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짜별 5.18 광주폭동 유언비어 모음
- 독립군
- 2011-10-10 21:52:22
- 조회수 : 1,739
날짜별 5.18 광주폭동 유언비어 모음
광주사태 사건 개요
당시상황
-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유신헌법의 간접선거 절차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은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연 내에(80년) 완료하고 80년 말경 직선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81년 초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정치일정을 제시.
- 80년 봄이 되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야당 및 민주화 단체 등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야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각종 집회를 열었고, 대학생들은 이를 지지하며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 및 집회를 전국적으로 전개(80년 서울의 봄).
- 1980년 3월 경기도 파주군을 통해 내려오던 북한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대대 소속 대위가 서울 은평구 북한산 근처에서 검거됨
- 직전 4월 말에는 사북탄광에서 폭력적 노사분규가 일어나 경찰관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사북 일대가 치안공백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
- 1980년 5월 1일, 친북 좌익 성향 대학생 10~15만 명이 지상 서울역 광장을 점령, 서울역 주변의 상가를 약탈하고 유리를 파괴하고, 주차된 차량을 찌그러트리고 가로수와 가로등을 부러트리고 행인 폭행
- 5월 15일 운동권 대학생이 주도하여 10만여명이 운집한 서울역 시위에서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경찰 수명이 숨지는 등 극심한 사회혼란 및 안보불안 상태에 놓임. 5월 16일 경찰의 진압대 투입 정보를 빼돌린 운동권 간부들에 의해 시위대는 반나절만에 바로 사라졌다.
- 김대중 등 재야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하여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고 대학생 등을 동원하여 봉기계획을 추진.
- 이에 정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김대중 및 그 측근 등을 내란 혐의로,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함.
-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시킴.
사건발생
- 5.17일 0시를 기하여 발표된 계엄 포고령에 의하여 조선대 전남대 등 광주시내 대학가에 계엄군 진주(교내의 학생들을 강제로 추방시킴).
- 연금상태에서 김대중은 '이런 자들과는 절대 타협할수 없다'는 선언을 함. 이는 일종의 지령임.
- 5. 18일 오전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
* 5월 18일 새벽 6시경 광주시내 29개 병기고 탈취. 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랐다, 계엄군이 여고생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사람고기를 뜯어먹었다 등의 유언비어들이 정체불명의 지프차와 확성기를 통해 확산됨. 시민들은 공포감에 빠짐.
* 오전 8~9시경 비상국무회의 열고 계엄군 투입. 계엄군은 31사단(사단장 정웅 소장)
* 오전 10시경 시내 중심가로 이동한 2백여 명의 전남대생이 시위,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 등 격렬한 시위로 경찰이 밀리자, 오후 5시 40분경 계엄군 병력을 투입, 상호 격렬한 충돌 및 부상자 다수 발생.
계엄군으로 파견된 31사단의 투입이 지연되자 바로 3공수여단,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이 투입됨.
* 오전 10시 20분, 7공수 여단 병력 8명이 전남대학교 정문에 배치됨. 누군가 돌을 던지라고 하자 8백여 명의 전남대학생이 일제히 공수여단 병력 8명을 향해 돌을 던짐. 계엄군 증원 요청.
*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계엄군에 살해되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 유포 => 전 광주시대로 확산
* 12시. 보병학교 병력을 겨우 따돌린 계엄군 31사단 병력 광주시내 진입. 이때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바로 물리적인 난투극 발생.
- 5.19일 시위가 확산되어 파출소 방화, 차량 방화 등의 사태 발생.
* 시위대 나주 예비군 대대 무기고 등을 습격, 소총과 탄약 탈취하여 무장.
* 광주 시외 버스터미널 근처의 시위대 중에 총상으로 의심되는 사망자 1명 발생.
- 5.20일 1만명의 시위대가 광주 MBC방송국 점거 방화/시청습격 파괴/ 도청앞 저지 경찰관 4명이 시위대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 사망 / 시내 파출소 다수 방화
* 광주시내의 거의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시위대가 습격 점거.
* 아세아자동차공장 습격, 화순탄광에서 폭약 탈취, 광주 교도소 습격. 사상범 외 살인범, 강간범들 모두 탈주.
* 오후 8시경 계엄군 대검 장착. 이때까지만 해도 계엄군이나 공수부대는 대검을 장착하지 않았음.
- 5.21일 광주세무서 방화로 전소/ CBS 방송국 점거 방화 및 차량 탈취.
* 시민군이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백여대를 탈취.
* 12시경 도청경비 계엄군과 수만명의 시민군 대치하던 중, 시위대의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이 깔려 수명의 사상자 발생. 그 와중에 계엄군 시민군을 향하여 최초(?) 발포.
(돌격하는 시민군의 장갑차,버스를 향해 우발적인 발포라는 증언들이 있음)
* 시민군이 5차에 걸쳐 2천7백 여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습격. 상당수의 사상자 발생.
* 계엄군 외곽지대로 완전 철수 => 시민군측이 광주시내를 장악, 계엄군 광주 외곽 봉쇄.
- 5. 23일 시민군측 지역유지 및 종교계 인사 등으로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 => 강경파의 타협 반대로 수습 실패.
- 5.24이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 대립과 혼란 속에 광주 시내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 봉쇄.
*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강경파 시민군 200여명 정도가 전남도청 및 인근에 잔류.
- 5.27일 새벽에 시민군의 최종 집결지인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장악 => 시민군 완전 해산.
* 사태 종결
날짜별 광주폭동 유언비어 모음
유언비어 목록
5월18일(D+0)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공장을 때려부순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 반란을 일으켰다”
“계엄군이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었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식이나 굶기고 술과 한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계엄군이 학생들을 구타한다”
“여학생을 발가벗겨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5월19일(D+1)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전라도 사람을 쑥밭으로 만든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계엄군이 미군이 준 환각제를 먹고 시민들을 학살한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싣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목이 짧은 시체를 보고는 “목이 없다”로, 유방이 낮은 시체를 보고는 “유방이 없다”로 표현하여 유언비어를 자아냈다.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사람을 깔아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질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싣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5월20일(D+3)
“차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시켜 귀를 자른다”
“광주은행 앞에 끌려간 사람들 신발 30족이 전시됐다”(이는 사실임)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5월21일(D+4)
-시위대 광주 완전 점령-
“신총리 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고교생들이 특공대를 구성하고 있다”
“화염병으로 장갑차를 물리치고 있다”
“남한 방송 믿을수 없으니 이북방송 들어라”
5월22일(D+5)
- 광주시 완전 점령: 무법천지 -
시체를 가지고 왔다갔다하며 시민들에게 적개심을 일으키게 했다
시체들을 도청 앞 광장에 진열하고, 합동 장례식을 치른다며 시민을 동원하고 항쟁을 독려했다
어린이들에게 과자와 검을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했다
5월23일(D+6)
- 시민참여 급감 -
상황: 시민들 이탈 시작, 수습국면 돌입, 냄새나는 희생자 시체 진열
“광주 궐기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외국우방이 우리를 지원하기로 돼 있다”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격해 오니 시민들은 총 궐기하라”
5월25일(D+8)
상황: 수습위원회와 협상
“계엄군은 못 들어온다”
“5일만 견디면 된다”
“대세가 우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하여 최후승리를 쟁취하라”
“계엄군이 무력진주하려 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라”
그러나 이 유언비어와 악성 루머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조했는지, 무슨 목적으로 루머를 지어냈는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광주사태 사건 개요
당시상황
- 박정희 대통령 사망 후 유신헌법의 간접선거 절차에 따라 대통령에 당선된 최규하 대통령은 직선제 등을 골자로 하는 헌법개정을 연 내에(80년) 완료하고 80년 말경 직선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여 81년 초에 정권을 이양한다는 정치일정을 제시.
- 80년 봄이 되자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등을 주축으로 하는 야당 및 민주화 단체 등에서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야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요구하는 각종 집회를 열었고, 대학생들은 이를 지지하며 조속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대적인 시위 및 집회를 전국적으로 전개(80년 서울의 봄).
- 1980년 3월 경기도 파주군을 통해 내려오던 북한 인민군 인민무력부 심리전대대 소속 대위가 서울 은평구 북한산 근처에서 검거됨
- 직전 4월 말에는 사북탄광에서 폭력적 노사분규가 일어나 경찰관이 숨지고 수십명이 부상하였으며 사북 일대가 치안공백 상태에 빠지는 사태가 발생.
- 1980년 5월 1일, 친북 좌익 성향 대학생 10~15만 명이 지상 서울역 광장을 점령, 서울역 주변의 상가를 약탈하고 유리를 파괴하고, 주차된 차량을 찌그러트리고 가로수와 가로등을 부러트리고 행인 폭행
- 5월 15일 운동권 대학생이 주도하여 10만여명이 운집한 서울역 시위에서 시위대의 차량돌진으로 경찰 수명이 숨지는 등 극심한 사회혼란 및 안보불안 상태에 놓임. 5월 16일 경찰의 진압대 투입 정보를 빼돌린 운동권 간부들에 의해 시위대는 반나절만에 바로 사라졌다.
- 김대중 등 재야에서는 최규하 대통령이 퇴진하지 않으면 5월 22일을 기하여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것을 선언하고 대학생 등을 동원하여 봉기계획을 추진.
- 이에 정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김대중 및 그 측근 등을 내란 혐의로, 김종필 이후락 등을 부정축재 등의 혐의로 체포하고, 김영삼을 가택 연금함.
-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모든 대학에 계엄군을 배치시킴.
사건발생
- 5.17일 0시를 기하여 발표된 계엄 포고령에 의하여 조선대 전남대 등 광주시내 대학가에 계엄군 진주(교내의 학생들을 강제로 추방시킴).
- 연금상태에서 김대중은 '이런 자들과는 절대 타협할수 없다'는 선언을 함. 이는 일종의 지령임.
- 5. 18일 오전 등교하던 전남대 학생들과 계엄군 사이에 소규모 충돌이 발생.
* 5월 18일 새벽 6시경 광주시내 29개 병기고 탈취. 계엄군이 임산부 배를 갈랐다, 계엄군이 여고생 젖가슴을 도려냈다, 계엄군이 사람고기를 뜯어먹었다 등의 유언비어들이 정체불명의 지프차와 확성기를 통해 확산됨. 시민들은 공포감에 빠짐.
* 오전 8~9시경 비상국무회의 열고 계엄군 투입. 계엄군은 31사단(사단장 정웅 소장)
* 오전 10시경 시내 중심가로 이동한 2백여 명의 전남대생이 시위, 오후 2시경에는 1천여명으로 늘어나 경찰과 투석전 등 격렬한 시위로 경찰이 밀리자, 오후 5시 40분경 계엄군 병력을 투입, 상호 격렬한 충돌 및 부상자 다수 발생.
계엄군으로 파견된 31사단의 투입이 지연되자 바로 3공수여단, 7공수여단, 11공수여단이 투입됨.
* 오전 10시 20분, 7공수 여단 병력 8명이 전남대학교 정문에 배치됨. 누군가 돌을 던지라고 하자 8백여 명의 전남대학생이 일제히 공수여단 병력 8명을 향해 돌을 던짐. 계엄군 증원 요청.
* "전남대 학생회장 박관현이 계엄군에 살해되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는 등의 유언비어 유포 => 전 광주시대로 확산
* 12시. 보병학교 병력을 겨우 따돌린 계엄군 31사단 병력 광주시내 진입. 이때 전남대 학생들과 조선대 학생들이 교문 밖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바로 물리적인 난투극 발생.
- 5.19일 시위가 확산되어 파출소 방화, 차량 방화 등의 사태 발생.
* 시위대 나주 예비군 대대 무기고 등을 습격, 소총과 탄약 탈취하여 무장.
* 광주 시외 버스터미널 근처의 시위대 중에 총상으로 의심되는 사망자 1명 발생.
- 5.20일 1만명의 시위대가 광주 MBC방송국 점거 방화/시청습격 파괴/ 도청앞 저지 경찰관 4명이 시위대가 돌진하는 차량에 치어 사망 / 시내 파출소 다수 방화
* 광주시내의 거의 모든 경찰서와 파출소를 시위대가 습격 점거.
* 아세아자동차공장 습격, 화순탄광에서 폭약 탈취, 광주 교도소 습격. 사상범 외 살인범, 강간범들 모두 탈주.
* 오후 8시경 계엄군 대검 장착. 이때까지만 해도 계엄군이나 공수부대는 대검을 장착하지 않았음.
- 5.21일 광주세무서 방화로 전소/ CBS 방송국 점거 방화 및 차량 탈취.
* 시민군이 오전에 아시아자동차를 습격, 장갑차 및 군용 차량 등 2백여대를 탈취.
* 12시경 도청경비 계엄군과 수만명의 시민군 대치하던 중, 시위대의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이 깔려 수명의 사상자 발생. 그 와중에 계엄군 시민군을 향하여 최초(?) 발포.
(돌격하는 시민군의 장갑차,버스를 향해 우발적인 발포라는 증언들이 있음)
* 시민군이 5차에 걸쳐 2천7백 여명의 죄수가 수용된 광주교도소를 습격. 상당수의 사상자 발생.
* 계엄군 외곽지대로 완전 철수 => 시민군측이 광주시내를 장악, 계엄군 광주 외곽 봉쇄.
- 5. 23일 시민군측 지역유지 및 종교계 인사 등으로 수습위원회를 구성, 무기 회수와 당국과의 협의를 통한 사태 수습을 위해 노력 => 강경파의 타협 반대로 수습 실패.
- 5.24이후 강경파와 온건파의 의견 대립과 혼란 속에 광주 시내는 시민군이 장악하고 계엄군은 광주 외곽 봉쇄.
* 대부분의 시민들은 귀가하고 강경파 시민군 200여명 정도가 전남도청 및 인근에 잔류.
- 5.27일 새벽에 시민군의 최종 집결지인 전남도청에 계엄군이 진입하여 장악 => 시민군 완전 해산.
* 사태 종결
날짜별 광주폭동 유언비어 모음
유언비어 목록
5월18일(D+0)
“화려한 휴가라는 명칭 하에 데모 진압 작전을 시작했다”
“여학생을 발가벗긴 채 세워놓고 대검으로 유방을 도려내어 죽였다”
“경상도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공장을 때려부순다”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들의 씨를 말리려 왔다”
“벌써 40명이 죽었다”
“경상도 군인만 골라서 왔다”
“전두환이 공수부대를 동원 반란을 일으켰다”
“계엄군이 사람의 고기를 뜯어먹었다”
“투입된 공수부대원들을 이틀식이나 굶기고 술과 한각제 등을 복용시켜 광주에 투입했다”
“공수부대원이 여자의 젖가슴을 대검으로 도려냈다”
“공수부대원이 임신한 여자의 배를 대검으로 찔렀다”
“죽은 시민을 불도저로 밀면서 처리하는 과정이 TV에 나왔다”
“공수부대원이 광주에 들어오면 광주시민을 무자비하게 죽일 것이다”
“대검으로 시민의 머리 가죽을 벗겨냈다”
“계엄군이 학생들을 구타한다”
“여학생을 발가벗겨 세워놓고 칼로 유방을 도려내 죽였다”
5월19일(D+1)
“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에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경상도 군인이 와서 전라도 사람을 쑥밭으로 만든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장갑차로 사람을 깔아 죽였다”
“계엄군이 미군이 준 환각제를 먹고 시민들을 학살한다”
“김대중을 잡아 죽이고, 전라도 사람을 몰살한단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찔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던지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삼립빵 트럭이 시체를 싣고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다”
“공수부대들은 젊은 놈은 모조리 죽여라, 광주시민 70%는 죽어도 좋다는 구호를 공공연히 외치고 있다”
목이 짧은 시체를 보고는 “목이 없다”로, 유방이 낮은 시체를 보고는 “유방이 없다”로 표현하여 유언비어를 자아냈다.
“민주주의가 말살되었다”
“학생들이 많이 죽었다”
“부녀자가 국부를 찌르고 유방을 칼로 도려내니 참을 수 없다”
“경상도 군인들이 와서 여자고 남자고 닥치는 대로 밟아죽이고 있다”
“계엄군이 출동해서 사람을 깔아죽였다“
“공수부대들이 호박을 찌르듯이 닥치는 대로 질러 피가 강물처럼 흐르는 시체들을 트럭에 싣고 있다”
“여학생들이 발가벗긴 채로 피를 흘리며 트럭에 실려갔다”
5월20일(D+3)
“차타고 있는 젊은 사람을 무조건 하차시켜 귀를 자른다”
“광주은행 앞에 끌려간 사람들 신발 30족이 전시됐다”(이는 사실임)
“시위학생을 태운 운전기사를 칼로 찔러 살해했다”
5월21일(D+4)
-시위대 광주 완전 점령-
“신총리 이하 전각료가 굴복 퇴진하였다”
“최규하 대통령은 곧 하야하게 되었다”
“고교생들이 특공대를 구성하고 있다”
“화염병으로 장갑차를 물리치고 있다”
“남한 방송 믿을수 없으니 이북방송 들어라”
5월22일(D+5)
- 광주시 완전 점령: 무법천지 -
시체를 가지고 왔다갔다하며 시민들에게 적개심을 일으키게 했다
시체들을 도청 앞 광장에 진열하고, 합동 장례식을 치른다며 시민을 동원하고 항쟁을 독려했다
어린이들에게 과자와 검을 나누어주면서 합세를 권장했다
5월23일(D+6)
- 시민참여 급감 -
상황: 시민들 이탈 시작, 수습국면 돌입, 냄새나는 희생자 시체 진열
“광주 궐기에 호응하여 전국각지에서도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외국우방이 우리를 지원하기로 돼 있다”
“계엄군이 무력으로 진격해 오니 시민들은 총 궐기하라”
5월25일(D+8)
상황: 수습위원회와 협상
“계엄군은 못 들어온다”
“5일만 견디면 된다”
“대세가 우리하게 돌아가고 있다”
“시민들은 우리 시민군에 가담하여 최후승리를 쟁취하라”
“계엄군이 무력진주하려 하니 시민들은 궐기 대항하라”
그러나 이 유언비어와 악성 루머들은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날조했는지, 무슨 목적으로 루머를 지어냈는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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