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수기] 新 탈출기
- 북민위
- 2023-08-01 05:11:01
- 조회수 : 301
영철동무, 자네가 보낸 편지를 1년이 지난 오늘에야 중국 쪽 인편을 통해 받아 보았네. 자네도 어려울 텐데 우리 집에 식량까지 전해 주었다니 무슨 말로 고마움을 표현할지 모르겠네. 한편으로 자신을 돌이키기도 했네.
자네는 편지에서 제 부모와 처자식도 못 지키면서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서 고향을 떠났느냐고 나를 꾸짖었더군. 아닌 게 아니라 나처럼 못난 놈을 그리며 고향 동구 밖에서 오늘도 기다리고 계실 어머니와 이 못난 놈 때문에 역적의 안해로 살아야 하는 연희, 그리고 내 아들 충성이를 생각하면 지금도 억장이 무너지는것 같네.
김 동무, 우린 그때 열심히 노력해서 남보다 먼저 조선노동당에도 입당을 하고 이왕 미술에 뜻을 두었으니 남들이 부러워하는 1호 화가, 영상 화가가 되자고 다짐하군 했었지. 대학을 졸업한 우리가 각각의 일터에서 좋은 성과를 내고 있을 때 그러했던 자네와 나를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었나.
자네나 나는 ‘그림으로 당을 지키고’ 그것이 곧 애국이라고 생각했음을 지금도 의심치 않네.
이제 와서 하는 말이네만 자네가 살던 평안남도는 그래도 좀 낳은 편이였지. 내가 배치 받았던 함경북도는 1992년 당시 배급이 완전 두절된 상태였다네. 그렇게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연희를 안해로 맞아들였네. 운 좋게도 대학에서 제일 예쁘다는 처녀와 연애한다고 자네가 늘 시심하던 그 연희 말일세.
연희도 마침 함경북도 수예연구실에 배치 받게 되었네. 어려웠지만 우리 둘은 아기 자기한 신접살림을 꾸려 나갔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의 운명이 이렇게 갈리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상황이었네.
그러던 1995년 겨울, 어느날 밤에 있은 일이네. 하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서는데 연희가 옹색한 얼굴을 해 가지고 어쩔 줄을 몰라하더구만. 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뭐해, 죽이라도 내 와야지”하고 이야기 했는데 연희는 죄 지은 사람처럼 “죽 끓일 쌀도 없어서요”하고는 머리를 푹 떨어뜨리는 것이었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냉수 한 사발 씩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네. 연희는 임신 중이었는데, 나는 내 배가 고픈 것 보다 임신한 연희와 배속에서 자라고 있을 아이생각에 머리가터질것 만 같았네. 긴 겨울밤을 뜬 눈으로 보내면서 태어나 처음 우리가 사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 보았네. 로동자 농민들에게 배급조차 주지 못하는 지금의 이 상황을 당에서는 알고 있을까. 장군님께서는 알고 계실까.
당시에 순진한 북한인민 모두가 나처럼 생각할 것이라고 믿었었지. 장군님과 조선로동당은 인민들을 위해서 로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데, 당의 뜻을 잘 받들지 못하는 일부 간부들이 일을 제대로 못해서 당에 심려를 끼쳐드리는 작금의 현상이 초래되었다고 말일세. 연희에게 도 이렇게 이야기 했었네. “장군님이 이 상황을 아시게 되면 모든 문제는 단번에 풀릴 거야.”
한편으로는 리당비서를 하는 아버지에게 인편을 보내어 임신한 며느리를 위해 식량을 좀 보내달라고 염치를 부리기도 했네. 하지만 한해가 흐르고 두해가 흘러도 굶주림은 계속 되었고 우리의 ‘위대한 장군님’은 백성들의 사정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매일 밤 텔레비죤을 통해 군부대 시찰 소식만 전하고 계셨네.
서른 살을 살아오면서 여태 보지 못했던 거지들이 역전이며 길가에 차고 넘쳤고 자고 나면 또 누군가가 굶어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머리를 어지럽혔고, 끝내는 우리 미술 창작실 부실장님마저 가마니에 말려 땅속에 묻히는 신세가 되었네.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연희도 그랬고 우리 창작실 화가들 모두가 얼굴색이 꺼멓게 죽어 있었네.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서 누군들 자유로울 수 있었겠나.
어느날 아버지에게서 편지가 왔네. 시골은 도시보다 좀 낳으니 고향으로 내려오라고. 그때 북한에서는 한창 농촌 진출이 장려 되고 있을 때라 고향으로 가는 것이 쉽게 승인이 났네. 명망 높은 미술가가 되겠다는 꿈도 희망도 모두 버리고 다만 죽지 않기 위해서 나는 고향으로 내려갔네. 자네와 함께 방학 때 놀러 갔었던 내고향 개마고원으로 말일세.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에 돌입 했을 때도 개마고원만큼은 식량을 자급, 자족 하고 있었었네. 산새가 험하고 교통이 불편해서 나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는 땅, 밀과 감자 농사로 살아가는 고향사람들은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고 저들만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지.
고향에 도착한 나는 이제야 연희와 아들의 목숨을 지킬 수 있다는 안도 의 숨을 쉬었네. 해보지 않은 농사일을 하자니 힘은 좀 들었지만 최소한 그곳에는 죽음의 공포가 존재하지 않았네. 해보지 않은 농사일에 연희도 힘들어 했지만 굶는것 보다는 훨씬 행복해 했네. 하지만 그 여리고 예쁜 여자를 내 삶에 끌어들이고 행복하게 해 주지 못하는 자책감에 늘 시달려 왔네.
연희에 대한 미안함, 그 미안한 마음속에 울컥 울컥 가슴에 고여 오던 울분 같은 것, 연희의 가냘픈 어깨를 바라 볼 때마다 생기던 그 감정들이 조선노동당과 사회제도에 대한 일종의 반항심이었다면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겠나. 이름 없는 한 미술가의 화첩에 남모르게 쌓여가던 굶주린 사람들의 해골 같은 스케치와 마르고 탄, 고향 들판의 풍경들은 지나온 많은 날들을 되새기게 했었네.
엎친데 덮친 격이라고나 할까. 그 이듬해인 1996년 감자와 밀을 심던 우리 고향 땅에 백도라지를 심으라는 “김정일 장군님”의 지시문이 우리 고향에 떨어 졌네. 자네도 백도라지가 뭔지 알지 않나. 마약을 생산의 원료로 쓰이는 아편이 이른바 백도라지인데, 군당조직 비서란 사람의 강연을 들어보니 “백도라지를 심어서 그것을 외국에 팔면 입쌀을 사 올수 있다”는 것이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개마고원 인민들이 밀과 감자로 생활하는것을 항상 가슴 아파 하시는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하얀 쌀밥에 고기 국을 먹게 하기 위해서 이러한 조취를 취했다”고 하더구만.
순진한 고향사람들은 장군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에 높은 증산성과로 보답하자고 맹세를 다 졌네. 국가가 나서서 아편을 재배하다니...나로서는 굶주림 보다 더 두려운 그 무엇이 평화롭던 우리 고향에 닥쳐 온다는것을 느끼고 있었네. 하지만 어쩌겠나? 모든 것이 당의 명령으로 통하는 그 땅인지라 사람들은 땅을 갈아엎고 평생 가꾸어오던 밀과 감자대신 백도라지 씨앗을 정성껏 뿌렸네.
봄내 여름내 하얀 쌀밥에 고기국을 바라고 너도 나도 땀 흘린 보람이 있어 개마고원의 그 넓은 대지에 연분홍 도라지꽃이 활짝 피었네. 가을이 되어서 추수가 끝나자 무장한 인민군군인들이 나타나 수확물을 모두 실어 거더군. 그때부터 내고향 사람들은 어제나 저제나 국가에서부터 하얀 입쌀이 내려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더랬지.
하지만 12월이 가고, 한해가 다 지나도 쌀은커녕, 감자 한 톨도 도착 하지 않았네.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그것들은 리당비서인 우리 아버지에게 종합되더군. 하지만 아버진들 어쩌겠는가? 아버지는 사람들에게 “지금 온 나라가 고난의 행군을 하고 있고 경애하는 장군님은 그것을 단신으로 헤치고 있습니다. 모두가 허리띠를 좀 더 졸라맵시다. 내가 곧 회의 차 도당에 올라가는데, 그때 우리 마을 실정을 당에 보고하겠습니다”고 하셨네.
그날 저녁 아버지는 나와 마주 않은 자리에서 “노동당이 인민들을 동원해서 아편을 심게 하고, 농민들의 목숨과 같은 농사를 못 짓게 하다니...이건 분명 장군님의 뜻이 아닐 거야.”고 이야기 하시면서 “내일 도당에 올라간다. 도당에서 안 되면 중앙당에 신소해서라도 이 문제를 지시한 작자를 꼭 밝혀내겠다”고 하시더군. “아버지, 아버지 말씀이 백번 옳은 말씀이지만 너무 나서지 마십시오. 우리 조선 땅에 장군님 몰래 하는 일도 있습니까?” 그러는 나의 목소리는 떨렸고, 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가에는 깊은 시름이 묻어 있었네.
자네도 잘 아는 나의 아버지는 50년대의 조선로동당원이라네. 한생을 로동당만 믿고 충성해온 충신 중에 충신이셨지. 아버지는 다음날 나의 만류에도 아랑곳 않고 도당으로 올라 같네. 하지만 이튿날 저녁 아버지는 두 어깨가 축 처져서 집으로 돌아 오셨네. 저녁 식사를 하시면서는 “내 꼭 중앙당에 신소할거다. 비열한 아첨쟁이들, 배신자들, 그놈들 때문에 장군님께서 얼마나 힘드실까, 생각하면 잠 이 안 온다.”며 실성한 사람처럼 한말을 곱씹으셨네.
불안해서 우리 온 식구가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은 그렇게 갔네. 그렇게 1996년이 지나고 1997년이 밝았네. 그해부터는 우리 고향에서도 아사자가 생기기 시작했네. 엄동설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는 개마고원의 절해고도에서 쌀 한 톨 없이 어떻게 살아난단 말인가? 아버지는 3번째로 중앙당에 제의서를 올렸네. 지금도 생각하고 싶지 않고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그날, 아, 1997년 1월 12일, 이날은 나의 일생에서 제일 저주 받은 날일세.
이날 저녁 우리 집에 갑자기 들이 닥친 인민군 보위사령부 사람들이 아버지를 결박 했을 때까지 나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네. 인민군 보위사령부 군관이 아버지 앞에서 “반당 분자 한철수를 인민의 이름으로 체포한다.” 라고 말할 때야 비로서 정신을 차렸네. 드디어 오지 말아야 할 것이 오고 말았네. 눈앞의 현실이 믿겨지지 않는듯 아버지의 눈빛은 허공에 정지되어 버렸고 어머니와 연희는 기절해 쓰러졌네. 다섯 살 난 아들 충성이만이 군인들이 들고 있는 총이 신기 한 듯 빤히 쳐다볼 뿐이었지.
아버지는 끌려 간지 하루가 지나고 일 년이 지나도 돌아오지 못하셨네. 죄명이 반당적 언행 선동죄라고 하는데 나는 억울하다 못해 분통이 터졌네. 조선 땅에 우리 아버지만큼 당을 위하고 장군님을 위한 충신이 또 있을까고 말일세. 죽어가는 고향사람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한 죄 밖게 없는 우리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반당적 언행 선동죄로 몰아붙이다니. 너무 억이 막혀 숨도 쉴 수 없었네. 뭔가 착오가 생겼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군당에 있는 소꿉시절 친구에게 줄을 대여 알아보았네.
하지만 그 실 날 같은 희망도 무너져 버렸네. 군당 조직부에서 지도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장군님의 친필 지시가 떨어 졌다는 걸세. 아버지의 제의서를 받아 본 김정일은 친필 지시로 “당이 힘들 때 같이 힘들어 하지 않고 당이 어려 울 때 같이 어려 워 하지 않는 자는 배신자입니다” 했다는 것일세. 원칙도 기준도 없이 기분 내키는대로 갈겨 쓴 한 문장 글에 의해 수십 년간 당만을 믿고 살아온 로혁명가가 역적으로 몰려 세상에서 매장되었더란 말일세.
군당에 있는 친구의 말을 전해 듣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정말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네. 더욱이 나를 괴롭히는 것은 고향사람들의 눈초리였네. 고향사람들은 자기들이 겪는 굶주림이 마치 우리 아버지 때문인것처럼 나와 우리 집을 멀리하기 시작했네. 수십 년간을 한 가족처럼 살아온 사람들이 그처럼 차디차게 등을 돌릴 수 있단 말인가.
나는 그때 공화국의 도덕적 가치관과 교육관, 인생관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기회가 있었네. 아버지가 끌려 간지 일 년이 지나고 98년 겨울 어느날, 작업반장이 군당에서 전화가 왔다고 연락을 주었네. 군당에 있는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네. 불안 반 기쁨 반으로 전화를 받았네.
“자네 내가 하는 말 잘 듣게. 자네 전번 작업반 모임에서 말실 수 한 것 있지.” “무슨 말!”불안한 마음에 다그쳐 물었네. “나도 자세한 것 모르겠는데, 군당 조직부에 신소가 올라 왔고 심의를 거쳐 보위부에 문건이 넘어 갔어” 더 구체적인 사연을 묻기도 전에 친구는 전화를 끊어 버렸네. 귀가에서 수화기 소리가 붕 붕 거리고, 가슴은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파오더구만.
전후사연이야 어떻게 되었건,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뇌리를 스쳐갔네. 아버지와 같아질 내 운명을 건질 방법이 나에게 없다는 것이 억울하기만 했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연희는 연희대로 나를 걱정하면서 앉아서 잡혀가기를 기다릴수는 없지 않는가고 안타까워 했네.
그러나 조선 땅 어디에 내가 숨을 곳이 있겠는가? 유일사상과 유일적지도체제가 관통된 그 땅에서 당으로부터 외면당한 내가 숨어 살 곳이 어디인가 말일세. 너무나 답답하고 억울해서 그만 펑펑 울고 말았네. 그러는 내 앞에 연희가 다가왔네. 언제 장만한 것인지 비닐에 싼 강냉이 엿 한 덩이를 내 놓으며 “수성집 아들도 남조선에 갔다는데 당신도 그곳에 가면 살 수 있지 않나요. 가요.”그렇게 딱 잘라 말하는 것이였네.
평생 흘릴 눈물을 그날에 다 흘린것 같네. 그리고 나는 그날 저녁으로 집을 나섰네. 개마고원의 겨울밤을 자네는 상상도 못할 걸세. 하지만 그 사나운 추위보다 복수심은 더 활화산 같이 타올랐네. 특별한 리유도 없이 가족과, 고향과, 사랑하는 사람들과 생리별을 당해야 하는 그 미칠것 같은 마음...
방향도 없이 뜻도 없이 그냥 북으로 북으로만 달렸네. 그렇게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이 두만강이 바라보이는 자그마한 언덕이었네. 내가 왜 이 언덕에 서있는지, 내가 왜 저 강을 넘어야 하는지, 지난날 선렬들은 나라를 찾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다지만 나는 오로지 살기위해서 남의 나라 땅을 밟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또다시 눈물이 쏟아져 내렸네. 차라리 어머니나 연희가 있는데서 자결이라도 했을 걸 하는 후회마저 들었네.
영철동무. 그렇게 나는 강을 건넜네. 강을 건너고 보니 공화국 쪽은 불빛 한 점 없는 지옥처럼 느껴졌고 그 반대의 중국 쪽은 형형색색의 불빛이 너울거리고 있더군. 하지만 그 불밝은 곳, 중국 땅에서 나라 잃은 백성이 겪은 설음도 만만치는 않았네. 인제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서울에서 살고 있고 있지만 잊지 못할 추억들이 중국 땅 여기저기에 묻혀 있다네.
그런 이야기들은 다음 편지에 전하기로 하고 이제, 자네의 꾸중에 답변을 해야 할 것 같네. 나는 이제 우리가 그토록 하늘처럼 떠받들던 “김정일 장군님”이 천하에 둘도 없는 시정배라는 것을 깨달았네. 물론 북에서 생활할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생각이지만 이곳 서울에 나와 보니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생각하더구만. 자신만의 사치, 자신만의 영달, 자신만의 부귀를 위해 나라 전체를, 백성들 모두를 인간이하로 만들어 버리는 시럽의 자식이라고 말일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보네. 같은 인간이면서 어떻게 사람들의 머리우에 군림할 수 있으며 나라전체를 제 개인의 영달을 위한 노리개로 만들어 버릴수 있단 말인가. 그렇게 순박한 내고향 사람들이 왜 불쌍히 굶어 죽어가야 했는지 왜 오직 당 밖에 모르고 조국 밖에 모르던 나의 아버지가 역적으로 몰려 죽어야 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어머니와 불쌍한 연희가 왜 역적의 가족으로 살아야 하는지 눈앞에 안개가 걷히듯 이제는 똑똑히 알게 되었더란 말일세.
그 김정일을 반대하고, 그 김정일을 우리 조국에서 없게하는 길이 고향사람들과 나의 가족을 다시 찾는 길이라는 것을 안 이상 나는 지나온 나의 길을 후회하지 않네. 이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성인의 한사람으로 내가 가야만 하는 량심의 길이라고 확신한단 말일세.
자내는 둘도 없는 내 친구, 언제나 개인 중심적이던 나를 관대하게 포용해주고 다듬어 주던 진실한 친구아닌가. 난 이제 자네를 동지라 부르고 싶네. 나의 진심이 통했다면 자네도 나와함께 이 길을 가는 동지가 되여 주게나. 나는 남한에서 북한민주화의 길을 가고, 자네는 북한에서 민중을 깨우치는 등불이 돼서 김정일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불씨가 되어 주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치려 하네. 우리 대학교정에서 부르던 동지애의 노래가 생각나나?
그 노래의 노랫말을 약간 고쳐 보게나. 그러면 참 좋은 노래라는 생각이 들더구만. 자네에게 마음의 선물로 바치고 싶네. 그럼 다음 소식을 나눌때까지 건강하라구.
2006년 3월 20일 서울에서 친구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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