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수기]
우리 가족의 운명
- 북민위
- 2024-04-24 06:31:47
- 조회수 : 239
1) 뜻밖에 알게된 사실
제가 자란 곳은 함경북도의 어느 농촌마을이었습니다. 이 마을은 봄이 되면 살구꽃과 사과배꽃들이 만발하는 물 맑고 공기 좋은 아담한 마을이었습니다.
저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범하고 부지런한 농사꾼이었고 형제는 네 형제로서 맏딸인 저와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 있었고 총명했던 형제들은 이웃과 선생님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평범하고 소박한 농장원의 집안의 자식으로서 대학시험에 응시하게 된 것 만으로도 큰 기쁨이었던 저희 부모님은 정성을 다하여 저를 지원해 주셨습니다.
무사히 시험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송평 역전대합실에서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낮선 할머니가 저에게 다가와 어디서 왔느냐, 어디로 가느냐, 여기는 무엇하러 왔느냐 면서 묻기 시작했습니다.
할머니께 대답드리고나서 의아한 생각에 왜 그러시냐고 물었더니 할머니는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한가지 물어보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뜻 물어보시라고 했더니 "거기에서도 배급을 안주느냐"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뜻밖의 질문을 받고 저는 엉겁결에 "우리 있는 곳에서는 다 준다" 고 대답 드리니 할머니 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배급카드를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카드는 1992년도부터 미정배급카드였는데 할머니는 지금 3년째 미공급 배급카드를 가지고 있으면서 언제면 줄까 하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왜 국가에서 배급을 안주느냐고 이게 몇 해인가, 먹어야 노동자들도 일을 할 것이 아니냐며 오늘 아침에도 자기 탄광을 다니는 아들은 굶어서 갔다고 이렇게 허기진 채로 어떻게 일하겠느냐며 하소연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그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식량난을 겪고 있는 청진시 노동자들의 실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10년 전의 일이었지만 지금도 저의 눈앞에는 그때의 그 할머니의 모습과 그 할머니의 말씀이 눈에 선하고 귀에 생생히 들려오는 것만 같습니다.
제가 집에 돌아와 어머니께 이 할머니에 대해 이야기하니 어머니 역시 여기도 마찬가지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저희 할머니가 배급을 탈 대상자였는데 우리 할머니도 배급을 타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수령님께서 돌아가셨으니 이제 식량난은 더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집은 그래도 농사꾼 집안이니 이 정도는 되는 것이고 현재 배급 타는 사람들은 식량난이 말이 아니며 모두가 농촌으로 식량을 꾸러 간다는 것이었습니다.
2) 월남자가족의 슬픔
그런 와중에서 저는 대학통지서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집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그토록 기다렸던 대학 합격 통지서는 끝내 오지 않았습니다.
불합격이었던 것입니다.
저의 앞길에 놓여있던 장애를 저는 몰랐던 것이었습니다.
후에 안일이지만 저의 집안은 남쪽으로 내려간 할아버지로 하여 월남자 가족의 딱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대학시험을 잘 치렀다고 확신에 차 있었던 저는 가정에 이러한 사정이 있는 줄도 모르고 합격 통지서만을 그토록 애타게 기다린 것이었습니다.
오중흡사범대학은 교원양성대학으로서 이런 출신 성분이 좋지 못한 자들은 절대로 합격될 수 없으며 학생을 가르치는 교원이 좋지 못한 성분의 가족이면 학생교양을 시킬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던 저는 다른 수험생들보다 실력이 낮아서 불합격한 것인 줄 알고 재도전하기 위해 시험 준비에 더욱 열중했습니다.
낮에는 힘든 협동농장일을 하고 밤에는 눈을 비비며 학업에 열중했던 결과 저는 2년 만에 다시 대학예비시험에 응시 할 수 있게 되었으며 우수한 성적으로 다시 대학추천을 받는 큰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번에는 지망을 바꿔 청진시 수남구역에 위치한 고등경제전문학교에 응시했는데 그 때가 아마 9월1일 개학이 4월1일 개학으로 바뀌는 등 교육제도가 바뀐 후의 첫 시험인 것 같았습니다.
밤낮없이 학업에 열중했던 저는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저와 저의 가족은 하늘을 날듯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때는 온 나라가 식량난으로 힘든 시기였고 집에서는 저의 상급학교 합격통지서에 기쁨보다는 걱정이 더 커져만 갔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서든지 참고 견디며 열심히 공부하겠다는 의지로 가득했으며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청진 고등경제전문학교로 향하였습니다.
하지만 평범한 농사꾼 집으로서는 학비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고 저의 의지는 허물어져 가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처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런 것은 불가능 했고 학교는 말이 대학교이지 그 안의 최우등생조차 실력이 형편없는 수준이었습니다.
학교경비를 서는 당번 날에는 당직근무 선생님의 식사비를 학생들에게 부담을 시켰고 학생들에게 수시로 농촌 돕기 과제로 맡겨지는 인분퇴비 그리고 구리등도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했던 저는 할당량을 채울 길이 없어 돈으로 내야했습니다. 이렇게 되다보니 부모님은 저를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당시 제가 속한 학급에는 노동자나 농민의 자식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저는 가족이 굶어 죽게 된 마당에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었고 곧 좌절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허무함과 서운함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단지 열정과 의지만으로는 바꿀 수 없는 현실을 괴로워했던 그때가 지금도 생생하기만 합니다. 이렇게 되자 저는 3년제였던 학교를 1년 다니고 2학년 1학기에 중퇴하게 되었습니다.
슬픔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사회에 나오게 된 저는 고향에 자리 잡고 있는 모피공장 후임 부기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부기라는 직책은 현금을 다루는 직업, 노동자들에게 월급을 나누어주고 공장 재산 문건을 작성하는 직업으로서 회계원의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경험도 없는 상태이고 단지 전문학교에서 일 년 동안 배운 지식뿐이었으므로 현장 일을 하면서 경험 많은 부기원들을 따라다니며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공장에 들어간 지 일 년쯤 되자 공장 당비서가 저를 찾아와 간부부 이력서문건을 쓰라고 했습니다. 저는 간부부 이력서를 쓰게 되었고 저의 이력서는 곧 시당간부부에 입송되었습니다.
애타게 기다리던 저의 비준문건은 부결되었으며 그 때 저는 우리 가족의 숨겨진 큰 아픔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의 아버지는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친할아버지라는 분은 아버지가 태어나기도 전인 6월 25일 전쟁시기에 남쪽으로 가게 되었고 그로인하여 우리 가족은 여기 국경지대로 추방되어 오게 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너무나 서러운 가족의 과거를 알게 된 저의 심정은 참담할 따름이었습니다.
누구보다도 가장 가슴 아파한 것은 부모님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이 얼굴한번 보지 못한 친아버지의 월남으로 인해 어려서 부터 고통을 겪으며 자라야 했으며 이제 와서는 그것이 자식들에게까지 영원한 장애가 되었으니 얼마나 가슴 아프셨겠습니까. 월남자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를 이어 상처 받아야만 하는 우리가족에게 기쁨과 희망은 사치였습니다.
아버지는 10년간 농장에서 분조장으로 일하면서 목표량 성취를 미달한 적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일해 왔지만 당에도 가입조차 할 수 없었고 돌아오는 것은 자식들 앞에 놓인 장애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월남이라는 죄아닌 죄때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늘 당이 어머니라 하지만 어머니 구실 못하는 당이 과연 어머니 당이란 말을 할 수 있는 것인지...
어머니는 아홉 자식의 행복보다 불행한 자식 하나에 마음을 더 기울인다는데 어머니다운 당이 어찌 불행한 자식의 슬픔을 더 가슴 아프게 하는지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가족이 전쟁으로 헤어졌으면 불쌍히 여기고 더 돌봐 주기는커녕 오히려 의심을 하고 박해를 하고 있으니 이런 가족들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입니까.
철없던 저는 아버지를 원망했고 할아버지가 한없이 밉기만 했습니다.
제 앞에 놓인 좌절과 서러움이 큰 상처로만 생각될 뿐이었습니다.
그토록 다니고 싶었던 전문학교 시절이 생각났고 그것을 그만두게 되고 이젠 미래까지 어둡다는 것을 알게 되니 자살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움만 커져갔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저는 청진시 도 보안 간부학교에 다니는 남자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와의 관계도 도저히 결합 될 수는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생각 끝에 우리사랑은 도저히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저는 단념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남자 가족이라는 죄아닌 죄로 많은 것을 잃게 된 고통은 참으로 컸습니다.
저희 가족이 배척당하고 따돌림 받고 의심받으며 살아야만 했던 그때의 삶은 지옥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24살 되던 해 10월, 월남한 할아버지의 얼굴조차 한 번 보지 못했던 아버지는 급작스럽게도 한 맺힌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 작업장에서 뇌출혈로 돌아가신 것 이었습니다.
할머니 뱃속에서 부터 월남자 자식의 설움을 안고 태어나야 했으며 희망과 미래도 없이 남들에게 말 한 마디 조차 떳떳이 해보지 못하고 사회의 눈치를 보는 사회인으로 살아야만 했던 아버지, 세상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 우리 자식들에게 미안했다는 말밖엔 남길 수 없었던 불쌍한 우리 아버지...
얼굴 한 번 보지도 못했던 할아버지의 죄 아닌 죄를 자신이 한 평생 짊어지고 온갖 수모를 받으며 살다가 죽음의 그 순간이 비로소 행운의 길이 되었을 아버지를 생각하면 지금도 한 없이 가슴이 저며 옵니다.
불효하고 철없기만 했던 저로 인해 많이 속 타고 많이 가슴 아팠던 우리 아버지.
자식들에게 마지막 하나라도 도움을 주기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일하러 나가야만 했던 우리 아버지의 죽음은 적어도 저에겐 순교자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위해 끝까지 일하다 일터에서 죽은 아버지의 죽음은 어느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죽어서도 월남자 자식의 죄만을 안고가야만 했던 불쌍한 아버지였습니다. 지금도 소달구지에 실려 왔던 아버지 시신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기만 합니다.
그때의 제 마음은 마치 저로 하여 아버지가 세상을 뜨게 된 것 같은 죄책감으로 가득했고 철없이 행동한 시절이 얼마나 후회스러웠는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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