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수 없는 목소리
  • 정진화
  • 2013-01-19 20: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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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뜻밖의 전화가 걸려왔다.

기약 없이 헤어 진지 거의 11년, 목소리마저도 낯설게만 느껴지지만 분명 그였다.

탈북 하여 얼마 안 되어 내가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친척들과 만났을 때 그녀는 인신매매를 당해 그 동네서 살고 있는 유일한 북한사람이었고 중국에서 만난 반가운 첫 고향사람이었다.

동네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그는 말도 잘 안하고 남편과 함께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밑반찬을 만들어 시장에서 파는 일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가 오기전까지만 해도 시부모와 함께 살던 맏며느리는 그녀가 오자 곧바로 딴 동네로 이사를 가버렸고 한 지붕아래서 시부모와 함께 살고 있었다.

중국에 피신해있는 모든 북한사람들 누구나의 사연이겠지만 나는 그 당시의 그녀의 이름이 진짜인지 가명인지도 몰랐다.

수십 명의 친척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시골동네서 나와 마주친 그녀는 처음엔 나를 무척 경계하면서 말도 잘 하려고 하지 않았다.

하긴 나도 정정당당한 신분이 아니어서 친척들도 나를 극구 만류했지만 태어나서 처음 만난 사촌보다는 낯도 코도 모르는 고향사람이 나의 호기심과 향수를 더 불러일으킴을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동네에 머물면서 나는 어렵게 그녀와 말을 건넬 수 있었고 나는 그가 만든 맛있는 밑반찬을 곁들여 식사도 함께 하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화려한 식당도 아니고 진수성찬이 차려진 밥상도 아니었고 그가 밑반찬을 만드는 시골집 주방 옆 자그마하고 어설프기까지 한 공간에서 우리 둘은 오랜만에 고향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하얀 쌀밥과 김치, 그리고 짠지 몇 가지를 차려놓았다.

...북방의 한 도시서 살다가 어릴 적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와 언니들과 살았다는 그는 집안의 막내였다.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고 각자가 뿔뿔이 생활전선에 뛰어들 때 그도 한가하게 학교만 다닐 형편이 안 되어 장삿길에 나섰다가 우연히 두만강을 넘었다고 한다.

처음에는 외로움에 지쳐 많이 울었지만 태어난 애기가 유일한 웃음으로 그를 지탱해주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시장에서 장사를 하고 나면 딸애가 잠든 사이 그를 잠간 바라보는 날이 더 많다고 한다.

유일한 희망이자 행복인 딸아이가 그가 살아있는 이유고 살아가는 이유였다.

둘은 한참을 고향이야기, 탈북 하던 이야기를 하면서 서럽게 울었다.

그는 그나마 친척이라도 있는 내 처지를 부러워했지만 생전 처음 불러보는 오빠나 언니가 생긴 내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암튼 아무런 살붙이도 없는 그에 비하면 내 처지는 호강스러워 보이기까지 해서 조금 미안하기까지 했다...

음식마다 기름기가 좔좔 흐르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이름도 모르는 비싼 요리보다 몇 십 년을 익숙해온 고향의 맛은 그야말로 백만불짜리 고급음식이었다.

자주 만나고 싶었지만 그건 나의 욕심이었다.

그의 시부모는 돈으로 사온 며느리가 혹여 딴 생각을 품을 가 봐 걱정이었는지 우리 둘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 친척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족들의 동네인 연변에서 많이 떨어진 곳이었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도 손꼽을 정도였지만 나이 든 아들이 돈까지 들여 사온 예쁘고 어리고 착하고 손재간까지 좋은 며느리가 딴 생각을 품으면 그건 분명 나에게 그 화살이 꽂힌다는 것이다.

거의 삼년을 올데갈데없이 애까지 낳고 착하게 사는 며느리가 그때 벌써 한국행을 생각하고 있는 나를 만나서 다른 생각을 품는다면 그건 두말 않고 “내 탓”이었다.

하긴 나도 친척들의 집에서 마냥 오래 머물 수만 없는 형편이었다.

큰아버지의 집을 떠난 이후 나는 얼마간 다른 친척집에 머물렀다.

갈수록 심산이라고 시간이 지난다고 탈북자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친척들의 눈치도 나날이 달라졌다.

처음에는 밥이라도 나눠먹고 함께 살자고 하던 친척들의 말이 너무 고마워 황송해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설 자리는 더욱더 좁아졌다.

TV에서 한국행에 성공한 탈북자들이 이야기가 나오면 너무 부러워 눈물을 흘리고 자나 깨나 한국에 가곺은 마음에 등이 달아 애타게 기도도 해보았다.

밤마다 사방에서 반짝이는 십자가를 따라 교회문도 열심히 두드려보았지만 모든 게 헛고생이었다.

그렇게 거의 4년 후 나는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서울에 집을 배정받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그는 시부모나 남편이 들을 가봐 겁나하면서도 자기도 가고 싶다고 울먹였다.

당시 나는 그를 데려올 수 있는 능력도 없었고 혼자 먼저 온 것에 미안함도 있었지만 언젠가는 꼭 그를 데려오는데 도움을 주겠다고 결심했었다.

몇년이 지났을 무렵 나는 한국에 온 친척을 통해 그가 한국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것이 바로 내가 그에 대하여 들은 마지막 소식이었다...

그렇게 그는 “잠적”했다.

나는 잠간의 인연이었지만 그를 찾곺은 마음에 여러 사이트“ 사람 찾기 란”에 사연을 올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바로 그가 나를 찾아 헤어져 11년 만에 고맙게 전화를 걸어왔다.

사연은 또 한 번 나를 서럽게 울렸다.

중국 내 탈북자들의 사연은 누구에게나 공통점이 있다.

원하지 않은 결혼, 원하지 않은 임신. 살기 위해서는 어차피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도 한 번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그래서 누구는 이름을 바꾸고 누구는 친구마저 외면한다.

그네들의 잘못이 아닌, 그렇게 밖에 할 수 없는 그들의 사연이지만 안타깝기도 하고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는 것이다.

고향을 떠나올 수박에 없었던 그들이었고 원하든 원치 않든 팔려가야 살 수 있는 그들이었고 친부모가 지어준 이름마저 바꾸면서 그 처지를 숨길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사연이었고 내 사연이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강산이 두 번 바뀔 때가 되었지만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 북한이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변했다고 한다.

국가경제체계가 무너지고 시장이 활성화되고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으로 체제가 바뀌면서 북한도 어느 정도 바뀌웠다고 말을 한다.

근데 왜 탈북자의 눈으로 본 북한은 변하지 않는 것 일가?

북한의 변화는 바로 김정은의 변화이다.

독재자의 이름이 변화는 것이 아니라 독재세습이 무너지고 개혁과 개방을 통한 변화의 조짐을 보여야 한다.

세계최악의 정치범수용소가 없어지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인권이 보장되어야 북한이 변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가?

굶주림과 경제파탄의 책임을 지고 김정은이 물러나고 진정한 지도자가 전면에 나서야 북한주민들의 삶에 결정적 변화가 오지 않을 가?

여전히 무서운 총대를 앞세워 “선군정치”를 부르짖고 인민의 무덤위에 저들의 호화궁궐을 짓지 말고 핵을 포기해야 진정한 북한의 변화가 이루어진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랑하는 부모형제와 고향을 떠나 이국땅 뿔뿔이 흩어진 수십만의 북한동포가 고향으로 돌아갈 그날이 와야 북한의 진정한 변화가 이루어지는 그날이 아닐 가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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