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악으로 버틴 10년 북창 수용소 생활 [2편] 박옥순
  • 북민위
  • 2023-10-15 07:4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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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순 (북창수용소, 1979~1989 수감)  
탄광에서 무수히 죽어가는 사람들
탄광에는 안전규정이 있었지만 그저 형식적으로 정해놓은 것에 불과했다. 안전규정대로라면 마스크를 쓰고 갱에 들어가야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탄광에서 일을 하다 보니 탄이 코로 들어가서, 코를 풀면 동글동글한 모양으로 탄이 나오곤 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농담 삼아 ‘구멍탄을 뽑았다’고 말하곤 했다. 가래를 뱉으면 석탄이 섞여서 항상 검은 가래가 나왔다. 탄광 일을 관둔 후에도 3년 동안 검은 가래가 나올 정도로 탄이 몸에 쌓여갔다.
석탄을 캔 자리에서는 가스가 나오기 때문에 탄광 안은 항상 가스로 가득 차 있다. 가스에 취하기 때문인지 탄광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만 해도 피곤함을 느꼈다. 우리는 항상 가스에 취한 채 일을 했는데, 일을 하던 사람들이 가스에 취해서 넘어지고 토하기 일쑤였다. 압축공기가 들어와서 공기순환이 되긴 하지만, 워낙 양이 적기 때문에 소용이 없었다. 가스에 취해 사람들은 항상 두통을 호소했다. 그러다 보니 사건 사고도 많이 일어났다. 특히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는데, 주된 이유는 하루 업무량 때문이었다. 정해진 업무량을 항상 채울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위험을 무릅썼다.
발파를 하고 나면 아파트 몇 층 높이의 큰 굴이 생기는데, 이 곳을 ‘공간’이라고 부른다. 그 곳에서라도 탄을 캐야 하루 업무량을 채울 수 있기 때문에 특히 젊은 사람들은 공간으로 들어가서 탄을 캐려고 애를 썼다. 원칙상 나무를 세우지 않은 공간은 갑자기 무너져 매몰될 수 있기 때문에 진입을 하면 안 되는 곳이다. 하지만 업무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밖으로 나갈 수조차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공간으로 들어가서 탄을 캤다. 그렇게 공간에 들어가서 탄을 캐다가 죽은 젊은이들이 많았다.
한번은 계획량을 채우지 못해 청년 셋이 공간에 들어간 적이 있다. 나는 차마 공간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그들이 발파를 할 수 있도록 준비 작업을 도와주고, 폭약에 불을 붙이는 것까지 보고 돌아서 내려오는데 영 느낌이 이상했다. 돌아 가보니 공간이 메워져 있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매몰이 된 것은 아니고 공간의 입구만 메워진 상태였다.

그때 당시 공간에 들어간 청년 세 명과 아저씨 한 명 그리고 나, 이렇게 5명이 채탄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저씨는 가스에 취해 옆에 앉아서 졸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아저씨를 깨우면서 아이들을 구해야 한다고 다급히 말했다. 다행히도 그 아저씨는 경험이 많은 분이었던 지라,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지렛대를 가져와서 입구를 메운 돌을 하나씩 제거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내 작은 구멍이 생겼고, 공간에 갇혀있던 청년 셋은 모두 무사히 구조되었다. 구조된 이후에 들어보니, 그 안에서 살려달라고 그렇게 소리를 쳤다고 한다. 그러나 입구가 너무 꽉 메워져서 밖에 있던 우리는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만약 그때 내가 그냥 내려가 버렸다면, 그 청년들은 모두 사망했을 것이다.
또 탄을 캐다 보면 나무가 돌 때가 있다. 탄이 없어서 나무를 세워둔 위까지 파다 보니 헐거워진 나무가 도는데, 그 나무 열 몇 개가 한꺼번에 다 돌면 갱이 무너져 내린다. 한번은 내가 4시쯤 교대를 나갔는데 갱이 무너져 사람들이 다 묻혔다고 난리가 났었다. 보통은 하루에 한두 명꼴로 사망자가 나오는데 그날은 12명이 죽었다. 묻힌 사람을 구하겠다고 들어갔던 사람들까지 모두 죽었다.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일어났던 가장 큰 사고였다. 사람이 죽어도 보상이라는 것은 전혀 없고, 그저 죽은 그날 바로 장례를 지내주는 것이 끝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시체는 같이 일하던 동료들이 관을 짜서 산에 묻어주는 식이었다.
탄광 안에서는 매몰 사고만 있는 것이 아니다. 수맥을 잘못 건드려 물이 터지는 일이 종종 있는데, 이를 ‘물통이 터진다.’고 표현한다. 물통이 터지기 전에는 몇몇 징조가 나타나는데, 가스가 나와서 갑자기 불이 꺼진다든가, 바람이 분다든가 하는 징조들이 보인다. 그러나 갱 안에서 정신 없이 일을 하다 보면 눈치를 채지 못하기 마련이다. 어느 순간 누군가 "물통 터졌다."라고 외치면 그제야 사람들은 정신 없이 도망친다.

물통이 터졌을 때의 가장 큰 문제는 물과 함께 석탄이 흘러내려온다는 것이다. 차라리 물만 나오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탄광 안에서 수맥이 터지면, 그냥 물이 아닌 물에 젖은 석탄이 빠른 속도로 탄광을 덮치기 때문에 사람이 살아남을 수가 없다. 갱의 천장 부근까지 죽탄이 찰 정도의 큰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딱 한 명 있었다. 23살의 젊은 청년이었는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기는 했지만 너무 큰 충격을 받아 정신이상자가 되고 말았다.

이 외에도 떨어지는 돌에 얼굴을 맞아 왼쪽 볼에 구멍이 난 사람도 있었고, 나도 떨어지는 돌에 허리를 다쳐 지금도 척추가 좋지 않다.
갱 안팎에서 일어나는 사고도 문제지만,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의 건강이었다. 채탄공은 폐에 탄가루가 들어가고 굴진공은 폐에 돌가루가 쌓여갔다. 그것을 우리는 규폐라고 했는데 병원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6년 동안 채탄공 일을 하다가 너무 힘들어서 약초반이라는 병원 소속의 업무로 직업을 바꿨는데, 그때 규폐에 걸려 입원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병원은 규폐병동, 간염병동, 결핵병동, 약초방 이렇게 네 구역으로 구성되는데, 규폐병동에 들어간 사람은 얼마 살지 못하고 금방 죽었다. 규폐병을 가진 사람들은 걸음도 겨우 걷는 수준이었다. 내 주먹보다도 적은 양의 쌀을 주어도 그것을 들 힘이 없었다. 특히 굴진공의 경우에는 폐에 돌가루가 차다 보니 공기가 들어갈 공간이 부족해서, 건강한 사람이 한번 내쉬는 숨을 그 사람들은 10번을 내쉬어야 살아갈 수 있었다.

북창수용소의 기억: 공개처형과 배급
내가 있을 때는 월급을 조금씩 줬는데 내가 채탄공을 관둔 이후부터는 탄이 더 이상 나오지 않아 월급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실 월급이라고 해봐야 우리가 일한 만큼 나오는 것도 아니었다. 돈이 생기면 사람들끼리 몰래 쌀을 매매하였는데, 월급으로는 쌀을 사 먹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수용소는 배급제로, 배급표는 갱에서 주었다. 그것을 받아 배급소에 가서 배급을 받는 식이었는데, 그나마도 1996년부터는 배급이 끊겼다.
일하는 사람은 직접공으로 분류되는데 그 중에서도 채탄공은 백미 900g, 조구반차는 800g, 갱 밖에서 일하는 사람은 700g을 보름치로 받았다. 이 외에도 아이들과 집에서 노는 사람은 300g, 막 태어난 아이는 100g, 2살 되면 200g, 3살 되면 300g, 학교 들어가야 400g, 중학생이 되면 500g 이렇게 올라가는 체계였다. 그러나 보름이라고 해도 이틀 치를 제하고 13일치를 보름으로 계산하기 때문에 식량은 항상 모자랐다.

더욱이 몸이라도 아파 직장에 하루 못나가게 된다면 일을 못한 것 이상으로 배급이 삭감되었다. 그러니 아파도 쉴 수가 없었다. 행여나 직장에서 잘려 일을 못하는 상황이 된다면 그건 더욱 큰일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무보수 노동을 하게 되는데, 무보수 노동을 하고 오면 거의 절반은 죽어 나온다고 보면 된다. 무보수 노동의 경우 일의 강도는 평상시보다 훨씬 세고, 식사량은 훨씬 적기 때문이다.
공개 처형이 있는 날에는, 오늘 공개처형을 하니 다 모이라고 인민반(마을단위)으로 통보가 온다. 대동강변에 공개 처형하는 장소가 있었는데 통보가 오면 모두 그 곳으로 모인다. 싫어도 무조건 가야 한다. 나는 공개처형 하는 장면을 본 적이 한 번 있다. 그곳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공개처형을 보았기 때문에 많은 충격을 받았다. 남자 네 명을 처형했는데, 처형장에 나오는 것부터가 이미 절반은 죽은 사람이었다.

제대로 걷지를 못해 끌려오다시피 하는데 눈은 천으로 싸매져 있었다. 나무에 세워놓고 동아줄로 머리와 가슴, 다리를 묶고 총을 쏘아 동아줄을 명중시킨다. 처형하기 전에 안전원이 죄명을 말하는데, 그 내용을 들으면 죽을 만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죄목도 많고 죄질도 나빴다. 하지만 그 내용이 조작된 것이라는 건 어린아이들도 다 알았다.
탈출을 시도하다가 공개 처형되는 경우도 많았다. 탈출을 시도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없었다. 워낙에 지형이 묘한데다, 강과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서 탈출을 해도 갈 곳이 없는 그런 곳이었기 때문이다. 탈출 성공도 불가능한데다, 잡히면 공개처형을 당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탈출할 생각조차 안 하고 힘들어도 묵묵히 주어진 탄광일을 하곤 했다.

북창수용소에서 해제(석방)되다
우리 가족은 수용소에 들어간 지 만 10년만인, 1989년에 해제가 되었다. 북창수용소는 80년대 초부터 해제가 시작되었는데, 보통 해제가 되어도 그 지역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는 해제가 되기 전까지 해제된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으면서 살아야 했다. 그 안에서 해제가 안 된 사람들은 말하는 짐승이나 다름없다.

아무도 사람으로 대우해주지 않았다. 머슴이 지주되면 더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제된 사람이 오히려 해제 안 된 사람을 더 괴롭혔다. 행여나 싸움이 나서 해제된 사람이 칼부림을 해도, 해제 안 된 사람은 말 한마디 할 수 없었다. 서러운 나날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해제가 됐을 때 뛸 듯이 기뻤다. 해제가 된 이후에도 우리가족은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계속해서 북창수용소에서 살았다.

봉창 17호 수용소
봉창은 북창 18호 수용소의 가장 끝인 잠상과 명학 옆에 위치해 있다. 봉창 17호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갔던 사람들을 통해 전해들을 수 있었다. 봉창에 있는 사람들은 보초들 때문에 가시철조망 주변에 있는 도토리를 줍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 구역에 있던 사람들이 17호 수용소 근처에 가서 도토리를 주워오곤 했다. 봉창은 정치범으로만 구성된 곳이라 감시•감독이 엄격한 곳이었다.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그곳 사람들은 말을 할 때도 안전원의 존재 유무를 항상 살피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도토리를 주우러 갔던 사람이 철조망 근처에서 소를 돌보던 어린 아이를 발견하고는 몰래 이것저것을 물었던 모양이다. 그 아이의 말에 따르면, 봉창 사람들은 가족이 함께 살지 못하고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따로 지내고, 남자ㆍ여자 모두 흩어져 별도의 숙소에서 생활한다고 했다. 아이들은 인민학교 4학년까지만 공부를 시키고 그 이후에는 바로 일을 시킨다고 했다. 워낙 엄격하고 무서운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18호 수용소 사람들도 봉창 17호 사람들을 측은하게 여기곤 했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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