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간첩양성 기관 봉화정치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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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06-15 11: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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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간첩양성 기관(1)-‘봉화정치대학’
written by. 김필재

주요교육내용, 지하당건설이론·심리학·비합법활동전술




"우리 북반부에서는 민간단체는 없지만, 남조선에는 그 이름도 잡다한 민간단체가 수없이 많다. 그 가운데에는 우리 측이 만든 민간단체도 적지 않다. 남조선 당국자들을 반민족적 분열주의세력으로서 몰아붙이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단체를 만들어 남조선인민 가운데서 통일의 열망을 쌓아올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김일성 교시, 1972년 8월 제1회 남북적십자회담대표들과의 회담)

북한의 대남공작요원(고정간첩)은 사회문화부 소속의 ‘봉화정치대학’에서 양성되며 ‘전투원’ 즉 무장간첩은 노동당 작전부 산하 ‘김정일정치군사대학’에서 양성하고 있다. 이 두 대학은 지난 1957년 이후 ‘686훈련소’. ‘금강학원’, ‘금성정치군사대학’ 등으로 변천을 거듭해오다 지난 1992년 이후 지금의 명칭으로 정착됐다.

고정간첩을 양성하는 봉화정치대학의 학제는 과정에 따라 1년 내지 3년이다. 입학대상자는 ‘김정일정치군사대학’ 5년을 졸업한 ‘전투원’ 출신이거나 비밀리에 선발한 요원들로서 대상자의 출신배경에 따라 교육기간이 결정된다. 주요 교육내용은 지하당 건설이론, 정보학, 지형학, 적국활동 심리학, 외국어, 남한 및 국제정세. 비합법활동전술, 수영·잠수·운전 등이다.

남한과 해외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생활하면서 각종 정보수집과 지하조직 건설, 그리고 와해활동에 필요한 지식과 기술을 최고의 환경에서 교육받는 것이다. 고령의 몸으로 맹활약한 이선실(2000년 사망) 등 공개·비공개 대남사업 종사자 거의 모두가 이 봉화정치대학 출신이다. 한편, 북한의 대남사업은 그 특성상 비밀보안 문제가 생명으로 그동안 김일성·김정일 이외는 어떤 인물도 이 분야를 건드릴 수 없다. 이와 관련한 일화가 하나 있다.

《67년 1월 30일, 평양의 주요 기관과 기업소에 현지지도를 나왔던 김일성이 당시 연락부장이었던 이효순에게 “오늘은 동무들의 사업을 좀 알아보자”며 ‘686훈련소’(봉화정치대학)로 승용차를 돌렸다. 당시 민족보위상(현 인민무력부장) 김창봉 대장을 비롯, 당 간부와 정무원 간부 수십명이 김일성을 수행했다.

김일성이 탄 차가 용성구역으로 들어서자 김일성은 갑자기 차를 세우게 했다. 그는 책임서기(비서실장)를 시켜 연락부장 이효순 외에는 누구도 동행시키지 마라고 지시했다. 이날 김일성은 무려 6시간 동안 학교를 시찰했다. 그동안 고위간부들은 용성구역의 도로 위에서 김일성이 나올 때까지 꼼짝없이 기다렸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김정일, 김현식·손광주 공저)》

80년경 김정일은 대남담당 4개부서 책임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남사업은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 시기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되, 정보수집과 관련해 다른 나라의 교훈을 참작할 필요가 있다. 그 모델로 2차 대전의 소련 정보원 리하르트 조르게(Richard Sorge, 1895∼1944)가 있다. 앞으로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해야 한다.”

이후부터 공작원들은 조르게를 많이 연구하게 됐다. 북한의 대남 공작원이라면 반드시 독파해야 할 ‘대외정보활동의 경험과 교훈 모음집 30권’이란 책의 각 권 첫장에도 “정보사업은 조르게식으로 하여야 합니다”라는 김정일의 말이 적혀 있다.


▲ 리하르트 조르게. ⓒspy-sorge.com

왜 김정일은 이처럼 ‘조르게’를 대남 공작원의 ‘모델’로 강조했던 것일까? ‘역사상 최고의 스파이’, ‘소련판 제임스 본드’라는 수식어가 붙는 리하르트 조르게의 면면을 잠시 살펴본다.

《1895년 독일인 석유기사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조르게는 1차대전이 터지자 자원입대해 철십자 훈장도 받았다. 그런 조르게의 직접적인 변신계기는 부상으로 병원에서 만난 간호사로부터 ‘공산주의’를 접하면서 부터다. 의병제대와 함께 베를린대학에서 정치학박사 학위를 받은 조르게는 이후 기자로 일하며 소련을 제발로 찾아가 간첩교육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차이퉁’지 상하이 특파원으로 부임(1930년)한 그는 중국어와 일본어를 익히고 아시아 농업사를 탐구하며 인맥을 쌓아나갔다. 소련의 지시로 도쿄로 가게된 조르게는 독일인 사회에서 단연 돋보이는 존재였다. 일본 문화에 대한 심층기사로 일본 권력층의 환심도 얻었다. 이를 통해 조르게는 일본 수상실을 비롯한 고위층에 일본인 첩자들을 심기도 했다.

1941년 소련은 독일군의 공격으로 위기에 처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진격할 위험성 때문에 소련은 시베리아 방면에 배치해 놓은 100만 병력을 대(對)독일 전선으로 이동시킬 수가 없었다.

이때 조르게는 ‘일본이 시베리아를 침공하지 않는다’는 극비정보를 모스크바로 타전한 후 일본 헌병에 체포된 조르게는 도쿄의 스가모(巢鴨) 형무소에 감금, 조사를 받고 재판에 회부되어 1944년 1월 20일 사형이 확정되고 동년 11월 7일 사형이 집행됐다.

당시 조르게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던 소련은 그가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시베리아사단을 독소전에 투입·대대적인 반격으로 승리의 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조르게의 스파이 활동은 성공적인 공작활동의 모범적인 사례로 각국 정보기관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어쨌든 김정일의 지시 이후 세계 유명·무명의 정보원들에 대한 분석이 대남교육내용에 많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북한의 대남공작요원들은 이들의 정보수집 사례와 공작원 개인의 정보활동을 서로 비교해보기도 하고 실기토론도 진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필재/프리존뉴스 기자 spooner1@freezone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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