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은 광주폭동 유공자인가?
  • 광복군
  • 2011-11-07 23:0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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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광주폭동 유공자인가?

광주폭동을 배후에서 조종한 인물이 김정일이라는 의혹이 있다. 후계자지위를 인정받고 싶었던 김정일은 아바이 수령동지에게 큰 선물을 해드리겠다고 79년말부터 남한에 인민군 특수정예요원을 띄웠다는게 김평일과 김선일의 증언이다. 김평일은 후계자감으로 내정됐다가 숙청당한 김정일의 이복동생이고 김선일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의 아들이다.
착각은 자유라고, 김정일은 남한에서 폭동만 일으키면, 적화통일이 쉬워질 것이라고 착각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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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3월 서울 은평에서 붙잡힌 인민군 사진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대대 소속 이창룡 대위)

1980년 3월에 파주 군사분계선을 넘어온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대대 소속 이창룡 이하 인민군 병력이 서울 은평과 경기도 고양에서 검거됐다. 68년에 인민군 김신조 일당이 넘어온 것도 파주 군사분계선이었다. 당시 붙잡힌 인민군은 신문과 방송으로 보도되었다. 이때 검거되지 않은 나머지 인원, 혹은 루트를 다르게 해서 내려간 분조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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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포스터 역시 김정일의 얼굴 이미지가 삽입된 포스터로 광주는 부른다고 했다. 광주는 부른다? 광주는 왜 인민군을 필요로 하는 것일까?

5월 18일 새벽 6시 자칭 시민군은 광주시내의 경찰서와 예비군 부대를 습격, 군경 29명을 학살하고 병기고를 탈취한다. 5월 17일 0시부로 계엄령이 전국으로 확대됐는데, 광주에서 군부대와 경찰서가 습격당하고 폭동이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자 전국은 초비상이었고, 18일 오전 9시에는 비상국무회의가 국보위가 황급히 소집되어 계엄군이 파견된다. 그러나 계엄군으로 파견된 31사단은 광주 상무지구에서 보병학교 병력을 만나 서로 네가 광주폭도라며 오인사격을 하는 바람에 3시간을 지체했다. 계엄군이 광주시내에 진입한 시간은 18일 12시이다. 당황한 정부는 5월 18일 오전 10시 헬기로 3공수, 7공수, 11공수를 광주시내로 급히 내려보낸다.
5월 18일 오후부터는 김대중 추종세력까지 가세해서 김대중 석방을 요구하며 사태를 더욱 확대시켰다. 김대중 광신도들은 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 전두환 퇴진하라 등 격렬한 구호를 내세웠다. 그들이 그렇게 결사옹위하려던 김대중은 나중에 왜 변절했는지.... 만약 김대중 추종세력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유언비어를 날조한 폭도들의 폭동에 가세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때맞추어 북한에서 내려보낸 인민군 특수부대원까지 가담한다.

5.18 광주폭동이 발생하자 김정일은 인민군 정예특수요원을 내려보낸다. 잠수함을 탄 인민군 특수부대원 6~800여 명은 전남 목포와 함평 해안가로 상륙한다. 침투한 북한 인민군은 광주시내로 진입, 남한의 친북세력에게서 전달받은 남한경찰, 남한군복으로 갈아입고 민간인들에게 총질을 했다. 당시 총에 맞아 죽은 사람들 중에는 병기고에서 탈취한 총기와 다른 기종의 총기에 의한 총상 흔적도 발견되었다. 총상은 시민군 폭도들이 병기고에서 탈취한 M16 소총이나 국군이 쓰던 K1 소총, K2 소총과는 기종이 다른 칼빈소총이었다.

칼빈소총은 당시 인민군이 쓰던 총기였다.

사망자가 수백명이 나오자 인민군 특수부대는 다시 민간인 복장으로 갈아입은 뒤에 시민군 행세를 하며 계엄군이 이렇게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했다는 거짓말을 하고 돌아다닌다. 시민군 틈에 숨어든 인민군은 온갖 유언비어와 루머로 사태를 더욱 확대시켰다.
5.18 광주폭동은 당시 북한에서 생중계로 보도되고 있었다. 광주폭동의 실황이 조선중앙통신 등에서 생중계로 보도되었던 것이다. 이런 5.18 광주폭동이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해 있는 현실을 보고 탈북자들은 어이없어 했다. 북한에서 탈출한 탈북형제와 인민군의 증언이 지만원, 이주천, 김동문 등의 증거 자료, 역사학도들이 확보한 BBC, CNN 등 외신의 기사와 자료, 사진 동영상과 놀랍게도 일치했다. 2000년 이전에 그들이 만나본 일이 없는데 어디서 만나서 자료를 날조했다는 말인가!

폭동은 80년 5월 30일에 진압됐는데 5월 27일 전남도청이 봉쇄당하고 폭도들의 패배가 예상되자, 북한 인민군 특수부대는 사상자 50여명의 시신을 갖고 재빨리 해안가로 가 목포, 함평에 정박중이던 잠수함을 타고 북한으로 되돌아갔다. 이때 미처 회수하지 못한 인민군의 시신이 민주화 유공자라는 이름으로 광주에 누워있다. 인민군 시신, 노숙자 시체까지 끌어다가 억울한 희생자로 몰고 가는 친북 주사파와 김대중 광신도들의 진실왜곡 소행이 괘씸하다.
북한으로 되돌아간 인민군 전사자는 인민영웅 칭호를 받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고, 인민군 생존자들도 인민영웅, 노력영웅 칭호를 받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호기를 노리던 김정일은 광주폭동의 실패를 아쉬워하며 미완의 혁명이라 불렀다.

김정일은 왜 광주폭동을 기획했던가? 광주폭동에서 기회를 놓친 김정일은 기회를 보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다. 1983년, 전두환은 동남아 5개국 순방을 한다. 전두환의 순방소식을 남한 친북좌파들에게 전달받은 김정일은 전두환을 죽이려고 인민군 1개 대대를 보냈다가 인민군 상좌 3명하고 대좌 2명이 붙잡히고 실패로 끝났다. 아웅산묘소 테러사건이다.
전두환을 죽이지는 못했지만 예행연습때 나온 애국가에 맞춰 폭탄테러를 감행, 80여명의 남한 장차관과 기자들이 그 자리에서 죽었다. 서석준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심상우 보좌관 등 80여 명이 그 자리에서 희생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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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폭동을 추모하며 제작한 북한의 5.18 청년호 1호와 2호

김정일은 뒷날 광주폭동을 추모하며 미완의 혁명이라며 아쉬워했다. 광주폭동이 실패하자 북한은 광주폭동을 추모하며 매년 5월 18일마다 광주봉기 추모식을 갖고 있고, 5.18을 추모하여 5.18 청년호 1호와 2호 라는 대형프레스 잠수함을 건조해 광주폭동을 추모하고 있다.
김정일에게 광주폭동은 왜 미완의 혁명일까? 김정일에게 광주폭동의 의미는 뭔가? 북한에서 광주폭동의 의미는 무엇인가! 광주폭동 전후로 인민군을 침투시켜 죄없는 사람들을 살상한 목적이 뭔가? 이는 반드시 김정일을 붙잡아서 진실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 만세! 광주폭동의 진실은 반드시 규명되어야 한다. 지만원 박사, 이주천 교수, 김동문 주필과 여러 역사학도님들이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영삼 일당의 정치보복, 정적죽이기 목적으로 민주화 운동으로 둔갑한 광주폭동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지금도 북한에서 김정일은 죄없는 북한동포들을 괴롭히고 죽음으로 몰고 가고 있다. 죄없는 동포들을 잡아다가 납치,감금하고 고문하고 살해한다. 살아남아도 아오지나 요덕으로 끌려가 중노동을 강요당하다가 비참한 생을 마감한다. 지금도 살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에서 생사의 목숨을 걸고 탈북한다. 자신의 목적달성을 위해 너무나도 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살해한 전범 김정일, 인간이 아닌 비인간적인 금수 김정일은 반드시 법정에 세워야 된다. 광주폭동의 진실, 김정일의 추악한 욕심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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