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장례 北변방 생화 없어.재활용,평양 같지 않았다. (1)
- 지일
- 2012-01-12 09:19:43
- 조회수 : 1,746
본보 통신원 나선시 조문현장 첫 공개
꽃 없이 빈소 찾는 조문객도… 초등생들 천방지축 뛰어다녀
《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사망 후 북한 내부 표정은 북한 관영언론과 AP통신 등 일부 외신의 제한적 취재를 통해서만 외부에 전해졌다. 그나마도 대부분 평양에 국한된 소식이었다. 과연 북한 변방은 어떤 분위기였을까. 동아일보는 채널A와 공동으로 지난해 12월 19일 김 위원장 사망 발표 직후 함경북도 나선시에 통신원을 보내 김 위원장 사망 후 주민들의 표정을 취재했다. 같은 달 28일 영결식과 29일 추도식까지 북한에서 보낸 동아일보 통신원이 목격한 현지 표정을 관찰기 형식으로 소개한다. 》
지난해 12월 21일 나선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거리가 텅 비어 있어 흡사 ‘유령도시’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과거 몇 차례 방문했을 때 사거리에 서 있던 남성 교통 안내원도 보이지 않았다.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경제특구로 지정돼 있어 평소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기업인도 많았으나 거의 발길이 끊긴 것 같았다. 북한이 조문 기간에 국경을 통제했기 때문으로 생각됐다. 조문 기간 일체의 오락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어쩌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선시에는 여러 곳에 조문소가 마련돼 있었다. 비교적 큰 김일성 사적관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20여 분 동안 길거리에서 눈에 띈 사람은 고작 10여 명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적관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기업소나 기관별로 온 듯한 조문객들이 단체로 헌화를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이 많아 길게 줄을 섰지만 어떤 때는 썰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조문객들의 표정은 대체로 덤덤한 편이었다. 침울하기는 했지만 조선중앙TV로 중계된 평양에서와 같은 격정적인 통곡은 없었다. 조문객들은 무표정하게 김 위원장의 영정 앞에 꽃을 놓고는 간단한 묵념을 한 뒤 서둘러 돌아갔다.
▼ 꽃 놓고 묵념 형식적 조문… 2~3분 머물다 돌아가기 바빠 ▼
조문하는 시간도 2∼3분에 불과했다.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 꽃을 놓고는 바로 내려와 줄을 지어 묵념을 하고 서둘러 돌아가기에 바빴다.
화환이 제법 놓여 있는데도 꽃의 향기가 생각보다 적다 싶어 자세히 보니 놓인 꽃들이 생화(生花)는 거의 없고 대부분 조화(造花)였다.
조문객 중 중국 기업인도 일부 있었는데 이들이 놓고 간 꽃들은 생화였다. 주민들은 “당초에는 생화로 조문하라고 지침이 내려왔지만 겨울에 도저히 생화를 구할 길이 없어 집에서 종이나 헝겊으로 만든 조화로 조문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평소에도 행사에서 조화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각 가정이나 기업소별로 꽃을 자주 만든다고 했다. 조화여서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행사에서 쓰고 남은 꽃은 다시 가져가 재활용하곤 한다며 이번에 김 위원장에게 헌화한 꽃 중에도 그런 꽃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어른과 아이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조문하는 게 이색적이었다. 아이들의 조문 장소는 사적관 맞은편에 있는 대극장이었다. 사적관과 대극장 사이에는 김일성 주석의 커다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은 태양산으로 불렸다.
대극장 앞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등 다소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고등학생들이 줄지어 대극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모습에서는 긴장감 같은 것은 엿볼 수 없었다. 꽃 한 송이를 한 손에 든 채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대극장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조문이 질서정연하게 치러지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좀 더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곳 주민들은 19일부터 영결식 전날인 27일까지 당의 지침에 따라 기관이나 기업소별로 3차례씩 조문을 하도록 되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대극장 옆 임시 건물에서는 조문객들에게 몸을 녹일 수 있는 뜨거운 물이나 콩물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간혹 꽃을 챙겨 오지 않은 조문객을 위해 꽃을 빌려주기도 했다. 북한처럼 엄격한 통제를 받는 사회에서도 꽃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이 있고 이들을 위해 꽃을 빌려주는 것이 신기하고 의아했다. 여러 번 북한을 드나들었지만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조문객들의 옷차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 두꺼운 방한복을 입었고, 스카프 등을 두르고 털이 달린 외투를 입는 등 멋을 부린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이는 나선시가 경제특구로 지정되는 등 중국 러시아 등과 작은 규모지만 교역이 이뤄지면서 부를 축적하는 계층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장마당에는 아직도 꽃제비(시장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가 많다. 식량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둑도 여전히 들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문을 하러 온 사람들은 그런대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부류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일성 사진 앞쪽으로 나선 도심과 차가운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내에는 5∼7층 건물이 많았고, 아파트가 길거리에 붙어 있는 것이 중국과는 다른 점이었다.
조문을 마치고 대극장 옆으로 난 길로 따라 내려오니 기업소별로 사람들을 태우고 온 파란색 버스 3, 4대가 줄지어 주차해 있었다. 조문객에 비해 버스는 몇 대 되지 않아 의아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추운 날씨에도 걸어서 조문 장소를 찾았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사망이 알려진 직후에 북한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이 눈치가 보여 걸어와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나선시는 경제특구로 지정돼 있으며 나진항은 대표적인 물류기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문을 마치고 오후에 방문했을 때 항구의 크레인들은 모두 멈춰 있었다.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경제특구의 대표적인 물류항이기는 하지만 나진항을 통해 나가는 물건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석탄이 대부분이다. 이는 중국이 상하이 등으로 물류비를 아껴서 운송하기 위해 중국 훈춘(琿春) 등을 통해 들여오는 물건이다. 가끔 러시아 배가 정박하면 러시아가 건설 중인 핫산∼나선 구간 철도 건설작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내리기도 한다.
김 위원장 사망이 알려진 직후부터 주민들은 기업소별로 일을 하지 않고 대기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장례 준비와 관련된 어떤 지시가 내려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김 위원장 사망이 통보된 바로 다음 날 커다란 영정을 마련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 영정은 아무나 그리지 못하고 도시별로 정해진 화가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영결식 날인 28일에는 아무런 활동 없이 기업소별로 TV로 중계되는 영결식 장면을 함께 보며 지냈다. 영결식 다음 날에는 평양에서와 같은 추도대회를 가졌다. 큰 운동장에 수만 명이 모여 평양과 같은 시간대에 행사를 치렀다. 그런데 이날 날씨가 유난히 추워 행사장에 나와 있던 사람 중 몇 명이 쓰려져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영결식과 추도대회가 다 끝나고 나선의 장마당은 31일 다시 문을 열었다. 도시에는 침울하고 힘든 터널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다음 날이 새해 첫날이어서 좀 더 활기차게 느껴졌다.
북한 사람들도 장마당을 통해 시장경제를 경험하고 있다. 다시 문을 연 장마당에는 긴 고생이 끝났다는 듯 생기가 흘렀다. 북한의 지방에서 김 위원장의 조문과 영결식을 경험해 보니 평양에서 보였던 광적인 통곡과 추모는 전체 인민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또 3대 세습에 대해 눈에 띄는 비판은 없었지만 큰 기대도 느낄 수 없었다.
옌볜=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꽃 없이 빈소 찾는 조문객도… 초등생들 천방지축 뛰어다녀
지난해 12월 21일 나선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거리가 텅 비어 있어 흡사 ‘유령도시’ 같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과거 몇 차례 방문했을 때 사거리에 서 있던 남성 교통 안내원도 보이지 않았다. 가게는 대부분 문을 닫았다. 경제특구로 지정돼 있어 평소 중국과 북한을 오가는 기업인도 많았으나 거의 발길이 끊긴 것 같았다. 북한이 조문 기간에 국경을 통제했기 때문으로 생각됐다. 조문 기간 일체의 오락 활동이 금지되어 있어서인지 어쩌다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나선시에는 여러 곳에 조문소가 마련돼 있었다. 비교적 큰 김일성 사적관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가는 20여 분 동안 길거리에서 눈에 띈 사람은 고작 10여 명에 불과했다. 김일성 사적관은 나지막한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기업소나 기관별로 온 듯한 조문객들이 단체로 헌화를 했다. 어떤 때는 사람이 많아 길게 줄을 섰지만 어떤 때는 썰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조문객들의 표정은 대체로 덤덤한 편이었다. 침울하기는 했지만 조선중앙TV로 중계된 평양에서와 같은 격정적인 통곡은 없었다. 조문객들은 무표정하게 김 위원장의 영정 앞에 꽃을 놓고는 간단한 묵념을 한 뒤 서둘러 돌아갔다.
▼ 꽃 놓고 묵념 형식적 조문… 2~3분 머물다 돌아가기 바빠 ▼
조문하는 시간도 2∼3분에 불과했다.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가 꽃을 놓고는 바로 내려와 줄을 지어 묵념을 하고 서둘러 돌아가기에 바빴다.
①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조문소가 차려진 북한 나선시 김일성 사적관에 단체 참 배객들이 조문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손에 작은 조화가 한 송이씩 들려 있다. ② 사적관에서는 시가지와 멀리 동해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③ 조문소 근처 시내의 한 은행은 조기만 내건 채 닫혀 있다. 나선=동아일보 통신원 A 씨
조문객 중 중국 기업인도 일부 있었는데 이들이 놓고 간 꽃들은 생화였다. 주민들은 “당초에는 생화로 조문하라고 지침이 내려왔지만 겨울에 도저히 생화를 구할 길이 없어 집에서 종이나 헝겊으로 만든 조화로 조문을 하게 됐다”고 전했다. 주민들은 평소에도 행사에서 조화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각 가정이나 기업소별로 꽃을 자주 만든다고 했다. 조화여서 오래 보관할 수 있기 때문에 행사에서 쓰고 남은 꽃은 다시 가져가 재활용하곤 한다며 이번에 김 위원장에게 헌화한 꽃 중에도 그런 꽃들이 있을 것이라고 주민들은 말했다.
어른과 아이가 각기 다른 장소에서 조문하는 게 이색적이었다. 아이들의 조문 장소는 사적관 맞은편에 있는 대극장이었다. 사적관과 대극장 사이에는 김일성 주석의 커다란 사진이 놓여 있었다. 이 지역은 태양산으로 불렸다.
대극장 앞에는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등 다소 부산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고등학생들이 줄지어 대극장으로 향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들의 모습에서는 긴장감 같은 것은 엿볼 수 없었다. 꽃 한 송이를 한 손에 든 채 별다른 감흥이 없는 표정으로 대극장으로 향했다.
평양에서의 조문이 질서정연하게 치러지는 것과는 달리 이곳에서는 좀 더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듯했다. 이곳 주민들은 19일부터 영결식 전날인 27일까지 당의 지침에 따라 기관이나 기업소별로 3차례씩 조문을 하도록 되어 있다고 귀띔해 주었다.
대극장 옆 임시 건물에서는 조문객들에게 몸을 녹일 수 있는 뜨거운 물이나 콩물을 무료로 나누어 주었다. 간혹 꽃을 챙겨 오지 않은 조문객을 위해 꽃을 빌려주기도 했다. 북한처럼 엄격한 통제를 받는 사회에서도 꽃을 가져오지 않은 사람이 있고 이들을 위해 꽃을 빌려주는 것이 신기하고 의아했다. 여러 번 북한을 드나들었지만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조문객들의 옷차림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대부분 두꺼운 방한복을 입었고, 스카프 등을 두르고 털이 달린 외투를 입는 등 멋을 부린 여성들도 눈에 띄었다. 이는 나선시가 경제특구로 지정되는 등 중국 러시아 등과 작은 규모지만 교역이 이뤄지면서 부를 축적하는 계층이 생겨났기 때문으로 보였다.
그러나 북한에는 여전히 많은 사람이 식량을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장마당에는 아직도 꽃제비(시장에서 구걸하는 어린아이)가 많다. 식량을 구하기 힘들기 때문에 도둑도 여전히 들끓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조문을 하러 온 사람들은 그런대로 생활에 여유가 있는 부류라는 생각도 들었다.
김일성 사진 앞쪽으로 나선 도심과 차가운 동해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시내에는 5∼7층 건물이 많았고, 아파트가 길거리에 붙어 있는 것이 중국과는 다른 점이었다.
조문을 마치고 대극장 옆으로 난 길로 따라 내려오니 기업소별로 사람들을 태우고 온 파란색 버스 3, 4대가 줄지어 주차해 있었다. 조문객에 비해 버스는 몇 대 되지 않아 의아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추운 날씨에도 걸어서 조문 장소를 찾았다고 한다. 현지 주민들에 따르면 김 위원장의 사망이 알려진 직후에 북한에 들어와 있던 외국인들도 차를 타고 가는 것이 눈치가 보여 걸어와서 조문을 했다고 한다.
나선시는 경제특구로 지정돼 있으며 나진항은 대표적인 물류기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조문을 마치고 오후에 방문했을 때 항구의 크레인들은 모두 멈춰 있었다.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모습이었다. 경제특구의 대표적인 물류항이기는 하지만 나진항을 통해 나가는 물건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생산된 석탄이 대부분이다. 이는 중국이 상하이 등으로 물류비를 아껴서 운송하기 위해 중국 훈춘(琿春) 등을 통해 들여오는 물건이다. 가끔 러시아 배가 정박하면 러시아가 건설 중인 핫산∼나선 구간 철도 건설작업에 필요한 기자재를 내리기도 한다.
김 위원장 사망이 알려진 직후부터 주민들은 기업소별로 일을 하지 않고 대기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장례 준비와 관련된 어떤 지시가 내려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김 위원장 사망이 통보된 바로 다음 날 커다란 영정을 마련하는 기민함을 보이기도 했다. 김 위원장 영정은 아무나 그리지 못하고 도시별로 정해진 화가가 따로 있다고 들었다.
영결식 날인 28일에는 아무런 활동 없이 기업소별로 TV로 중계되는 영결식 장면을 함께 보며 지냈다. 영결식 다음 날에는 평양에서와 같은 추도대회를 가졌다. 큰 운동장에 수만 명이 모여 평양과 같은 시간대에 행사를 치렀다. 그런데 이날 날씨가 유난히 추워 행사장에 나와 있던 사람 중 몇 명이 쓰려져 병원으로 실려 가기도 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영결식과 추도대회가 다 끝나고 나선의 장마당은 31일 다시 문을 열었다. 도시에는 침울하고 힘든 터널을 통과했다는 안도감이 느껴졌다. 다음 날이 새해 첫날이어서 좀 더 활기차게 느껴졌다.
북한 사람들도 장마당을 통해 시장경제를 경험하고 있다. 다시 문을 연 장마당에는 긴 고생이 끝났다는 듯 생기가 흘렀다. 북한의 지방에서 김 위원장의 조문과 영결식을 경험해 보니 평양에서 보였던 광적인 통곡과 추모는 전체 인민의 분위기와는 거리가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 또 3대 세습에 대해 눈에 띄는 비판은 없었지만 큰 기대도 느낄 수 없었다.
옌볜=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댓글목록
수정님의 댓글
수정 작성일모든것이 재활용인 북한. 쓰레기가 없는 "황홀한 나라" 북한, "궁전같은 나라"? ...북한 당국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소련식 사회주의 재활용을 우리식 사회주의라고 떠드는 불쌍한 나라 북한, 죽은 몸뚱이마저 재활용하는 나라가 뭔들 재활용 못할가? 바닥난 민심을 재활용하려고 무진애를 쓰지만 성형한 몸뚱이에서 할배의 "공적"은 결코 재활용하지 못하리라. 봉이 김선달을 재활용하면 돈이라도 벌려만 28세의 김선달은 그 정체마저도 의심스러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