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북한의 두 얼굴
  • 송근수
  • 2013-11-12 08:04:54
  • 조회수 : 1,821

내가 본 북한의 두 얼굴

나는 나의 일생에서 내 운명을 가지고 도박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택은 하였다.

지켜주는 나라가 없고 죽어도 묻힐 곳이 없는 이 인생!

거리를 헤매이다가 바람에 부딪치고 넘어져서 쓰러지면 내가 있을 자리는 과연 어디일까?

두만강가에 묻어버린 지나온 나의 삶이 너무도 가슴 아프고 힘든 추억에 때로는 울고 몸부림 치기도 했다.

조국과 인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고 일시적인 난관 앞에 겁을 먹고 자기와 한 핏줄을 나눈 부모 형제들까지도 버리고 달아난 민족 반역자라는 죄명으로 조국 땅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이제는 끝장이구나’하고 생각했다.

국경 경비대와 그리고 인계받으려고 나온 군보위부 반탐과 과장과 지도원이 서슬이 퍼러딩딩해서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야! 이 쌍간나 새끼들아, 어디라고 고개를 쳐들어’

하는 소리와 함께 ‘악’비명을 지르며 13살 명옥이가 쓰러졌다.

세관 마당에 서 있는 우리들의 모습은 도살장에 끌려온 개돼지와 같았다.

그때 시간은 오후 4시였는데 이미 서산으로 해는 기울고 있었다.

‘과장 동지 휘발유가 없어서 차가 뛰지 못한다고 합니다.’

‘젠장 그러면 걸어가야 된단 말이야, 야! 이 민족 반역자 새끼들아 너 간나들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고생을 한다. 할 수 없지 날이 어두워 지는데 빨리 행동하라.’고 하며 과장은 우리를 쭉 흩어보더니

‘여, 지도원. 저 까마귀들의 신발을 다 벗겨라. 도중에 뛰지 못하게’

‘과장 동지 이 추운 날씨에 30리 산길을 어떻게 맨발로 걷게 합니까?’

‘뭐야, 저런 인간 쓰레기들에게 무슨 인정이야, 인정 야, 지도원 너부터 신발 벗을래’

순간 지도원은 ‘네, 잘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대소한의 추위에 우리 도강자 28명은 신발을 벗은채 30리 산길을 걸어 군보위부 앞에 도착하였다.

보위부 청사 뒤에 있는 석탄 창고에 우리들을 쳐 넣었다.

한 30분 지나자 얼었던 발이 얼마나 쓰리고 아픈지 13살 명옥이는 엉엉 소리내며 울고 있다.

나는 명옥이 발을 주물러 주면서 ‘어른들도 이렇게 아픈데 이 어린 것이 얼마나 아프겠는가?’ 생각하는데 뚜벅뚜벅 구두발 소리와 함께 덜컹 문이 열렸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데 어린 명옥이는 계속 훌쩍훌쩍 울고 있다.

‘야, 이 쥐꼬리만한 간나 새끼야, 너도 도강을 해. 어째 도강을 했어’

‘선생님, 우리 아버지, 어머니, 오빠가 다 굶어 죽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 선생님, 쌀을 주시오.’

어린 명옥이는 콧물에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고사리같은 두 손을 쳐들었다.

옆에 섰던 지도원이 ‘이 간나, 선생은 무슨 선생이야 부장 동지이시다’ 그제서야 보위부장인 줄 알았다.

‘뭐야, 이 쌍간나 새끼야. 쌀을 달라고 지금 장군님께서는 고난의 행군 진두에 서서 달리는 승용차 안에서 감자로 요기를 하시면서 현지 지도의 길을 이어가고 계신다. 그런데 배가 고프다고 도강을 해’

하며 명옥이 머리채를 잡아 창고 바닥에 내동댕이 치고는 그 시커먼 구두발로 명옥이 손을 사정없이 짖뭉개 놓고 있었다.

세관에서부터 총박죽에 맞던 명옥이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며 맞는데 그 모양은 흡사 승냥이 앞에 놓인 토끼 새끼같았다.

한참 동안 발길로 차고 때리더니

‘야, 여기서 우리 당이 나쁘고 우리 수령이 나빠서 중국에 간 사람이 있으면 손을 들어라.’

감히 누가 손을 들겠는가?

지도원이 명단을 가지고 들어와서 이름을 불러 확인을 한다

‘부장 동지, 이 간나 XX반 반장입니다. S지도원이 담당한 그 반 있지 않습니까? 이 간나 꼴 좋게됐다. 너 간나 때문에 담당 지도원이 얼마나 비판을 받았는지 알아. 하여튼 너는 죽었어. 여기서 썩어라. 썩어 이 구류장에서 나갈려고 생각도 하지 말라. 지금 너를 얼마나 벼르고 있는지 알아.’

창고 지붕에 달리 벌건 전기불이 우리들을 비치고 있는 가운데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 있었다.

덜컹, 문이 열리더니 지도원이‘XX 나오라’

나는 마음을 가다듬고 초연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도원을 따라서 본 청사로 들어갔다.

보위부 청사를 손금보듯이 알고 있던 나는 (반탐과로 가는구나) 똑, 똑, ‘데리고 들어오라’는 소리와 함께 방에 들어서니 반탐과 과장과 비서 담당지도원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팽팽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담당 지도원이 내 앞으로 다가오면서

‘야, 간나 새끼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힌다고 하더니 네가 도강을 해. 어디 한번 죽어봐라. 여기서 살아 나가리라는 생각은 하지도 말라. 알았어’

하면서 가죽 장갑을 끼더니 나를 때리기 시작했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문채 주먹을 꼭 쥐고 온 몸에 힘을 주면서 ‘그래 어디 한번 때려봐라. 몇 개나 때리나 보자’ 마음을 다잡았다.

하나, 둘-- 열여덟까지 때리고 치고 박더니 제 손이 아픈지 허리에 찼던 권총을 뽑아 손잡이로 내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순간 나는 비명을 지르며 기절하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리니 온 몸은 물주머니가 되었고, 앞 이빨은 부러지고 머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코피로 얼굴은 피범벅이 되었다.

그때로부터 8일동안 하루에 두,세번 불려나가서 취조를 받고 비판서를 썼다.

한번씩 취조 받을 때마다 당한 내 몸은 망신창이가 되었다.

손가락과 손등은 너무 부어서 나뭇가지 하나 쥐지 못할 정도였고, 얼굴은 빵빵 불어난 고무 풍선이었고, 나갈 때는 제 발로 나갔지만, 들어올 때는 푹 삶아 놓은 씨레기처럼 질질 끌려서 감방에 들어왔다.

나를 보던 과장들과 지도원들은 ‘야, 이 간나새끼, 꼴 좋게됐구나. 그래. 중국에 가서 이밥 실컷 먹었어. XX 지도원 이 간나 여기서 푹 썩게 만드시오.’

하는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도 변한 초라한 나의 모습에 가슴이아팠다.

취조를 받는 동안 보위부장은 ‘저 간나 한테는 밥도 주지말라’고 하여 한 공기씩 나오는 멀건 죽도 주지 않았다.

함께 있던 27명의 도강자들이 자기들이 받은 죽에서 한 숟가락씩 덜어서 나에게 주던 그 모습을 평생 잊을수 없다.

내가 너무나도 자주 불려 나가서 취조를 받는 모습과 피투성이가 되어 들어오는 내 참상을 보고

‘남조선에 갈려고 했는가?’

‘중국에 있으면서 기독교에 갔는가?’

‘남조선 사람을 만났는가’고 저저마다 조용히 물어보았다.

온갖 심문에 시달렸다가 힘없이 지쳐서 쓰러져 있던 나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도강전에 나의 삶은 안전부, 보위부, 분주소, 군당을 제 집처럼 드나들었다.

군당이나 사무소에 가면 ‘아, 종합 반장 동무’

안전부, 보위부, 분주소에 가면 ‘아, 반장 동무 수고했습니다’

하던 것이 도강이라는 두 글자 때문에 ‘동무’가‘쌍간나 새끼’로 변했다.

개,돼지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내 모습을 보며, 이것이 이때까지 내가 선전하고 충성해 왔던 우리나라 사회주의인가?

떠나고 싶어서 떠난 것도 아니고,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진 혈육들이 아닌데 단지 그 어떤 사상도 없이 배고픔 때문에 두만강을 건넌 것이 죄가 되었던 것이다.

내가 보위보, 안전부를 거쳐 분주소 대기실에 13일만에 왔을 때어린 명옥이는 4일만에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쌀을 주세요’ 고사리같은 두 손을 쳐들었던 명옥의 모습이 그려지면서 가슴이 저리고 눈뿌리가 뜨거워진다.

얼마나 많은 명옥이와 같은 아이들이 식량을 구하러 떠난 엄마를 기다리다가 지쳐서 산과 들로 헤매이다가 장마당 모퉁이에서 시궁창에서 역전 대합실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었는가?

내가 읍 분주소에 도착한 것은 아침 출근 보고를 하려고 온 각 기관 기업소, 기요원들로 접수실 앞을 메우고 있었다.

나는 차마 얼굴을 들 수 없어서 고개를 숙이고 지나가는데 ‘저게 도강재 아니오’

‘응, 맞소. 아니 저게 혜숙이 엄마 아니오. 비슷한데’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복도 제일 끝에 가서 문을 열고 들어가라고 해서 들어갔다.

쿵, 하고 문이 닫기니 방안은 암흑이었다.

저쪽 벽 구석 위에 있는 작은 공기창으로 한줄기 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앞을 분간하지 못하여 어쩡쩡 서 있는데 내 손을 잡아 끄는 사람이 있었다.

‘처음에 여기에 들어오면 새까매서 어디가 어딘지 모르오. 좀 있으면 나을거요. 여기로 오오.’

석심한 목소리였다.

잡아끄는데로 끌리면서 나는

‘여기가 어딥니까?’

라고 물어보니 ‘아니 여기까지 끌려오면서 어딘지 모르고 왔소. 여기는 분주소 대기실이오’

‘대기실’

순간 나는 멍하였다.

대기실이란 손님을 접대할 때 기다리는 장소가 아닌가?

참 기가 막혔다.

순간 내 머리 속에는 해마다 12월달에 인구 통계를 하느라고 반장들과 함께 주민 등록과로 가던 일이 떠올랐다.

반장들은 서로마다 먼저 올라가고, 나는 맨 나중에 층계를 밟는데 ‘물 좀 주시오’라는 가느다란 신음 소리에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출입문 위에 있는 공기창으로 한 사람이 손을 내밀고 물을 달라고 한다.

나는 앞에선 반장을 툭 치며, ‘XX 반장 저것 보오. 저 사람이 물을 달라고 하오. 저 칸이 무슨 칸이오’

‘아니 이 반장봐라. 그것도 모르오. 저게 분주소 대기실인데 담당 주재원이 심문을 하고 감찰과로 넘길때까지 저기에 가두어 놓소. 그리고 매일 집에서 하루 새끼 밥을 날라야 하오. 그런데 반장은 저런 곳도 몰랐소’

‘야, 나는 몰랐소. 그런데 이름이 참 좋지, 대기실, 저게 어떻게 대기실이오. 감방이지 감방’

그러자 그 반장은 내 손을 쥐며 ‘대기실이라면 대기실이라고 생각하오. 말 조심하오.’라고 나를 훈시한다.

그런데 오늘 내가 그 대기실에 초롱속에 새가 되어 갇혀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대기실이 무엇이고 구류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너무나도 몰랐던 내가 얼마나 청맹간이였는지 가슴을 치며 통곡할 정도로 가슴이 아팠다.

다음날 아침 반장 동무가 아닌 쌍간나로 변한 독살스런 말투와 험상굿은 얼굴을 가진 소장이 나를 불렀다.

‘이 쌍간나, 너는 더 취급할 것도 없다. 너 간나 때문에 소장 비서가 군당, 군안전부에 가서 얼마나 비판을 받았는지 알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야, 내 너무 기차서. 여, 지도원 이 간나 깡판에 만땅크(6개월)로 집어 넣어. 제일 힘든 일을 시키고, 잠도 재우지 말고, 먹이지도 말고 이 간나 어디 맛좀 봐라. 도강한 죄가 얼마나 큰지 알겠어’

이것이 내가 평생을 충성해 왔던 사회주의 북한에서 받은 푸짐한 대접이었다.

어젯날의 양 얼굴이 변하여 승냥이가 되었어도 이런 얼굴은 아니었을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