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선
- 2013-01-27 22:2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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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와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4. 베트남에서 468명 북한주민 공수작전.
2002년 한해 1천명 이상 북한주민 남한이주 시대가 열리자 탈북자관련 시민단체, 종교단체들이 장마철 죽순처럼 돋아났다.
북한주민들의 남한이주를 돈벌이 사업으로 활용하려는 양아치들과 범죄자들이 기승을 부렸다. 먼저 남한으로 입국한 탈북자들도 수익성 브러커로 대거 진출했다.
정부의 탈북자입국 예산을 뜯어먹기 위한 늑대, 여우, 토끼들의 난장판이 벌어 졌던 것이다. 양아치들이나 범죄자들은 돈과 주먹으로 쉽게 굴복시킬 수 있었으나 교민들과 목사들의 비열한 행위에는 별 방법이 없었다.
몽골에 나타난 미국 시민권자 목사 몇 명은 별도로 탈북자 몇 명을 아파트에 수용하고 ‘난민수용소’를 건설했다고 미국등지에서 모금활동을 했는데 공갈협박으로 쫗아 버렸다.
몽골은 이미 북한주민들이 자기 영토로 들어 올 경우 무조건 남한으로 이주시키도록 협정이 이루어 졌고 국경에서 탈북자 1명을 울란바타르로 압송하는데 300달러씩 한국 정부가 부담했다. 또 이런저런 대가로 통신, 전기를 비롯한 무상원조도 하고 있었다.
몽골에 200여명, 태국에 300여명, 베트남에 400여명, 캄보디아에 200여명, 중국주재 한국영사관에 200여명 등 제3국에서 한국정부의 보호를 받으면서 대기하는 북한주민은 1천여명이 넘었으나 입국은 더 느려지고. 북한주민들은 계속 밀려왔다.
태국방향은 그나마 괜찬은 상황이었다. 북한주민들이 난민인정을 받을 수 있어 일단 들어만 가면 한국으로 올수 있었다. 수익성 브러커들이 집중되어 있는 것이 문제 였지만 자유를 찾기 위한 그만한 부담은 문제될 것이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베트남-캄보디아로선 이었는데 폭팔 직전이었다.
베트남에서는 탈북자가 공안원을 살해한 사건으로 2001년부터 한국영사부에서 북한주민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해 캄보디아로 보내야 했다.
그러나 캄보디아에서 문을 받아버렸다. 탈북자 1명을 베트남에서 캄보디아로 넘기는데 국경브러커들에게 각각 130달러씩 260달러를 주었는데 그 비용은 한국정부가 지급했다. 훗날에는 헐씬 올라갔다.
문제는 캄보디아 서병도 목사와 베트남 교민들과의 마찰이었다. 서병도 목사는 밀려드는 북한주민들을 독점적으로 취급하려고 했다. 또 자기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은 이미 초과 했으므로 베트남쪽에서 북한주민들이 넘어오는 것이 귀찮았다. 탈북자 상당수가 브러커들과 500만원 정도의 각서를 쓰고 오는데 그들의 돈벌이에 놀아나는 것이 싫었던 것이다.
베트남수용소를 탈출해 자기들끼리 캄보디아로 온 북한주민들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태국으로 쫗아 버렸다.
베트남과 캄보디아에서 영사관들이 참여한 가운데 2차례의 협상을 진행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정부는 직접 개입 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사건들이 연속적으로 터졌다. 무더위와 질병으로 임신한 여성들이 고통을 호소하는 것은 물론 30여명의 탈북자들이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공안에 체포 되 중국으로 압송 되 많은 자금을 써 찾아오는가 하면 베트남 공안도 문제의 심각성을 눈치 채고 접근해 왔다.
한국영사관들에서는 임영선을 괘심하게 생각하면서 협조하려고 하지 않았다. 심지어 내가 묵고 있는 호텔방에 도청장치까지 하고 가는 곳 마다 미행을 했다. 한국교민과 베트남인 프락치들이었는데 우리에게 붙잡혀 혼쭐이 나군 했다. 호텔방을 털어가기도 했다.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김상철변호사와 문제의 심각성을 정리하고 공신력 있는 대표단을 구성해 접근하기로 했다.
전 유엔대사 소병도님을 단장으로 송부근목사, 위원2명을 포함해 5명으로 구성된 대표단이 베트남으로 갔다.
마침 호치민 총영사님은 소병도 대사와 가까운 후배여서 공항에서부터 반갑게 맏아 주고 허심탄회한 대화와 협의회를 가졌다. 결론은 역시 중앙정부의 태도였다. 2004년 당시는 노무현 정부시대였고 정동영 통일부장관이 수장이 였다.
나는 나름대로의 작전계획을 작성해 김상철변호사에게 제출했다. 우리는 캄보디아, 베트남에 적채된 북한주민 600여명을 상선으로 한 번에 수송할 계획이었다. 먼저 캄보디아의 북한주민 200여명을 공해상으로 운송해 대기했던 한국 상선에 태우고 이어 베트남 공해상에서 400여명을 태운 후 한반도에 접근 할 때 혹시나 북한 잠수함의 공격을 우려해 미군과 한국군의 경호를 받으며 부산항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김상철변호사와 송부근 목사가 정동영 통일부장관을 만나 긴밀한 협력을 약속했다. 나는 통일부와 외교부, 국정원 직원들과 작전의 타당성 검토를 했다.
정부는 주한 베트남 대사관을 통해 베트남 정부와 협상에 돌입했다. 캄보디아는 북한주민들을 뽑는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작전에서 제외됐다.
며칠 후 나는 “극비 작전은 시작되었다”라는 짧은 통보만 받았다. 그런데 TV방송에서 동남아국가에서 북한주민들을 전세기 2대로 실어 온다고 보도했다. 훗날 밝혀졌지만 통일부직원이 경향신문사 친구에게 정보를 흘린 것이었다.
상선 작전은 너무 범위가 넓고 작업이 복잡해 신속, 간단한 항공기 운송 쪽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한국정부는 베트남 정부에 협조의 대가로 쌀 10만 톤을 사주었고 그 쌀은 전부 북한에서 자력으로 운송해가도록 했다. 북한은 식량이 없어 주민들이 탈북 하도록 만들고 그 탈북자들로 인해 식량을 얻어 간 것이다.
이렇게 베트남에 적체되었던 468명의 북한주민들은 무사히 자유대한으로 이주해 왔다.
통일방송 대표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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