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자수기] 악으로 버틴 10년 북창 수용소 생활 (1편) 박옥순
- 북민위
- 2023-10-15 07:4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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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순 (북창수용소, 1979~1989 수감)
올곧은 남편, 수용소에 수감되다
남편은 밀매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위 동료들이 남편의 밀매를 눈치채고 말았다. 문제는 남편이 워낙 올곧은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만약 남편이 밀매한 돈 중 일부를 몰래 가로채서 다른 동료들에게 술 한 잔이라도 사줬다면 문제가 되지 않았을 텐데, 자신의 돈이 아니다 보니 남편은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결국 부아가 치민 동료 중 하나가 남편을 보위부(북한의 국정원)에 밀고하였다. 후일이 두려웠던 남편은 도망을 갔는데, 간 곳이 하필이면 평소 알고 지내던 소련인의 집이었다. 그러니 문제가 더 커졌다. 도망쳤다는 점도 수상쩍게 보는 판국이었는데, 소련인의 집으로 도망을 갔으니 나라를 배반하고 도망가는 사람으로 보기에 딱 좋았던 것이다. 결국 남편은 보위부를 거처 18호 북창 관리소(정치범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때가 1976년도였다.
나는 남편이 북창수용소에 수감됐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정부는 가족에게조차 남편의 수감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남편이 귀국하기로 되어 있었던 해가 1976년도였는데,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리라 믿었던 남편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자 나는 그가 행방불명 되었다고 생각하였다. 남편의 생사여부도 모른 채 그렇게 3년을 지낸 1979년 어느 날, 남편과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귀국하면서 남편이 북창수용소에 수감되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당시에 북창수용소에서는 가족에게 편지를 쓸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남편은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에 3년 동안 편지도 부치지 못했다. 그런 남편이 너무 밉기도 했고, 아이들을 생각해서 남편과 이혼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이혼을 결심하고 남편을 찾아갔다. 북창수용소 입구에 초소가 있는데 초소의 안전원(일종의 경찰)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 원래는 출입이 금지되는 곳이지만, 남편을 만나러 왔다고 하니 여기저기 연락을 해보고는 들어가도록 해주었다.
수용소에 들어가 보니, 길도 외길일 뿐 아니라 바로 옆에는 대동강이 흐르고 주변은 온통 산이라 도망치고자 해도 도망칠 수 없는 첩첩 산중의 요새 같은 곳이었다. 그렇게 북창수용소에 들어가서 남편을 보는 순간 남편을 모질게 대하리라 굳게 결심했던 마음이 한 순간에 무너져버렸다. 예전에 알던 남편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몰골을 한 남편을 보고 이혼하자는 말은 목구멍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북한에서는 세대주가 거주지를 옮기면 남은 가족들은 모두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남편과 이혼을 하지 않는다면 나와 아이들도 모두 북창수용소로 이주를 하는 것으로 정해져 있었다. 그렇게 나와 3명의 어린 자식들은 북창수용소로 들어가게 되었다.
우리는 북창 읍에서 기차를 타고 수용소로 들어갔다. 북창수용소는 한 개 군보다도 큰 지역인데, 돌이 많아서 석산리라고도 불렸다. 석산리는 제2의 평양이라고 할 정도로 간부급으로 있던 사람들이 많이 오는 곳이었다. 정치범보다는 경제범들이 많이 오는 곳이고, 간부들도 많이 있었기 때문에 여느 관리소보다는 감시•감독이 약한 축에 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수용소에 처음 들어가면 당증(노동당 입당증명서)를 빼앗는다. 한 번은 평양에서 당 고위급 가족이 들어왔는데, 그 집 여자가 당증을 안 내놓겠다고 울며불며 야단을 친 적이 있다. 사회에서 발언권을 갖기 위해 돈을 주고서라도 당증을 사는 곳이 바로 북한이고 아무나 얻을 수 있는 당증도 아닌데, 한 번 당증을 뺏기면 복당하기가 매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빼앗기지 않으려고 울고불고 난리를 쳤지만 결국 당증을 빼앗기고 말았다.
여자 채탄공으로 6년을 살다
북창수용소에서 주로 하는 일은 탄광 일이다. 북창수용소 입구에서부터 순서대로 갈골갱, 보피갱, 청년갱, 심산갱, 명학갱, 범골갱, 잠상갱이 있고 강 건너 동부노천갱이 있다. 작업반은 채탄 1작업대, 2작업대, 3작업대, 굴진 1작업대, 2작업대, 3작업대로 나뉘며, 조구통관리반도 있었다.
1979년 9월에 수용소에 들어가 난생 처음 갱일을 접했다. 그 전까지는 갱일이라고는 해보지도 않았을뿐더러 내가 살면서 그 일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곳에서 채탄공을 했다. 수용소에서는 일일 할당량이 정해지는데, 할당량은 그날그날 달라졌다. 보통은 1인당 하루에 몇 톤을 캐라고 정해주는데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남자들은 채탄공과 굴진공을 한다. 굴진공이 굴을 뚫으면, 그 굴에 채탄공이 들어가 탄을 캐내는 식으로 작업이 진행되었다. 여자들은 주로 조구통관리반에 들어가는데, 조구통관리반에서 하는 일은 벨트 콤페어를 통해 운반된 석탄을 받는 작업이다. 나는 여자임에도 채탄공으로 일하였다. 남편이 몸이 너무 허약해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생활을 꾸려 나가기 위해서는 내가 자처해서 힘든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남편도 탄광에서 일을 했다. 남편은 청년갱, 나는 보피갱으로 배치 받았다. 탄중에서는 보피탄이 제일 좋기 때문에 보피갱이 가장 많은 일을 했다. 1980년대 까지는 그래도 탄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그곳에서도 내가 속한 중대가 탄을 제일 잘 캤었는데, 많이 캘 때는 하루에 20광차 넘게 탄을 캐기도 했다.
모든 인부는 아침7시까지 출근을 해야 하고, 출근한 인부들은 산에 올라가서 탄광 안에 세울 나무를 준비하는 작업을 했다. 아침마다 나무를 해 오는 일은 매우 고됐다.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하는 일만 해도 한 시간이 더 걸리는 일이었지만, 교대를 해주는 8시까지 작업장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그 무거운 나무를 끌고 산을 막 뛰어 내려와야만 했다. 그런 다음에야 작업장으로 들어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아침에 갔다가 저녁에 집에 오면 9시나 10시쯤이 되었다. 고단해서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를 정도로 정신 없는 나날이었다.
탄광 안에 들어가면 보통 12시간은 노동을 해야 한다. 하루의 작업은 총화(전체모임)로 시작해서 총화로 끝이 나는데, 아침에 정해준 계획량을 달성하지 못하면 저녁 총화를 해주지 않았다. 문제는, 저녁 총화를 받지 못하면 퇴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어떻게든 계획량을 달성해야만 집에 갈 수 있는 것이다. 교대시간이 되어도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퇴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근무가 끝난 후에도 탄을 찾으러 버력더미(돌무더기) 사이를 헤맸다.
매일매일 업무량이 달랐지만 퇴근을 제때 하기란 쉽지 않았다.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말로 표현을 할 수가 없다. 모두 새까맣게 물들어 퇴근할 때 샤워를 해야 하지만 겨울에 보일러가 고장 나기라도 하면, 갱 앞에 흐르는 도랑물의 얼음을 깨고 얼음물로 샤워를 하고 퇴근하고는 했다. 막장 안에는 안전장치도 없었다. 갱에 들어갈 때는 카바이드 깐드레(갱 내에 들고 들어가는 등)를 들고 들어갔는데, 나중에는 돈이 없어 카바이트를 주지 않아 불도 없이 어두컴컴한 갱 안에 들어가서 작업을 했다.
당시에 나는 정말 악으로 일을 했다. 막장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는 소위 ‘영양제’라는 것을 준다. 영양제 식당이 있는데, 집에서는 제대로 먹지 못하니까 그 영양제 한 그릇을 바라고 사람들이 일을 더 하게 되는 체계였다. 하루 업무량을 채우지 못하면 영양제를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욱 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점심도 굶으면서 일을 하곤 했다. 한창 커 가는 아이들은 항상 배고파했고, 배급되는 식량은 너무 적었기 때문에 내 도시락을 챙길만한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영양제를 받으면 먹지 않고 항상 집에 싸가지고 와서 아이들을 먹였다. 못 먹고 일을 하다 보니 헛구역질을 많이 했지만,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악으로 일을 했다. 남자와 똑같은 수준으로 일을 했기 때문에 반장이 나에게 돈을 좀 더 챙겨주기도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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