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들의 삶과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2)
  • 임영선
  • 2013-01-13 09: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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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들의 삶과 (재)북한이탈주민지원재단(2)

 

본인이 1993년 은밀히 자유대한으로 입국했다가 처음으로 중국에 간것은 1997년이다. 그때는 이미 북한의 <고난의 행군>에 진입했을 때이다.
 


단동, 심양, 연길, 도문에서 한국 사람들은 동냥하는 북한어린이들 때문에 길을 갈수 없을 정도 였다.
 


중국 동북지역에 북한을 압박하고 공격하기 위한 특수집단 건설은 너무쉽게 이루어졌고 자원입대자들로 넘쳐났다. 당시 작전은 2가지 방향이었는바 첫째는 대북작전, 둘째는 북한주민 중국 내륙으로 이송과 남한으로 이주였다.
 


먼저 동북과 가까운 몽골지역으로 북한주민들을 빼내기 시작했고 동남아 지역 루트도 개척했다. 루트를 알려주고 돈을 주면 10명중 2~3명은 자유대한으로 찾아오고 대부분 그 돈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떠돌이 소비자금으로 소진했다.
 


당시 중국당국은 북한주민들의 무단입국 문제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특별한 대책도 없었다.
 


그쯤에 천기원, 신동철 목사를 비롯한 전문 탈북자구원 운동가들이 출현하기 시작하더니 '탈북자국제난민유엔청원'운동의 바람이 중국까지 불어왔다.
 


2000년도에 들어서면서 중국과 북한이 각성했고 햇볓정책이 절정에 닿은 한국정부는 탈북자들의 남한 입국을 완강히 외면하기 시작했다.
 


김동식목사와 함께 납치되어간 우리공작원들과 강제북송당한 북한주민들로부터 동북상황을 체크한 북한노동당은 중국에 강력 항의하는 동시에 탈북자 강제북송을 강화했고 우리를 상대로 무자비한 암살과 납치를 자행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와 과오는 "황장엽노작"을 북한지역에 대량살포한 것이고 그것이 적들의 공격의 빌미가 된것이다.
 


북한과 중국의 협공에 완전히 괴멸당하고 간신히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들어 온것이 2001년이었다. 후에 김동식목사 납치하는데 참여한 조선족들의 재판 과정에 알았지만 적들은 임영선 납치작전을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 했고 최종적으로 대낮에 공황에서 시도하던 중 중국고위 공안간부와 동행해 놓쳤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희생과 막대한 자금을 탕진하고 <압록강봉사대>와 <두만강 봉사대> 는  처참하게 괴멸돼 기치를 소각하고 근신하던 중 이민복씨의 알선으로 김상철 탈북난민보호운동본부장을 만나 남한의 시민운동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작전에 최고의 방해꾼이었던 사람들과 그들의 단체에 들어가 함께 밥을 먹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되어 1998년부터 시작된 중국체류 북한주민 구원운동은 2007년까지 진행되었고 1600여명의 북한주민들을 남한으로 이주 시켰다.
 


아울러 북한주민 남한이주 작전에 선봉에 섰던 천기원목사, 신동철목사, 독일의사, 중국, 몽골,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라오스, 필리핀의 한인재외교민들과 대한민국 영사관 공직자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지금도 그런 애국자들의 노고가 아니라면 북한주민들은 자유대한으로 이주 할수 없다.
 


2002년 김대중정부 임동원장관의 도움을 받아 당장 정부 예비비를 사용하도록해 해외 공관에 찾아 온 북한주민들은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했다 그해 북한주민1000명 남한입국 시대를 열었고 2004년에는 노무현정부의 정동영장관의 도움으로 베트남에 적체된 468명의 탈북자들을 전세기 2대로 전부 실어 옴으로써 한해 2000명 입국시대를 열었다.
 


이렇게 자랑 같기도 하고 변명같기도 한 글을 구구절절히 적는것은 남한으로 이주한 북한주민들의 근항을 나름대로 평가하고, 지적하고 싶고, 어쩌면 그럴만한 자격을 가진 사람임을 선언하기 위함이다.
 


솔직히 지금 남한으로 이주해 오는 북한사람들은 그 시절 우리가 구원한 북한주민들의 이런 저런 활동 때문이다. 또 우리로 부터 활동을 인계받은 종교단체나 시민단체들의 역활이기도 하다.
 
글이 너무 길어 쉬었다 다시 쓰시기로 한다.
 
통일방송 대표 임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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