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세미나] 나를 버린 조국
  • 북민위
  • 2023-08-01 05:0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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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탈북 동기는 배고픔도 아니였고 못 살아서도 아닙니다. 2만여 명 탈북자들이 각각의 가슴아픈 사연들이 있지만 저에게도 억울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내가 아닌 조국이 나를 버린 것입니다. 
식량사정이 어려운 북한실정에서 더 잘 먹고 더 잘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치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을 때, 어느 날 군 보위부장이 보위부로 오라는 호출을 받고 찾아갔습니다.
보위부장방에 들어서니 처음에 하는 말이 당신은 어렸을 때부터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배려와 사랑을 듬뿍 받고 대학에 가서도 김일성장학금으로 공부했고 오늘까지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신임과 배려를 많이 받지 않았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세뇌교육으로 머리에는 온통 김일성에 대한 충성심만 가득 차오르던 때라 안 그렇다고 하면 안 되고 해서 무작정 그렇다고 답변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종이를 한 장 내 놓으며 읽어보고 수표(싸인)를 하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이에 적힌 글들은 역시 보위부장이 한 말과 똑 같은 내용이었고 마감에 이 종이에 적은 글들과 보위부에서 들은 말들과 앞으로 지시하는 내용에 대한 것들을 비밀로 하여야 하니 구체적으로 읽어보고 잘 알고 사인을 하라는 내용들이 더 포함 되었습니다.
더 무서운 글은 만약에 여기에 적힌 종목들에 대한 비밀이 새 나가면 정치범수용소로 가야한다는 내용 이였습니다. 가족 남편, 친척 친구 누구에게도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읽어보고 그대로 하겠다고 사인하고 밖으로 나오니 도살장에 들어갔다 나온 소보다 몸이 더 오싹 해지고 머릿속에는 어떻게 하나 종이에 적힌 규정들을 어기지 말아야 하고 시키는 대로 무조건 잘해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꽉 차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충섬심이 불타올랐습니다.
며칠 뒤 담당보위부 지도원 정 아무개가 불러서 갔더니 이제부터 자기 지시를 잘 따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중강에는 중국 임강현 맞은 켠 도시로서 탈북자들이 북송 되여 안전부나 보위부로 많이 잡혀서 나오곤 하였습니다.
처음 내린 지시는 탈북자 할머니 한 분을 감시하는 일이였습니다.
할머니는 1996년 고난의행군 때 살기가 너무 힘들어져서 탈북했다가 아들딸을 중국에 두고 혼자서 북송된 것입니다.
67세 나이로 이빨이 하나도 없었고 남편은 자강도 어느 리 병원 진료소장을 하다가 간첩으로 처형당하고 혼자가 된 노인이였습니다. 그러니 혼자 몸으로 아들딸 같이 살다가 너무 생활이 어려워 중국 친척집에 갔다가 옆의 조선족들의 고발로 북송 당한 것입니다.
보위부에서는 이 할머니를 집으로 안 보내고 그냥 중강에서 제 옆에서 일부러 일시키고 심부름 시키면서 속내를 뽑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보위원이 “중국이 여기보다 더 잘 사는가? 나도 중국에 갈 수 있는가? 아들딸은 어디에 살고 있는가?” 이런 생활적인 질문에서부터 마감에는 “중국 가서 남조선방송을 들어보았는가? 방송 내용들은 재미있던가? 한국사람 만나 본 적 있는가? 성경책을 구경해 보았고 교회로 간 적이 있는가? 남조선이 우리보다 더 잘 사는 것 같은가?” 등을 물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정말로 수령과 당의 배려에 충성으로 보답한다고 열심히 잘 하였습니다. 꼭꼭 보고하고 알아내고…….
그러다가 차츰 차츰 나의 행동을 돌이켜보니 보위부에서 시키는 대로 물어보고 들은 소리를 고발하다보니 내가 너무 하는 것 같았고 사람이 할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수하고 고지식한 한 여인에게 정치적 감투를 뒤집어 씌우려고 보위부 밀정 짓 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 보였습니다.
한국에 와서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혼자서 쓴 웃음이 나오고 아직도 그 짓거리들을 하는 북한 보위부가 생존한다고 생각하니 증오스럽고 죽도록 미워납니다.
하루는 할머니가 아프다기에 왜 아프냐고 물으니 아들과 딸이 보고프다 못해 가슴이 아파나더니 온 몸이 쑤셔나고 먹지도 못 하겠고 맥이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그 날 보위원이 시킨 말은 중국에서 한국방송 “북조선 노동당원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내용을 들었다는데 어떤 내용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미음을 쑤어가지고 가서 입에 더 넣어 드리고 나서 약간은 기운이 난다기에 시키는 대로 물어 보았는데 대답을 통 안 하십니다.
더 물어도 못보고 그냥 돌아왔더니 고등농업학교 실습 사과나무 밭으로 오라고 하여 갔더니 정 아무개 보위원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짜고짜 발길질 하고 왼쪽 뺨을 한 대 후려갈기더니 왜 시키는 대로 그 노친네 속 내막을 못 빼오냐고 합니다.
제가 그 할머니가 너무 아파해서 두 번 다시 못 물어 보았다고 하자 또 발길질 몇 번 하더니 누구에게도 자기가 때렸다는 말도 하지 말고 이번일이 새나갈 경우 가만 두지 않겠다고 위협을 합니다.
그렇게 남편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몰래 혼자서 임무를 제대로 수행 못한 나를 책망하면서 속으로 운적이 몇 번인지 모릅니다.
하루는 그 할머니한테 위험이 닥쳐왔습니다.
보위부에서 하는 말이 이제는 그만한 증거면 얼마든지 처리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북한에서의 처리란 정치범 수용소로 보내거나 민족반역자로서 처형하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저의 마음은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고 어떻게 하면 좋을까 생각도 많이 해 보았습니다.
그러면 5월 어느 날 보위부에서 중국 어디에 아들과 딸이 있는지 알아내라고 마지막 임무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할머니를 처리하려면 아들과 딸도 중국공안과 협조해서 북한으로 데려와야 하기 때문이였다고 생각됩니다.
순간 저의 머릿속에는 내가 너무 어리석었고 이제라도 할머니를 탈출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중국에 밥 빌어먹으러 갔다가 재수가 없게 붙잡혀 북송 되였다는 것 밖에 없는데 보위부라는 어마어마한 권력 안에서 민족반역자라는 감투를 뒤집어쓰고 한 인간이 매장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니 소름끼치도록 무서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는 그 할머니를 나한테로 부터 탈출시키고 중강땅을 벗어나 북한을 탈출해서 자식들이 있는 중국으로 가게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보위부에서는 그 할머니를 다그치며 내가 한 말들을 다시 확인해 보았는데 절반은 전달도 안 하고 절반은 거짓말 보고하고 보고내용과 들은 내용이 맞지 않은 것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같이 일하는 아줌마에 임무를 주어 나를 감시하도록 하였습니다.
어쩐지 불안하고 말하고 싶지 않고 그냥 서먹서먹 시간을 보내던 중에 3일 뒤 그 할머니가 안 보이기에 물었더니 어제 밤에 도망을 쳤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너무 무서웠습니다. 나 때문에 도망을 했고 내가 보위부 지시대로 안 움직이었기에 눈치 채고 달아난 것입니다.
며칠 동안 숙박검열과 인근 동네까지 뒤져도 못 찾았습니다.
나에게 붙인 감시는 내가 아침 사회활동을 시작 할 때부터입니다.
나도 위험을 피하려면 도망을 쳐야하는데 새벽시간이 되여야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할 수 없이 남편보고 자종지총 다 말하였는데 남편에게도 감시가 붙은 것입니다. 남편의 제일 친한 친구를 감시로 붙여 놓았다는 것입니다.
북한이라는 지옥나라는 부부지간에도 말 못하는 비밀과 서로 감시하고 감시를 당하고 서로가 의심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인 것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이런 나라가 또 있습니까? 과연 사람이 살 곳입니까?
우리 부부가 감시에서 벗어나려면 당에서 하라는 대로 하고 당에 죽도록 충실해야 하고 당의 신임을 다시 회복하려면 죽기 살기로 아첨하고 뇌물작전을 하고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까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의 대학친구로부터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나 때문에 아마 정치범 수용소로 가야할 것 같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순간 나의 머릿속에는 내가 조국을 배신한 것이 아니라 조국이 나를 배신하고 버린다는 생각에 더는 충성 할 필요도 더는 이 나라에서 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배고파 탈북 했다가 북송된 힘없는 한 이름 없는 할머니한테 진 빚만 해도 죽을 때까지 못 갚을 정도인데 이 무슨 청천벽력입니까.
생각만 해도 무시무시한 정치범수용소로 내가 왜 가야하는가? 내가 도대체 그만한 죄를 지었는가고 반성해 볼 때 죄란 이름 앞에 죄 지은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렁이도 밝으면 꿈틀 댄다고 여태껏 자기들이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다 했을 뿐이고 아픈 할머니를 보위부 감시망에서 도망치게 한 죄 아닌 죄밖에 없는데 내가 왜 정치범수용소로 가야하는지를 그 때는 잘 몰랐습니다. 그냥 괘씸하고 그냥 열 받고 그냥 그 땅에서 못 살겠다는 생각만 들었습니다.
그리하여 남편과 약속하고 먼저 약초 캐러간다고 하고는 새벽 4시에 산속에 들어가 숨고 오전 9시에 남편이 약초를 캐서 양강도 혜산에 가서 팔고 오면 보름이 걸릴 것이라 엄마한테 거짓말하고는 식량과 엄마가 구워준 두부반찬을 배낭에 넣어가지고 산으로 올라왔습니다.
이제부터 진짜 탈북이였습니다.
이 때는 그냥 목숨을 건지기 위한 단순한 고향 탈북이였습니다.
낮에 숲속에 숨어 있다가 어슬녘에 오수덕에 가면서 보위부한테 잡힐까봐 남편과의 거리는 항상 100m 사이에 두고 길옆으로만 걸었고 혹시 아는 사람들이 얼굴을 알아볼까봐 땅만 보고 머리 숙여 걸었고 낮에 걸을 때에는 남들이 한 번도 걷지 않은 생소한 자갈밭과 숲속으로만 걸었습니다. 돈 있어도 눈앞에 기차를 보고도 탈 궁리를 못하고 그냥 밖에서 자고 먹으며 혜산까지 일주일 넘게 도보로 걷기만 하였습니다.
중강에서 혜산까지 걷다보면 국경경비초소가 3개가 있습니다.
처음 초소는 다리위에 있어서 아래모퉁이 강을 넘어서 길 위에 올라서 걸어서 통과 되였고 둘째 초소는 양강도 신파 쪽인데 맞은편이 압록강이라 산 귀퉁이에서 불숙 튕겨 나오는 국경 경비군인과 마주하였습니다.
너무나 당황스러워 집으로 간다고 하니 집이 어데인가 묻기에 함흥인데 엄마가 갑자기 사망해서 증명서를 못하고 가는 길이라고 거짓말을 했더니 그 군인이 하는 말이 “우리 집이 성천구역 통남동인데 편지를 전해 줄 수 없냐?”고 하기에 나는 너무 반가운 김에 전해주겠다고 하자 몇 자 적은 종이를 접어서 주는 것을 가지고 벗어나니 온 몸에 식은땀이 쭉 났습니다.
그냥 숲속에 농사하는 막에 가서 배낭안 쌀로 밥을 지어달라고 해서 먹고 그냥 걷고 또 걷고 마감초소는 양강도 혜산시 광문초소였습니다.
도와줄 사람도 없고 앞에는 군대들이 짐을 뒤지고 호루라기 불어대고 가관이 아니었습니다.
할 수 없이 땔 것이 없어서 나무뿌리를 파 가는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 구루마(손수레) 뒤에 붙어 섰습니다.
좀 밀어주겠다고 말하고 양 옆 모서리를 잡고 머리를 앞으로 수그리고 초소 앞을 지났습니다.
초소를 벗어나서 몇 걸음 걸었을까 갑자기 뒤에서 “서라!” 하는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저와 남편한테 전지불이 비쳤습니다.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억제하고 그냥 모른 체하고 구부리고 밀었더니 아마 해진 배낭을 등에다 걸치고 힘들게 미는 모습이 불쌍해 보였는지 한참 후엔 잠잠하였습니다.
이렇게 국경초소 3개 초소를 다 거치고 혜산 시내에 들어서니 안도의 숨이 나갔습니다.
이제부터는 고향탈출이 아니라 북한 탈출, “조국배신자, 민족반역자”에 해당하는 큰 죄를 짓는 탈출이 시작된 셈입니다.
혜산에 도착해서 혜산역 앞 콩밭에 숨어 있다가 날이 밝아서 위연으로 걸어서 압록강 바라보이는 작은 떨기나무 밑에서 꼬박 2일간 물 한 모금 못 먹고 숨어 있다가 남편의 손을 잡고 압록강을 넘어서 또 다시 탈북의 긴 노정이 시작 되였습니다.
압록강에서 그냥 걸어서 만강을 지나고 쑹장허, 이도백하. 안도를 거쳐 연길에 도착했고, 연길 과학기술대학에서 일하다가 또 자유를 향한 탈출이 시작 되였습니다.
중국에서 숨어살던 어느 날 문득 자유아시아방송에서 “중국내 탈북자들은 중국을 벗어나 외국공관에 뛰어들면 한국에 올 수 있다.”는 신동철 목사님의 말을 듣고 3년간 우리를 보호해주고 잘 대해주던 연변과학기술대학을 떠나 천진, 상해, 곤명에 이르기까지의 어려운 노정은 말할 것도 없고 당시 중국에서의 샤스병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단속이 엄청 심하였기에 더욱 힘든 길이였고 어려운 길이였습니다.
곤명에서 손바닥만한 지도를 가지고 국경을 넘어 라오스 멍시에 도착하였지만 지갑을 그만 분실하였습니다. 돈 한 푼도 없어서 메콩강 물을 음료수로 마시고 갈대를 밥으로 삼아 씹어 삼키며 칡 줄기를 반찬으로 씹으며 라오스 국경까지 걸어오던 그 힘든 과정을 생각하면 한국 정착에서의 어려움도 두려움도 하나도 없습니다.
중국국경을 넘어서 라오스 군대에게 2번이나 잡혀 죽을둥살둥 도망쳐 신발마저 다 떨어졌었고 맨발에 칡줄기를 감고 메콩강 옆을 걸을 때면 열 발자국도 못 가 40도의 열대 고열에 칡줄기가 툭툭 끊어지고…….
메콩강 옆 길 아닌 길을 걸을 때면 목이 너무 말라 물소가 미역 감은 물을 마시고 나면 입안에서 모래가 버적버적 씹히고, 캄캄한 밤에 다리 밑 물이 달빛에 번들거리면 다리 밑에 기여 내려가서 물을 마시고, 그러고나면 입안에 무슨 찐득찐득한 물이끼가 씹혀서 아침에 보면 썩은 물 웅덩이였습니다.
비 오는 날에는 나무 잎에 입을 대고 한 방울 한 방울 받아먹고, 논두렁길 옆을 지날 때 논에 고인 물을 마시면 화학비료 냄새가 물씬물씬 나고…….
라오스 사람들에게서 거지라고 손가락질 받으며 걷던 그 힘든 길은 내 인생에서 가징 최악의 길이었고 아마 죽어서도 잊지 못할 영원한 추억으로 남을 겁니다.
17일간의 긴 노정을 걸어서 태국 국경도시인 라오스 후이산에 도착하니 도움 받을 곳도 주는 사람도 없어서 고기 잡는 배를 노도 없이 훔쳐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서 메콩강을 건너던 때를 생각하면 한국에서 나의 지금 생활은 너무나도 행복한 생활입니다.
남들은 몇 백만 원 돈을 주고 브로커의 도움으로 편히 왔지만 북한 중강에서 혜산, 중국 장백에서 쑹장허, 이도백화, 안도, 화룡, 연길, 연길에서 3년 일하고 조선족들의 고발이 무서워 또다시 천진, 상해. 곤명을 거쳐서 라오스, 태국으로 3만 리가 넘는 길을 내내 차 한번 못 타고 걷다보니 아직도 발바닥에는 역사의 굳은살이 배여서 한 달에 한 두 번씩 깎아내야 합니다.
너무나 힘들고 너무나 어렵고 너무나 배고프고 너무나 무시와 냉대를 받으며 찾아온 대한의 품이어서 나서 자란 북한보다 더 소중한 마음속의 조국이 되어버렸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한국에서의 성공적인 정착은 내 나름대로 내가 마음먹고 열심히 배우고 열심히 살기에 있다는 진리를 가지고 힘과 지혜, 노력을 다 하였습니다.
대한의 품에 안겼어도 항상 그 때 그 힘들게 어렵게 오던 길을 생각하면서 오늘의 배부름과 물 한 모금 마시는 것에도 만족하면서 모든 일에서 더 열정을 다 하며 살았습니다.
아직까지 대한민국에서 크게 성공한 삶은 아니라고 해도 성공해서 잘 정착하는 것에 자신감을 가지는 건 한국사회를 알고 북한에서의 모든 학력, 경력을 다 잊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한다는 초심의 마음을 간직하고 탈북 당시 가졌던 용기와 꿈, 희망을 잃지 않고 늘 열심히 살아온데 있다고 봅니다.
저의 탈북 행로는 아직 멀고도 멀었습니다. 한국에 왔다고 나의 어렵고 긴 탈북노정은 끝난 것은 아닙니다.
탈북의 색깔이 빨간색 이였고 과정은 검은색이 되였더라도 이제 마지막 남은 탈북 색갈을 투명하고 맑게 하기에는 너무나 해할 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수많은 아리랑 고개를 노래를 부르며 여기까지 왔지만 아직도 더 헤치고 넘어야 할 산들이 더 많기에 더 많은 아리랑 노래 부르며 가야하기에 성공적인 정착이 완성되는 날에야 저의 긴 탈북노정은 맑게 끝이 나는 걸로 생각합니다.
북한에서의 폐쇄적인 낡은 생각을 버리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성실함과 인내심으로 성공적인 한국사회 정착을 한다면 통일조국의 귀중한 사람으로 준비하는데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앞으로 더 열심히 더 노력하며 살 겁니다.
지금 국내외 정세는 우리들에게 고향으로 빨리 돌아 갈 수 있게 급변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정착을 잘하여 고향으로 돌아 갈 때에는 너도 나도 모두가 성공한 사람들이 되어 돌아 갈수 있게, 그리고 북한에 두고 온 모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더욱 열심히 분발해야 합니다.
통일이 되면 우리들이 직접 체험한 경험들을 북한에 있는 가족들과 이웃들에게 전파하여 고향을 두고 올 때의 아픈 마음을 간직한 보람을 느끼는 우리들이 되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2011년 5월 전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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