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 섭정 중인 장성택 ‘수양대군’되려나?
- 솔개
- 2012-01-27 11:35:43
- 조회수 : 2,078
김정일 장례기간인 12월 25일 사람들을 놀라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김정일의 매제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인 장성택이 대장 군복을 입고 나타난 것이었다.
대장 견장을 달고 기존의 군 장성들 사이에 천연스럽게 서 있는 장성택을 보는 순간 “이제 북한의 미래는 장성택의 손에 달렸구나”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장성택이 대장을 달게 된 경위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들은 김정은이 장성택에게 의지하기 위해 대장 칭호를 수여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나는 김정은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장성택이 스스로 달았다고 본다. 물론 김정은에게 “내가 대장을 달아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겠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했다는 것은 김정은에게 고모부의 욕심을 막을 힘이 아직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일은 생전에 장성택에게 대장 칭호를 주지 않았다. 장성택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보위부, 보안서를 관할하는 노동당 행정부장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군, 비밀경찰, 경찰 등을 사실상 틀어쥘 수 있는 무소불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이런 장성택에게 군 직함인 대장까지 수여하면 그의 힘이 너무 커져서 김정은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10년 노동당 대표자회의 때 여동생 김경희를 포함해 일부 노동당 비서에게 무더기로 대장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장성택은 외면했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실세이긴 하지만 장군복을 입지 않은 부위원장은 그나마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부친의 이런 우려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김정일이 죽자마자 불과 며칠 만에 장성택은 김정일이 우려하던 장성 군복을 스스로 입었다.
이건 단순한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북한 정책 전반을 장성택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김정일이 쳐놓고 간 마지막 견제선도 거리낌 없이 훌쩍 뛰어넘는 마당에 다른 정책쯤이야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송이 김정은도 아직 고모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힘은 없어 보인다. 김정일의 자녀는 김경희의 보살핌 하에 자란다. 김정남 때부터 그랬다.
어렸을 때 태자와는 거리가 먼, 후계 구도에서 멀어져 있던 김정은을 장성택이 어려워했을 것 같지도 않고 김정은 역시 고모부의 말을 잘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서 고모부에게 갑자기 위신이 설리 만무하다. 김정은으로써는 차라리 당분간은 장성택과 공생하면서 고모부가 2인자에 만족하면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하긴 김정은이 장성택 만큼 믿을 사람도 찾기 어려운 것도 한 이유다.
40년 가까이 김정일의 오른팔로 살아오면서 통치 방법부터 시작해 웬만한 간부 개개인별 성향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장성택의 화려한 경력은 김정은에게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더구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김정은에게 장성택의 카리스마는 통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장성택의 섭정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에 있다. 장성택이 ‘북한판 수양대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럴 경우 김정은이 과연 장성택을 어떻게 견제할지도 관심사다.
과연 장성택은 수양대군이 되려 할까. 가지고 있는 힘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무리 이영호 총참모장이니, 김영철 정찰국장이니 하는 군 실세들이 김정은을 보좌한다고 해도 벼락출세한 이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성택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인간들일 뿐이다.
장성택이 이미 2인자였던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은 장성택의 발치에도 가보지 못했던 인간들이다.
하지만 장성택이 수양대군이 되기엔 2% 걸리는 점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통성을 강조하는 북한에서 장 씨는 왕의 핏줄이 아니다. 장성택은 혈통에 있어서만큼은 수양대군과 비교할 수 없다.
그가 올라서서 북한을 다스리는 순간 전국에서 숨죽여 있던 반항의 불길이 확 타오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차라리 김정은을 내세워 실권을 틀어쥔 2인자로 만족해 사는 것이 장성택에겐 훨씬 나은 선택일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따져볼 때 당분간 장성택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성택의 지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간부들에겐 김정은 지시만큼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김정일 생전인 2004년 장성택이 실각한 이유도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컸던데 있었다.
장성택이 2002년 10월 한국에 경제시찰단 18명 중 일원으로 왔을 때 경제시찰단장인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도 장성택을 깍듯이 대해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국정원 3차장을 지냈던 한기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에 따르면 “2003년경 박봉주 당시 내각 총리가 평양시 광복거리 건설공사에 자재를 우선 공급하라고 지시했을 때 담당자들이 ‘장성택 부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한 게 실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총리 말보다 장성택의 말이 더 힘이 큰 것을 본 김정일이 그를 견제했다는 분석이다.
장성택에겐 측근도 많다. 2004년 김정일이 장성택을 좌천시킨 구실은 측근끼리 끼리끼리 뭉쳐 흥청댄다는 것이었다. 장성택의 측근이 초호화 결혼식에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장성택은 측근들을 확실히 챙기는 등 의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실제로 2004년 그가 좌천될 때 그의 측근들도 함께 각 지방으로 해임돼 혁명화를 내려왔는데, 장성택이 다시 복권된 뒤 측근들도 거의 다 다시 복권됐다.
문제는 장성택의 의중이 앞으로 개혁 쪽으로 갈까 폐쇄 쪽으로 갈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행적으로 봤을 때 장성택은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그는 북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2002년 한국 방문 등으로 남쪽과 세계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다. 당시 남쪽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울 지하철, 코엑스몰, 지방공장, 제주도 등 곳곳을 둘러봤다. 이때 서울의 한 룸살롱까지 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처음에는 차분하게 술을 마시던 장성택이 나중에는 폭음을 하면서 ‘공화국의 앞날이 걱정이다’고 한탄을 하더라”고 전했다.
장석택은 “어떤 정책수단을 써도 북조선 경제를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고 이튿날 일정까지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북에 돌아갈 때는 여성 팬티와 브래지어만 수천 장을 사서 돌아가는 바람에 “비행기가 못 뜬다”는 수군거림이 나올 정도였다. 무게가 1t이 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한국산 여성 속옷이 선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주변에 챙겨야할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성택이니 한국에 와서 눈치 보지 않고 여성 속옷 수천 장을 사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장성택은 노동당 행정부장에 오른 뒤에는 탈북자 처벌을 강화하는 등 폐쇄 강경정책을 주도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실리는 체제 유지라고 할 수 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특정 정책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탈북자 사살 지시 등 강경정책을 내놓는 배후에는 장성택의 조언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사망 발표문 마련부터 부검 사실 공개, 주민들에 대한 통보 방식, 애도기간 선포 등에서 나는 전권을 쥔 장성택의 입김을 뚜렷이 느꼈다. 장례 경험이 없는 김정은이 아닌 1994년 김일성의 장례를 직접 치러본 장성택이 뒤에서 모든 장례 절차를 총괄 지휘하는 듯 했다.
현재 북한 체제는 김정은, 김경희, 장성택의 가족경영체제의 틀을 갖추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대장이다. 이중 핵심은 장성택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장성택은 1960년대 말 김일성대학에 입학해 김경희와 같은 반이 되면서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장성택의 부친은 일제 때 길주 명천 지방에서 반일 농민운동을 하다 체포됐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1968년 이전까지는 해방 전의 국내 반일활동도 인정해주던 분위기라 장성택은 성분이 좋아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68년 갑산파가 숙청되면서 장성택의 성분도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됐다.
그런데 그런 그가 김경희의 눈에 들게 됐다. 김경희는 앞자리에 앉은 장성택의 귀를 풀대로 간질이면서 놀리는 식으로 교제를 하다가 사랑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장성택은 음주가무에 능하고 손풍금을 잘 치며 말솜씨가 좋은 호방한 미남으로 여학우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장성택에게 반한 김경희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장성택과 살겠다고 고집한다. 원래 김일성은 군부 출신의 사위를 생각했다. 김정일은 당에서 사위는 군에서 자신을 보좌하게 할 계획이었다.
김경희를 막기 위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는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김경희는 주말마다 아버지의 차를 직접 몰고 원산까지 내려가 장성택의 기숙사에서 밀린 빨래까지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대학 교직원들은 처음에는 수상이 현지지도를 오는 줄 알고 비상을 걸었다가 수상의 차에서 새파란 여성이 내려 기숙사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런 김경희의 고집에 김일성과 김정일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미천한 출신에서 일약 ‘부마’ 자리에 오른 장성택은 김정일의 눈에 들기 위해 젊어서부터 온갖 열성을 다 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외교담당 과장으로 있던 1970년대 중반 김정일에게 피로회복관이라는 명목으로 호화관저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충성의 자금’ 마련을 위해 북한 외교관들이 마약을 밀매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음주가무를 좋아하던 그는 1978년 측근들과 여인들을 불러다 김정일을 흉내 낸 연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사실이 보위부의 감시에 포착돼 김정일에게 보고 됐다.
김정일은 격노했다. 누이동생과 함께 사는 매제라는 자가 딴 여인을 끼고 노는 것도 분노할 대목이지만 더욱 노여운 점은 감히 자신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분노를 산 장성택은 2년 동안 강선제강소에서 작업반장을 지내며 혁명화를 했다. 이 무렵부터 결혼생활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 김경희는 술에 빠져 살았다.
장성택은 1989년 노동당 청년사업부장을 지냈으며 1995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지냈다. 하지만 김정일의 매부라는 것 때문에 1980년대부터 ‘장 부장’으로 불리며 직책에 관계없는 권력 2인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앞으로도 2인자로 만족할지 아니면 더 큰 야망을 꿈꿀지 현재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1970년대 ‘왕’의 부마의 신분에서, 1990년대 말에는 ‘왕’의 매제에서, 2012년엔 ‘왕’의 고모부로 신분이 바뀌어 온 장성택이다. 분명한 점은 그가 부마나 매제보다 고모부 신분이 된 지금이야말로 생애 최대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장성택에겐 당분간은 체제 유지가 첫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 장례가 끝나자 마자인 1월 4일 장성택이 자기의 매부인 전영진을 쿠바 대사로 파견한 것에 주목한다. 두 형이 모두 사망한 지금 매형은 장성택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척이기도 하다. 김정일이 그리 했듯이 말이다.
대사 파견은 친인척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왜 하필이면 쿠바 대사일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나갈 모델을 중국과 베트남 등에 고착시켜 보고 있지만, 사실 쿠바야 말로 진짜로 주목해야 할 나라이다. 미국과 같은 발전된 적대국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권력 이양도 순조롭게 했고 경제개혁도 큰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잘 해나가고 있다.
자영업자 육성, 농산물 직거래 도입, 부동산 매매 자율화 등 북한이 앞으로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지금 쿠바가 밟고 있다.
나는 장성택이 매형에게 쿠바에 직접 가서 경제개혁 사례를 연구해 보고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 섞인 관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1980년대 외교부 부부장이던 전영진은 개혁개방을 주장하다 6년 동안 혁명화를 갔던 경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전영진이라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 내 보기엔 사치하지 않고 겸손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장성택의 또다른 심복인 이광근 전 무역상 역시 새해 벽두부터 북한 투자유치를 담당한 책임자로 임명돼 베이징에 파견됐다.
앞길이 절망적인 북한의 경제 상황을 타개할 활로를 제시하면서도 권력을 절대 내놓지 않을 그런 과제는 어린 김정은이 아닌 노회한 장성택의 몫이다.
장성택은 2012년의 북한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할까. 그리고 2013년은……
주성하기자 2012.1 25
대장 견장을 달고 기존의 군 장성들 사이에 천연스럽게 서 있는 장성택을 보는 순간 “이제 북한의 미래는 장성택의 손에 달렸구나”하는 생각이 머리 속을 스쳐지나갔다.
장성택이 대장을 달게 된 경위에 대해 거의 모든 언론들은 김정은이 장성택에게 의지하기 위해 대장 칭호를 수여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나는 김정은이 수여한 것이 아니고 장성택이 스스로 달았다고 본다. 물론 김정은에게 “내가 대장을 달아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했겠지만, 결국 자기 뜻대로 했다는 것은 김정은에게 고모부의 욕심을 막을 힘이 아직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김정일은 생전에 장성택에게 대장 칭호를 주지 않았다. 장성택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보위부, 보안서를 관할하는 노동당 행정부장의 직함을 갖고 있었다. 군, 비밀경찰, 경찰 등을 사실상 틀어쥘 수 있는 무소불위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김정일은 이런 장성택에게 군 직함인 대장까지 수여하면 그의 힘이 너무 커져서 김정은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다는 우려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2010년 노동당 대표자회의 때 여동생 김경희를 포함해 일부 노동당 비서에게 무더기로 대장 칭호를 수여하면서도 장성택은 외면했다.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실세이긴 하지만 장군복을 입지 않은 부위원장은 그나마 힘이 빠지기 때문이다.
김정은이 부친의 이런 우려를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김정일이 죽자마자 불과 며칠 만에 장성택은 김정일이 우려하던 장성 군복을 스스로 입었다.
이건 단순한 하나의 현상이 아니라 앞으로 북한 정책 전반을 장성택이 자기 마음먹은 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 김정일이 쳐놓고 간 마지막 견제선도 거리낌 없이 훌쩍 뛰어넘는 마당에 다른 정책쯤이야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애송이 김정은도 아직 고모부에게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있는 힘은 없어 보인다. 김정일의 자녀는 김경희의 보살핌 하에 자란다. 김정남 때부터 그랬다.
어렸을 때 태자와는 거리가 먼, 후계 구도에서 멀어져 있던 김정은을 장성택이 어려워했을 것 같지도 않고 김정은 역시 고모부의 말을 잘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와서 고모부에게 갑자기 위신이 설리 만무하다. 김정은으로써는 차라리 당분간은 장성택과 공생하면서 고모부가 2인자에 만족하면서 살기를 원할 것이다.
하긴 김정은이 장성택 만큼 믿을 사람도 찾기 어려운 것도 한 이유다.
40년 가까이 김정일의 오른팔로 살아오면서 통치 방법부터 시작해 웬만한 간부 개개인별 성향까지 속속들이 꿰고 있는 장성택의 화려한 경력은 김정은에게 큰 힘을 실어줄 수 있다. 더구나 리더십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김정은에게 장성택의 카리스마는 통치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장성택의 섭정이 언제까지 계속될 것인지에 있다. 장성택이 ‘북한판 수양대군’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도 없고, 그럴 경우 김정은이 과연 장성택을 어떻게 견제할지도 관심사다.
과연 장성택은 수양대군이 되려 할까. 가지고 있는 힘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하다.
아무리 이영호 총참모장이니, 김영철 정찰국장이니 하는 군 실세들이 김정은을 보좌한다고 해도 벼락출세한 이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장성택 앞에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던 인간들일 뿐이다.
장성택이 이미 2인자였던 198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이들은 장성택의 발치에도 가보지 못했던 인간들이다.
하지만 장성택이 수양대군이 되기엔 2% 걸리는 점도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정통성을 강조하는 북한에서 장 씨는 왕의 핏줄이 아니다. 장성택은 혈통에 있어서만큼은 수양대군과 비교할 수 없다.
그가 올라서서 북한을 다스리는 순간 전국에서 숨죽여 있던 반항의 불길이 확 타오를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차라리 김정은을 내세워 실권을 틀어쥔 2인자로 만족해 사는 것이 장성택에겐 훨씬 나은 선택일 수가 있는 것이다.
여러모로 따져볼 때 당분간 장성택이 전면에 나설 일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장성택의 지시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간부들에겐 김정은 지시만큼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따지고 보면 김정일 생전인 2004년 장성택이 실각한 이유도 그의 영향력이 너무 컸던데 있었다.
장성택이 2002년 10월 한국에 경제시찰단 18명 중 일원으로 왔을 때 경제시찰단장인 박남기 국가계획위원장도 장성택을 깍듯이 대해 화제가 됐던 적이 있었다.
국정원 3차장을 지냈던 한기범 통일연구원 객원연구위원에 따르면 “2003년경 박봉주 당시 내각 총리가 평양시 광복거리 건설공사에 자재를 우선 공급하라고 지시했을 때 담당자들이 ‘장성택 부부장의 승인이 있어야 한다’고 보고한 게 실각의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김정일의 지시를 받은 총리 말보다 장성택의 말이 더 힘이 큰 것을 본 김정일이 그를 견제했다는 분석이다.
장성택에겐 측근도 많다. 2004년 김정일이 장성택을 좌천시킨 구실은 측근끼리 끼리끼리 뭉쳐 흥청댄다는 것이었다. 장성택의 측근이 초호화 결혼식에 다녀오다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 계기가 됐다.
장성택은 측근들을 확실히 챙기는 등 의리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실제로 2004년 그가 좌천될 때 그의 측근들도 함께 각 지방으로 해임돼 혁명화를 내려왔는데, 장성택이 다시 복권된 뒤 측근들도 거의 다 다시 복권됐다.
문제는 장성택의 의중이 앞으로 개혁 쪽으로 갈까 폐쇄 쪽으로 갈까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선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행적으로 봤을 때 장성택은 철저한 실리주의자다.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그는 북한의 문제점을 잘 알고 있다.
2002년 한국 방문 등으로 남쪽과 세계의 발전상을 잘 알고 있다. 당시 남쪽에 머무는 동안 그는 서울 지하철, 코엑스몰, 지방공장, 제주도 등 곳곳을 둘러봤다. 이때 서울의 한 룸살롱까지 갔다고 한다.
당시 현장을 잘 아는 한 인사는 “처음에는 차분하게 술을 마시던 장성택이 나중에는 폭음을 하면서 ‘공화국의 앞날이 걱정이다’고 한탄을 하더라”고 전했다.
장석택은 “어떤 정책수단을 써도 북조선 경제를 일으키기에는 역부족”이라며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마셨고 이튿날 일정까지 차질을 빚었다고 한다.
북에 돌아갈 때는 여성 팬티와 브래지어만 수천 장을 사서 돌아가는 바람에 “비행기가 못 뜬다”는 수군거림이 나올 정도였다. 무게가 1t이 넘었다고 한다.
북한에서 한국산 여성 속옷이 선물로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주변에 챙겨야할 사람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장성택이니 한국에 와서 눈치 보지 않고 여성 속옷 수천 장을 사갈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장성택은 노동당 행정부장에 오른 뒤에는 탈북자 처벌을 강화하는 등 폐쇄 강경정책을 주도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실리는 체제 유지라고 할 수 있다.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그는 특정 정책에 구애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이 탈북자 사살 지시 등 강경정책을 내놓는 배후에는 장성택의 조언이 컸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 사망 이후 사망 발표문 마련부터 부검 사실 공개, 주민들에 대한 통보 방식, 애도기간 선포 등에서 나는 전권을 쥔 장성택의 입김을 뚜렷이 느꼈다. 장례 경험이 없는 김정은이 아닌 1994년 김일성의 장례를 직접 치러본 장성택이 뒤에서 모든 장례 절차를 총괄 지휘하는 듯 했다.
현재 북한 체제는 김정은, 김경희, 장성택의 가족경영체제의 틀을 갖추고 있다. 공교롭게도 세 사람 모두 대장이다. 이중 핵심은 장성택이라고 할 수 있다.
1946년 1월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난 장성택은 1960년대 말 김일성대학에 입학해 김경희와 같은 반이 되면서 운명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장성택의 부친은 일제 때 길주 명천 지방에서 반일 농민운동을 하다 체포됐던 경력의 소유자였다.
1968년 이전까지는 해방 전의 국내 반일활동도 인정해주던 분위기라 장성택은 성분이 좋아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68년 갑산파가 숙청되면서 장성택의 성분도 일반인과 별다른 차이가 없게 됐다.
그런데 그런 그가 김경희의 눈에 들게 됐다. 김경희는 앞자리에 앉은 장성택의 귀를 풀대로 간질이면서 놀리는 식으로 교제를 하다가 사랑까지 하게 됐다고 한다. 당시 장성택은 음주가무에 능하고 손풍금을 잘 치며 말솜씨가 좋은 호방한 미남으로 여학우들에게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 한다.
장성택에게 반한 김경희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끝까지 장성택과 살겠다고 고집한다. 원래 김일성은 군부 출신의 사위를 생각했다. 김정일은 당에서 사위는 군에서 자신을 보좌하게 할 계획이었다.
김경희를 막기 위해 김일성의 동생인 김영주는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켰다. 하지만 김경희는 주말마다 아버지의 차를 직접 몰고 원산까지 내려가 장성택의 기숙사에서 밀린 빨래까지 해주기도 했다고 한다.
이 대학 교직원들은 처음에는 수상이 현지지도를 오는 줄 알고 비상을 걸었다가 수상의 차에서 새파란 여성이 내려 기숙사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이런 김경희의 고집에 김일성과 김정일은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미천한 출신에서 일약 ‘부마’ 자리에 오른 장성택은 김정일의 눈에 들기 위해 젊어서부터 온갖 열성을 다 했다.
노동당 조직지도부 외교담당 과장으로 있던 1970년대 중반 김정일에게 피로회복관이라는 명목으로 호화관저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충성의 자금’ 마련을 위해 북한 외교관들이 마약을 밀매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음주가무를 좋아하던 그는 1978년 측근들과 여인들을 불러다 김정일을 흉내 낸 연회를 열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 사실이 보위부의 감시에 포착돼 김정일에게 보고 됐다.
김정일은 격노했다. 누이동생과 함께 사는 매제라는 자가 딴 여인을 끼고 노는 것도 분노할 대목이지만 더욱 노여운 점은 감히 자신을 흉내 냈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분노를 산 장성택은 2년 동안 강선제강소에서 작업반장을 지내며 혁명화를 했다. 이 무렵부터 결혼생활에서 만족을 찾지 못한 김경희는 술에 빠져 살았다.
장성택은 1989년 노동당 청년사업부장을 지냈으며 1995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을 지냈다. 하지만 김정일의 매부라는 것 때문에 1980년대부터 ‘장 부장’으로 불리며 직책에 관계없는 권력 2인자의 삶을 살았다.
그가 앞으로도 2인자로 만족할지 아니면 더 큰 야망을 꿈꿀지 현재로는 누구도 알 수 없다.
1970년대 ‘왕’의 부마의 신분에서, 1990년대 말에는 ‘왕’의 매제에서, 2012년엔 ‘왕’의 고모부로 신분이 바뀌어 온 장성택이다. 분명한 점은 그가 부마나 매제보다 고모부 신분이 된 지금이야말로 생애 최대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것이다.
장성택에겐 당분간은 체제 유지가 첫째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김정일 장례가 끝나자 마자인 1월 4일 장성택이 자기의 매부인 전영진을 쿠바 대사로 파견한 것에 주목한다. 두 형이 모두 사망한 지금 매형은 장성택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인척이기도 하다. 김정일이 그리 했듯이 말이다.
대사 파견은 친인척에 대한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한 목적도 있겠지만 왜 하필이면 쿠바 대사일까.
많은 사람들이 북한이 나갈 모델을 중국과 베트남 등에 고착시켜 보고 있지만, 사실 쿠바야 말로 진짜로 주목해야 할 나라이다. 미국과 같은 발전된 적대국을 코앞에 둔 상태에서 권력 이양도 순조롭게 했고 경제개혁도 큰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잘 해나가고 있다.
자영업자 육성, 농산물 직거래 도입, 부동산 매매 자율화 등 북한이 앞으로 경제개혁을 하려고 하면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을 지금 쿠바가 밟고 있다.
나는 장성택이 매형에게 쿠바에 직접 가서 경제개혁 사례를 연구해 보고할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 섞인 관측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1980년대 외교부 부부장이던 전영진은 개혁개방을 주장하다 6년 동안 혁명화를 갔던 경험도 있다. 개인적으로도 전영진이라는 사람을 간접적으로 잘 알고 있는데 내 보기엔 사치하지 않고 겸손한 인물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장성택의 또다른 심복인 이광근 전 무역상 역시 새해 벽두부터 북한 투자유치를 담당한 책임자로 임명돼 베이징에 파견됐다.
앞길이 절망적인 북한의 경제 상황을 타개할 활로를 제시하면서도 권력을 절대 내놓지 않을 그런 과제는 어린 김정은이 아닌 노회한 장성택의 몫이다.
장성택은 2012년의 북한을 어디로 끌고 가려 할까. 그리고 2013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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