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우리 힘으로 한반도 통일하고 싶다-
- 관리자
- 2010-06-28 10: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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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정부의 입장을 대변해온 관영통신사인 신화통신이 발행하는 국제선구도보(國際先驅導報)가 6.25전쟁의 발발 원인을 처음으로 '북한의 남침'이라고 단정적으로 묘사했다.
신문은 1950년 6.25전쟁 발발에서 53년 정전협상 체결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한국전쟁 대사기(大事記)'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전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 영문판(글로벌타임즈)도 비주류 사학자 선즈화(沈志華) 화둥(華東)사범대 역사학과 교수를 인용, 북한의 남침설을 보도했다.
이 같은 중국 언론의 보도는 한국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침묵하던 중국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태도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얼마 후 삭제되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항미원조 구호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이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는 태도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중국의 입장 변화가 가시화 되고 있는 데는 6.25전쟁 관련국들의 극비 문서가 해제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전쟁의 발발 및 경과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나오면서 북한군의 남침이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김영호 외 12인이 공동 집필한 '6.25 전쟁의 재인식'(기파랑 刊)은 기밀이 해제된 소련의 극비문서를 바탕으로 6.25 전쟁을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강규형과 캐스린 웨더스비는 '소련 문서를 통해 본 6 . 25 전쟁의 기원'을 통해 6 . 25 전쟁 발발의 원인이 북한이란 사실을 논증한다.
캐스린 웨더스비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러시아 외무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소장하고 있던 한국에 관한 방대한 문서에 점차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에 근무하면서 모스크바의 대통령 문서 보관소에 있던 약 2,000 페이지 상당의 한국에 관해 고위급이 내린 결정에 관한 기록을 입수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미국의 자료에 의존했던 전쟁기원에 관한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저자들이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내린 판단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경계선에서 무력충돌이 전면적 남침으로 확대된 것은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내린 의도적인 결정 때문이다.
저자는 당시 북한과 소련 사이에 남한침공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북한은 6.25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는 반도의 북부에만 국한된 국가로서 소련에 매우 의존적이고 종속적이었다고 말한다. 북한은 소련에게 경제적·군사적으로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명백한 리더로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멘토로 따르게 됐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 전쟁을 치르고 착취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은 경제적으로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 내 지지기반이 전혀 없으며 소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김일성이 북한에 등장하게 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으로 북한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하게 된다.
저자는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정치적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자 김일성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스탈린의 허가를 구했다고 말한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과 미국의 전쟁개입 여부와 중국의 원병 지원 가능성에 대해 판단을 해 본 후 남침을 승인하게 된다.
저자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미국은 이제 북한 뒤에서 소련과 중국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큰 전쟁이라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며 "중국은 한반도를 해방시키려는 우리의 의지를 항상 지지해왔고 중국혁명이 완료되면 우릴 도와줄 것이며 필요하다면 군대도 파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반도를 우리의 힘으로 통일하고 싶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다"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스탈린을 설득하여 남침의 허가를 받아 군사행동을 급속히 진행, 남침을 하게 된다.
'6.25 전쟁의 재인식'은 이 외에도 ▲탈냉전과 6.25전쟁의 재인식 ▲6.25전쟁과 소련의 군사적 역할 ▲6.25전쟁과 한국군의 대응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성립 ▲6.25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 등을 다루고 있다. /The DailyNK
신문은 1950년 6.25전쟁 발발에서 53년 정전협상 체결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한국전쟁 대사기(大事記)'에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공격을 시작,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고 전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인민일보 자매지인 환구시보 영문판(글로벌타임즈)도 비주류 사학자 선즈화(沈志華) 화둥(華東)사범대 역사학과 교수를 인용, 북한의 남침설을 보도했다.
이 같은 중국 언론의 보도는 한국전쟁 발발 원인에 대해 침묵하던 중국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태도다. 하지만 이 기사는 얼마 후 삭제되어 지금은 찾아 볼 수 없다.
항미원조 구호 아래 한국전쟁에 참전한 중국의 입장에서 이와 같이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는 태도는 상당히 파격적이다.
중국의 입장 변화가 가시화 되고 있는 데는 6.25전쟁 관련국들의 극비 문서가 해제된 데 가장 큰 원인이 있다. 전쟁의 발발 및 경과에 대한 객관적 자료가 나오면서 북한군의 남침이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김영호 외 12인이 공동 집필한 '6.25 전쟁의 재인식'(기파랑 刊)은 기밀이 해제된 소련의 극비문서를 바탕으로 6.25 전쟁을 재조명한 책이다.
이 책의 공동 저자인 강규형과 캐스린 웨더스비는 '소련 문서를 통해 본 6 . 25 전쟁의 기원'을 통해 6 . 25 전쟁 발발의 원인이 북한이란 사실을 논증한다.
캐스린 웨더스비는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러시아 외무부,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와 국방부가 소장하고 있던 한국에 관한 방대한 문서에 점차적으로 접근할 수 있었다.
이후에도 냉전 국제사 프로젝트에 근무하면서 모스크바의 대통령 문서 보관소에 있던 약 2,000 페이지 상당의 한국에 관해 고위급이 내린 결정에 관한 기록을 입수했다.
이와 같은 자료들은 미국의 자료에 의존했던 전쟁기원에 관한 해석에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저자들이 이러한 자료들을 종합해 내린 판단에 따르면, 당시 한반도 경계선에서 무력충돌이 전면적 남침으로 확대된 것은 특정한 사람이 특정한 시기에 내린 의도적인 결정 때문이다.
저자는 당시 북한과 소련 사이에 남한침공에 대한 긴밀한 논의가 이루어진 것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저자는 북한은 6.25 전쟁 이전과 전쟁 중에는 반도의 북부에만 국한된 국가로서 소련에 매우 의존적이고 종속적이었다고 말한다. 북한은 소련에게 경제적·군사적으로 원조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소련을 세계 공산주의 운동의 명백한 리더로 인정하며 자연스럽게 멘토로 따르게 됐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조선은 일제 치하에서 전쟁을 치르고 착취를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북한은 경제적으로 소련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한국 내 지지기반이 전혀 없으며 소련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던 김일성이 북한에 등장하게 된다. 김일성은 소련의 후원으로 북한에서의 지도적 위치를 확고하게 유지하게 된다.
저자는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어 정치적 방법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자 김일성이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고자 스탈린의 허가를 구했다고 말한다.
이에 스탈린은 김일성과 미국의 전쟁개입 여부와 중국의 원병 지원 가능성에 대해 판단을 해 본 후 남침을 승인하게 된다.
저자는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미국은 이제 북한 뒤에서 소련과 중국이 도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큰 전쟁이라는 모험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라며 "중국은 한반도를 해방시키려는 우리의 의지를 항상 지지해왔고 중국혁명이 완료되면 우릴 도와줄 것이며 필요하다면 군대도 파병할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한반도를 우리의 힘으로 통일하고 싶다. 우리는 그럴 수 있다고 믿고 있다"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결국 김일성은 중국 공산당 마오쩌둥의 지원을 약속 받고 스탈린을 설득하여 남침의 허가를 받아 군사행동을 급속히 진행, 남침을 하게 된다.
'6.25 전쟁의 재인식'은 이 외에도 ▲탈냉전과 6.25전쟁의 재인식 ▲6.25전쟁과 소련의 군사적 역할 ▲6.25전쟁과 한국군의 대응 ▲한반도에서 기독교와 공산주의의 대결 ▲6.25전쟁과 한미동맹의 성립 ▲6.25전쟁이 일본에 미친 영향 등을 다루고 있다. /The Daily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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