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탈북민수기] 증산 단련대에서의 1년6개월 - 최금순-
- 북민위
- 2023-08-10 08: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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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삶의 희망과 포부가 있고 인간다운 삶을 을 누리고 싶어한다. 조선에서 태어난 나도 한 인간으로써 희망이 있었고 꿈과 포부가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정치 상황 아래서는 인간으로서의 꿈도, 희망도 미래도 이룰 수 없었다.
국경을 건너면서 시작된 고난의 순간들과 맞서 어렵게 어렵게 하루 하루 살아가던 중 2002년 10월 중국 심양에서 중국 공안국에 체포되었다.
10월 3일 10시쯤 심양시 공안국 감옥의 2호 감방에 수감되었는데 그날 밤 너무나 내 운명이 너무 한탄스럽고 원망스러워 밤새껏 소리 내 울었던 기억이 난다.
10월 5일 또 다른 조선 사람 2명이 잡혀 들어왔는데, 조선 사람들에게 대한 중국 사람들의 차별은 감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당시 쌀쌀한 가을에 접어든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안국 감옥에서는 조선 사람들에게 홑이불 하나도 지급해주지 않았다. 나는 어설픈 중국어 실력으로 “어째서 조선 사람들만 차별하여 이렇게 모욕을 하는가?”하고 소리를 지르며 항의하자 간수들이 하나 둘 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는 “너희들이 우리를 조선으로 돌려보내려고 붙잡아 온 것이니, 조선 사람들만 함께 지낼 수 있도록 따로 방을 내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간수들은 “너희들은 비법으로 구경을 넘어 우리 땅에 숨어 들어온 사람들이라 중국 사람들과 같은 대우를 해줄 수 없다”며 묵살 했다.
나는 너무나 분통이 터져 이때부터 심장병이 생기고 말았다. 공안국 감옥에 있는 동안 하루에 2~3번씩 정신을 잃기 시작했고, 간수들이 주는 약을 아무리 먹어도 발작이 멈추지 않았다.
공안국 감옥의 간수들은 2003년 10월 7일 아침 옆방에 있던 김씨와 나를 불러내더니 병원으로 후송할 채비를 시작했다. 함께 있던 조선 사람들이 조선말로 “형님 잘 돼었소. 병원에 가는 길에 정신 바짝 차리고 도망치시오”라며 나를 배웅했다.
그러나 감옥 밖에 나서자 우리에게 족쇄를 채우는 것도 부족하여 6명의 공안 요원들이 우리를 호송하기 위해 함께 차에 올라타는 것이었다. 우리가 도착한 병원도 일반 사회의 병원이 아니라 죄인들만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공안병원이었다. 건물 2층 높이까지 울타리가 있었고 전기 철조망을 사방을 둘러 막은 것이 보였다.
한 달간의 병원 생활 동안 나는 도망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병원생활이라고 해봐야 하루 세 번 병원측에서 공급하는 약이나 타먹는 것이 전부였지만 죄인들에게 대한 감시는 감옥과 비슷했기 때문이다.
11월 5일 퇴원하여 다시 공안국 감옥으로 돌아오니 감옥 안에 있던 조선 사람은 총 17명이었다. 내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에는 40명 정도의 조선 사람들이 함께 수감되어 있었는데 퇴원하고 돌아가 보니 전에 있던 사람들은 한 명도 보이지 않고 모두 새로운 얼굴이었다.
11월 19일 아침 나는 김씨, 손씨와 함께 조선으로의 송환길에 나서게 되었다. 중국 외사과에서 2명이 우리를 호송하러 왔다. 외사과 직원들은 우리 3명에게 족쇄를 채우고 족쇄끼리 서로 연결하여 우리가 달아나지 못하게 조치를 취했다. 그런데 가운데 있던 김씨가 심양역 앞에서 족쇄를 풀려고 시도하다가 외사과 직원들에게 들키는 바람에 그들은 우리를 거칠게 다루기 시작했다.
배고프다고 하소연 해도 먹을 것을 주지 않았으며 용변을 보자 해도 위생실에 보내주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에게 심양역의 철길에 내려가 용변을 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우리들은 내가 가지고 가던 밥그릇을 놓고 용변을 보았다.
심양역 승강장의 수 많은 중국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철로에서 바지를 내리고 쭈그리고 앉아 용변을 본 것이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무슨 큰 구경이나 난 것처럼 중국 사람들이 우리를 내려보고 있었다.
심양역에서 출발한 기차가 단동에 도착하니 중국변방대의 자동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차를 타고 한참을 달려가니 변방대 청사가 나타났다. 우리는 2층으로 끌려가 옷을 모두 벗고 알몸 검사를 당한 후 변방대 감옥에 수감되었다.
저녘때가 되니 8명이 더 수감되었는데, 4명은 대련에서 잡혀왔고, 2명은 봉황에서, 1명은 몽골에서 잡혀왔다고 했다. 우리는 이틀 동안 변방대 감옥에 있다가 11월 20일에 조선 여성 4명과 함께 신의주로 압송되었다.
우리는 신의주 세관 마당에서 기본적인 물품 조사를 받았으며 전염병 검사도 받았다. 생각과 달리 신의주 세관 직원들은 우리에게 쌍소리도 하지 않고 폭력도 행사하지 않아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세관 검사를 마치고 우리는 신의주 보위부로 실려 갔는데, 차창 밖으로 보이는 조국의 풍경은 8년 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바라보니 너무도 초라한 행색과 야윈 얼굴들만 거리에 가득한 듯 느껴졌다.
신의주 보위부에 도착하니 이제부터는 이름이 없어지고 수감번호로만 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보위부 감방에서는 머리를 숙이고 허리를 45도 각도로 굽히고 걸어야 했다. 나와 함께 송환된 여성들은 모두 3호 감방에 수감되었는데, 올방자(가부좌)를 틀게 하고 허리를 펴고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하루 종일 앉아 있게 했다.
이렇게 앉아서 두 세 시간을 보내자면 정신이 혼미해지고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 당장에 죽을 것 만 같았다. 이 때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간수의 쌍소리와 몰매가 돌아왔다. 지금도 이 때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신의주 보위부에서는 우리를 한 사람씩 불러 몸수색을 시작했는데, 간수가 감방안에 들어와서 모두 옷을 벗게 하고는 머리카락과 입안, 귀안을 수색하고 여성들의 경우에는 자궁까지 손가락을 넣어 샅샅이 수색했다.
신의주 보위부에서 나는 ‘115’라는 번호를 받았으며, 1호방에 수감되었다. 보위부 감옥의 규칙은 아주 엄격했다. 용변을 보려면 간수들에게 “선생님! 1호방 115번 한가지 제기할 수 있습니까?”하고 물어봐야 한다. 그러면 간수는 “왜?”하고 묻고 이 때 “1호방 115번 변소 볼 수 있습니까?”라고 대답해야 한다. 간수가 승낙하면 용변을 볼 수 있지만, 간수가 대답을 하지 않으면 그냥 참고 있어야 한다.
잠자는 시간은 저녘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였다. 내가 있던 1호 방은 길이 3미터, 너비 2미터 정도의 크기였는데 10명이 넘게 수용된 적도 있었다. 방은 좁은데 사람들은 잔뜩 밀어 넣어 잠을 자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발가락이 내입에 들어오기도 했다.
감방 안에서는 주로 ‘교정 시간’이 주어지는데, 교정이란 올방자를 틀고 앉아 손을 올려놓고 하루 종일 꼼짝 않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움직이다 간수에게 들키면 벌을 서야 하고, 재차 들키면 매를 맞아야 했다. 나는 심양 공안국에서부터 심장병 환자로 분류되어 있었지만 조금의 특혜도 없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았다.
대련에서 잡힌 사람들은 한국으로 가려는 시도를 하다가 중국 공안에 잡혀 끌려오게 되었는데 보위부에서는 그들은 독방에 넣고 조사했다. 그들의 매맞는 소리, 비명소리, 욕설소리들이 들릴 때 마다 감방안의 죄수들은 숨소리도 못 내고 벌벌 떨어야 했다.
그들에 비하면 나는 쉽게 조사를 마친 편이었다. 우선 나는 보위부에 들어가자 마자 내가 심양 공안국에서부터 가지고 갔던 물건들을 모두 간수들에게 바쳤다. 내가 갖고 있었던 물건이라고 해봐야 남자 양말 5개, 여자 속옷 2벌에 중국 돈 93원 뿐이었으나 시시때때로 압력을 가해오는 간수들의 등쌀에 못 이겨 포기하고 말았다.
보위부 조사가 끝나자 나는 12월 10일 아침 신의주 집결소로 이관되었다. 여기에서도 간수의 알몸검사가 있었다. 집결소 생활에서 가장 고역스러웠던 것은 밤마다 극성스럽게 몸에 달라붙던 ‘벼룩’을 잡는 일이었다. 신의주 집결소는 예전에 개를 키우는 곳을 개조했던 터라 밤에 잠을 청하려고 누우면 벼룩들이 얼굴에 새까맣게 달라붙어 퉁퉁 튀어 오르는 판이었다.
집결소에서의 식사는 통강냉이와 소금국이 전부였는데 알을 세면 100알도 되지 않는 통강냉이를 먹고 하루 종일 중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봄철에는 거름을 나르는 일을 시키는데 거름통(똥통) 하나가 50키로가 넘어 남자 둘이 함께 들어도 힘에 부쳤다.
거름통을 옮기느라면 발걸음을 떼기도 힘들었는데 그때마다 간수들이 온갖 욕을 퍼부었다. 두 명이 발이 맞지 않아 거름통이 출렁거리면 온몸에 똥물이 튀었다. 하루는 무산에 살던 박씨가 잘못 걷는 바람에 넘어져 온통 똥물을 뒤집어 쓴 적도 있었다.
집결소라는 것이 죄수들의 거주지 도에서 데리고 와야만 나갈 수 있는 곳이다. 자기 도에서 데리러 오지 않으면 한 달이건 두 달이건 그곳에서 일을 해야만 한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아 일주일 만에 사리원에서 나를 데리러 왔다. 사리원에 있는 누나가 내가 잡혀 왔다는 통보를 듣고 돈을 써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다.
나는 12월 23일 저녘에 신의주 역에서 기차를 타고 사리원으로 이관되었다. 7년만에 보는 조선의 모습은 너무도 서글프고 소란스러웠다. 유리 한 장 제대로 끼워져 있지 않은 채 며칠만에 운행하는 기차에는 사람과 짐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너무나 춥고 배가 고팠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자기 짐을 잃어 버렸다는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에 좀처럼 잠들 수가 없었다. 매 역마다 군인들이 창문으로 올라타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기차는 24일 새벽 6시에 사리원에 도착했다. 역 앞에 나가 보니 김치 몇 조각에 옥수수밥 한 덩이를 비닐 봉지에 넣어 50원에 팔고 있었다. 사과도 1알에 50원에 팔고 있었다. 사리원에서 나를 압송하러 온 사람이 50원짜리 옥수수 밥 한 덩이를 사줘서 급한 데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나서 걷기 시작했다. 사리원역에서부터 걸어서 사리원시 안전부에 도착하니 직일 근무를 서던 안전원이 나의 짐과 몸 검사를 하고 나를 대기실에 들여 놓았다.
황해북도 사리원에서는 탈북자라면 매우 엄중하게 처리한다. 국경과 거리가 멀기 때문에 탈북자들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증산에 있는 11호 단련대로 끌려가 그곳에 1년 6개월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사리원시 안전부에서는 식사시간에 된장국 한 국자에 강냉이밥 두 숫가락을 말아서 줬는데,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플 정도였다. 내가 사리원시 안전부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받고 해주에 사는 누나가 음식을 장만해서 나를 찾아왔다.
누나는 고양이 담배 2곽을 담당 안전원에게 바쳐서 겨우 나를 면회했으나 안전원의 감시 때문에 말한 마디 못하고 눈물만 짓다가 돌아갔다. 누님과는 10년만의 만남이니 할 말이 많고 많지만 조선의 법은 그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며칠 후에 누님이 다시 나를 찾아 왔는데 누님이 “경태야, 너는 증산으로 간다”라고 말해줬다. 내가 “증산이 어디냐? 거기에 무엇이 있나?”하고 물으니 “증산은 살아나오는 사람이 드물고 대부분 다 죽는 곳이란다”하고 통곡을 하는 것이었다. 대기실에 들어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평안남도 증산 11호 단련대는 풍덕리라는 곳인데 날씨가 너무도 변덕스러원 변덕리라고도 불린다고 했다. 말을 듣고 보니 소름이 오싹 끼쳤다.
2003년 2월 19일 새벽 나는 남성 죄수 9명과 여성 죄수 2명과 함께 증산단련대로 떠났다. 가는 도중 차가 자주 고장 나더니 12시간이면 도착 길을 다음날 새벽 5시경에야 도착했다. 군의소에 가서 검사를 마친 후 입소하였다.
살아 있는 송장들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한 구의 시체였다. 전날 죽은 사람들인데 ‘모든 단련대생들은 이 시체를 보고 정신을 바짝 차리라’며 그냥 놔두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첫 순간부터 이런 상황이니 내가 과연 여기서 살아 나갈 수 있을까 두려웠다.
하지만 나의 결심은 확고했다. 무조건 살아서 내 뜻을 이룰 각오를 굳게 가졌다. 이곳에서 짐승처럼 죽어갈 수 없다고 다짐했다. 마음을 잡고 나니 두려움이 한결 사라졌다.
증산단련대에서는 담임선생님이라 부르는 보안원과 경비원이 매일 우리를 직접 인솔했다. 신입반에서는 감옥에서 지켜야 할 생활준칙 교육과 명제학습이 진행되었다. 생활준칙은 1조~10조까지 있는데 무조건 복종하라는 것이었다. 명제란 위대한 수령님과 장군님의 말씀을 정리한 것을 말한다. 하루 노동을 마치고 돌아오면 학습이 시작되는데 매일마다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단련대에서는 노래와 춤이 근절이고, 말도 크게 못하며, 마음데로 웃어서도 안된다. 아침 6시에 기상하여 대충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작업장으로 나가면 저녘 10시가 되어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기상시간은 계절마다 다른데 봄과 겨울에는 6시 기상, 모내기 철에는 새벽 4시 기상, 가을에는 5시 기상이며, 취침시간은 밤 10시였다. 점심시간은 1시간이 주어졌다. 단련대에서 제일 힘든 고비는 봄철이었다.
나는 신입반 과정을 마치자 5과 2반에 배치 되었다. 3월 2일 저녘, 경비선생이 인솔하여 5과에 도착했다. 식사는 일명 단지밥이라고 하는데 직경 10센티정도 깊이 8센티정도 크기였다. 밥은 강냉이 밥인데 강냉이 송치(껍질) 채로 분쇄한 것이여서 먹기가 아주 곤란하였다.
또 돌맹이가 너무 많아 배가 아프지 않은 날이 없었다. 국은 소금국인데 썩은 시라지로 끓이다 보니 그 냄새가 얼마나 역한지 모른다. 그래도 그런 것 조차 모자라 식사 시간이면 국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죄수들끼리 싸움질이 일어난다.
증산에서는 단련대 자체를 ‘돼지목장’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돼지보다 못한 인간들이 살고 있으니 틀린 말도 아니다. 머리는 죄다 군인들 처럼 깍게 했고, 옷차림은 기워 입은 것, 째진 채로 입은 것, 가지각색이니 하나의 원숭이 무리를 방불케 한다.
3월 3일 첫 출력(출근)이 시작되었다. 첫날 작업에서 나는 살얼음이 낀 논에 들어서야 했다.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감각에 움찔하며 뛰쳐 나왔다. 그러나 이것도 잠시, 무조건 맨발로 얼음에 들어서야 하고 일해야 했다. 발은 얼다 못해 아예 감각이 없어졌다.
증산단련대에서는 정말 하루도 기를 펴고 살아볼 날이 없었다. 죄수들끼리 서로 눈치를 보고 잡고 때리는 판이었다. 말 한마디만 잘 못하여도 어느새 보안원의 귀에 들어가 ‘체조형벌’을 받는다. 툭하면 맞고 채인다.
우리반 김씨와 고씨는 너무 많이 맞아 눈이 잘 보이지 않고, 갈비뼈도 부러져 움직일 수 조차 없었지만 다음날 어김없이 일을 하러 나서야 했다. 단련대 울타리 안에서는 ‘무조건’이라는 세 글자만이 통하는 세상이었다.
내가 증산단련대에서 제일 고통스럽게 느껴졌던 것은 우선 여죄연유와 반성문을 쓰는 시간이었다. 여죄연유란 내가 숨기고 있던 죄와 다른 사람이 숨기고 있던 죄를 적어 내는 것이고, 반성문이란 내 잘못을 적어내는 것이다. 이때는 별의별 소리를 다 적어 낸다. 한번 잘 못 걸려들기만 하면 계속해서 불려다니고 고통을 겪어야 했다.
또 하나의 고통은 벼룩과의 전투였다. 저녘이면 벼륙이 얼굴에 까지 뛰어오르고 온몸에 들어가 유희를 벌인다. 힘들게 일하고 들어와 피곤하여 잠을 자려면 벼룩 때문에 잠들 수가 없었다. 벼룩뿐만이 아니다. 저녘이 되면 이도 성화를 부린다. 낮에는 보안원들에게, 밤에는 벼룩과 이에 단련을 받다 보면 하루가 몰라보게 모습이 변모되어 성성이가 되어버린다.
다음으로는 배고픔과의 전투가 있다. 이곳에서 무조건 살아 남아야 한다는 생존본능에 의해 입에 넣을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데로 주워먹는다. 배추, 무우, 강냉이, 벼, 콩, 고추, 풀…… 눈에 보이는 데로 줍는다. 그것들을 씻을 사이도 없다. 보안원들의 눈을 피해야 함으로 줍는 데로 입에 넣고 씹는다.
나는 호박, 강냉이, 감자, 벼, 콩을 날것으로 먹곤 했는데 정말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 지금 생각에도 생호박 맛은 별미였다. 뚝감자는 돼지 먹이로 심은 것인데 이것도 우리에게는 별미였다. 그러나 이런 일도 보안원들에게 들키면 찍소리도 못하고 매를 맞고 벌을 받아야 했다.
증산단련대에서는 중참을 끓여 주었는데 밑에 깔려 있는 건대기는 경비요원들의 개들에게 먼저 주고 나머지를 우리들이 먹어야 했다. 너무나 배가 고파 똥통 안에 있는 벼 알갱이를 주어먹기도 했다. 쥐도 잡아 먹고 개구리, 뱀, 미꾸라지, 깻잎, 쑥, 냉이, 콩잎, 강냉이 송치(껍질)등 닥치는 대로 먹어야 했다.
이리하여 소화능력이 없거나 운수가 나쁜 사람들은 설사를 하거나 배앓이를 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일주일 정도면 맥없이 죽어 나갔다. 되마루를 먹고 죽은 사람, 올맹이(모내기 철에 논에서 나는 풀씨)를 먹고 죽은 사람, 여기에 다 적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잘못 먹어 죽어나갔다.
거의 매일 매일 사람들이 죽어 나갔다. 우리반에서도 12명이 죽어 나갔다. 이렇게 사람들이 죽어나가면 보안원들이 자기들 맘데로 병명을 붙여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한다. 증산단련대에서 죽은 사람들은 ‘꽃동산’이라고 불리는 언덕에 묻었다.
죽은 사람의 키가 크면 발도 제대로 들여 놓지 않고 대충 흙으로 덮는다.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서도 두 다리를 못 펴는 것이 단련대의 죄수들이다. 사람의 탈을 썼다면 짐승에게도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3일이 지나도록 기다리는 기차는 출발 하지 않았다. 나는 사리원에서 평성가는 자동차를 얻어 탔다. 6000원을 내고 차를 탔는데 도중에 고장이 나는 바람에 2000원씩 더 물라고 했다. 도중에 내릴 수도 없고 해서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2천원을 더 냈다.
해가 지고 어두워지자 마침 북쪽으로 들어가는 화차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무작정 철길을 달려 달리는 기차에 올라탔다. 날이 컴컴하니 멈추는 역들이 어느 역인지 알 수가 없었다. 깜박 잠이 들었다가 화차문을 고정하는 소리를 듣고 화차에서 내려서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이름 모를 탄광지대라는 것이었다. 사람들에게 기차역을 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어보니 80리 길을 걸어야 한다고 답해줬다.
배고픔을 달래며 날이 새도록 걷다 보니 신성천 역에 도착했다. 이때가 오후 1시였다. 한참을 기다리니 평양-두만강행 열차가 도착했다. 나는 눈치를 보다가 객차 밑으로 기어들어가 뒷편에 문이 열린 것을 확인하고 열차에 올라탔다.
객차에 올라 한숨을 돌리나 싶더니 증명서 검열이 시작되었다. 나는 꼼짝없이 단속에 걸리고 말았다. 출소증명서가 아무 소용이 없는 줄 알면서도 그것을 보이며 사리원에는 집도 없고, 아내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갔으며, 몸도 허약하여 온성의 동생집에 치료 받으러 간다고 사정했다.
그러나 안전원은 끝내 나를 고원역에 내리게 하여 역에 인계하고 말았다. 고원역에서는 나에게 다시 사리원으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두만강-평양 열차 안전원에게 나를 인계했다. 안전원은 두만강-평양 열차에 나를 태웠지만 나는 눈치를 보다가 다시 뒷문으로 도망쳤다. 때마침 북쪽을 향해 출발하는 화차가 있어 이것을 잡아타고 위기를 모면했다.
화차가 도착한 곳은 풍어역이었다. 나는 풍어역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다가 다시 화차를 몰래 타고 라흥역에 도착했다. 라흥역에서 밤 10시에 신의주-청진 열차에 올라탔다. 마침 그 열차는 차표, 증명서 검열을 마친 상태라 무사히 청진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청진에서 나는 100원짜리 찰떡 1개와 10원짜리 사탕 10알로 허기진 배를 채우며 3일동안 기차를 기다리다 사리원-라진행 기차에 올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기차가 떠나자 시작된 차표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안전원은 나를 단속칸으로 데리고 갔는데, 나는 안전원에게 거짓말을 꾸며댔다. 집은 온성인데 청진 작은아버지가 사망해서 왔다가 짐을 다 잃어버렸다고 사정했다. 하지만 안전원은 나를 고무산 역에 인계하고 말았다.
나와 함께 5명이 고무산 역으로 인계됐는데, 마침 잘되려고 했는지 낮에 근무서던 안전원이 단속대상의 돈을 빼앗은 일이 제기되어 소장이 노발대발 화를 내며 그 안전원을 불러 오라고 성화였다. 다른 안전원들은 우리 같은 일반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치부를 보여주기 싫었는지 우리를 모두 역 밖으로 나가도록 했다.
역 밖으로 나오니 기차가 출발하려는지 기적 소리가 울려퍼졌다. 나는 아무 생각도 없이 무조건 달렸다. 지하통로를 거쳐 승강장에 들어서니 기차는 이미 출발하고 있었다. 이 차를 놓치면 100리길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달리는 기차의 승장기 손잡이를 잡고 죽을 힘을 다해 매달렸다. 정신을 가다듬고 객차 출입문 손잡이를 돌려보니 운 좋게도 문이 열렸다. 하지만 객차에 들어선지 5분도 되지 않아 나는 또 차표, 증명서 검열에 걸리고 말았다.
그러나 이때부터는 마음 한구석이 편안해 졌다. 단속에 걸렸어도 나를 회령에 내려 놓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 놓고 객차 바닥에 앉아 잠을 청했다. 회령역에 도착하고 나니 열차 안전원이 불같이 성을 내며 다시 한번 차에 오르면 가만 두지 않겠다며 쌍소리를 퍼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도 10여명이나 되는 사람이 안전원의 인계 절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회령역 책임자와 안전원이 인계 서류를 주고 받는 틈을 타서 나는 재빨리 뒷문으로 도망쳐 회령역을 빠져 나왔다.
회령에서 온성으로 가는 차를 얻어 타고 만 하루만에 온성까지 도착 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사리원에서 온성까지 33시간이면 들어올 길을 13일을 소모하고 나서야 도착했다. 나는 온성에 있는 여동생의 집에서 머물다가 더 이상 친척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어 6월 23일 두만강을 건넜다. 비가 오지 않아 물은 얕았다.
야심한 밤에 두만강을 건너면서 나는 우리 어머니가 생각났다. 4년 전 어머니와 이모는 중국에 살고 있던 나를 만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다 물에 휩쓸려 사망했다. 어머니가 죽었던 그 길을 내가 다시 걸어간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렀다. 그리고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것인가 자문했다.
나는 지난 7년간의 중국생활의 고비마다 고마운 한국분들을 만나 생명도 담보 받고 인간으로서의 기쁨도 느꼈다. 배불리 먹는 기쁨도 느끼고, 일한 만큼 돈이 차려지는 기쁨도 느끼고, 내가 번 돈으로 부모와 동생들에게 먹을 것을 차려주는 기쁨도 맛보았다. 지금까지 조선땅에서는 단 한번도 누려보지 못한 행복이었다.
그리고 나는 조국을 반역한 죄 값으로 개, 돼지 만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도 다 느꼈다. 숱하게 굶고, 얻어 맞고, 쌍소리를 듣고, 달리고, 걸었다. 이것은 나만이 겪는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지금 조선땅에서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이 매일 겪는 일들이다.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불쌍한 조선 백성들을 이야기를 전 하기 위해 이 글을 썼다. 인류의 물질 수준과 문화가 나날이 발전하고 있는 현 시대에 어째서 유독 조선 사람들만 한 평생 헐벗고 굶주리는 고통을 당해야 하는가? 백성들이 못나서 이렇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고통은 모두 자신과 일가족의 부귀영화만을 위해 인민들을 옭아매고 탄압하는 김정일 유일체제가 빚은 결과이다.
나를 살려준 한국 선생님으로부터 한국에서 조선사람들의 인권을 위하는 국제행사가 열린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세계의 지도자들과 훌륭하신 분들이 조선사람들의 인권을 위해 발벗고 나서 주신다니 고맙고 또 고맙다.
한국에서 이런 국제인권행사가 있다는 사실을 좀더 일찍 알았다면 내가 더 많은 이야기와 글을 썼을 것이다. 하루에 11시간씩 명태가공 공장에 나가 일을 하고 돌아와서 밤까지 글을 쓴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이번 기회를 통해 세계인들에게 조선의 상황을 더 잘 알릴 수 있었을 텐데, 시간의 부족으로 뜻 한만큼 글을 쓰지 못한 점이 후회로 남는다.
마지막으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중국 정부의 탈북자 단속 정책이다. 나는 현시대 국제법이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중국의 탈북자 단속은 대단히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알기로는 60년대 중국에서 먹고 살기 힘들어서 중국사람들이 조선으로 넘어왔을 때, 우리 조선에서는 중국 사람들을 ‘난민’이라며 공민증을 만들어주고 배급을 주고 일자리를 주었다.
이제 반대로 우리 조선사람들이 먹고 살기 어려워 중국에 친척들의 방조를 받고 돈을 벌고 있다. 그런데 중국은 파렴치 하게도 조선사람들을 붙잡아 강제로 압송한다. 강도질을 하고 남의 물건을 빼앗는 조선사람들을 붙잡아 가고 처벌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땅에서 중국의 법을 존중하며 먹고 살기위해 성실히 일하는 조선사람들까지 죄다 색출하는 행위에 대해 규탄하는 것이다. 탈북자들이 송환되면 어떻게 처벌 받는지도 잘 알면서 모른 척 하고 붙잡아 넘겨 준다. 이제라도 중국 정부는 지난 날의 오류를 인정하고 탈북자들에 대한 단속과 강제 송환을 중단해야 한다.
내가 남들보다 더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해서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다. 나는 증산단련대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결국 살아서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숱한 사람들의 죽음을 목격했고, 내 손으로 땅을 파서 묻은 사람도 여럿이다.
나는 증산단련대에서 지낸 2년 동안 반드시 살아나가서 전세계 사람들에게 죽어간 북조선 백성들의 이야기를 계속 전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들이 굶어서 죽고, 폭행 당해서 죽고, 질병으로 죽어갔던 이야기를 세계에 알려내고 싶었다.
조선에서는 구경도 할 수 없는 좋은 질량의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조선 백성들의 사연을 적자니 눈물을 참을 수가 없다. 나는 죽는 날까지 만나는 사람에게 모두 조선 백성들의 현실을 이야기 할 것이다. 한국과 전세계의 양심 있는 모든 사람들이 조선 백성들을 도와줄 것이라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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