잘못 놔서 사람이 죽었다. 실수로 간을 찔렀거든. 원래는 의사였다”
가슴팍을 보니 리학모라고 쓴 이름과 죄수번호가 보였다.
“여기서 4년을 살았다. 이제 나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지!”
“그래요?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허~ 좋기야 좋지”
“준하야 여기서 살아 나가려면 참는 법을 배워라! 음~ 여기 이런 말이 있다. 못 본 척 3년, 귀머거리 3년, 벙어리 3년이면 살아 나간다. 내 보기엔 너도 사람 됨됨이가 그리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살아서 여기를 나가겠거든 오늘 같은 행동은 삼가해라. 옆에서 너를 지지해주는 사람이 많고 또 네가 자리를 잡았는데도 계속 억울하다면 싸우고 분하면 분노를 터뜨려라. 그러기 전에는 절대 니 맘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좋은 말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여기두 겉보기엔 다 거친 죄인들 같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사는 집단인 만큼 정이 흐른다”
잡부 일을 하는 죄인이 와서 의사 선생을 찾는다고 알려주자 그는 곧 나갔다. 위생원은 나갔지만 웬일인지 그가 한 말이 귀에 쟁쟁했다.
“사람들이 사는 집단인 만큼 정이 흐른다”
이제는 죽었구나 생각했었는데 그 말을 들으니 마음이 어느 정도 가라앉으면서 삶의 희망이 보일 듯했다. 한참 누워있노라니 전날 저녁 기차역에서 눈물짓던 어머니의 얼굴이 못 견디게 그리웠다.
‘지금 어머니는 뭘 하고 있을까?’
내 생각은 어느새 고향을 떠나던 그날의 기차역으로 이어졌다. 족쇄를 차고 두 명의 계호원과 함께 기차역 보안원 대기실로 들어가던 나는 친척을 배웅하러 나왔던 친구 영춘이를 만났다.
“준하야!”
나를 보자 반가움에 달려오던 영춘이가 계호원들의 싸늘한 눈총을 받고는, 눈이 둥그래서 나에게 어디 가느냐고 물어보았지만 나를 호송하던 계호원들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그들은 내가 떠나기 전에 어머니를 만나면 혹시 도주라도 할까 두려웠는지 심리적 자극을 주지 않으려고 집에도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눈물이 글썽해 있던 영춘이가 내 눈짓을 보고는 부리나케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우리 엄마한테는 물론 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라도 알리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다행히 그날 내가 타고 떠날 기차는 사정에 의해서 1시간 반 동안 지연되었다.
영춘이가 어머니와 함께 제일 먼저 도착하고 그 뒤로 친구들과 그들의 부모님들 몇 분, 어머니 친구들과 동네 아주머니들이 도착하였다.
계호원들은 역내 보안원실 문을 걸어 잠그고 만나지 못하게 하다가 담배와 술 같은 뇌물을 받고 나서야 만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어머니는 나를 붙잡고 눈물만 흘리며 말을 못했다.
“울지 마시오, 어머니! 내가 돌아올 때까지 앓지 말구 건강해야 합니다. 꼭 살아서 돌아오니까 그때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어머니는 고개만 끄덕일 뿐 하염없이 울기만 했다.
“준하 엄마! 울지마오. 우리 준하는 어릴 때부터 돌 꼭대기에 올려놔도 살아날 놈이라고 했는데 어딜 가든 살아올 거요”
모두들 고무와 격려의 말로 어머니를 위안했고, 떠나는 나에게 힘을 주었지만 나는 그분들을 떳떳한 눈으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선생님, 제발 이 순간이라도 족쇄를 좀 풀어주시오”
어머니의 간청을 듣고 성혁 계호원이 마뜩치 않은 눈으로 보다가 마지못해 내 손목의 족쇄를 벗겨 주었다.
“영춘아, 성준아, 그리고 광일아, 내가 올 때까지 건강하게 잘 지내라. 앓지 말고! 부모님들 말씀 잘들어라! 그리고 우리 엄마 나 올 때까지 니들이 잘 좀 돌봐드려라”
“준하야, 어머니 걱정말구 가서 몸조리 잘해라. 교화소라는 델 가면 다들 살아 돌아오기 힘들다던데……. 기다릴 테니 죽지 말고 꼭 살아가 돌아와야 한다”
친구들은 물론 바래주러 나온 모든 분들이 걱정해주고 나름대로 힘을 주었다. ‘빵~’ 하고 경적이 울렸다. 나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족쇄를 찬 손을 내밀고 모든 사람들의 손을 일일이 잡아 보았다.
“모두들 앓지 말고 몸 건강히 계십시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내 손을 꼭 붙잡고 따라오면서 “준하야~ 준하야~” 하고 부르짖었다. 기차가 점점 속력을 내는데도 어머니는 내 손을 더 억세게 틀어쥐었다.
‘이러다가……’ 하는 생각에 더럭 겁이 나서 얼른 어머니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 앉아 버렸다.
“준하야~”
순간 나는 이때까지 참고 참았던 오열을 터뜨리고 말았다.
어머니의 애원에 찬 부르짖음이 귀전에서 멀어져 갈수록 눈물이 앞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격정으로 목이 메여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누군가 불을 붙여 담배를 입에 물려주기에 정신없이 빨아들였다.
한참 눈물을 떨구며 담배연기를 삼키고 나니 마음은 좀 진정되는 듯했지만 그래도 이 찢어지는 가슴을 어찌하랴. 내 마음이 이리도 아플진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교화소로 보내는 어머니의 그 심정이야 오죽했으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다며 열아홉 해를 남편 없이 혼자 살면서 오직 나 하나만을 바라보고 산 어머니. 먹을 것이 없어서 온 가족이 하루아침에 굶어죽곤 하던 그 어렵고 힘든 고난의 행군 시절 당신은 굶어서 얼굴이 부석부석해지면서도 내 죽그릇에 당신의 몫을 덜어 주던 어머니, 그렇게 애지중지 키운 사랑하는 자식을 다른 데도 아닌 교화소로 보내야만 하는 어머니의 그 심정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날 역전에서 자식을 애타게 부르며 철길 옆에 엎어져서 우는 어머니를 보고 울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내가 정신이 들자 신입반장이 나를 다시 신입반으로 데리고 갔다.
“이 개새끼야, 맞고 나니 정신이 좀 드냐? 맛 좀 더 볼래?”
참았다. 아니 참아야만 했다.
“이제야 풀이 좀 죽었구나. 이 새끼야 신임반장 3년 하면서 너 같은 새끼는 처음 본다. 어디다 대고 감히 반장한테 대들어?”
한참 핏대를 돋우던 그는 죄명이 뭐냐고 물었다.
“145조 2항입니다.”
“흥~ 살인자 새끼니까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뎀비지.”
그래도 참았다. 기운이 없기도 했다. 이어 내 이름, 집주소, 나이, 친척관계 등을 물어 문건을 만들어서는 나가버렸다.
“준하! 너 저기 제일 뒤에 가서 앉아라.”
부반장이라는 사람이 지정해주는 자리에 가서 앉았는데, 머리를 깎아야 하니 또 옷을 벗으란다. 나는 구류장에 가위가 없어서 머리를 깎지 못하고 왔었다. 시키는 대로 옷을 벗고 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 앞에 가 앉았다.
쑥덕쑥덕. 갑자기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내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됐나?’ 내 머리카락이 그렇게 아깝다고 느꼈던 적은 처음이었다. 반질반질하게 중머리를 하고 앉아 있노라니 창문 짬 새기로 들어오는 찬 기운에 머리가 시렸다. 내 교화소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교화소 이야기⑥]120m 콘크리트 담벽 안에서 짐승취급 받는 죄인들
조선 경제범교화소 중의 하나인 ‘제12교화소’는 함경북도 회령시에서 청진 방향으로 30리쯤 떨어져 있는 ‘전거리’라는 작은 농촌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10리쯤 산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회령에서 청진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보면 도로 좌측에 전거리가 있고 우측에는 풍산리가 자리하고 있다. 큰 길에서 전거리로 들어가면 기차가 다니는 철다리 밑을 거쳐야 하는데, 이곳이 전거리 입구다.
이 철다리 밑에서부터 약 1.5km 정도 치안대가 다니는 비포장도로를 따라 올라가면 차단초소(검문소, 차나 사람을 단속)가 있는데, 이 초소는 제12교화소 산하 경비대원들이 지키고 있다. 이 초소를 거쳐 빠른 걸음으로 30분쯤 걸어가면 제12교화소에 도착한다.
전거리에서 회령 쪽으로 30분가량 가면 조선인민군 경비대가 지키고 있는 초소가 있다. 이 초소에서는 유동인구의 신분증 및 여행증명서, 소지품 검사를 담당한다.
전거리 교화소는 수용인원이 약 2,000명 수준이다. 이 교화소에는 경비대 초병들까지 합쳐서 보안원만 약 300명 규모다.
이 중 직발입대초병(군대에 뽑혀 바로 전거리 교화소로 들어간 사람, 한국의 경비교도대와 같음) 60명, 가족과 함께 살림을 하는 30~35세 초병이 10여 명, 미혼인 ‘특사’ 계급 초병이 10여 명 정도 된다. 그 외 견장에 별을 달고 있는 보안원이 약 220여 명 정도 된다고 알려져 있다.
중학교를 갓 졸업하고 군대 초모(군인(초병) 모집)가 아닌 안전부 초모로 입대한 초병들 중에서 교화소 초병을 선발하는데, 한마디로 돈도 없고, 배경도 없는 집 자식들이 교화소 초병으로 선발된다. 교화소에서는 죄인뿐만 아니라 초병들도 많은 고생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늘 죄인들을 감시하는 역할을 맡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죄인들을 따라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죄인들이 나무하러 산에 오르면 무조건 제일 꼭대기에 서 있어야 하고, 바지를 적시는 한이 있어도 용변을 참아야 한다.
그리고 아무리 배고프고 힘들더라도 그 무거운 무기장구류를 하루 종일 착용하고 있어야 한다. 초병은 무게 3.2kg짜리 68식 자동보총(소련제 AK 소총을 개량한 AK-68소총), 실탄을 채운 탄창 2개를 늘 소지한다. 때문에 교화소 초병들의 얼굴 표정은 마지못해 끌려 다니는 죄인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항상 얼굴에 짜증이 가득하고 피곤한 표정이었다.
제12교화소는 본소(本所) 건물 외에 본소에서 동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동정광(원광을 선광하여 동(銅)이 들어 있는 것만을 갈라낸 광석)을 캐내는 2과와 5과가 분소(分所)로 자리 잡고 있고, 본소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해발 1,000m 높이에 4과가 분소로 위치해 있다. 1과와 3과는 본소에 포함되어 있다. 흔히 본소를 ‘전거리 교화소’라 부른다.
전거리 교화소에는 교화소 소장을 우두머리로 그 밑에 부소장, 정치부장, 간부과장이 있고, 1~5과에는 과장, 비서급 보안원, 관리보안원 및 일반 보안원들이 있다. 귀동냥으로 들은 바에 의하면 전거리 교화소는 1970년대 말에 "제22호 청년교양소"라는 명칭으로 세워졌으며 그때는 교화소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가 6m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에 "제12교화소"로 이름을 바꾸면서 콘크리트 담벽의 높이도 8m로 높아졌다. 지금도 전거리 교화소의 콘크리트 담벽은 20여 년 전에 추가로 쌓은 담벽의 모습이 선명하게 구분된다.
교화소 체계는 크게 1~5과로 분류되며 보안과, 교화과, 생산과, 재정과, 노동행정과, 간부과 등이 있다. 2과와 4과, 5과를 통솔하는 별도의 분소 소장이 있는 것은 아니다. 본소와 2개의 분소에는 각각 죄인들을 관리하는 관리보안원, 과장, 비서들이 존재한다.
본소 콘크리트 담벽은 한 변이 약 120m 길이의 정사각형과 유사하며, 그 안에 감방, 창고, 낙후자 휴게실, 목공반, 설계반, 공무반, 구내반, 취사장, 벌목반, 병원, 약국, 상하차반(상차, 하차가 있고, 작업한 것을 싣고 부리는 일, 작업조 이름),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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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나타님의 댓글
마라나타 작성일
리준하님의 북한생활이 영화같군요, 눈물겨운 님의 삶의 자취를 관심있게 읽었어요,
이어지는 다음 이야기를 기다립니다.
마라나타님의 댓글
마라나타 작성일리준하님의 영화같은 삶의 자취를 잘 읽었습니다, 이어지는 님의 얘기를 기다립니다.
마라나타님의 댓글
마라나타 작성일님의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를 계속 듣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