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무죄(1) - 김광일
  • 관리자
  • 2010-06-07 15: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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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내면서

나는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긴 유명인사들이 자신들의 겪은 감옥생활에 대하여 쓴 책을 여러 번 보았다. 넬슨 만델라의 “감옥생활”, 여류작가 루이저 린저의 “옥중 일기”, 가깝게는 전 인민군 종군기자 이인모씨가 쓴 수기. 이들은 책에서 당시대의 독재정권들에 의하여 인권과 민주주의가 무참히 짓밟히었던 복역시절을 공개하여 독재자들을 고발하였다. 이들은 인류의 발전을 위해 자기식의 정견을 가지고 투쟁하던 사상가들로서 북한식으로는 정치범인 것이다.

오늘날 이 지구상에 누구나 외칠 수 있고 누구나 향유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실현 되어가고 있기까지에는 자기의 귀중한 생을 받쳐 독재세력들에 맛서 싸운 투사들의 피와 넋도 깃들어 있다.

지금은 21세기이다. 고도로 발전된 과학은 우주를 정복해나가고 있다. 이 문명한 21세기에 20세기 중반기 독재정권들이 자행하던 것과 같은 독재가 실시되는 곳이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하지만 불행히도 그런 곳이 있으며 그것도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 있는 북한땅이 그런 곳이다. 나는 그 어떤 정견을 가지고 제도에 맞섰던 사상가가 아니다. 그러니 정치범이 될 수 없다.

얼마 전에 청주교도소에서 20여명의 수감자들에게 2년여의 교육을 주어 기술자격을 취득시켜 앞으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수 있는 자활능력을 갖춰 주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사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복역자들에게도 보장되는 인권을 보게 되니 너무도 대조적인 북한 교화소 복역생활이 생각나며 진정한 인권은 민주주의가 실현되어 가고 있는 사회에서만이 보장될 수 있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된다.

“라40”

이것은 북한 인민보안성 12교화소 복역자였던 나에게 붙여졌던 수용자 번호이다. 보다시피 나는 출소자이다.

그러면 왜 갔었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굳이 밝힌다면 117조 비법밀수죄이다. 하면은 무엇을 밀수하였는가 하는 물음이 또 생긴다. 답한다면 나는 밀수한 적이 없다.

그러면 억울하게 갔다는 것인데 이 글에서 교화소에 가게 된 동기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북한 교화소에서 수용자들의 복역생활을 있는 그대로 더하지도 덜지도 않고 각색 없이 쓰려고 한다.

북한 교화소에서 수용자들이 복역 생활이 인간적인가 아닌가는 글을 보는 사람들이 평가할 몫이다.


구류장

2004년 7월 8일 나는 회령역전 앞에서 이미 추적하고 있던 보안원들에 의해 체포되어 아무런 법적 절차가 없이 회령보안소 구류장에 구류되었다.

북한도 공민을 체포하여 구류시켜 취급하자면 검찰소에서 체포장이 발급되어야 하는 법절차가 있는데 이 절차는 대개가 무시당하고 우선은 잡아놓고 본다. 잡아 놓고 체포 조사하여 사건 제기로 만들어서는 형벌을 적용하면 하고 그 어떤 환경이나 뒤 공작이 있으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여기서 환경이란 출신성분을 말하는데 북한에서 일명 ‘백두산 줄기’라는 사람들과 대개가 그들의 차지하고 있는 고위층으로 그들의 가족친척들이 환경이 좋은 집안으로 된다. 또 비행사, 잠수함, 특수부대라고 대남공작하는 사람이 있는 가족들도 환경이 좋은 집안으로 되어 이들의 가족친척들은 살인을 쳐도 집행유예로 되는 특혜가 있다.

나는 예외가 될 수가 없는 출신이라 형사소송법에 따른 범죄자들만 구속되게 되어있는 구류장에 즉시로 구류되었던 것이다.

체포된 지 5일만인가 체포장을 가져와서 사건으로 취급한다고 했다.

나를 데리고 간 예심과 보안원이 계호원을 부르더니 “야를 4호 감방에 여라.”하고 명령했다. 한 계호가 오더니 예심과에 잇달린 보안 장치가 된 문을 열고 나를 들여보냈다.

“야. 오라”하는 꽥 소리에 보니 젊은 계호가 나를 손짓해 부른다. 엉거주춤 해서 다가가니 “이 새끼 눈 깔아.”하며 발로 걷어찼다. 우선은 구류장이라는 위압감을 주려는지 사나운 눈길과 독살스러운 말투이다.

“옷 벗어.”하고는 팬티까지 벗겨 벌거벗은 나를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손을 뒷짐 지고 벽을 향해 돌아있게 하고는 옷을 검사해 단추를 다 뜯어내고 혁띠를 회수하였다.

이것이 구류될 때 받아야하는 검신이라는 것인데 단추와 혁띠까지 회수하는 것은 구류된 자들이 예심기간에 보안원들이 핍박에 못 견디어 또 처형이 두려워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란다.

검신을 끝내고 옷을 입으라고 해서 옷을 입으니 팬티 고무줄까지 뽑아놓아 항상 아랫도리를 쥐고 다니게 만들어 놓았다. 그것이 정 불편하여 구류자들은 한 뼘 되는 끈으로 앞을 당겨 매고 지낸다.

“걸어라!”하며 구류장 뒤에 있는 좁은 길을 가리키기에 일어나서 걸으려하니 발로 호되게 걷어찼다.

“이새끼 대갈 숙여. 뒤짐져. 신발 벗어. 걸엇!”

4호라고 쓰인 번호 앞에 이르니 밑에 높이 너비가 45cm가량 되는 2중 보안장치로 된 철문이 있었는데 그 앞에서 또 무릎을 끓고 뒷짐을 지고 머리를 바닥에 대고 철문이 열릴 때까지 돌아 엎디어 있어야한다.

내가 벙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물거리니 “이새끼 대갈 까고 돌아 엎드려.”하며 내 허리를 강하게 내려찍었다.

“헉…….”
순간 주저앉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 여독에 구류장 생활기간 계속 허리가 아프게 됐다.

문이 열리고 “들어가라.” 하는 소리에 머리를 들고 들어가려고 하니 또 발길로 걷어차며 “이새끼 그대로 게바라 들가라.” 한다.

이 문이 구류장에서는 일명 ‘개구멍’이라고 기여서 드나들게 만들어 놓은 문인데 내가 들어가니 등을 돌리고 앉아있던 사람들이 흘끔 흘끔 뒤돌아보는 것이 머리를 박박 깎아놓아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나는 으스스 해났다.

좀 있으니 나를 체포한 자가 감방 앞에 오더니 나를 머리를 깎고 교정을 주라고 한다. 머리를 깎는다는 것은 일단 형사소송법에 의한 사건으로 취급하여 처벌을 가하기 위하여 구속한 자에게 행하여지는 ‘구류보전 처벌’이라는 것인데 나는 그 어떤 법적 절차가 없이 체포되었으며 구류보전처벌을 받은 것이었다. 즉 미리 나를 잡아 걷어 넣을 작정이었기에 잡힌 이상 나 같은 것은 그 어떤 항의가 소용없는 것이 북한의 법이다.

“야, 너 자를 머리 깎고 교정 주라. 그리고 너, 459번이다.”하며 계호원이 가위를 가져다주었다.

“형님, 어쩌겠소. 머리 깎아야지…….” 안광국이라는 청년이 측은한 눈길을 주며 나한테 다가왔다.

중국에서 몽골을 거쳐 한국으로 가려다가 국경지대에서 잡혀 보위부까지 거치다보니 거의 1년 동안 구류되어 있는 다고 했다.

썩둑썩둑 잘려 바닥에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보며 이게 사회에서 듣던 ‘똥굴’인가, 내가 이젠 죄수인가 하는 기막힌 생각에 지나온 인생이 허무하기만 했다.

무엇인가 해보려고 잘살아 보려고 소 갈데 말 갈데 다가며 별의별 일을 다 하면서 생을 삶답게 살아보려고 버둥거렸지만 종당에 당한 것은 범죄자가 되어 ‘똥굴’에 들어온 비참한 운명이 된 것이다.

구류장에서는 머리를 깎으면 ‘탁구알’이라고 하는데 이 ‘탁구알’들은 거의 99%가 교화소에 가게 된다.

머리 깎는 사이에 안광국이 교정을 가르쳤다. 우선은 구류장의 수감자들은 보안원들을 ‘선생님’이라고 불러야 한단다. 아침 5시에 기상하여 30분 동안 청소 정돈 하고 그다음 정좌하고 앉아 머리를 숙이고 손을 무릎위에 놓고 앉아 7시 30분 밥 먹을 시간 까지 움직이지 말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밥 먹은 다음에 또 끌어 앉아 밤 10시까지 있어야 하는데 원래는 1시간에 45분 교정이고 15분 운동시간이 있지만 대개가 지켜지는 것이 없고 3시간 4시간씩 그대로 정좌시켜 놓는다고 한다. 조금만 움직여도 가혹한 형벌이 차려진다고 했다.

나도 구류된 첫날 정좌하고 있는 것이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러워 얼굴에 비지땀이 줄줄 흐르던 생각을 하면 지금도 몸이 지긋 거려진다.

계호나 예심원들이 신입자들에게 구류장 규율을 인식시키려는 고의적인 의도로 수시로 불러대는데 “459번”하고 호명하면 “예, 4호 감방 459번입니다.”하고 끌어 앉은 자세로 감방 앞 중간에 빠른 속도로 나가 앉아야하는데 금방 들어간 내가 비참한 운명으로 하여 저락된 정신 상태에서 또 사회때부터 심하던 건망증에 번호를 자꾸 헷갈리어 곤경을 당하곤 했다.

구류장에서 벌이란 그저 매와 욕설이다. 조금만 잘못하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놓게 하여서는 가죽혁띠와 ‘총 소제대’로 내리쳐서 뼈가 끊어질 정도로 때리고 끓어 앉혀 5~6시간씩 그 자리에 꼼짝 못하고 앉아있게 하는데 이게 보통 고통스러운 일이 아니다. 그 상태로 있다보면 저리다 못해 감각이 없어지고 일어서려면 다리가 굳어져 펴지지 않아 쓰러지군 한다.

내가 구류되어 있던 구류장은 10호까지의 감방이 있는데 매방이 너비가 2.5m,길이가 3.5m 정도이고 방 사이가 30cm 넘는 콘크리트 벽이고 앞면에는 40mm가 넘는 환봉으로 된 철창이 있었으며 감방구석에 높이 40cm될 만한 칸막이를 하고 변기가 있었는데 이것이 퇴수가 잘되지 않고 청결이라는 것은 생각지도 못하는 말 그대로 ‘똥굴’이라 항상 악취가 푹 배여 있다.

바닥은 널마루 인데 거기에 다 떨어져 너덜너덜하고 얼룩 때가 낀 요포를 취침시간에는 덮고 낮에는 깔고 앉아있다.

매 감방마다 8~15명에 이르는 수감자들이 있었는데 살인, 강도, 강간 같은 강인범(북한에서는 강력범을 강인범이라 한다)으로부터 사기, 협잡, 구타, 교통사고와 같은 사회불량자들과 비법월경자들이 있었는데 국경지역이라 비법월경자가 65%정도 되였다. 이중에 80%가 여성들이다.

구류장 생활이라는 것이 아침에 5시에 기상하여 두 줄로 정좌하고 머리를 숙이고 손을 무릎위에 올려놓고 식사시간과 용변 볼 일외에는 저녁 10시까지 앉아 있는 것인데 말이 앉아있는 것이지 부동자세로 앉아있는 것은 일종의 고문이나 같은 것이어서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이 괴로워 수감자들은 취급을 나갔으면 한다. 취급을 나가면 예심원과 말이라도 할 수 있고 담배도 얻어 피울 수 있기 때문이다.

좁은 감방에 줄을 맞춰 앉아 있다가 좀만 움직이거나 계호들이 시비에 걸리면 ‘탕’을 맞아야 한다. ‘탕’이라는 것은 구류장 규정을 위반했다고 하여 계호들이 가하는 벌인데 일반적으로 ‘뽐쁘’, ‘오토바이’, ‘시계’, ‘제트기’ 등 그 형벌의 형태는 그들이 생각해내면 생각해내는 대로이다. 스스로 살창을 들이 받게하는 벌도 있는데 받는 소리가 약하게 들릴 때는 거짓이라고 꽝 소리가 날 때까지 받게 한다. 그렇게 받고나면 기절한다.

‘뽐쁘’라는 것이 타이어 튜브들에 공기를 채울 때 사용하는 재래식 펌프가 아래위로 움직이는 것처럼 사람을 앉았다 섰다를 반복시키는 벌인데 100번이 넘어가면 벌써 숨이 차서 헐떡거리고 2~5백을 넘어서게 시키는 경우도 있는데 도중에 다 쓰러진다.

‘오토바이’라는 것은 다리를 구부리고 두 손을 앞으로 들고 오토바이를 탄자세로 있는 것인데 이 자세로 20분만 넘어가면 진땀이 솟아 턱밑으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계호들은 그 밑에 술잔을 가져다 놓고 술잔에 땀방울이 다 찰 때까지 서있으라고 한다. 30분을 못 넘기고 쾅하고 다 쓰러진다. 쓰러져 괴로워하는 모습에 계호들은 희희덕거리며 수감자들을 조롱한다.

예심원이나 계호가 때릴 때도 있지만 왜 이런 방법의 체벌을 하는지는 ‘심화조 사건’으로 내놓고 때리면서 취급할 수 없게 되니 때린다는 말을 듣지 않고 고통을 가중하여 줄 수 있는 방법을 택한 은폐된 고문인 것이다.

북한도 예심과정이나 교화 중에 구금자들에 대하여 때릴 수 없게 되어있다고 하지만 수양이 낮은 그 법관들이라는 사람들이 배운 것이 없다보니 구금된 자들보다 머리 회전이 빠르지 못하여 골탕 먹는 일이 종종 생기군하여 약이 오를 때마다 수환을 발휘하여 범죄자를 휘여 잡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을 등대고 억지다짐인 주먹으로 해결하려는 경향이 많다. 구타의 정도가 가혹하여 맞아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노련한 예심원들은 강인범이라도 인간적으로 대해주면서 그의 심리를 제압하는데 못 되먹은 자들과 애송이들은 주먹다짐으로 국가에서 쥐어 준 권력을 행사하여 억지 답을 받아내는데서 권력의 맛을 느끼는 것 같다.

나도 두 달하는 구류장 생활에 이런 고통을 몇 번 당했다.

한번은 계호책임자가 와서 나를 불러 세우더니 ‘뽐쁘’ 5백을 하라고 한다.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당해야만 하는 수감자 처지라 어쩔 수 없이 당하고 있는데 매 한번마다 홍광철(23살)이라고 도적질로 들어온 자에게 셈세기를 하라고 한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느냐며 2백번 넘게 할 때 계호책임자가 오더니 “너 잘못한 거 없어?”하고 묻는데 내가 머뭇거리자 “야 이게 안 되겠구나. 계속해!”한다. 계속하면서 생각해봐도 내가 체벌 받을 말한 빌미를 준 것이 없고 또 예심원이나 계호들하고도 사이가 나쁜 것이 없는데 무슨 영문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한 3백번을 하였을 때 계호책임자가 오더니 “너 정말 모르겠나?”한다. 내가 모르겠다고 대답하자 그는 “너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 회령에서 카라오케와 식당 운영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뭐 사장하겠다면서? 하하 이새끼...”하더니 그만하고 가서 앉으라고 한다.

그말을 들으니 짐작이 된다. 또 내가 체벌을 받을 적에 셈세기를 하던 홍광철이 결국은 먹을 것 때문에 나를 고자질한 것이었다.

구류장에서 공급하는 급식이라는 것이 진때가 너무 끼여 얼룩무니 같이 된 알루미늄 식기에 묵지가루(중국에서 짐승먹이로 가공한 옥수수 가루를 북한에서는 식량으로 수입해서 간혹 얼마간씩 공급할 때가 있다.)를 부풀려서 절반이 못되게 퍼주는 것이 정말 굶어죽지 않을 정도로 꼭꼭 다지면 세 숟가락 정도인데 원래부터 몸들이 약하던 사람들이 구류장안에 들어와서 그런 급식을 먹고 보름만 지나면 허약이 오고 몇 달씩의 취급이 끝나고 정작 형기를 받고 교화소에 보내려면 교화소에서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돌려보내는 정도로 ‘강 허약’이 된다.

보안서 측에서는 이런 현상을 없애보려고 예심기간에는 하지 못하게 된 면회를 시켜준다고 하며 가족들에게 면회음식과 펑펑이 가루를 가져오게 하여 매일 점심때마다 200~300g씩 주게 하는데 이것도 북한 현실에서는 뭔가 좀 있는 집이여야지 없는 집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다보니 홍광철 같이 집형편이 못되어 돌아다니면서 좀 도적질을 해먹던 사람들에게는 찾아올 사람이 없어 그 무엇도 먹을 수는 없고 하니 감방내 수감자들의 동향을 일러바치는 것으로 계호들한테서 다른 사람들의 펑펑이 가루를 덜어낸 것을 얻어먹는 것이다.

또 계호책임자나 예심원들은 남들이 먹을 때 보기만하고 먹을 수는 없으니 굶주림에 허덕이는 그런 자들을 이용하여 펑펑이 가루를 조금씩 먹여주며 감방 내 동향을 알아내여 일러바치게 한다. 이런 자들은 배고픔에 다른 수감자들이 계호들의 눈치를 보며 조용히 주고받는 대화를 엿들어서는 일러바치는데 그 내용들이라는 것이 그들의 귀맛에 들게 쉽게 말하면 취급 시나 교정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 정도의 가치를 부여해야겠기에 각색하기가 일반이다.

나도 체포된 후에야 내가 너무 소심한 놈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이제 출소하면 돈을 벌어서 뭔가 좀 해보려는 생각의 말을 했었는데 그 말을 홍광철이 고발할 건더기로 보고 얻어먹기 위해서 일러바친 것 같았다.

헌데 이상하게도 벌을 주면서 계호가 지켜보는 것이 아니어서 건성건성 눈치를 보아가며 하게 되였으며 또 홍광철로 하여금 셈세기를 시켰으니 누가 한 짓인가를 금방 알게 된 것이다. 계호 책임자가 배고픔에 기갈 든 자들의 속내를 알고 있기에 그런 자들을 써는 먹여야겠지 그렇다고 알 만한 사람들이 당하게 할 수는 없으니 일부러 이런 놈이라는 것을 공개하여 놓았던 것이다. 감방들에는 이런 자들이 한두 명씩 있었다.

이 일로 그는 감방안의 사람들이 원래 밉게 보던 차에 완전히 고립되었다. 홍광철 같은 것은 어리석게도 보안원들의 영향력 확보를 위한 암투속도 가려보지 못하고 시키는 대로 주절거리다가 그들이 미움을 샀고 거기에다 감방안의 수감자들이 ‘간첩’으로 취급하여 되게 골탕 먹이려고 작정하고 있다가 내가 먹다가 좀 남긴 펑펑이떡(옥수수를 튀겨서 다시 가루 내여 물에다 그대로 이기면 떡처럼 되여 쉽게 먹을 수 있게 변성시킨 가루를 말한다)을 훔친 것을 빌미로 우리 감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당직 계호한테 말하여 도적으로, 또 계호책임자를 자기 삼촌이라고 하면서 자기는 감방안의 동향을 감시할 특수 임무를 책임자한테 받고 수행하는 사람이라고, 자기는 이 일을 하고 인차(금방) 나가게 된다고 했다고 열 개의 감방이 다 들릴 정도로 고발하였다.

법관들이라는 사람들이 수감자들 앞에서 홍광철과 같은 좀도적들을 상대하는 유치한 인간들로 돼버리자 온 구류장 계호들과 보안원들은 자기들이 명예를 도적질해 팔아먹고 사는 비루한 천치라고 멸시하며 그에게 잘못을 뉘우치라고 머리로 철창을 쾅 소리가 나게 열 번도 더 박게 하고 3일 동안 그 자리에 꼼짝 못하게 당직들이 교대해가며 벌주었다.

후에 홍광철은 뇌출혈로 죽었다는데 내 생각에는 그 둔한 것이 계호들 앞에서 정말로 철창을 박는다는 인식을 주려고 머리를 박다가 그 여독에 죽지 않았나 싶어 측은한 감도 들지만 그 시절만큼은 감방안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미워했다.

식사시간이 되면 “밥 먹을 준비해라!”하는 계호의 소리에 앉아있던 자리에서 서로 마주 돌아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세워 앉고 손을 발위에 올려놓고 감방장이 “0호 감방 밥 먹을 준비되었습니다.”라고 보고한다. 이렇게 10개의 감방에서 보고가 다 들어오면 계호가 급식을 공급하는데 자기가 직접 할 때도 있고 간혹은 감방에서 자기가 안속이 있는 수감자를 불러 시킬 때도 있다.

급식을 받는 것은 감방안의 수감자들이 돌려가며 받는데 ‘개구멍’ 옆에 손이 드나들 수 있는 작은 구멍이 있는 것이 배식구이다. 자기들이 감방 앞에 배식밀차가 오면 “00감방 00명입니다.”하고 보고하고 손을 내밀어 받아들여 먼 거리부터 넘겨받는데 신속하지 않으면 얼마 안 되는 그 급식마저도 배식구로 탕 쥐여 뿌리는 성질 더러운 계호들도 있어 급식 받을 적에는 초긴장이 된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전체가 먹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국이라는 것이 늙어서 껍질이 딱딱한 누런 오이들을 맹물에 대충 삶아낸 것이 몇 점 뜬 것인데 마뜩치 않을 적엔 배식구로 그대로 쳐 넣는 자들도 있었다. 북한에도 오이를 삶아 먹는 지방이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오이를 거의 생채로 가공하여 찬이나 냉국을 해먹는 것이 보통인데 보안서에 수감자들에게 급식할 국거리가 있을 수 없기에 짐승도 먹지 않아 버리는 것을 쓸어 담아 그대로 먹이는 것이다.

신경전 같은 배식이 끝나고 받은 그릇을 앞에 놓고 다시 두 줄로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으면 계호가 앞으로 온다. “00감방 먹을 준비 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10개의 감방에서 보고가 다 되면 “먹어라.”하는데 혹시나 좀 늦게 보고하면 그 감방은 전체가 벌을 받아 먹지 못할 수도 있고 서서 먹게 할 때도 있다.

밥은 꼭지를 끊어 없앤 숟가락을 가지고 먹는다. 꼭지를 끊은 것은 그 꼭지를 목구멍으로 넘겨 자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이다.

먹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기에 모든 것을 거기에 집착시켜 놓고 사람들을 괴롭히는 야비한 곳이 구류장 생활이다. 점심때마다 면식 펑펑이 가루로 빚은 떡을 먹을 수 있기에 수감자들은 명절을 기다리는 어린이 보다 더 하게 매일 매일 점심시간을 기다린다.

그런데 이런 면식도 잘라 먹을 때가 있다. 한 것은 예심원들과 계호들이 각 감방들에 있은 누가 찾아 줄 사람이 없는 ‘간첩’들에게 마음에 내킬 때마다 먹이자니 자신의 집에서 가져다 줄 리는 없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것을 잘라서 먹이는 것이다. 그러고 혹시 의의를 제기하면 “너건 어째 안나왔어.”하면 그만이다. 또 계호들이 사관들로서 대개가 합숙생으로 술도 먹고 놀음도 해야겠는데 북한 현실에 월급으로는 무엇이 없으니 수감자들의 면식을 잘라 내여 바꾸어 먹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사회 보안원들이 그런대로 생활이 유족하지만 그들이 생활의 원천이라는 것이 범죄자들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 범죄를 진 사람들을 자기 단계일적에는 웬만하면 눈을 감아 주기 때문이다. 눈감아준 대가가 돈인 것이다. 하기에 보안원들은 생활이 좀 낫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기에 아직 받아먹을 조건이 안 된 이런 계호 같은 자들은 수감자들이 면식을 잘라내며 또 가족 친척들이 들여보낸 음식도 자기들이 먼저 먹고 남은 것이 있으면 좀 가져다주는데 그 것도 큰 배려로 생각하게 한다.

나도 새벽이나 밤중에 계호들이 불러 내여 계란 몇 개 월병 몇 개를 준적이 있었는데 훗날 출소하여 들으니 나를 생각해서 언젠가 연고가 있는 중국에 있는 여성의 부탁으로 회령의 연고자들이 들여보낸 음식이었는데 그들이 다 먹고 조금이 양심이 있어서 나에게 준 것이었다.

구류장 생활이라는 것이 서로 모르는 사람들끼리라 나밖엔 모른다하지만 그 속에서도 수감자들 사이에는 인정이 오고갔다. 누가 면회 왔다하면 들어올 적에 검신에 어떻게든 음식물을 조금이라도 숨겨 와서는 감방안의 수감자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것이 걸리면 면회 중지 당할 수도 있지만 구류장 생활을 좀 하고 나면 예심원이나 계호들의 심리를 어느 정도 알기에 면회하고 나서는 가족들이 가져온 좋은 담배를 계호한테 쥐여 주고 “제가 좀 들어가서 급식시간에 먹을 수 없습니까?”하고 넌지시 눈치를 보면 그냥 눈 감는 계호들도 있었다.

북한에서는 담배가 일종의 화폐 같은 역할을 한다. 뇌물도 돈이 아니라 고급담배로 받으면 훗날 부정축재로 말밥에 올라도 난 담배를 인사 삼아 받은 것뿐이요 하고 억지를 쓸 수 있기 때문이며 받은 담배를 장마당에 내다 돈으로 쉽게 전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기에 예심원들도 수감자들의 가족들에게 알리여 언제부터 면회 오라고 하고는 응당히 고급담배 한 갑은 있으려니 하며 또 가족들도 억울하지만 응당히 그래야만이 면회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심원들은 법적으로는 예심기간에 면회 시킬 수 없는 것이지만 내가 사정을 보아준다는 식으로 또 내가 형기를 낮출 수도 있고 높일 수도 있다는 암시를 하여 가족들로부터 이것저것 받아서 챙긴다.

나도 구류된 후 주일만인가 어머니가 면회 왔다. 예심원의 호출에 불리워 나가보니 어머니가 왔는데 머리를 깎아 알아볼 수 없게 만들어진 내 모습을 보고는 억이 막혀 눈물이 글썽하여 그저 “이그... 어찌게... 이그... 이그...”하면서 아무 말도 못한다. 어머니를 그런 장소에서 보게 되는 나는 인생이 억울함에 눈물이 솟구치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엄마 어떻게 알고 왔소?”
“저 보안원동지가 알려줘서 왔다. 이그 어찌겠나...”

나는 엄마만큼은 이런 자리에서 보고 싶지 않았으며 또 74살이 넘은 어머니가 법관들 앞에서 나를 위해 구걸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래 어머니와 나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나를 낳은 친 부모들이 일찍 돌아가시다나니 자식이 없는 이 어머니가 나를 11달 때부터 데려다 키웠는데 성격이 좀 괴벽한 지라 나하고 잘 맞지 않았으며 나 또한 어릴때부터 엇두레질을 잘하다보니 좋은 기억도 있지만 나쁜 기억도 많다.

부모들이란 자식들 때문에 본의 아니게 법 앞에 서서 용서를 빌 때가 한두 번쯤은 있겠지만 나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반항아적으로 일그러진 내 성격으로 하여 종종 빚어지는 불상사 때마다 법관들 앞에서 흰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빌곤 했다. 그리고는 “다시는 그러지 마라. 다 늙은 게 언제까지 머리를 숙이면서 다녀야겠나?” 하며 울분을 토하시곤 하셨다.

이런 어머니인줄 알기에 잡혀서도 어머니가 오지 말았으면 해서 예심원에게 주민등록에 등록된 어머니가 아니니 나 때문에 찾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는데 혹시나 하고 예심원이 가본 것이 그래도 어머니가 펑펑이가루와 면식을 가지고 담배를 들고 찾아왔던 것이다.

“엄마 다시는 찾아오지 마오.”
“너 그러면 어떻게 살아나겠나…….”
“아니, 엄마 내 꼭 살아올게요. 죽지 않고 꼭 살아오겠으니 엄마 더 찾아오지 마오.”
“이그... 그래도 내 가야지. 광일아 마음 크게 먹어라. 내 계속 면회 오마.”

어머니와 나의 재회를 지켜보고 있는 예심원도 나의 가정사를 알고 있는지라 마음이 측은해지는 것인지 “밥 먹으라”하고는 피하여 준다.

이번에는 어머니가 그 어떤 구걸도 하지 않으셨다. 어머니도 이번일이 빌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 펑펑이 가루에다가 사탕가루를 섞어서 한 달에 한 번씩 꼭 가겠으니 거기서는 면식이 있으면 산단다. 그러니 내 계속 가마.”
“엄마. 오지 말라지 않소.”

면회라는 것이 북한 실정에서 식량이 비싼데 그것 말고라도 늙은 어머니가 어찌 다닌단 말인가. 그것이 쉽지 않은 고역일줄 알기에 나는 끝내 어머니를 오지 못하게 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는 꼭 면회를 다닌다고 하였다.

내가 왜 어머니를 오지 말라고 했는가. 한 것은 자라면서 친 어머니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솔직히 내가 거리를 둔적은 없었는데 어머니가 동네에 ‘신뚱띠’라는 왈패스러운 노친과 가까워서 그 노친이 어릴 적부터 어른들이 하지 못한다는 집안일들을 내가 잘해내니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기 아들과 사위들을 비교하여 위축감을 가지고 은연중 심술이 나가지고는 “데려다 키운 새끼들이 다 필요 없소. 아재도 광일이 이제 보오. 제멋에 자랐다고 하지 않나.”하며 나를 상관하지 말라고 남인데 이젠 제 뿌려두라고 늘그막엔 돈이 자기 손에 있어야 한다고 추동질을 하여 그 말이 옳다고 생각한 어머니가 나를 외면하다시피 하셨다.

어머니는 북한의 그 어렵던 90년대 중반기에도 돈이 있으면서도 갓 결혼해서 정말 힘들게 살아가는 내가 좀 도움을 바라면 매정하게 외면했으며 그것이 가슴에 맺힌 나는 어머니에 대한 원망에 체포될 당시에는 길가에서 보아도 서로 모르는 것처럼 지내다보니 이런 어머니를 나를 위해 그런 걸음을 시킬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구류장에 있을 때와 교화소에 갔을 적에 9번을 면회 왔다.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 더 있다고 그 정이 있어 어머니는 구류장에서 나한테 한 말을 지켰던 것이다.

그 여름날, 그 겨울 길에 늙은 몸이 면회 짐이 너무 무거워 두 번에 나누어 가지고 한 50m를 날라 가곤 돌아서서 나머지를 지고는 또 50m를 나르고 하며 그래도 힘이 정 부치면 소나무가지를 꺽어 눈발구 삼아 거기에 짐을 싣고 끌고 나를 찾아 교화소로 오군 했다.

지금도 그 먼 길을 나를 위해 무거운 짐을 지고 힘들게 다녔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살아서 마음고생만 시킨 내가 너무도 죄스러워 벼락을 맞는대도 할 말이 없다.

지금은 어머니가 이 세상에 없다. 2008년 내가 출소한 다음해 6월 17일 어머니는 78세로 내 무릎을 베고 눈을 감으셨다. 출소한 후에 여태껏 못한 효자노릇을 해보려는 내 마음을 어머니는 알아주지 않고 가셨다.

간간히 북한의 황망한 언덕에 주인 없이 누워있을 어머니를 생각하면 죄스러움에 잠 못 이룬다. 이제는 찾을 길도 없어 한식, 추석날이면 숙연한 마음만 그 하늘밑으로 보내면서 저승에서의 어머니의 명복을 빌 뿐이다.

- 다음에 계속 -

2010년 5월 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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