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산천
- 2013-11-02 08: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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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미안합니다
세월은 참 빨리도 흘러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는 나이밥을 먹은지도 30년이 지났다.
어머니 손목을 잡고 까치 걸음 퐁, 퐁, 퐁 뛰며 학교에 입학던 때가 어제같은데 이제는 내가 어머니가 되었다.
오늘은 우리 햇님이 학교 입학 개교 첫날이다.
(어머니 빨리 가기쇼. 다른 아이들이 다 갔겠다. 오늘은 어머니 딱 굼베지같이 노니)
하고는 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는다.
(햇님아) 대답도 하기 전에 행복이가 어머니와 함께 들어왔다.
‘히야 햇님아, 네 단복(운동복)이 참 곱다. 음, 어머니 보시오!
햇님이는 저런 옷을 입었는데’ 하면서 자기 옷을 내려다 본다.
‘행복아 네 옷은 햇님이 옷보다 더 곱구나. 치마 주름도 쫙서고 세타도 정말 멋있다.’
고 칭찬해 주었더니 조금 서운한 기색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오전 9시에 개교식을 하기에 시간을 맞춰 나는 햇님이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많은 어머니들이 아이들의 손을 잡고 모여 있는 운동장은 내가 인민학교 1학년에(80년도에는 인민학교 지금은 소학교라고 부른다) 입학하던 때와는 비교도 안되었고 썰렁하였다.
개교식이 시작되었다.
우리 햇님이는 제일 앞줄에 섰다.
나는 햇님이가 보라고 잘 보이는 곳에 서서 그 어린 모습에 눈을 떼지 않았다.
햇님이는 내가 도중에 장마당으로 갈까봐 모이기 전에 ‘어머니 오늘 장마당에 딱 가야 됩니까? 안가면 안됩니까?’ 하고 물어보고는 ‘호--’ 하고 한숨을 쉬었다.
뻔한 집안 형편을 알기에 그 어린 것도 걱정반인데 나는 ‘그래 오늘 햇님이를 위하여 장마당에 가지 않을게’라고 애기 손가락으로 약속을 하고 도장까지 찍었다.
개교식이 끝나고 학생들은 교실로 들어갔다.
내가 돌아서보니 어머니들이 절반이나 자리를 비고 있었다.
하루벌어 하루 살기 바쁜 세월인데 왜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데 하늘이 흐려지면서 비가 올 것같았다.
나는 급히 집에 가서 우산을 가지고 오려고 하는데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집에 도착하니 댓줄기 같은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옷을 입은 후 우산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접수실 앞에서 햇님이를 기다리는 나의 마음에는 어머니도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 기다리시던 사랑스런 어머니 모습이 떠올랐다.
아직도 내 기억에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어머니 그 사랑은 내가 1학년 때 수업 도중에 때아니게 내린 폭설로 학교에서는 비상이 생겼다.
눈은 무릎까지 오게 되니까 1학년 학생들은 집에 돌아가는 것을 4학년 학생들이 지역별로 데려다 주기로 결정하였는데 나는 우리 마을 동무들과 같이 집으로 가려고 교문 앞에 나오니 눈을 폭 뒤집어 쓴 우리 어머니가 수건, 동화, 장갑 등을 가지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머니는 나를 등에 업고 손이 시릴까봐 어머니 등에 손을 넣으라고 당부하던 어머니 그 모습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난다 한들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제일 좋은 곳으로, 제일 맛있는 곳으로, 제일 깨끗하게 해서 나를 학생들 앞에 세우시던 어머니 추우면 추울세라 더우면 더울세라 나의 뒤를 쫓아 다니며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다독여 주던 그 어머니를 원망하였던 어젯날의 일이 가슴 아프게 떠올랐다.
1997년 3년동안 앓던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나실 때 나는 그 자리에 없었다.
아버지 사망 소식을 받고 집에 왔을 때는 아버지 공장 간부들과 친척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집에도 오래있지 못하고 함북 체육단에서 훈련 중이었기 때문에 아버지를 잃은 다음에도 어머니는 한달에 한번씩 속도전 가루 콩, 강냉이를 닦아가지고 나를 찾아오곤 하였다.
그런데 석달이 지나고 반년이 되었는데 소식도 없고 어머니도 오지 않았다.
그때에는 배급이 중단되어서 가는 곳마다 사람들의 죽음이 나뒹글고 산과 들에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뱃사장을 이루었다.
국가 공급이 되는 우리도 기름은 고사하고 염장 배추에 강냉이 가루 밥이 우리 주식이 되었는데 그나마도 다행이었다.
들리는 소리마다 고향에서는 누구네는 다 죽었소. 누구네는 중국에 온 가족이 다 도강했소. 누구네 엄마도 갔소. 하는 소문이 귀따갑게 들려왔다.
그때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다 도강을 하여도 우리 어머니만은 절대 도강을 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만큼 우리 어머니는 사회와 가정, 자식의 대해 너무나 충실하였던 우리 어머니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훈련을 마치고 기운 없이 털털거리며 숙사에 들어서고 있는데 ‘누나야’라고 부르며 동생 철이가 두 팔을 벌리고 달려오지 않는가?
나는 너무 기뻐서 온 하루의 피곤도 더욱이는 무거웠던 마음도 다 털어버리고 ‘철이야’ 부르며 힘껏 포옹했다. 꼭 열달만이다.
나는 철이 손목을 잡고 숙사에 들어왔다.
동무들은 모두 제 동생이 온 것처럼 기뻐하며 저저마다 식권을 내어 점심을 먹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오후에 나는 시간을 허락받았다.
철이는 오늘 가야 한다고 하기에 둘이 청진 역전까지 걸어서 나왔다.
‘철이야!’
나는 어머니 소식이 너무도 궁금하여 물어보려고 하니 ‘누나’ 하고 내 손목을 꽉쥐면서 ‘이제부터 내가 하는 말 잘들으시오.’한다.
나는 그때처럼 굳은 동생의 얼굴 모습을 처음 보았다.
‘누나! 누나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다 압니다. 아버지가 떠나간지 1년이 되어 옵니다. 내 어머니를 찾아 중국에 갔다가 어머니를 찾지 못하고 왔습니다. 맞습니다. 어머니는 도강을 했습니다. 나에게 빠르면 5일 늦으면 일주일만 기다리라고 했는데 종 무소식이어서 도강을 해서 중국 연길, 화룡까지 갔댔는데 못찾았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죽었다고 합니다.’
설마 아닐거야 아닐거야 하면서 자기 마음을 위로하며 속을 태우던 나는 순간 뒤통수를 큰 망치에 맞은 것처럼 그 자리에 쓰러졌다.
내가 눈을 뜨니 쓰러진 나를 철이가 부여앉고 있었다.
‘철이야 우린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니,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까지 우리를 버리고 갔으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줄 끊어진 구슬마냥 뚝뚝 떨어졌다.
그런 나를 측은히 바라보던 철이는 제법 어른스럽게 ‘누나 내가 있잖아. 이 동생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는 우리를 버리고 갔지만 이제부터는 누나를 내가 지킵니다.’
하고는 제 호주머니에서 십전짜리 동전까지 내 손에 쥐어주는 것이었다.
우리 형제는 부둥켜 앉고 실컷 울었다.
울지 말라고 하는 철이의 눈에서도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는 이때까지 살면서 그때처럼 눈물을 흘려보기는 처음인 것같았다.
철이는 ‘누나 우리 어머니는 절대 죽지 않았습니다. 내 꼭 어머니를 찾고야 말겠습니다. 이 세상 끝까지 다 뒤져서라도 어머니를 꼭 찾겠습니다. 누나 기다리시오. 알았지’
그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헤어진 사랑하는 동생이 그곳도 이세상에서 마지막 이별이 될 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동생을 보내고 숙사까지 나는 무슨 정신으로 어떻게 왔는지 모른다.
살고 싶은 생각은 꼬물만치도 없었다.
그날 저녁부터 식음을 전폐하고 앓기 시작했다.
연 3일동안 물 한 숟가락도 넘기지 못하고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사경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 어떤 말도 내 귀에 들리지 않았다.
5일째 되는 날, ‘혜숙아’ ‘혜숙아’ 하는 소리에 소스라쳐 눈을 떠보니 어렴풋한 모습에 나는 ‘어머니’ 하고 벌떡 일어났다.
식당 책임 주방자가 죽을 한 공기 가지고 와서 반시간 전부터 흔들어 깨웠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겠다고 도리질을 하며 다시 돌아누웠다.
주방 책임자는 우리 어머니가 나한테 올때마다 식당에서 음식을 같이 만들고 하면서 아주 친한 사이였다.
‘혜숙아! 정신을 차리고 내 말을 명심해 들어라 나도 들었다. 어머니 말을 그런데 지금 여자들은 가족을 버리고 자식을 버리고 행방을 갔다가 종 무소식이 되는 것도 많다. 그렇지만 너희 어머니는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다. 자식을 버릴 그런 어머니가 아니다. 중국에 친척이 있으니까 방조를 받으러 갔다가 일이 잘 안되어서 그렇겠지’
이렇게 말하는 사이에 내호실에는 부단장, 책임 지도원, 담당 지도원 그리고 선수들이 방안을 꽉 채우고 있었다.
책임자 어머니는 죽을 한 숟가락씩 떠서 내 입에 대며 ‘어서 먹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때로부터 두달 후 나는 중국으로 도강한 어머니 때문에 체육단에서 쫒겨나 고향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실었다.
갈수록 심산이라고 집에 오니 우리 집은 벌써 딴 사람이 살고 있었다.
사촌 오빠가 살기 바쁘다고 팔았다고 한다.
동시에 동생을 찾으니 행방이 묘연하였다.
졸지에 나는 고아가 되었다.
바람부는 벼랑 끝에 선 나는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모른다.
내가 고향에 돌아오니 정말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내가 살던 인민반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행방불명이 되었고 거리마다 대합실마다 시체들이 나뒹글었다.
친척들의 집을 찾아가도 문전박대였다.
그날 저녁 갈 곳이 없어서 역전 대합실에 가는데 우리 이웃집에서 살던 춘미 엄마를 만났다.
‘아니 이게 혜숙이가 아니야, 그래 엄마 소식은 들었겠지 그런데 지금 어디로 가니’
나는 당장 눈물이 쏟아져 말도 못하고 울먹이고 있는데 ‘응 알만하다 네가 있을 곳이 없어서 대합실에 가는구나 우리 집에 가자’ 하면서 내 손목을 잡아 끈다.
‘춘미 아버지 누가 왔나 보시오 혜숙이가 왔습니다 혜숙이’ 하는 소리에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구라고 그래 혜숙이구나 빨리 들어오라’ 하며 내 손을 잡아 끌어들인다.
춘미 엄마는 따끈따끈한 국수 죽을 한사발 담아 주면서 ‘먹어라 얼마나 배가 고프겠니’ 하며 혀를 끌끌 찬다.
그 이튿날 외톨이가 되어 갈 곳없는 내 소식을 들은 인민반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 것처럼 춘미네 집에 모여들었다.
친척들도 다 나 몰라라 외면을 하는데 한끼가 새로웠던 당시 그 형편에 남에게 한끼 먹여준다는 것은 자기가 그만큼 굶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우리 어머니를 생각해 나를 이끌어 재워주고 먹여주는 인민반 사람들의 정성은 나의 어머니에 대한 오해를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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