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았던 특수부대 군인과 싸움
  • 이민복
  • 2016-09-25 11:43:54
  • 조회수 : 2,719



북에서 인민군 경보부대도 특수부대라고 한다.
유격대출신인 김일성의 방침따라 맹근 부대이다.
천리행군하는 그들을 본적 있는데
처녀들이 그 고생을 이해못해 땀내난다고 하니 그 자리에서 쳐 버려.
심야에도 행군하는 그들은 얼마나 지쳤는지
신기하게도 혁명가요가 아니라 신상옥 감독이 만든
사랑사랑내사랑! 노래를 합창하며 기운을 돋구고 있었다.
-
1983년 9.9절 공화국창건 35돐때이다.
당시 함북도 화성(명간)군에 있는 우리연구소 분장인
룡덕리에 현지시험으로 있은 3년간 기간 중.
아마도 화성에서 온 탈북인은 룡반역에서 걸어들어가면
룡덕분장이 있으며 무장보초를 통과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99절 국경절을 35주기년을 맞아
20여개 리들이 읍에 총 모여 체육경기가 있었다.
5명씩 팀으로 된 룡덕분장 씨름선수의 일원으로 나갔는데
결승경기에 이르러 내가 있던 룡덕분장과 상대는 근동리였다.
서로 이기고 지고 하다가 5번째 선수에 이르러
공교롭게도 마지막 결승전을 맺는 경기에 내가 걸려들었다.
사실 1등을 자신한 근동리에서 소까지 상으로 냈는데
나의 경기결과로 1등 상인 소를 떼우고 말았다.
-
상대는 특수부대에서 갖 제대된 경보군인이었는데
구리빛에 굴찍한 근육체질인 그에 비에 나는
연구실에 있다나니 창백하고 나약해보였다.
샷바를 잡을 때 그에 귀에 대고 너무 쎄게 메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게 심리전인 줄 모르고 그는 더욱 신나
세게매치려고 공격적으로 으싸싸 들고 돌아갔다.
방어 전술로 그의 맥을 다 빼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을 아는
읍학교 씨름선수였던 경력을 그는 몰랐던 것이다.
결국 1회전에서 맥을 놓는 순간 무릅치기로 그자리에 앉혀버렸고
2회전에는 오히려 내가 들어 메쳐버려-
2승 연속이면 씨름은 끝.
얼마나 원통한지 그는 1회전에 넘어졌을 때에 모둠발로 나를 차며
벌떡 일어나 내가 자기 좃을 쳤서 쓰려졌다고 하여 인산인해 관중은 물론
그 앞에 있던 처녀들이 얼굴이 새빨개 배를 그러않고 웃음이 터졌다.
-
경기가 끝나고 얼마후 찾아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하엿다.
-
그는 꾸겨진 자존심을 위해 복수를 하려는 것이 분명했다.
어릴 쩍 싸움꿈이었기에 그 심리를 잘 안다.
그렇다고 국가연구사가 농민청년과 싸울 수도 없고 난처하여
경기는 경기고 싸우면 내가 지니 그러지 말라고 사정했다.
그것은 오히려 달아나면 더 무는 꼴이 되어
특수부대에서 훈련한 그대로 치고 들어왔다.
그것이 360도 회전 뒤발차기이다.
싸움은 본능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또 25살 청년기였기에 감당할 수도 있었다.
-
약간 몸을 낮추어 피하고 그 발을 잡아
탄력 그대로 회전시켜 뿌려 버렸다.
저 만큼 나가 떨어졌는데도 다시 일어나 달려들때
이번에는 오히려 비호같이 내가 그의 턱밑까지 들어가
주먹이 아니라(상처가 나니) 손 바닥으로 턱을 위로 쳐버리니
그대로 정신잃고 쓰려져 버렸다.
-
뒤발차기 즉 태권도!?
군대가지 않아 그리고 태권도를 배우지 않아 모르겠다만
학교 씨름과 군 체육구락부생인 나같은
어느 정도 준비된 사람에게 뒤발차기는 하수라고 본다.
상식적으로 발보다 주먹이 더 빠르기 때문이다.
-
여자 표도르인 론다로우지가 홀리홈에 발차기로 ko당한 것은
부단한 주먹질에 피로에 빠졌을 때 먹혀든 것이지
처음부터 그랬으면 론다의 밥이 되었을 것이다.
-
또 통계적으로
태권도선수출신 종합격투기 체피언이 없는 것으로 증명한다.
그래서인지 아들에게 태권도가 아니라 유도와 권투,
그 후 종합격투기를 해보라고 했다.
*안해 때문에 종합격투기는 무산
*화성군은 함경북도에 있으며 그 전 명칭은 명간, 명천
*씨름에서 1등 소 탔다고 하는 사실여부는 1억원 내기걸기.
현재 탈북하여 뒤늦게 입수한 일기장에도 기록된 것 있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