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조폭두목 임영선 체포하라!
  • 임영선
  • 2013-01-26 08:26: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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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와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

 

3. 탈북자 조폭 두목 임영선 체포하라.

 

2003년 노무현의 <참여정부>가 출범했다.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가 옥동자를 낳은 것 이다. 그러나 노무현정부의 탈북자정책은 다른 방향으로 갔다.

 

우선 북한주민의 남한이주를 제한하는 것이었다. 얼마 전 일부 공개된 노무현-김정일 대화록을 보고 왜 그런 정책이 시작되었는지 이해했다.

 

노무현의 정책방향은 네 가지로 가닥을 잡았다. 첫재는 북한주민들의 남한이주 비용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하나원’을 출소 할 때 300만원만 지급하는 것이고 둘째는 중국영사부와 제3국에 체류하는 북한주민들을 될수록 오래 적체시켜 한국입국을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셋째는 북한주민이주를 지원하는 시민단체들을 압박하고 수익성 브러커들을 잡아들이는 것, 넷째는 북한주민들의 정착지원을 축소하기 위해 인센티브제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안타까운 것은 노무현정부가 시작한 북한주민들의 남한이주 차단 정책은 이명박 정부가 그대로 계승완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수 더 추가해 일부 측근들의 국민세금 탕진의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는 것이다.

 

2003년부터 북한주민들이 이주해 오는 국가들 영사부에 그들의 남한입국을 지원하기 위한 예산이 집행되었다.

 

‘산 넘어 또 산’이라고 교민들의 이권사업으로 둔갑하더니 종교인들과 심지어 조폭들까지 뛰어 들었다.

 

북한주민들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게 애를 먹이던 사람들이 한명이라도 더 받아들이려고 총성 없는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한국영사부에서는 북한주민 1인당 숙식비와 치료비, 기타 잡비를 부르는 대로 지급했다. 그렇게 골치 아프던 북한주민들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됐던 것이다. 한명이라도 더 받아들이고 될록 오래 잡아두는 것이 좋았다. 그것은 한국 정부의 방침이기도 했다. 혼탁해진 전쟁마당에서 승자는 조폭들이었다. 한국영사부들에서도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는 있었지만 은밀성을 보장하는데 더 중점을 두었다.

 

탈중한 북한주민들이 한국행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서는 몽골, 태국, 베트남-캄보디아, 필리핀까지 가야 했다. 그 노정에 아마존의 식인악어 같은 조폭들이 거닐고 있었다.

 

베트남에서 첫 전투가 진행되었다. 칠성파 조직을 배신하고 몇 개 나라를 방황하던 자가 모텔에 100여명의 북한주민들을 수용하고 강간과 인권유린을 밥 먹 듯 하고 있었다. 고통을 이겨내지 못한 북한주민들은 자살까지 시도했다. 한국영사부에 신고하고 항의하려고 찾아가면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

 

내가 그 나라에 가면 조폭들은 비상경계령을 내리고 야구 방망이를 든 대원들을 모집해 ‘임영선이 때려잡으러 간다’며 북한주민들 앞에서 기세를 보이군 했다. 훗날 알았지만 영사부에서 북한주민을 수용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임영선이 도착했다고 통보해주군 했다.

 

한국과 중국에 있던 전투원 몇 명이 베트남으로 갔다. 부산 칠성파 쪽에서는 자기들과는 무관한 인간이라고 했다. 그 외 다른 몇 명은 송사리들이었다.

 

원산폭격 준비운동부터 시작한 작업은 통닭구이, 사이다 마시기, 충성 맹세문 쓰기, 등 깔끔하게 마무리 됐다. 그때로부터 얼마 후 이들은 라오스, 미얀마로 옮겨가 태국방향 루트를 확장했고 지금도 관계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일반교민들과 종교인들의 행태에는 손을 댈 수가 없었다. 이런 일이 여기저기서 몇 번 있었지만 아무런 흔적도 없었고 한국영사부들도 알지 못 했다.

 

통일부정책이 제대로 먹혀들지 않자 통일부 직원들이 직접 나서 작업을 시작했다. 가장 악날하고 비열한 선봉장은 통일부 국장과 하나원 원장까지 해먹은 고경빈 이었다. 서울대를 졸업하고 통일부에서 잔뼈를 키웠다고 하는데 나에게 노골적으로 ‘탈북자 데려오는 것 만이 방법이 아니다, 조심하라’하며 협박했다.

 

국정원에서는 ‘북한주민 이주 사업을 직업항목에서 빼는 것이 어떻냐?’ 하며 말렸다.

 

그런 상황에서 탈북자들의 집단폭행이 발생했다. 사건을 조사하던 서울경찰청 폭력계는 이들 대부분이 임영선의 도움으로 한국으로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또 임영선이를 ‘형님’, ‘삼촌’이 라고 했다. 이 녀석들은 연길과 심양, 장춘과 베이징들에서 꽃제비 생활하던 청소년들인데 닥치는 대러 몽골과 동남아로 실려가 한국으로 이주한 것이다.

 


당시에 나는 외국 출장 중 이었다. 나와 전화가 안 되자 우리 집에 한번 찾아왔던 경찰은 혁혁한 성과를 이룩한 듯이 곧장 체포영장을 발부 받아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훗날 술자리에서 실토하건데 그들은 나를 탈북자라고 얕잡아 보았고 또 국정원과 통일부와의 대화 없는 썸싱이 있었던 것이다.

 

공중파 방송과 신문들은 ‘탈북자 조직폭력 두목 임모씨 동남아 도주, 서울경찰청 추적 중!’이라고 톱기사로 올렸다.

 

외국에서 비즈니스 업무를 보던 나에게 김상철 변호사(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 창립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들어오라고 할 때까지 외국에 있어라, 어떤 사건인지 알 아 보자’ 였다.

 

‘귀신도 곡 할 일’이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음날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싫었다. 그런데 공항에서 체포하지 않았다. 곧장 김상철변호사에게로 갔다. 검찰에서도 깜짝 놀라 당장 들어오라고 했다.

 

담당 경찰들이 불려왔고 호된 추궁을 받았다. 김상철변호사는 경찰들을 검찰에 고소했다. 경찰들을 처벌하기 위한 조사가 시작됐고 엄중 처벌이 가능했다. 최종 결론에서 나는 “경찰들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시민단체들과 주변사람들은 부글부글 끓었다. 사실 그들은 경찰들 보다 노무현정부가 미웠기 때문이었다. ‘탈북자 조폭두목 임영선 체포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통일방송 대표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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