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두만강가에 나의 인생을 묻었다 - 정은아 (1)
  • 관리자
  • 2010-06-07 1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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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수기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은 탈북여성 정은아(가명) 씨의 수기를 필자의 동의를 얻어 3회에 걸쳐 게재합니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져버린 이름 탈북자. 그러나 그들이 가슴에 안고 있는 눈물 겨운 사연들은 언제나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이 수기를 통해 탈북자들을 더 많이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봅니다. 편집자 주(데일리NK)


1. 병마에 너무도 고통스러워 죽여달라고 했지만…

끊임없이 이어지며 대한민국으로 찾아오는 탈북자 수는 올해로 2만을 채워가고 있다. 고향과 부모, 형제를 등지고 죽음의 고비를 넘어 이곳에 이르기까지 2만 여명의 탈북자들이 걸어온 인생행로는 저마다 각이하다.

누구는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누구는 감옥행을 가기 싫어 또 누구는 자유를 찾아서 각 자 서로 다른 이유로 이 길을 택했지만 우리들 모두에게는 꼭 같은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즐겁게 웃고 떠드는 순간에도, 행복으로 가슴 벅차는 순간에도 마음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 잡힌 채 결코 지워지지 않고 끊임없이 자아를 괴롭히는, 사랑하는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들이다.

탈북자 누구나 그렇듯 나 또한 떠나고 싶어 떠난 땅이 아니며 넘고 싶어 넘은 두만강이 아니다. 그러나 아무리 있으려 해도 더는 견딜 수 없어 그 땅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나이고 우리들이다.

암담한 마음으로 삭막한 두만강 가에 서서 뒤편에 펼쳐진, 칠 흙 같은 어둠속에 묻혀 불빛 한 점 보이지 않는 내 고향을 뒤 돌아볼 때 내 마음속에도 음산한 어둠만 가득 찼고 눈앞에 펼쳐진 두만강 건너 중국 땅에서는 온갖 미련 다 버리고 어서 오라 수천 수 만개의 아름다운 불빛들이 손짓하며 명멸하고 있었다.

그 날 나는 뒤에 남겨지는 그 땅에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묻어 버렸다. 순진하고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과 처녀 시절, 불행과 슬픈 상처만을 가슴속에 남겼던 결혼생활, 또 다른 고통의 연속이었던 10년간의 독신생활, 결핵병원의 사체실 옆 지옥 같은 방에서 목구멍을 넘어 수돗물처럼 쏟아져 플라스틱용기에 가득 차던 피를 볼 때마다 전율하며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던 그 순간들...

고통에 몸부림치며 차라리 그냥 죽게 내버려 달라고 눈물 흘리던 내 손을 잡고 죽으면 안 된다고, 용기를 내라고 힘을 주던 고마운 의사선생님과 운신도 못하던 내 몸을 엄마처럼 닦아주고 지켜주던 21살의 간호사 처녀들, 죽음의 고비를 넘어 일어섰을 때 그럴 줄 알았다고, 의지가 강한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며 격려해주던 고마운 분들...

함께 기뻐하고 함께 아파하며 고통과 슬픔의 바다를 헤쳐온 내 어머니와 형제들, 고마운 분들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싶었다. 아니 잊으려 하고 지우려 해도 뜻대로만 되지 않는 그 모든 것들을 두만강 가에 선 그 순간에만은 지워버렸었다.

달빛이 어린 두만강 물에 섞여 엄마에게 울부짖던 내 말소리가 들린다. ‘혼자서 죽도록 고생했어도 견뎌 냈는데 내 엄마, 내 형제한테 와서 이렇게 병에 걸렸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집에 오지 말것을...’ 한 달간의 줄 기침 끝에 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고 통곡하며 뱉는 내 말에 억이 막힌 엄마는 미처 말도 못했다.

홀몸으로 온기 한점 없는 한산한 숙소에서 추위에 온 몸을 떨다가 얼음같은 몸을 이끌고 직장으로 출근하느라 정신없이 살던 그 때 이미 병이 온 것을, 기댈 곳이 없어 아파도 쓰러지지 못했던 육체가 엄마랑 혈육에게 왔으니 맥이 놓여 그리된 것을 엄마 탓, 형제 탓 하다니... 생각하면 내 병 치료 때문에 고생하던 엄마와 동생, 조카들 생각에 미안하고 안쓰럽다.

이가 다 빠져 간신히 옥수수밥 잡수시던 늙으신 어머니와 좋아지지 않는 세간 살이 하며 병 든 누이 돌보느라 세대주 대접 한번 제대로 못 받아 보고 부대끼던 동생, 옥수수밥 앞에 놓고 고모 앞에 놓인 이밥 그릇만 뚫어져라 건네다 보던 어린 두 조카들, 가냘픈 몸매에 병든 시누이 시중까지 들라 웃음 한번 제대로 찾아보기 힘들던 올케의 모습...

숟가락에 담아 입에 떠 넣는 것이 밥 같지가 않아 돌을 씹는 것 같고 목구멍으로 넘어 가는 음식은 깔깔한 모래알 같아 끼니마다 수저를 들지 못하는 내 모습이 민망해 올케는 어린 조카들을 윽박질러 밖으로 내어쫒기도 했었다.

병 치료는 끝났으나 식구들에게 짐 되는 것이 미안해 혼자 밥벌이라도 해보려고 애쓰다 재발된 병세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몸이 완쾌되기 시작될 무렵, 나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큰 언니의 집으로 떠나갔고 출근하는 동생과 아직 몸이 추서지 못한 내게 어린 조카들을 맡겨두고 본가에 다녀온다며 떠난 올케는 한 달이 되어 오도록 소식조차 없고, 속이 타 술 한잔 마시며 ‘두 번이나 살려줬으니 인젠 누이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고 사정하듯 말하던 동생의 목소리..

2. "무섭다니, 다버리고 가는 사람이 뭐가 무서운가?"

병 치료는 끝났으나 식구들에게 짐 되는 것이 미안해 혼자 밥벌이라도 해보려고 애쓰다 재발된 병세로 죽을 고비를 넘기고 몸이 완쾌되기 시작될 무렵, 나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어머니는 큰 언니의 집으로 떠나갔고 출근하는 동생과 아직 몸이 추서지 못한 내게 어린 조카들을 맡겨두고 본가에 다녀온다며 떠난 올케는 한 달이 되어 오도록 소식조차 없고, 속이 타 술 한잔 마시며 ‘두 번이나 살려줬으니 인젠 누이 혼자 알아서 살아가라’고 사정하듯 말하던 동생의 목소리..

내가 힘든 만큼 그들도 힘들었으리라. 내가 아픈 만큼 그들도 아팠으리라. 그래도 병든 나는 그들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을 어찌하랴.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그들의 곁을 떠나주는 것이었다.

그 몸으로 괜찮겠냐고 걱정하는 동생에게 하직 인사 나누고 길을 떠났으나 갈 곳 없어 이 곳 저 곳 헤맨 끝에 마침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두만강 가에 섰을 때의 내 모습은 틀림없이 허울만 남은 ‘산송장’의 모습이었으리라.

그 곳에서 소중한 것들을 모두 버렸었다. 버리면 안 될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안고 가면 무거운 짐이 되어 두만강으로 들어서는 나의 두 발목을 잡을까 두려워 그 순간만은 버렸다.

‘내게는 아무도 없어. 부모도 형제도 친척, 친우도 없어. 세상천지 아무도 없는 나야. 그래, 나는 기댈 곳도 의지할 곳도 아무것도 없어서, 고아여서, 홀몸이어서 가는 거야...’ 두만강의 저편에서 이편으로 넘어서던, 내 인생을 완전히 바꾼 그 2분간 나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뇌었던 것은 오직 이 말 뿐이었다.

함께 손잡고 두만강 물에 들어선 19살내기 연이가 무섭다고 훌쩍인다. 무섭다니, 뭐가 무서운데, 다 버리고 가는 이가 무서울 것이 뭐가 있는데...

"너 이만한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왔어? 울지 마." 독이 밴 나의 조용한 목소리에 연이가 울음을 그쳤다. 그랬다. 아무 미련도 두려움도 없었다.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그 순간만큼은 소중한 내 목숨도 생각지 않았다.

그렇게 넘어왔다. 내 고향의 끝인 두만강을... 다 버리고 텅 빈 가슴엔 ‘죽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한마디만 달랑 품은 채...꽉 꽉 채워진 얼음에 간신히 남아 있는 그 한마디가 강가에 선 내게는 인생의 목표였다.

한번 묻어버린 소중한 추억을 다시 꺼낼 기회는 북송의 위험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중국 땅에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열심히 일하고 싶어도 일할 곳 없고 어딜 가나 탈북자에게 보내지는 불신과 위험의 눈총에 견디기 어려웠던 나날들...

더러운 수욕을 채우려다 말을 듣지 않으면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던 사람들을 피하며 조선족이라 속이고 간신히 취직한 회사생활, 열심히 일해서 사장할머니의 사랑을 독차지한 내가 아니꼬워 북한여자라고 저희들끼리 수군대며 공안에 고발하라 추겨대던 조선족들, 그래도 나는 어찌 할 수 없어 그냥 혼자 화장실에서 얼굴이 퉁퉁 붓게 울었다.

갈 곳이 없는 것을 어찌하랴. 내가 이제 어디로 더 갈 것인지, 더는 피하고 싶지 않고 도망치고 싶지도 않았다. 이 구차한 목숨 부질없이 유지하려 발버둥치지 말고 그냥 이 곳에서 끝을 내고 말자. 그러나 하늘이 보기에도 나의 운명이 너무 가혹해 보였는지 생각지도 않게 목사분이 오셔서 사람 잡이에 미친 그들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영문 모르는 목사님의 두 손을 꼭 잡고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이는 내 두볼로는 하염없는 눈물만 흘렀다.

그것이 중국에서 나의 생활이었다. 절망 끝에 한국으로 갈 수 있다는 친구의 소개를 듣고 1박 2일을 기차에 몸을 싣고 천방지축 찾아갔으나 그 곳서 나를 기다린 것은 또 다른 북송의 위험과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림이었다.

살점이라도 떼줄 듯이 살뜰하던 사람이 자신의 수욕을 채울 수 없게 되자 공안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하던 순간에 참고 참았던 분노와 원한이 터져 그 자리를 뛰쳐 나왔으나 갈 곳은 없었다.

지켜주는 나라도 없고 죽어도 돌아볼 이 없는 내가 거리를 헤매다 폭풍이 울부짖는 바닷가에서 세찬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은 저 속엔 과연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이렇게 살려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예까지 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만강가에 묻어버린 지나온 나의 삶, 비록 아프고 힘든 추억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었다.

3. 대한민국에 오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지켜주는 나라도 없고 죽어도 돌아볼 이 없는 내가 거리를 헤매다 폭풍이 울부짖는 바닷가에서 세찬 파도를 바라보며 생각했던 것은 저 속엔 과연 내가 있을 자리가 있을까, 이렇게 살려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예(중국)까지 오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두만강가에 묻어버린 지나온 나의 삶, 비록 아프고 힘든 추억들도 많았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언젠가는 다시 꺼내어 내 마음속에 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었다.

철없던 시절 내가 부모님의 품에서 아무 걱정 없었던 것처럼 그렇게 행복한 날들이 다시 오게 되면 제일 먼저 묻어둔 나의 엣 추억들을 조금씩 꺼내 보려 했지만 과연 그런 날이 올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었다.

또다시 1년 반이라는 피 말리는 기다림, 그리고 마침내 이(한국) 땅에 왔다. 다시 한번 목숨을 걸고 중국에서 삼국으로의 탈출이라는 극적인 인생의 포물선을 새로이 그리며 대한민국으로 왔고 여기서 나는 지금 행복한 삶을 누리고 있다. 고통스러웠던 그 모든 추억을 뒤로 한 채.

가까이 있어도 멀었던 이 곳, 분명히 하나인 우리 땅이지만 60년의 분단이 안겨준 이질감으로 힘들고 어려운 순간도 많다. 그래도 나는 이 땅에서 내 인생에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보낸다.

대한민국에 온 내게 처음으로 새 생활에 대한 희망과 소중한 꿈을 품게 해주었던 하나원과 살뜰했던 선생님들은 오랫동안 슬픔과 고통의 미궁 속에서 헤매던 나의 넋을 안정시켜 주었다.

하나원을 수료하고 나온 내게 아담하고 자그마한, 내 인생에 처음으로 내 이름 석자로 차례진 임대주택은 새로운 내 삶의 소중한 보금자리로 자리 잡게 되었다.

가끔 힘들 때마다 나는 그 날의 두만강가를 떠올린다. 암흑과 광명의 가운데 서서 뒤돌아보며 버릴 수밖에 없었던 내 삶의 슬픈 추억들과 오늘을 위해 맞바꾸려 했던 귀중한 내 목숨, 그리고 목숨을 건 대가로 얻어진 오늘의 소중한 자유와 행복을 생각해 본다.

그러면서 ‘요만한 게 무슨 고생인데, 이 대한민국에 오려고 목숨도 걸었었는데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 오늘의 내 삶이 얼마나 행복한데...’라고 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그렇게 비우고 또 비워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새 삶을 만들어 가며 마음속에 아름답고 즐거운 추억거리를 하나씩 하나씩 채워간다.

처음 먹어보는 생문어회를 보고 질겁해 비명을 질러 주변 분들이 깜짝 놀라던 일, 지하철을 잘못 타 30분이면 갈 곳을 2시간이나 돌고 돌던 일, 집을 배정받은 첫 날 밖에 나갔다가 꼭 같이 생긴 아파트들을 보고 집을 찾을 수 없어 몇 시간을 헤맨 끝에 간신히 찾은 내 집 현관 앞에서 혼자 배를 잡고 웃던 일..

몸도 약한 내가 한국에서의 어려운 생활을 이겨낼 수 있을지 스스로 걱정일 때 내게도 면접이라는 행운이 차려졌고 부족한 나와 함께 일하자며 선뜻 손 내밀어주던 사람들, 아무 것도 모르는 내게 차근차근 가르쳐 주며 오늘의 내가 있게 해준 직장의 동료들, 익숙되지 않은 한국 생활의 부적응으로 몸살을 앓아누운 내게 다정히 대해주던 고마운 사람들...

그리고 지금은 두만강 가에서 소중하면서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그 모든 것들을 파내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 소중히 담아 안고 남북이 하나 될 통일의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살고 있다. 그 날이 오면 내 고향의 그리웠던 이들에게 나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진 대한민국에서의 아름다운 삶의 갈피들을 모두 퍼내 보여주려고...

2009년 11월 정은아

자료제공 : 데일리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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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안촌사람님의 댓글

성안촌사람 작성일

고향이 어디신지요?
이산가족이 있는 제주사람이고 동래정씨입니다.
매우 가슴이 아파 눈이 흐릿하고 울컥합니다. 힘내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