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임영선
- 2013-01-17 18:4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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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와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4)
김영삼 정권은 북한의 상황을 몰랐다.(1)
1992년 집권한 김영삼 정권이 남북통일 정책에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은 국가보훈처의 <귀순용사보호법>을 보건복지부 <북한이탈 주민보호법>으로 바꾼 것이다. 이때 처음으로 <북한 이탈주민>이란 용어가 등장했다.
1992년까지는 월남귀순용사에게 15평 아파트를 무상으로 지급했고 귀순용사가 가지고 온 무기나 정보의 가치에 따라 돈을 지급했다. 정보가치 등급은 (A,B,C)로 나누어 A급 정보는 순금 10만냥(추축), B급은 5만냥, C급은 2만냥 하는 식으로 정부가 귀순용사로부터 정보를 구매하는 격이 였다. 때문에 귀순자가 입국하면 그 순간의 금 시세를 정확히 입력했다가 그 시점 가격으로 계산했다.
1981년에 비행기를 가지고 귀순한 이윤평 대령은 당시 현금 11억원을 받아 정주영 회장보다 현금이 많다고 소문이 났다고 한다.
운이 없게도 내가 입국한 1993년에 대통령 령이 개정 통과 되고 1994년부터 시행령에 들어가 15평 주택을 받지는 못하고 현금 3천만원 받는 것으로 끝났다. 1년 후 정보가치 평가로 3천 만원을 더 받았다.
1994년부터 입국한 귀순자들에게는 보건복지부에서 지급하는 정착보조금 1400만원이 전부였다. 상계동 임대아파트 보증금이 600만원이고 가전제품 이것저것을 들여 놓고 서울 구경 좀 하고나면 통장은 방금 비었다. 문제의 심각성을 알게 된 안기부가 정보가치를 부풀려 귀순자들을 구제하는 형편이었다. 안보강연을 많이 잡아 수익 활동을 시키는 것도 귀순자들을 돕는 방법이었다.
당시 국방부 장군들과 3군 사령관님은 나를 공식적으로, 개인적으로 불러 인민군 장군이 온것 만 못지않은 정보를 얻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웃기는 것은 정보 가치도 등급이 있었지만 북한에서의 직책 관계에도 등급이 있어 나는 겨우 인민군 소대장에 계급은 중위여서 일반 북한주민 등급을 받았다.
현재의 대한민국의 법과 국민들의 정서대로 라면 북한의 고위직은 여전히 우대 대상이고 일반 노동자나 농민, 도시인들은 외면대상 일수밖엔 없다. 정말 아이러니한 대한민국이다. 독일과 대한민국의 차이가 바로 그런 것이다. 통일독일은 동독의 간부들에 대한 철저한 견제와 통제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통일독일 후 불평불만 자, 부랑자들은 대부분은 동독 공산당과 군부 및 요직 출신들이다. 꼭 그렇지만 않은 경우는 동독 요직에 있으면서도 자유 독일을 위해 음으로 양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이다. 히틀러의 세력을 척결하듯이 공산당 세력도 철저히 견제하고 척결했다.
반면에 우리 대한민국은 오히려 북한에서 요직에 있다 귀순해 오면 마치 조상 신주 모시듯이 특별대우 하고 심지어 우상숭배까지 하는 코미디극이 벌어진다.
내가 제공한 정보에 근거하여 대한민국 정부는 자력으로 탱크, 잠수함, 전투비행기, 미사일 생산에 돌입했고 미국으로부터 긴급히 반 항공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들여왔다.
1995년부터 시작한 자체 군사력 증강은 5년이 지난 2000년 쯤 되어 탱크, 대포 같은 상용무기들이 나오더니 10년이 지나 비행기와 미사일, 잠수함과 같은 첨단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지금도 자체로 제작한 탱크, 대포, 미사일, 비행기, 잠수함과 함선들의 위용을 볼때마다 한없는 자부심을 느낀다.
북한은 이미 1980년대 말에, 올해 쏴 올린 대륙간탄도 미사일을 완성했고 북부지역에 실전배치 했으며 당시 미국의 주력전투기 F-16와 대등한 러시아의 <미그-29기> 계열생산 시스템을 완성하고 1992년 4월 23일 시험비행에 성공해 29대를 실전배치 한 상태였다.
미군도 머리를 갸웃 둥 하며 반신반의 했고 국군 심문관들은 ‘그런 기술과 무기는 세계적으로 미국, 러시아와 몇 개나라 밖엔 못가지고 있다’다 비아낭하다 몇 달 후 확인되자 ‘큰 일 났다’며 탄식했다.
평남 온천에는 지하 활주로가 건설되고 자력으로 생산한 중,소형 잠수함들은 남한으로 제집 드나들 듯하고 외국으로 수출도 하고 있었다.
특히 38선 돌파와 미군의 탱크공격용 헬기 공격에 대응한 신형 탱크들을 생산해 실전배치하는 등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핵실험과 핵 탄두 완성에 진입 했을 때인 1990년에 러시아 첩자들에 의하여 북한의 핵무기 상황을 확인한 미국은 북한을 공격하겠다며 핵 위기를 조성했지만 핵무기 소형화와 운반기술을 계속 향상시키고 있었다.
이런 전쟁 광란은 1989년 제13차 세계 청년학생 축전이 끝나고 김일성주석이 오진우와 김정일을 비롯한 핵심요원들과의 담화과정에서 시작되었다. 인민군의 전투능력을 알아보던 김일성이 <1995년까지 통일을 못하면 나는 통일을 보지 못 한다>라고 교시하자 오진우와 최광 같은 오리지날 장군들은 재래식 전쟁전략에 매 달렸다. 반면에 김정일은 핵, 미사일, 최신 전투기, 화학무기, 대남기습작전과 같은 첨단 전략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김일성은 신이 들린 사람임이 분명하다. 어떻게 자기가 사망하는 연도까지 엇비슷이 알고 있었을까?
또 우리민족은 애국가에 있듯이 ‘하느님이 보우하사’ 1994년 김일성을 하늘나라로 데려갔고 막강한 북한의 군사력을 무력화 시키려는 듯 북한에는 <고난의 행군>을 시작하게 했다.
어쨌든 김영삼 정권에서 귀순용사들은 졸지에 국가보훈대상에서 영세민으로 전락했다. 이 문제는 앞으로 꼭 집고 넘어가야 한다. 정부가 월남 귀순용사들로 부터 아무런 공청회나 국민의 의사, 특히 본인들의 의사를 묻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국가 보훈자 자격을 빼앗았던 것이다.
1994년 대한민국이 요동쳤다.
북한을 방문한 전 미국대통령 카터가 김영삼-김일성 정상회담을 주선했고 만남의 날자까지 약속했다.
통일방송 대표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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