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무죄(3) - 김광일
- 관리자
- 2010-06-07 15:06:18
- 조회수 : 2,391
교화소
1. 신입반
버스대기소에서 오래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자 계호책임자가 미리 연락을 받아 아들이 떠난다는 것을 알고 아침에 대기소에 음식을 들고 와서 기다리던 대성이 어머니와 무슨 말인가를 주고받더니 5호관리소 금광차를 타고가게 됐다. 그의 아버지가 금광 기사장이다.
차를 탈 때 그의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잡고 귓속말로 “다 해놓았으니 근심 말라.” 한다.
차로 한 시간 넘게 달려서 교화소 근처 마을에 내려 점심을 먹은 다음 계호책임자가 여기까지 따라온 수감자 아내들에게 더 따라갈 수 없다고 말하니 서로 손을 잡고 눈물이 글썽해진다.
“앓지마시오…….”
“응…….”
“내 어떻게 하나 한 달에 한 번씩 면회 오겠습니다.”
“응…….”
그들은 피동으로서 교화소라고 해도 형기가 6개월밖엔 안되지만 정작 갈라져 감옥에 들어갈 순간이 되니 이별이 가슴이 저려 와서인지 울먹인다.
“광일인 어쩌게?…….”
그들의 이별을 바라보는 나에게 계호책임자가 말한다. 가족 친척이 없는 내가 어찌 살아나오겠는가 하는 동정이었다.
“운명이지요. 내 살아 나갈 것입니다.”
“그래 꼭 살아오라.”
오직 어떻게 하나 살아 나와야 한다는 각오였다.
우중충 높은 담벼락과 커다란 교화소 철문이 점점 다가왔다.
우리를 호송한 계호들은 접수에 서류를 넘겨주고 영수증을 받아 쥔다.
여기까지로 회령보안서의 일은 끝났다.
이제부터는 우리를 교화소에서 관리한다.
접수문이 열리고 한 보안원이 나오더니 우리를 시답지 않게 흩어본다.
“야 줄 맞춰 걸어라.”
커다란 철문 앞에 다섯 명은 일렬로 섰다.
“이 개새끼들아 대갈까.”
교화소라는 독재기관의 중압감에 잔뜩 주눅이 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엉거주춤해 서있는 우리들에게 20살이 될까 말까 한 앳된 초병이 앙칼진 소리를 지른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드릉드릉 하고 육중한 철문이 열리였다.
“들가라.”
쿵……. 철문이 닫히는 소리에 자신을 의식하며 머리를 든 내 눈앞에는 처참한 현실이 펼쳐졌다. 너무 여위여서 광대뼈가 툭 불거지고 눈이 흰자위만 번득 거리는 죄수들이 다 떨어져 너덜너덜한 넝마 같은 옷을 걸치고 나무로 만든 통에 진똥을 담아 메여 나르기도 하고 모여 쭈그리고들 앉아 무엇인가 하는 모습이 꼭 구더기들이 우글거리는 것 같았다.
“도주는 자멸이 길이다. 절대로 도주행위를 하지 말라!”는 위협적인 글이 쓰여 있는 현수판 밑을 지나 ‘사’로 향하는데(교화소에서는 수용자들이 생활하는 감방들이 있는 곳을 ‘사’라고 한다.) 대여섯 명이 커다란 손달구지에 발들이 비죽 비죽 엇갈려 나와 있는 시체 몇 구를 실어가지고 어디론가 간다.
교화소에 들어서자마자 죽어난 시체부터 보게 된 우리는 아차 하다간 저 신세 되겠구나 하는 소름끼치는 전율을 느끼는데 수용자들은 무심한 눈길이다.
“수용자 출입금지!” 라고 써놓은 곳에서 교화소 군의들이 우리들을 신체검사 했다. 신체검사라고 해야 돌아 세워 엉치(엉덩이)에 살이 있으면 건강한 것으로 되는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다.
결핵검진도 했는데 렌트켄 촬영이라는 것이 렌트켄 1세대 설비를 가지고 하는 것으로 다 죽게 된 환자가 아니고는 잘 나타나지 않는 실정이다.
남호철이 폐결핵으로 법의학적으로 인정된 사회보장대상인데 보안원들이 몇 번 기웃거리고는 일없다고 한다. 북한의 교화소도 정 용납할 수 없는 중죄가 아닌 이상 결핵 간염은 입소를 못시키게 되어 있어 남호철이는 결핵으로 퇴출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가 아니고 생각밖에 김대성이 누구인가 묻는다.
대성이 나서니 세 명의 군의들이 그를 흩어보며 저들끼리 뭐라고 쑥덕거리고는 다른 사람을 시켜 데려갔다. 후에 들으니 결핵으로 병보석방이라고 했다. 떠날 때 “다 해났으니 근심 말라.”고 한 말의 속내를 알만했다.
5호관리소라는 것이 노동당 자금 마련하는 기관인데 거기에서 그의 아버지가 기사장으로 있는 금광이 큰 비중을 차지하며 이것으로 해서 이곳 간부들은 당 기관 권력기관들과 일정한 인맥이 이어져 있는데 그 줄을 이용하여 아들을 석방 시킨 것이다. 또 그 시기 교화소에서도 그곳에서 광맥을 빌려 금을 채취하려고 한 것도 변수였을 것 같다.
신체검사가 끝나고 한 사람을 부르더니 우리를 데려가게 했다. 그가 우리를 자그마한 창고 같은 곳으로 데리고 들어가더니 옷을 다 벗으라고 한다. 그리고는 옷깃과 호주머니를 다 뜯어내고는 샅샅이 들추어본다.
“야, 내 신입반장이다. 뭐이 없어?”
“……."
후에 생각하니 담배같은 것이 없을 가하고 들추고 물어본 것이었다.
옷을 입으라 하고는 사로 들어가 제일 끝에 있는 ‘ㄱ’ 라고 쓰인 명판이 붙어 있은 감방을 열고 들여보낸다. 여기가 교화소에 입소한 자들을 한달 여에 걸쳐 파악하고 교육을 주어 과별로 보내는 신입반이란다.
20평이 될 만한 감방에 60명이 넘게 있었는데 벽을 향해 돌아앉아 벽면에 걸어놓은 교화소 ‘생활준칙’과 ‘인민보안원에 대한 예절’을 학습하고 있었다.
감방에 들어서자 악취가 폐를 꾹 내려 누르는 것이 구류장하고 또 다른 무겁고 짙은 매캐한 악취다. 몇 십 년이 지나도록 너무도 불결한 청결상태에서 똥에 푹 절은 악취였다.
신발을 신장에 넣으라 해서 변소 관리자라고 하는 ‘곰’이를 따라가니 구류장과 마찬가지로 변소가 감방에 잇달려 있는데 그 안에 널판자로 칸을 만들어 놓은 것이 신장이라고 한다.
변소관리자라는 ‘곰’이가 주의를 주는 것이 교화소에서는 변소에 혼자 마음대로 들어갈 수 없으며 자기에게 보고하고 혼자일 적에는 자기와 같이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이 변소출입규제는 자살과 도주를 막기 위한 조치였는데 신입반에서는 변소관리자도 ‘티’라고 반장한테 잘 보인자들이 했고 그는 국물이라도 더 얻어먹는다. ‘티’라는 것은 수용자들내에서 완력과 술수로 목소리가 좀 높은 자들로서 교묘하게 교화소 규정들을 악용하여 다른 수용자들을 핍박하여서는 자기생활 공간을 편리하게 가진다.
대개가 ‘이용자’들이라고 말 그대로 수용자들 관리에 이용하기 위하여 반들에 있는 반장, 조장, 계산공, 감시들과 오랜 죄수들이 ‘티’인데 수용자관리를 쉽게 하려는 내심에서 그들의 범칙 같은 것은 선생들도(구류장이나 교화소에서는 보안원을 죄수들은 선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어느 정도 눈감아 주기에 이 ‘티’들이 전횡이 도를 넘어 살인까지도 난다.
신입반에서는 10개조로 되어 있는 ‘생활준칙’과 6조에 따르는 ‘인민보안원에 대한 예절’을 토 한자 틀리지 않게 암송하여야 하며 여기에서 교화과와 보안과 담화를 하고 ‘ㄴ’감방으로 넘어가서 생산과 담화를 하고는 각 과로 배치 되어 간다.
구류장과 똑같이 정좌하고 앉아 학습하는데 좀 나은 것이 감방 안에서는 죄수들끼리라 약간의 움직임이 있고 또 구류장처럼의 강도 높은 교정이 실시되지는 않았다.
저녁 급식시간이 되니 60여명이 서로 마주앉아 두 줄, 여섯 줄로 늘어앉아 감방문에 달려있는 배식구라고 손이 드나들게 되어있는 구멍으로 들어오는 밥을 넘겨서 받는다.
시커먼 수지 식기에 한 덩이 담겨온 밥을 받아 쥐기 바쁘게 “야 그릇 내려라.”하고 소리친다. 얼떨결에 보니 다른 수용자들은 밥을 받아 조그마한 비닐에 놓고는 그릇은 도로 내보낸다. 비닐조차도 없는 내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이 새끼 손에다 쥐고 그릇 내보내라.”하고 재차 다그쳐 소리친다.
어쩔 수 없이 손에다 밥덩이를 쥐고 있는데 다른 수용자들은 벌써 먹는다. 국이란 것이 ‘까마귀 날개’라고 양배추 떡잎이 썩어서 구멍이 숭숭하고 시꺼멓게 되어 정말 까마귀 날개 같은 것이 들어왔는데 수용자들은 건지(알맹이)는 건져서 비닐종이에 놓고 물은 훌훌 들이키고는 그릇은 또 내보낸다.
60여명에 그릇이 20여개정도 밖에 없는데 그것으로 밥과 국을 돌려가며 받아야 하니 그릇을 빨리 내보내야 하는 것이다. 대개의 수용자들은 숟가락이 없어 밥을 손에 쥔 채로 입으로 먹는다.
나도 먹으려고 손에 쥔 밥을 보았는데 밤색 나는 조그마한 밥덩이가 개먹이 같이만 보여 도무지 먹을 것 같지 않았다. 이런 우리를 힐끔힐끔 보던 다른 수용자들이 안 먹겠으면 달라고 한다. 얼른 넘겨주었다.
기막혔다. 지금이 어느 세기인데 숟가락이 없어 짐승처럼 입으로 먹여야 되고 밥그릇이 없어 손바닥에 밥을 쥐고 먹어야 하는가. 이런 곳이어서 교화소를 지옥이라고 하는가.
나와 같이 입소한 네 명은 모두가 밥을 먹지 못하고 넘겨주었다. 이때 ‘곰’이 오더니 다짜고짜 밥을 넘져 준 대섭이를 걷어찼다.
“야 이 새끼야 먹지 않겠으면 내려라. 누가 마음대로 남 주랬어?”
“야 이 새끼야 밥 내놔.”
하고는 대섭이 밥을 가진 수용자한테서 밥을 빼앗아 내보냈다. 다행히 우리는 건드리지 않았다.
자기가 먹지 못한 밥도 마음대로 남을 줄 수 없는 것이 교화소이라는 것을 대섭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준 것이었다.
아수라장 같은 저녁급식이 끝나면 약간의 공간이 주어지고 8시부터 학습을 한다. 학습이라는 것이 날짜별로 교화소 내 신문인 ‘새출발’, ‘교양자료’라고 수용자들의 교육을 위해 만든 교화소 책자 등을 읽어주는 것인데 학습시간에는 열을 맞추어 정좌하고 앉아있어야 하며 ‘생활준칙’을 학습하는 날에는 큰소리로 외워야 한다.
60여명에게는 너무도 좁은 감방에 학습시간이라고 옷을 모두 입고 정좌하고 있느라면 서로의 몸에서는 악취에 절은 땀이 줄줄 흘러내린다.
지긋한 학습을 퍼그나 했을 때 “점검준비” 하는 잡부가 길게 뽑는 소리가 들렸다.
10분전 10시였다.
“끓어 앉아라!”
수용자들은 여덜 줄로 맞추어 앞을 향해 끊어 앉았다.
좁고 음침한 감방들에 정적이 깃들고 멀리서부터 개 짖는 소리가 들려 왔다.
‘사’를 담당하여 전문으로 당직을 서는 늙은 선생들이 잡부 두 명을 데리고 맨 끝 감방부터 인원 점검을 해오는데 그 선생이 감방창구 옆에 다가오면 반장들이 “번호”하고 지시한다. 그러면 맨 앞의 수용자부터 마지막 수용자까지 번호를 이어 부르는데 그 소리가 멀리서부터 울려오는 것이 신통히 개 짖는 소리 같았다.
맨 마지막 번호를 이어 부른 반장이 “ㅇ반 00명 다 있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대기 잘 서라.” 하고는 다른 감방으로 넘어간다.
한참 후에 “찌르릉” 하고 취침 벨소리가 울린다.
“대기 누구야?”
“ㅇ조 누구누구” 하면서 8명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1대기 누구 누구, 2대기 누구 누구” 이런 식으로 4대기까지 정하여 주고 대기를 잘 서라고 강조한다.
“잠 잘 준비”
수용자들은 밥 먹을 때처럼 서로 마주앉는다. 이 마주앉은 자리가 자신의 밥 먹는 자리이며 자기 자리이며 잠자리로서 선생들이 지정해 주게 되었는데 신입반에서만은 수시로 새 수용자가 들어오고 나가고 하니 반장이 자의로 정한다.
“자라.”
서로의 머리 쪽에 발이 가게 ‘톱날’잠을 자야한다. 원래는 800명을 수용하게 되어있는 교화소에 북한에 ‘고난의 행군’이라는 대 아사의 시기가 생기면서부터 생계형 범죄자가 많아져 2400명 넘게 수용하다나니 감방들이 너무 비좁게 되여 잠을 잘 적에 ‘톱날’로 자야한다. 나는 교화생활 2년 5개월 동안 언제나 ‘톱날’잠을 잦다.
대기들은 한조가 2시간씩 한명은 서고 한명은 앉고 하여 서로 교대하여 잠자는 수용자들의 동향을 살피는 것이 임무다.
교화소는 밤에 잘 적에 전등을 끄지 못한다. 북한의 긴박한 전력사정에도 교화소는 좀처럼 정전을 못 시킨다. 불이 꺼지면 고역스러운 징역생활에 악만 살아 있는 수용자들 속에서는 서로의 맺힌 한과 운명에 대한 절망감으로 하여 살인을 하거나 자살하는 사건들이 발생할 수 있기에 항시적으로 전등을 켜놓고 대기를 서는 것이다.
자유를 억누르는 무거운 정적 속에 곤욕스러운 하루를 보맨 수용자들이 서로 밀착되고 엉키면서 지옥의 밤 나락에 들어선다.
“야 오라.”
신입반장이 이야기를 잘하는 어느 수용자를 부른다.
“이야기해라.”
“이젠 정말 할 게 없습니다.”
“해라!”
“아 정말 생각나는 것이 없습니다.” 벌써 하도 많은 이야기를 해서 이야기 밑천이 없는 것 같았다.
“생각날게다. 해라. 그리고 너 다리 주물러라.”
신입반장이 자기 잠자리를 따로 판자로 만들어 놓은 ‘강대’에 드러누우며 한 수용자에게는 이야기를 시키고 다른 어린 수용자에게는 다리를 주무르게 한다. 교화소에서는 선생들이 수용자관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반장들에게 수용자들을 규제할 수 있는 일정한 환경과 조건을 지어주기에 이들은 교묘한 방법으로 이 공간을 활용하여 감방안의 수용자들을 자기한테 복종시키며 감방안에서 제왕 같이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대개의 신입자들은 교화생활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으니 이자들의 전횡을 의례적인 일로 감수하며 무반항적으로 당하기만 한다. 간혹 ‘꽈배기’라고 재범자들과 좀스럽게 꾀 많은 자들은 반장의 밑구멍까지도 빨 정도로 너절하게 아부하여 밥덩이나 국물을 얻어먹으며 육신을 보존하려고 한다.
이야기를 하게 된 수용자는 무엇인가를 짜내여 간신히 이야기를 하고 다리를 주무르는 자는 그가 잠들 때까지 주물러 주어야 한다.
죄수를 교화한다는 교화소에서 같은 죄수가 다른 죄수를 옛날의 머슴이나 종처럼 부리는 범칙행위가 은연중 만연되고 묵인되고 있는 이 상황에서 과연 그들이 교화되겠는가?
내가 보고 지낸 경험에는 이런 자들이 교화소에서 10년을 살았다 고해도 결코 개준 되지 않으며 더욱 노련한 범죄자가 되어간다.
찌르릉…….
길기만 했으면 하는 지옥의 밤이 너무도 짧은 것 같이 지나고 기상을 알린다.
수용자들은 일어나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 숙이고 아침점검 준비를 한다.
당직 사선생이 매 감방마다를 돌며 점검한다. 또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 점검이 끝나면 대기들이 대기 보고를 한다.
“1대기 누가 변소 가고 누구 설사하고 누구 물먹고…….” 이렇게 4대기까지 보고하고 이상이 없으면 정돈하고 설사한 수용자는 왜 설사했는가를 따지고 아침에 국을 주지 말라고 한다. 국물 한 그릇도 마음 상 큰 도움인데 수용자는 울상이 된다.
아침에는 교화반별로 순번제로 세수를 시킨다. 4평이 될 만한 찌들은 때가 껴서 시커먼 세면장에 2입방미터 정도의 물을 담을 수 있는 욕탕 속에 고여 썩은 것 같은 물이 밑바닥에 조금 있는 곳에 들어가 세면한다는 것이 '티'가 아닌 이상 얼굴에 물을 댓다떼거나 넝마쪽 같은 수건에 물을 묻혀 나와 닦기만 해도 잘한 것이다. 그런 욕탕마저도 1과에서는 20여개의 감방의 천 여명의 수용자들이 이용하자니 제대로 된 세수를 하는 수용자들이 없다.
“면식 나오라.”
그 혼잡 속에 면식 잡부가 감방 앞을 돌며 소리치면 감방들에서 가족들이 면회와서 펑펑이가루를 가져 온 것이 있는 면회자들은 숟가락을 들고 복도에 나와 인원을 세고는 면식장으로 간다.
면식양은 과별로 다르지만 1과는 500g씩 나무그릇에 퍼주면 도람통의 물을 퍼서 숟가락으로 부비부비 하여서는 채 되지 않은 떡을 입에 마구 쓸어 넣는다.
500g이라고 하지만 이것이 뜯어내기도 해서 제대로 된 계량이 아니라 400g정도 되면 잘된다. 그래도 이것을 먹고 나면 배가 든든해진다.
나도 신입반 때 어머니가 면회와서 면식장에 10일 나가보았다. 어머니가 면회 왔을 적에는 나는 마음의 정리를 하고 차분할 때이지만 정작 죄수가 되어 교화소에 있는 나를 본 어머니는 구류장하고는 또 다른 환경에 풀썩 주저앉으며 눈물을 줄줄 흘리셨다.
“엄마 울지 마오. 그리구 오지 마오. 내 꼭 살아서 나가니 정 다니겠으면 몇 달에 한번 씩 오기싶을 때 오오.”
“이그... 자 부모 없는 아꾸마. 이그... 어찌 살겠니...” 어머니는 통할 수 없는 동정을 면회선생한테 바라며 울기만 하셨다.
“엄마 됬소. 돌아가오.”
나는 5분도 안하고 돌아서 나왔다. 더 있으면 나도 울 것 같았다. 그때 어머니가 펑펑이가루 15kg를 가져왔는데 5kg를 교화반에 공동으로 바치고 10kg를 하루에 500g씩 10일간 먹었다.
이렇게 교화소의 일과, 신입반의 일과가 시작 된다.
교화소에서는 항시적으로 여죄, 연루죄 고백을 하게 한다. 이것은 말 그대로 숨기고 있거나 다른 사람과 연루된 죄를 솔직히 고백하라는 것인데 이 제도 하에서는 반 국가음모 가담과 살인에 이르기까지의 죄가 모두 용서되며 고백한 사건이 가치에 따르는 평가가 있다. 그 평가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먹을 것을 더 주는 것인데 그 어떤 효과를 노리고 정 추악한 범죄를 고백한 자도 '탁' 자리를 하나 선사하는 쇼를 연출하기도 한다. '탁' 자리란 잡부로서 선생들의 심부름을 하고 면식을 나누어 주는 자들로서 직접적인 생산노동에 참가하지 않으며 먹을 것은 더 먹을 수 있는 굶주림에 허덕이는 수용자들 속에서는 너무도 부러운 선망의 자리이다.
이 고백 제도를 수용자들에게 사활적으로 제일 중요한 먹을 것에 집착시켜 놓고 미미한 가치라도 있는 것을 써내면 먹을 것을 더 주고 아무도 고백한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주지 않으니 비루한자들은 밥덩이 한 개, 죽 한 그릇을 위해 친구 형제 부모까지도 고발하여 순간의 배를 채운다.
신입반 때 무산의 명철이라고 얄팍하게 생긴 수용자는 연루죄를 제출하였는데 보안과에서 몇 번 담화하더니 그는 먹을 것을 한번 배불리 먹고 교화소 내에서도 생것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농산반으로 가게 되었다. 무슨 가치 있는 내용인 가부다 했는데 후에 들으니 그가 자기 어머니가 권총 탄알 6발을 건사하고 있은 것을 말하여 그 어머니가 6년형을 받고 교화소에 갔다고 했다.
그는 비법월경으로 4년형이였는데 다음해 대사까지면 1년 만 생활하면 3년 면제 되어 나갈 수 있는 대상인데 그 1년을 못 참아서, 아니 한 끼 배를 불리려고 어머니를 잡았던 것이다. 그 어머니가 그 총알을 가지고 무슨 정치적인 목적에 활용하려고는 안 했을 것이다.
미공급시절(배급을 안 주는 시기)에는 군인들이 총알을 조금씩 빼내어 사민들을 통하여 중국사람들에게 총알 한 발당 1만원씩 파는 일들이 있었다. 돈 외에 그 어떤 다른 목적은 없었을 것이다. 하기에 교화 6년이지 정치적인 성격이라면 온 집안이 사라졌을 것이 북한이다.
인신매매로 15년형을 받았던 반장의 다리를 주물러주던 수용자도 무산이었는데 자기 이모와 무슨 원한이 있는지 연루죄를 내놓아 그 이모가 8년형을 받고 교화소로 갔다고 했다.
이렇게 교화소는 밥 한 덩이, 죽 한 그릇에 부모 형제까지도 고발하게 하는 인간 불모지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부모형제를 고발한 자들은 거의가 다 허약에 걸려 죽어나가는 일들이 있었다. 결국은 순간의 배고픔에 혈육도 잡아 받치는 먹을 것에 대한 비루한 집착성이 그들을 허약으로 몰아갔고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 그들에게 죽음이 찾아왔던 것이다.
그 어떤 죄도 용서하는 여죄, 연루죄 고백 공간을 이용하여 범죄자들은 사회에서 털어놓지 않은 살인죄를 고백하고 용서되는 수도 있다.
사람을 8명씩이나 죽인 수용자가 있었는데 범칙으로 제재를 받을 때마다 여죄를 내놓았는데 매번 하는 여죄가 살인죄였다. 그러나 여죄로 내놓았으니 평가를 해야 하고 또 여죄를 많이 내놓는 자가 개준열의가 높은 것으로 되는 고백제도이기때문에 그 자는 만 사람이 치를 떨 살인자였지만 매번 처벌을 피해가군 했다.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범죄도 용서하기에 훗날 계산공 감시를 하던 시기에 반 담당선생에게 이런 죄도 용서하니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고 하니 선생이 하는 말이 “당을 위해서 하는 것이야.” 한다.
여죄, 연루죄 평가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무기, 폭약류라고 할 때 악착한 살인자도 용서하면서 바라는 고백제도의 진짜 의도는 인간개조가 목적이 아니고 체제전복의 사소한 싹이라도 발견하려는 것이었다.
보안과에서는 수용자들 속에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첩자를 만들어 둔다.
어느 휴식일이였는데 보안과 선생이 담화를 한다기에 불려가니 숨기고 있는 죄가 있으면 솔직히 말하라고 한다. 내가 따져봐야 더 문제될 것이 없기에 없다고 하니 후회하지 말라며 무슨 근거라도 있는 것처럼 술책을 보인다. 그냥 없다고 하자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특별한 징후를 포착 한 것이 없냐고 묻는다.
금방 입소해 실정을 잘 모르겠다고 하자 중요한 자료를 내놓으면 면식 잡부도 시킬 수 있고 구내식당도 보내 줄 수 있다고 한다. 그래도 대답할 말이 없자 가서 잘 생각해보고 필요한땐 찾으라면서 비밀이라고 했다. 아마 교화 생활 중 이런 경우를 당해본 수용자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그 때 밤에 헛소리를 자주 하는 것을 수용자 내부의 어느 배고픔에 시달린 시정배가 이상한 느낌으로 각색하여 일러 바친 것 같았는데 나한테서 나올 것이 없으니 도리어 역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ㄱ’ 방에서 20일간 있고 ‘ㄴ’ 방으로 넘어갔다. ‘ㄴ’ 방에서는 생산과 담화를 하고 칭호를 받고 각 과로 배치된다. 담화라고 해야 모두 불러내 마당에 앉혀놓고 사회에서 무슨 일을 했는가, 무슨 재간이 있는가하는 물음이다.
교화과에서는 수용자가 복역기간 불리게 될 칭호를 붙여 주는데 나는 ‘라40’이였다. 이것이 복역기간 내 이름이며 왼쪽 가슴에 흰 천 조각으로 새겨 써 붙이고 다녀야 한다.
원래 죄수들은 죄수복을 입어야 하는데 북한 교화소에는 죄수복이 없다. 국가가 너무도 경제 사정이 어렵다나니 죄수복을 만들어 공급할 형편이 못되어 수용자들은 사회에서 입던 옷을 들여다가 옷깃을 떼고 호주머니를 꿰매 입는다. 간혹 공급되는 것이 60명 교화반에 8벌 정도로 누가 찾아줄 사람이 없어 정 걸칠 것이 없는 수용자들에게 차려지는데 솜동복이라는 것이 명색뿐이라 수용자들은 여기에 사회 옷 2~3벌을 덧대어 꿰매 입고 추위를 던다.
수용자들이 죄수복이 없어 사회 옷을 입고 다녀서 사회 사람들과 구별하기 힘들면 도주위험성이 높아진다고 해서 옷을 팔다리를 뜯어서 흰색과 검은색을 서로 대조적인 색깔로 바꿔 꿰매어 입게 하니 옷들이 모두 얼룩덜룩하게 되어 어디서 보아도 죄수라는 것이 쉽게 알리게 만들었다.
‘ㄴ’방에서는 오전이나 오후에 구내 작업을 나갈 때가 있는데 작업을 하게 되면 3급 밥을 먹게 된다.
교화소의 급식은 알락미쌀 10%, 옥수수쌀 60%, 콩 30% 하여 섞어 서랍에 담아 증기 가마에 넣어 쪄낸 것을 김을 뽑고 삽으로 퍼서 부풀려 밥단지라는 기구로 1급부터 5급까지로 찍어낸다. 보통은 반경이 4cm, 높이가 6cm로 찍어낸 3급을 먹고 환자로 휴역하는 수용자나 신입반은 4급을 먹고 5급은 범칙을 하여 독방에 들어간 자들에게 주는 처벌 밥이다.
매 급수에 따라 삶은 콩 세운 것만큼의 높이가 올라가는데 광산착암수와 벌목일을 하는 수용자들은 1급과 2급 밥으로 다른 농간이 없다면 제법 양이 많다. 그런데 이 양이 제대로 되는 때가 없다. 콩이 들어가야 하는 감옥 밥에 콩이 없을 때가 있으며 화식조 수용자들도 조절하여 여러 가지 바꿔치기를 하다나니 밥 양이 줄어든다.
사회에서 콩 값이 다른 작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은데 과들에서는 이것을 빼돌리고 수용자들은 시켜 농사지은 자기들의 싼 팻기콩을 가져다 넣어 급식시킨다. 감자철에는 자급자족이라 하여 맨 감자만을 껍질도 안 벗기고 삶아 그대로 찍어서 주는데 이런 급식을 한 달만 하면 다 허약에 걸린다. 복역 기간에 제대로 된 급식을 받은 적이 있다면 교화국에서 검열 나왔을 적에 한두 끼였을 것이다.
‘ㄴ’방에서도 일 나간 수용자와 나가지 않은 수용자가 있어 급식 시간이면 누구는 3급, 누구는 4급하며 분간하여 급식하는데 혹시 잘못되어 바뀌어 갈 적에는 즉시 의의가 제기된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3급을 받은 자는 벌써 먹기 시작했다. 그것만큼은 대단히 민감해서 잘못 온 것임을 뻔히 알지만 모르는척하고 입을 대는 것이다. 그래도 뺏는다. 그리고 그자의 밥에서 먹은 것만큼 덜어서 준다.
수용자들은 이렇게 모든 것이 먹는 것에 집착되었고 한 급 한 급의 차이를 놓고 피나는 신경전을 벌린다.
이것이 교화소 복역자들의 일상이지만 아직은 지옥의 문턱을 넘었을 뿐이다.
2. 라40
11월 18일 아침 나를 포함해서 여섯 명을 불러 내여 2과로 간다며 2과 선생들한테 인계했다.
본소를 나와 선생들이 지시에 따라 줄을 서서 경사진 산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니 2과가 있었다. 2과는 기본이 동광석 채취인데 내가 입소해서는 거의 폐광 되다시피 하고 한 개 반만이 거기서 또 한 시간 가량 가서야 있는 소갱에서 채굴작업을 했다.
12교화소가 생긴 목적이 동광을 채취하기 위한 것인데 이제는 동맥이 바닥이 났으니 나무를 채벌하고 농사를 짓는 것이 업이다.
과에 도착하니 잡부가 교양실 석회칠과 청소를 시켰다. 장갑도 없이 석회물에 손을 대고 하다나니 손가락들에 구멍이 생겼다. 한참을 하는데 잡부가 오더니 가서 나무를 패라고 한다.
도끼질을 한다는 것이 도무지 팔 힘이 없어 숨만 차며 나무가 짜개지지 않는다. 끓어 앉힌 교정으로 이어진 두 달이 구류장 생활과 한 달반의 신입반 생활이 육체를 부실하게 만들어 놓아 팔과 다리의 맥이 없어진 것이다.
겉을 보아서는 신입자들이라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멀끔하고 조촐했으나 복역생활에 강마른 그들에 비한다면 물알이었다. 더구나 배에 찬 것이 없으니 내려찍는 도끼에 힘이 가지 못한다. 이때 잡부가 무를 한 개 가져 와서는 먹으라고 준다.
“법조 뭐야?”
“117조요.”
“뭐 밀수해?”
“뭐 한 게 없소.”
굳이 답하고 싶지 않아 얼버무리였다.
나보다 10살은 적은자인데 교화소에서는 ‘탁’자리와 ‘티’들이 형님이라 신입자나 다른 수용자들에 대해서는 노소를 불문하고 반말이다. 그래도 이자가 가져다준 무를 먹으니 순간에 배에 힘이 생기여 나무를 인츰 패놓았다.
점심에 밥덩이가 들어온 것을 보니 옥수수쌀에 콩을 섞은 것으로 감자만 먹던 신입반생활보다 훨씬 나았다. 2과 밥이 좋았다.
수용자들은 시기별로 몇과 밥이 좋다 나쁘다 하며 밥이 좋은 과를 부러워한다. 밥이 좋다는 것은 그 어떤 ‘조절’이 없이 정량대로 찍어낸 밥을 말하는데 수용자들이 급식을 담당한 선생이 인간성의 질에 따라 식량 취급에 엄격한 질서가 서있는 과들에서는 그나마도 제대로 된 밥을 먹는 때가 있다.
밖에서 우~ 하고 겨울을 부르는 바람소리가 들렸다. “겨울이 다 왔구나.” 밖을 내다보던 잡부가 말한다.
12교화소는 해발 1500m가 넘는 북방의 산간지대라 겨울이 다른 지대보다 훨씬 더 빠르게 오며 맑은 날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높은 관모봉이 보이며 동쪽으로는 나진 앞바다가 멀리 바라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 있다.
여름에 체포 되어 가을을 보내고 겨울을 맞게 되니 전락된 운명에 대한 비감만 들었다. 이 지옥에서 또 어떤 고역들이 생명을 바라고 나를 희롱할 것인가…….
오후에 과장의 개별담화가 있고 저녁에 반에 배치되었는데 나는 1반이였다. 2과 1반은 강인범이 18명이나 있는 강인범반이며 장형수들이 많은 반이다.
‘사’ 선생에게 이끌려 반에 들어가니 수수떡 같은 전등 아래 우글거리던 수용자들이 모두 쳐다보았다.
“신입자야?”
“신자 왔구나.”
“저기 가 앉아라.”
주춤거리는 나를 홍재라는 회령출신 반장이 자리를 지정해 준다. 변소 출입문 앞이라 감방에서도 제일 번잡하고 불편한 지리다.
이 1반에 나선시 노동당 조직비서를 하던 김광도 15년 형기를 받고 와있었다.
저녁 급식이 끝나고 반장이 찾는다.
“회령 어디야?”
“망양이오.”
“형제 있나?”
“야 있소.”
같은 회령이라 반장은 궁금한 고향소식에 이것저것 묻는다. 궁하지 않을 정도의 답을 해주는데 옆의 수용자들이 이야기를 시키자고 한다. 신입자가 들어오면 밖의 세상소식에 주린 수용자들이 며칠씩 이야기를 하라고 달구어댄다.
“이야기 할 줄 아나?”
“잘 못하는데…….”
“일없다. 해라.”
“…….”
“아 일없다. 아무 이야기나 해라.”
고역과 고리타분한 일상의 반복에 적막하기만한 교화소 생활에 찌들어든 수용자들에게는 신입자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한번 들은 적이 있어도 새롭고 재미있게만 들린다.
사회에 있을 적에 책에서 본 스미꼬라는 여성첩보원의 활약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모든 수용자들이 조용히 집중하여 꽤나 흥미 있게 들었다.
“찌르릉” 하는 학습시간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리지 않았다면 아마 시간 가는 데까지 다 듣자고 했을 것이다.
학습시간은 신입반보다 한결 편했다. 교화생활에 늘 먹어난 반장이나 수용자들은 서로 걸리지 않을 정도로 심리적인 제휴를 해가며 어느 정도의 휴식을 취한다.
그날 학습은 ‘생활 준칙’인데 처음 한번은 큰소리로 다 같이 하고는 한 사람이 한 조항씩 60여명이 돌아가며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반장은 강대에 누워서 다른 수용자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제 볼일을 본다.
규정대로 하면 열을 맞추어 정좌시키고 반장이 집행해야겠으나 하루의 고역에 지친 수용자들의 심리를 알고 선생들이 눈을 피해 어느 정도 풀어주고 자기들을 좀 풀어주니 수용자들은 반장이 그 시간에 누워있어도 걸고 들지 않는다. 간혹 누가 반장을 선생들한테 고발하면 웬만해서는 추궁으로 끝나고 대신 보복으로 규정대로 집행하면 수용자들이 바쁘게 되니 서로 살이 아프지 않을 정도로 지내는 것이다.
“교정이 올라야 ‘시래기’들이 바쁘지 내 바쁘겠나.”
이것은 올라간 교정에 힘들어하는 수용자들에게 ‘티’들이 빈정대는 말이다. ‘시래기’라는 것은 일반수용자들을 말한다. 이 ‘티’들은 교화소에서 수용자관리를 위해 부여된 권한을 이용하여 자기들이 영역을 지켜간다.
교화반들에서 ‘티’들이라면 반장, 감시, 계산공, 조장을 하는 이용자들과 오랜 징역생활에 늘먹을대로 늘먹은 장형수들인데 이들은 다른 수용자가 그 어떤 배경의 힘을 입어 자기 영역에 위험한 대상이라면 사소한 싹이라도 짓밟으려고 한다.
같은 죄수여도 일정하게 다른 죄수들은 관리할 권한이 있어 이 권한을 교묘하게 활용하여 남들은 더 시키고 자신은 육체를 조절할 수 있는 위치가 되는 이 ‘티’ 자리에서 밀려나면 저도 역시 ‘시라지’라 일반 수용자나 똑 같은 고역을 치러야겠으니 다른 수용자가 ‘티’ 로의 부상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남보다 쉬운 일을 하고 남보다 밥 한 덩이라도 더 먹을 수 있는 ‘티’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생명과 직결된 문제로 되어 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수용자들 간의 무서운 암투가 벌어지며 이 암투는 또 하나의 교화살이 이다.
다음날 아침 기상하여 예의 그 ‘개 짖는 소리’가 들리고 본소보다도 더 좁은 복도 길로 아비규환 같은 세면장으로 갔다와서는 급식이 시작된다.
2과는 8개반으로 1반부터 5반까지가 갱반이고 허약자들을 모아놓는 6반, 출소까지가 1~2년 남아 도주위험이 적다고 보이는 자들을 집합해서 야외 벌목일을 하는 7반, 농사를 위주로 하는 8반이 있고 한 건물에 잇달려 선광일을 하는 5과 3개반이 있었다. 2과와 5과를 합해 500여명이 있었다.
“밥이 떳다” 하면 밥 다이를 든 구내반 수용자들이 순서별로 반들이 배식구 앞으로 다가오며 감방안의 수용자들은 자동으로 앉은자리에서 서로 마주앉아 밥줄을 만든다.
이 밥 받는 순서가 바뀌어 자기반에 밥이 늦게 오게 되면 수용자들은 별 쌍소리를 다하며 구내반 수용자들을 욕한다. 그만큼 1초라도 빨리 먹고 늦게 먹고가 더 먹는 것 같고 적게 먹는 것 같은 마음상 문제로 된다.
배식은 ‘먼거리 법칙(멀리 있는 사람 우선)’이다.
교화반들에서는 험하게 깨져 실로 깁고 불갈구리로 때여 붙인 그릇이라도 한사람에 한 개씩 돌아갔다. 또 숟가락이 없어 밥을 어찌 먹을지 하는데 반장이 감방 배식들에게 숟가락을 빌려주라고 해서 먹었다. 다음날 나는 참나무 장작을 쪼개어 나무 숟가락을 만들어 사용했다.
교화소는 밥상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게 된 곳이라 바닥에 놓고 먹던가 들고 먹으며 국을 같이 먹는 일이 없고 찬은 교화생활 전 기간 죄수들은 먹지 못하게 되었다.
밥 배식이 끝나는 차례로 커다랗고 시커먼 끄슬림이 잔뜩 붙은 국통이 배식구 앞에 “쿵” 하고 내려지고 국 배식이 시작된다.
수용자들은 자기 그릇이라는 ‘또로배’에 받아먹는다. ‘또로배’라는 것은 국그릇이 없으니 면회 때 가족들이 가져온 알루미늄이나 범랑그릇(비밀그릇)을 가져와서 반에다 놓고 사용하는데 그 크기와 모양이 각양각색으로 세면기만한 ‘또로배’도 있다. 이것을 자기 그릇이라고 하는데 좀 큰 것을 사용하는 수용자들은 감방배식들이 실수하여 작은 그릇에 국을 보내면 마음상 적게 먹는 것 같아 아쉬운 마음에 항의가 많아 배식 때면 감방 배식들은 밥줄의 순서에 맞게 ‘또로배’를 보내느라 신경을 많이 쓴다. 국그릇이 왜서 ‘또로배’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전부터 그렇게 불렸다고 한다.
아침 배식이 끝나면 인츰(이내) 점심배식을 한다.
“밥 딸보 내려라.” 하면 수용자들은 천으로 밥덩이가 들어가게 만들고 거기에 실로 자기 이름을 써놓은 밥주머니를 내려 보낸다.
감방배식들은 이 딸보들에 밥덩이를 담아 옭아매서는 밥통에 건사하거나 먼 야외 작업을 나갈 적에는 기동을 쉽게 하려고 나누어 준다. 쉽게 말하면 도시락인데 용기가 천으로 만든 주머니이다. 개별적으로 건사시키면 굶주림에 허덕이는 수용자들이 출력하기 전에 다 먹어치우는 경우가 많다.
급식이 끝나고 작업준비 하라는 반장의 말에 수용자들은 주섬주섬 모자, 장갑을 챙긴다.
“출력준비 하기오~” 하는 잡부의 길게 뽑는 소리가 들린다.
수용자들은 정좌하고 앉아서 담당선생이 오기를 기다리던가 아니면 “ㅇ반 출력하라!” 하는 소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오는데 징벌 노동에 나가는 그 걸음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라는 말이 딱 맞는다.
1, 2, 3, 4 반별로 마지막 수용자까지 유일번호를 하고 ‘사’앞에 나와 모자를 벗고 열을 맞추어 끓어않는다.
‘사’선생이 인원 확인을 나오면 또다시 번호이다. 마지막 번호를 받아 넘기면서 반장이 “0반 00명 출력합니다. 환자 0명, 휴역 0명 떨어졌습니다.” 하고 보고한다.
“나가라.” 하면 교화반은 돌아서서 반 창고 앞에 가서 작업공구를 가져온다. 매개인당 ‘끌바’를 한 개씩 휴대하고 도끼조는 도끼를 쥔다. ‘끌바’라는 것은 화살촉처럼 생긴 두 개의 쇠 촉살을 사슬에 연결하고 거기에 배낭끈 같은 것을 덧대어 든든하게 하여 어깨에 걸치고 나무를 끌 수 있게 만든 교화소에만 있는 나무끌개이다.
산에 가서 벌목하여서는 촉살을 나무에 도끼로 박아서 끌고 내려온다.
작업준비를 갖추고 출력선에 서면 초병들이 장부를 가져와서 대조를 한다. 초병이 호명을 하면 수용자는 자기 칭호를 댄다.
“김광일”
“라40입니다.”
이런 식으로 호명이 끝나고 또 번호를 부르며 정문을 나와서 맞추어 서면 담당선생과 만 탄창한 무기와 예비탄창 두 개를 휴대한 두세 명의 초병들이 배속되고 출발을 지시한다.
반마다 담당이 한명 있고 초병은 야외 작업 시에는 열명 당 한명이 따라야 하는데 수용자는 많고 초병은 적으니 보통은 두세 명이 따라간다.
반이 출발하면 감시는 선생들이 먹을 밥통과 국거리를 쥐고 또 그들이 야외에서 깔고 앉을 방석을 두세 개 메고 대열을 따르며 짬이 없이 유일번호를 시켜야 한다.
“번호!” 하면 맨 앞의 수용자가 “하나” 하고 넘기고 다음 수용자가 “둘”하며 맨 마지막에 감시가 “ㅇㅇ명 다 있습니다.” 하고 보고하고 재차 “번호”하고 소리친다. 또 그런 식으로 번호가 이어져 온다.
교화생활은 번호로 시작해서 번호로 끝난다는 말이 있는데 하루에 기상부터 취침까지 6~70번을 불러야 한다. 도주 방지를 위한 항시적인 감시차원이라지만 일에 지치는 수용자들에게는 너무도 부담스러운 것이다.
벌목지에 도착하면 지시에 따라 도끼조는 채벌에 들어가고 다른 수용자들은 선생들이 쪼일 불을 땔 나무를 주어온다. 나무도 이깔나무를 주어오면 탁탁 불찌가 튀어난다고 다른 삭정이를 주어 와야 한다.
선생들은 맞춤한 자리에 불을 피우게 하고는 방석을 깔고 앉아 수용자들을 관리 감시한다. 반장은 돌아다니며 작업을 다그치고 감시는 쉴 새 없이 호명하여 보고한다. 일을 하다가도 호명에는 정확하게 답하여야지 그렇지 않다가는 매가 차려진다.
매라는 것이 감시가 때린다 해야 욕설과 손찌검이겠지만 초병들이라는 것은 열여덟 살부터 스물대여섯 살에 이르는 사관들이라 자기 말 한마디에 노예같이 움직이는 권력의 맛에 재미를 느끼는 자들이 있어 수용자 같은 것은 짐승 패듯 하는 자들이 있다.
좀 나이 있고 연륜이 있는 선생들은 정 못된 놈이 아니고는 혹독하게 다루지 않는데 일반 초병들은 사정없이 매질하는 것으로 수용자들 앞에서 위엄성을 과시한다. 이 매질에 귀가 째지고 코피가 터지고 뼈가 부셔져도 수용자들은 항변 한마디 못한다. 결코 머저리가 아닌 수용자들이지만 죄수이기 때문이다.
개중에는 인간성이 있는 담당들이 있어 자기가 관리하는 수용자들을 매질하는 초병들에게 은연중 너무 폭행하지 말라는 암시도 하고 맞지 않도록 막아주는 경우도 있으며 매질이 도를 넘을 때에는 “너무 그러지 말라. 가들도 감정을 가진 인간이야.” 하고 질책하는 선생들도 있다. 이런 선생들이 관리하는 교화반에서는 초병들도 수용자들을 쉽게 매질하지 못한다. 죄수처지에는 매 맞는 것을 동정하여주는 선생들이 그렇게까지 고마울 수가 없다. 이런 선생들은 수용자들을 오늘의 죄수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출소후의 인간으로 보고 눈에 드는 수용자들과는 은연중 앞날을 약속하기도 한다. 수용자들 중에는 정말 능력이 있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도끼조가 채벌을 하고 운반조가 나무를 메여 일정장소까지 날라놓으면 점심시간이 된다.
부식들은(배식들을 부식이라고 부른다.) 작업장에 도착하면 도람통 같이 생긴 커다란 국통을 걸어놓고 거기에 과에서 국거리로 받아온 10kg 정도 되는 '까마귀 날개'나 무를 물에 대충 흔들어 씻어서는 썰어서 끓여 공급하는데 수용자들은 이것도 없어서 못 먹는다.
국 한 그릇씩 '또로배'에 받아들고 '밥 딸보'를 손에 들고 아구리를 풀어서 입으로 먹는데 점심을 먼저 먹어치운 자들은 국물만 들이키고는 머쓱해서 남들이 먹는 모양을 구경한다. 이때는 먼저 먹어치운 것이 후회된다.
선생들은 감시가 불을 때놓고 국거리를 깨끗한 물에 손질하여 가져다주면 또 깨끗한 물을 받아오게 해서는 밥을 지어먹는다. 선생들은 지겨울 정도로 야영을 하는 기분으로 산다.
식사가 끝나고 나무를 등성이까지 메여 나른다. 경사지로 나무를 메여 나르는 것은 진이 빠진 수용자들에게는 보통 고역이 아니다. 무거운 나무에 짓눌려 허덕이면서 경사를 숨이 턱에 닿아 톺아 오르며 번호는 번호대로 끊임없이 외쳐야 한다.
헉, 헉, 쎅, 쎅…… 목에서는 쇠비린내가 나고 숨은 턱에 막힐 정도로 차오른다. 허약한 수용자들은 나무의 흔들림에 이끌려 순간 몸 균형을 잃어버려 넘어지면 나무에 그대로 깔리기도 하고 여기저기 치우며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도 한다.
북한에서 간혹 어떤 사람들은 ‘단련대’보다 교화소가 일이 쉬워 낫다고 한다. 어느 정도까지라면 나을까? 너무도 모르는 소리이다. 복역자들은 ‘단련대’는 살이 빠지지만 교화소는 뼈가 빠진다고 한다. ‘단련대’는 사회음식이라도 먹을 수 있고 교양이라 해도 사회에서 격리된 것이 아니지만 교화소는 항시적인 굶주림과 사회로부터의 철저한 격리 속에 수용자들은 육체의 진이 다 빠져나간다.
나무도 화목일적에는 또 낫다. 원목운반을 할 때에는 그야말로 한통 한통이 역사이다. 원목을 나르다 한 사람이 실수하여 넘어지면 십분 사상자가 생기기 일쑤라 원목을 나를 때에는 모든 수용자들이 악을 쓴다. 그 중에도 키를 가지고 몸을 조절하는 자들이 있어 원목을 나를 적에는 키 큰 수용자들이 고통이다. 이런 역사를 하여 나무를 등성이까지 올려놓고 촉살을 박아 나무를 찬다.
선생들은 인원을 점검하고 간격을 유지하고 나무를 끌어내리게 한다. 눈길에 나무를 끌 때에는 쉬울 수 있으나 대신 경사에 내리쏠리는 나무를 이기지 못하여 맥없는 수용자들은 끌려가다 걸채여 넘어져 터지며 쏠린 나무는 자칫하면 앞사람의 다리를 쳐서 끊어놓는다.
교화소에서는 이런 사고가 심심치 않게 생긴다. 끊어진 다리가 살가죽에 붙어 피범벅이 되어 흔들거리는 참사를 당해 정신을 잃고 쓰러져 담가에 실려 가면서도 처참한 광경에 억이 막혀하는 선생에게 “펑펑이가루를 좀 먹게 해주십시오”한다. 너무한 굶주림에 아픔이 지나 당할 배고픔에 이 상황이라면 선생이 들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동정의 소원을 말해 한번이라도 펑펑이가루를 배부르게 먹고 싶어서이다.
여름철에는 맨 땅으로 나무를 끄는 것이 도무지 끌리지 않고 뒤에서는 초병들이 매질로 재촉하지 하니 안타까워 “나무야 왜 가지 않나.” 하며 눈물을 흘리는 수용자들도 있다.
이렇게 수용자들의 피땀으로 역사를 쓰며 나무들이 끌려 과에 도착하면 그날 징벌노동이 끝나며 수용자들은 “또 하루 살았구나.”하며 한숨을 쉰다.
- 다음에 계속 -
2010년 5월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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